어느 순간부터 나는 MP3P 없이는 거리를 나다니기 힘들어졌다. 최근엔 PMP(Portable Media Player : 휴대용 동영상 기기)로 바꿔서 이제는 얼굴을 들고 거리를 다니는 일도 많이 줄었다. 도대체 주변의 소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새로 개업한 업소 앞에는 어김없이 늘씬한 내레이터 모델들이 신나게 춤을 추면서 업소 홍보를 외쳐대느라 정신이 없다.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짧은 순간에도 온전한 자신만의 짧은 여유를 가질 틈이 없다. 시시때때로 바뀌는 정류장의 거대한 광고판이 우리의 눈을 잡아두기 때문이다. 얼마나 새로운 카피로 내 구매욕을 자극하는지, 어떤 모델이 어떤 상품을 광고하는지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보면 그 순간은 후딱 지나가버린다. 차라리 내가 좋아하는 미드(미국드라마의 줄임말)를 보든가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선택해서 볼 수 있는 PMP를 보면서 걷는 것이 내 정신건강에 훨씬 좋다.
너무 쉽게 빼앗긴 조용한 삶을 살 권리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는 어떤가. 운전기사의 취향에 맞는 라디오 방송을 듣거나 그 버스 노선이 지나다니는 노선 근방의 업체 광고들을 들을 수밖에 없다. 기사의 취향이 나와 비슷하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취향이 맞는다고 해도 항상 그런 걸 듣고 싶지는 않은 법이다. 조용한 지하철 안에는 작은 스크린으로 광고방송을 끊임없이 내보내고, 어떤 역에서는 맞은 편 벽을 몽땅 활용해서 큰 화면으로 제공하는 친절함까지도 보여준다. 이래서야 피곤한 몸이 잠시 잠깐 버스 안에서 쪽잠을 잘 수도 없고, 정말 바보상자 안에 머리를 박고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시각적 자극을 받아들이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 이어폰을 꽂지 않고, 읽을거리도 들고 있지 않고, PMP도 없고, 자는 것도 아닌데 가만히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있는 사람을 보면 아주 가끔은 참 존경스럽다는 생각까지도 든다.
“사람을 향합니다”, “당신은 소중하니까요” 하는 문구를 잘도 내보내면서 아무 것도 보지 않고 듣지 않을, 조용하게 지낼 권리를 뺏고 있는 광고들이란 참 아이러니하기 짝이 없다. 그나마 백 번 양보해서 버스 안에서의 광고는 참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루 종일 운전하는 기사의 노동환경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미 기사에게도 자신의 노동환경을 개선할 선택권 따위는 없다. 안내 방송 사이사이에 끼워져 똑같이 녹음되어 있는 광고를 틀지 않을 권리는 버스회사 기업주에게는 있어도 기사에게는 없는 것이다.
자연스레 사람들은 자신들의 시간을 위해 피난처를 찾게 되었을 것이다. 이제 내가 살고 있는 동네는 없어지고, 나의 평온과 고요를 위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조용한 피난처 공간들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걸 피해서 갈 수 있는 데가 마땅치 않으니 그걸 알려주기 위해 또 광고를 해댄다. 이 지겨운 악순환이라니….
그런데 왜 광고는 ‘광고’일까?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광고’의 범위에는 왜 ‘상업광고’밖에 없을까? 광고는 영어로는 advertising, 독일어로는 die reklame, 프랑스어로는 reclame이라고 쓰인다. 어원을 따져보자면 영어는 라틴어의 advertere라는 단어에서 유래했고, 독일어와 프랑스어는 라틴어의 clamo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 ‘advertere’는 ‘돌아보게 하다’, ‘주의를 끌다’라는 의미이고, ‘clamo’는 ‘반복하며 부르짖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결국 광고란 ‘널리 반복하며 부르짖음으로써 주의를 끄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널리 반복하며 부르짖음으로써 주의’를 끌어야 하는 것이 상업광고 밖에는 없는가? 사람들이 알아야 할, 알고 싶어 하는, 주목을 받아야 하는 게 결국 돈에 대한 이야기뿐일까?
세상은 온통 상업광고 투성이
고개만 돌리면 상업광고들이 넘쳐나는 이런 상황이다 보니, 이젠 서울 지리를 외울 때도 광고효과가 높은 곳을 중심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됐다. ‘강남역’하면 △△제과와 ☆☆극장, ◇◇영어학원이 떠오르고, ‘명동’하면 성당도 떠오르지만 백화점 거리나 새로 들어선 쇼핑몰, 쇼핑의 거리가 떠오른다. 청계천 복원이 한참 이슈로 떠올랐을 때 문제가 됐던 그 곳의 노점들과 헌책방들은 이제 잊혀진지 오래고 청계광장과 그 주변에 있는 서점이나 기업 빌딩들만이 떠오른다. 대체 그 동네는 사람은 없고 건물이나 기업만 있나?
나는 그 동네가 갖는 특성을 단순히 건물이나 어떤 업체가 있는지 따위로 기억하고 싶지 않다. 이 버스 노선의 어느 정류장에서 내리면 어느 성형외과나 영어학원이 있는지, 지하철역 몇 번 출구 근처에 무슨 레스토랑이 있는지는 궁금하지 않다는 거다. 주소지 등록자가 4명밖에 안 된다는 서울의 소공동에서는 그 네 명이 무엇을 하고 사는지, 그 동네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그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사는지, 물론 이런 건 나만 궁금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솔직히 화려한 모델들의 천편일률적인 광고를 보는 것 보다는 내가 궁금해 하는 것들을 볼 수 있는 것이 훨씬 더 낫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고 싶은 것, 내가 듣고 싶은 것을 들을 수 있는 권리 자체가 차단되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보다는 적어도 보면서 무엇이든 ‘생각’해볼 수 있는 내용들을 읽고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이 훨씬 낫지 않은가? 시끄럽지 않은 거리를 걸을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하면서 사는 것 보다는.
광고가 단순히 소음이 아니라 정말 ‘널리 반복하며 부르짖음으로써 주의’를 끌만한 가치를 지닌 것들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돌아다니는 광고판이나 들려오는 광고 내용들이 정말 내 주의를 확 끌어당겨서 나처럼 주의가 끌어당겨진 사람들과 만나보고 싶다. 광고를 보면서 지름신이나 영접하면서 살고 싶지도 않고, 제발 어느 쇼핑몰의 브랜드 매장에서 만나서 사치품이나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인생이 되고 싶지는 않다는 말이다!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