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시작하며 인권은 억압과 착취에 반대한다고 한다. 인권은 어떤 특권에도 반대하고, 그러기 때문에 보편성을 갖는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우리가 알고 있는 인권은 서구에서 발달하여 친자본주의적이고, 기독교적이며, 다수자 중심이라는 비판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렇지만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주는 이론서들은 대개 국제인권기준으로 무마한다. 당연한 것을 왜 물어보느냐 하는 게 대개의 이론서들이 취하는 태도다. 인권의 현장은 늘 치열하다. 현장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은 ‘상식적인’ 인권에 대해 회의하게 한다. 현장 인권운동을 하면서 한번쯤은 고민해 봄직한 질문 10개를 뽑아 인권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① 모든 인간은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갖는가? ② 집단은 인권의 주체일 수 있는가? ③ 의무 없는 권리는 존재할 수 없는가? ④ 국가가 인권옹호자가 될 수 있는가? ⑤ ‘보편성’은 또 하나의 교리가 아닌가? ⑥ 인권은 ‘법의 지배’에 의해서만 보장되는가? ⑦ 소수자가 인권을 새롭게 써야 하는 것은 아닌가? ⑧ ‘평화권’과 ‘발전권’은 권리일 수 있는가? ⑨ 인권의 국제적 보호를 믿을 수 없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⑩ 인권운동은 인간해방에 기여할 수 있는가? |
인류 가족 모든 구성원의 고유한 존엄성과 평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세계의 자유, 정의, 평화의 기초가 됨을…”로 세계인권선언은 시작하고 있다. 현대 권리장전이라고 불리는 ‘경제.사회.문화적권리에관한국제조약’(사회권조약)과 ‘시민.정치적권리에관한국제조약’(자유권조약)은 “이 규약의 당사국은, 국제연합 헌장에 선언된 원칙에 따라 인류사회의 모든 구성원의 고유의 존엄성 및 평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세계의 자유, 정의 및 평화의 기초가 됨을…”로 시작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물어볼 필요도 없이 존엄하고, 평등하며, 누구에게 넘겨줄 수 없는 권리를 갖는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인권을 ‘인간(사람)의 권리’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인권은 인간의 권리 모두를 말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도 쉽게 알 수 있다. 위에서 인용한 세계인권선언이나 국제인권조약의 전문들에서 보는 것과 같이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권리”만이 인권이다. 양도할 수 없는 것이니 누구에게 빼앗겨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인권은 인간의 권리 중에 가장 기본적인 권리들만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말한다고 해야 옳다.
인간은 정말 존엄한가?
그런데 여기서 한번 되짚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있다. 그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가진 인간은 왜 존엄한가이다. 인간이 존엄하기 때문에 평등한 것이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도 갖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에 대해서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인권의 문제들은 그 존엄하다는 인간에 의해서 발생한다. 인간이 가해자이고, 피해자도 인간이다. 누구는 자연이 인권을 침해한다고 할지도 모른다. 가장 심각한 자연에 의한 인권침해는 아마도 지구 온난화에 따른 기후의 변화 때문에 겪는 기아의 문제일 것이다. 사막은 늘어만 가고 있고, 많은 사람들은 그로 인해서 죽거나 굶주림에 시달린다. 그렇지만 문제를 추적해 들어가면, 그 문제는 인간이 만든 문제다. 인간의 무분별한 자연 질서의 파괴, 생태계의 파괴로 인해서 지구 온난화가 발생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사막은 늘어갔다. 쓰나미의 경우에 대해서는 왜 해저해일이 일었는지 아직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것도 인간에 의해서 파괴된 자연이 자체적으로 정화작용을 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존엄한 인간을 해치는 인간은 누구일까? 물론 인권가해자들은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잔혹한 살인행위를 일삼았던 살인마들이 우선 떠오를 것이고, 성폭력 가해자도 떠올릴 수 있다. 좀 더 나아간다면 독재자들도 생각할 수 있다.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 한국에서는 박정희나 전두환과 같은 독재자들이 학살과 고문으로 얼룩진 죽음의 시대를 만들었던 점을 기억해낼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을 좀 더 진전시켜 보자. 자신의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땅을 빼앗고, 생존권을 박탈하기를 일삼는 다국적기업은 어떤가? 마치 산업혁명 초기시기에 농민들을 농토에서 강제로 추방하여 도시빈민을 만들었던 엔클로우저의 역사는 21세기 현재에도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다. 더욱이 그 이윤을 추구한다는 자본은 사람들을 대량으로 살상할 수 있는 무기들을 만들어 공급하고, 판매하여 그로부터 이익을 남긴다. 내전이 일어나고 있는 나라들에서는 무기 구입이 담배보다도 더 쉽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런 군수산업은 미국경제의 근간을 이룬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고, 최첨단 무기들을 생산하여 세계 곳곳에 공급한다. 아프리카 내전의 현장 뒤에는 미국의 군수자본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그것이 꼭 미국만이겠나)은 공공연한 비밀이지 않은가.
존엄한 인간이 가해자?
그 행위로 보면 결코 존엄할 수 없는 인간들이 너무도 많고, 그들에 의해서 ‘존엄한’ 인간들은 권리를 침해당하고, 인권을 유린당한다. 거듭 말하거니와 인권침해나 인권유린의 주체들은 ‘존엄한’ 인간들이고 피해자도 ‘존엄한’ 인간이다. 그런데 인간이 존엄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하나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경제.사회적으로 굶지 않고 충분히 먹을 수 있어야 하고, 비바람과 추위를 피하고 사생활이 보호될 수 있는 집이 있어야 하고, 아플 때는 언제고 치료를 받아야 하고, 원하는 만큼 공부할 수 있어야 하고, 노동하면서도 문화적인 권리를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인간은 생명과 안전을 위협받지 않는 환경에서 국가권력으로부터 함부로 체포되지 않아야 하고, 자신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고, 필요하면 집회와 결사의 자유도 누려야 하고, 정치적 권리도 보장받아야 한다. 이처럼 빵과 자유가 동시에 보장될 때에야 인간은 비로소 존엄함을 잃지 않으면서 생을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현실에서 인간들은 자신이 존엄한 인간이기를 깨닫기 훨씬 이전부터 생존의 경쟁에 자신을 내맡겨야 하며, 존엄하기를 포기하는 대가로 겨우 입에 풀칠을 하고 살아야 하는 이들이 너무도 많고, 그것은 더욱 확대되고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불평등할 수밖에 없는 이런 현실 위에서 인간들은 버둥대며 하루하루 살아간다. 치열한 경쟁에서 탈락한다는 일은 얼마나 끔찍한가?
자연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 인간의 존엄함을 너무 강조하다보면 인간의 오만이 극점에 달하게 되고, 그로부터 인간은 자연을 훼손하는 일을 너무도 쉽게 저지른다. 그로부터 자연환경은 존엄한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으로 황폐화되어 간다. 그렇다면 인간의 존엄성을 절대적인 진리로 위치 짓기보다는 자연과 공존해야 하는 자연의 일부로 상대화하는 것이 필요한 일일 수 있다. 자연 앞에서 겸허하게 같이 자연의 혜택을 나누고, 자연과 더불어 생을 살아가는 것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결국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것은 이와 같이 상대적이거나 현실과는 동떨어진 추상적 관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인권을 떠받치는 지렛대로 삼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와 같은 인간을 존엄할 수 없게 만드는 조건이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을 더욱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인간은 존엄해야 하고, 그로부터 평등함을 누려야 한다는 것은 그래서 우리의 전제이기도 하지만, 목표이기도 하다. 모든 인간이 존엄한 존재로 존중받으며 살 수 있다는 것, 꿈만 같은 이야기이지만, 이 꿈을 포기하기보다는 이 꿈을 이루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 인권운동의 길이 아닌가.
‘천부인권설’은 아니다
인간은 존엄하고, 평등하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고, 넘겨줄 수 없는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 인권의 출발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자. 그런 권리를 누가 갖고 있고, 누가 부여하는가.
서구 기독교적 세계관에서는 당연히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를 보내시어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하셨다. 그런데 무지몽매한 인간들은 이런 하나님의 배려와 예수님의 부활의 기적에도 불구하고 마치 바벨탑을 쌓아올리던 구약시대의 인간처럼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권리를 찾지 못한 채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다가 인간의 인지능력이 향상되자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이 주신 권리에 눈뜨게 되고, 그로부터 인권의 항목은 날로 늘어간다. 하나님의 모상대로 인간을 빚었고, 거기에 숨결을 불어넣어 인간이 된 것이고, 끔찍이도 사랑하는 인간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권리를 주고 법을 주었다는 것, 이것이 우리가 아는 천부인권설과 자연법의 요체가 아닐까.
이런 천부인권설은 인권의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세의 질곡에서 벗어나 인간이 권리의 주체로 설 수 있기 위해서는 신분질서로부터 해방되어야 했고, 그것은 왕과 영주, 귀족이라는 세속적 권력과 함께 하나님의 대리자인 로마 교황의 권위로부터도 해방되는 것이었다. 그 강력한 기존질서를 부정하는 방법으로 계몽주의자들은 서로 평등한 관계를 맺던 ‘자연 상태’를 상정했다(물론 홉스는 정반대로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늘 전쟁상태였다.). 자연 상태에서 평등한 인간들이 계약을 맺어서 권리를 국가에 위임하여 국가가 탄생했다는 이런 가당찮은 시나리오를 들고 나서서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고 외쳤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렇지만 인권의 역사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권리가 떨어진 것이 아니라 치열한 투쟁과정에서 인권의 목록을 늘려왔고(확장했고), 심화시켰음을 말해준다. 인권의 역사를 조금만 알게 된다면, 이 천부인권설이 갖는 한계는 금방 눈에 들어온다. 인간의 권리를 추상적인 차원에서 묶어두려 했던, 자신들만의 권리체계로 한정지으려 했던 지배세력의 의도를 투쟁을 통해서 깨 나왔던 것인 피지배 민중들의 투쟁의 역사이고, 그것이 바로 인권의 역사다.
인간은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의 주체인가?
그런 투쟁의 과정에서 유럽에서 19세기 말까지는 보통 성인남성들이 투표권을 갖게 되었고, 20세기 초반부터는 여성들도 투표권을 갖게 된다. 인권의 초기 시대, 재산을 넉넉히 소유한 일부 부르주아지들만이 정치에 참여할 권리(특권)를 갖고 있던 것에 끊임없이 도전한 결과다. 그로부터 그들은 그 사회의 시민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시민이 되도록 투쟁하는 시기에 그들의 국가들은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에서 식민지를 건설하고, 그곳에 살던 수많은 민족과 인종들을 무권리 상태로 만들어 착취하고, 억압했다.
그 뒤 권리의 주체에는 어린이, 이주노동자, 장애인, 난민 등이 포함되었다. 유엔이 창설된 이래 이들 소수자들의 인권을 존중하고, 보장한다는 선언과 조약들이 속속 마련되었고, 공표되었다. 그래서 인권은 인류의 쉽게 거스를 수 없는 권위를 갖는 당위가 되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모든 인간들이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의 주체가 되었을까? 다시 현실로 돌아와 보면, 권리의 사각지대에 놓인 약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장애인들은 시설과 가정에 격리되어 있고, 성소수자들은 아예 그 존재조차 승인받지 못한다. 이주노동자들은 노동력만 제공하고 돈만 벌면 되지 권리를 누릴 생각을 엄두도 내지 못한다. 어린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입시경쟁에 내몰리면서 권리보다는 동급생들을 내가 경쟁해서 이겨야 하는 상대로 인식하게 된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살을 꿈꾸기도 하고, 노숙인으로 살기도 하고, 인신매매 당해서 외진 섬에서 기약 없는 노동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권리의 상태에서 신음하고 있는가.
우리나라 헌법은 인권의 법적인 다른 용어인 기본권을 인간 모두에게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만 보장한다. 그래서 이주노동자들의 기본권은 쉽게 무시된다. 국민이라고 해서 모두 기본권의 주체가 되는 것도 아니다. 미성년자는 선거를 할 수 없다. 전과자들도 권리의 행사에 제한을 받는다. 여성들을 비롯해 사회적 약자들은 헌법에 규정하여 보장받도록 하는 기본권의 예외지대에 속한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애초에 양도할 권리도 주어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그리고 다시 현실 세계에서는 국제인권조약과 헌법보다는 이른바 ‘주먹’을 더 가까이 보면서 살아간다. 그 주먹이 국가일 수 있고, 사회적 관계에서 권력자일 수 있고, 경제적 관계에서 생사여탈권을 쥔 자본가일 수 있다. 이들 앞에서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의 주체는 무력하기만 하지 않은가. 그래서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의 주체가 되는 것도 조약이나 헌법의 기본권 조항을 외우는 것으로는 되지 않는다. 나 또는 우리의 권리를 지킬 수 있도록 우리는 연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존엄한 존재인 인간이 평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의 주체가 되는 길을 포기하지 않고 밀고 가는 것, 그 꿈을 계속 꾸고, 현실에서 실현하려는 노력이 경주될 때 그 문구들은 비로소 현실의 힘으로 전화한다. 이런 규정들은 그래서 오히려 우리의 분투를 요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박래군 | 편집인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