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은 탄생할 수 있는가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인권을 마치 자신이 누리는 것과 유사한 정도까지는 다른 사람들도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가’ 동성애에 빠지게 되었냐며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40년을 함께 한 동성애자 커플 중 한 명이 갑작스런 사고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단지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면회나 간호, 심지어 임종을 지켜보지도 못하는 사례를 들려주면 뭔가 사회적으로 이들을 위한 배려는 있어야 한다고 동감한다. 그럼에도 똑같은 이야기를 동성애자의 결혼이나 입양과 연결시키면 금세 난색을 표한다. 동정과 시혜의 대상으로서 볼 때는 “그래, 그들도 가족이지” 싶지만 구체적 권리의 주체로서 이야기하면 가족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부터 꺼낸 것은 가족구성권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 역시 이런 지점에 머물러있기 때문이다. 편모, 결손가정, 사생아, 호로자식 등의 단어에서 드러나는 편견과 부당한 차별에 대한 지적은 대체로 동의하지만,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해체하고 국가가 가족을 지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개인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하자고 말하면 너무 급진적이라고 하거나 난해한 문제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사람들에게 가족구성권이 어색하게 들리는 또 하나의 이유는 가족은 자연발생적이고 하늘이 점지해 준 운명공동체이며, 가족이 없다는 것은 그 사람이 매우 불운하거나 불량하여 가족을 잃었거나 버린 결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교황청이 동성혼 인정 요구를 책임과 의무는 지지 않으면서 권리만 주장하는 파렴치한 짓이라고 비난하는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소외된 이들에게도 정당한 대우와 복지혜택을 달라는 절절한 외침과 드세어지는 요구를 국가는 ‘건강가정기본법’이라는 해괴한 법률에 다양한 가족도 존중한다는 한 구절을 삽입하는 것으로 유유히 빠져나갔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족구성권을 통해 다시 논의해야 할 핵심을 놓치지 않으려 애써야 한다. 이것은 우아하게 살 자격의 유무를 따지는 싸움이 아니라, 애당초 인간답게 살 가능성의 문을 열어놓지 않는 지독하고도 교묘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작동방식을 밝히는 일이다.
쉬운 사례부터 살펴보자. 여기에 사별이나 이혼으로 인한 한부모 가구가 있다. 처음 출발은 현 사회제도가 존중하고 있는 혼인신고와 출산이라는 과정을 통해 정상적 핵가족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불의의 사고나 부부간의 불가피한 갈등으로 ‘한 부모’만이 남게 되자, 사회는 이를 재빨리 편모/편부 가정 또는 결손가정으로 명명하며 정상성을 탈각시켰다. 더욱 심각한 것은 한번 훼손된 정상성은 좀처럼 복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재혼을 하면 재혼 가정으로 불리고, 소위 ‘배다른’으로 표현되는 이복형제들이 생기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정상은 아니라고 한다. 혼인과 혈연 중심의 정상가족은 엄밀하게 말해 단 한 번의 혼인과 단 하나의 씨(남성)에서 나온 핏줄관계의 조합만을 인정하므로 실수란 용납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우리가 민법 779조에 명시된 가족의 정의를 외우려 애쓰는 것도 아니다. 핏줄은 속일 수 없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가족임을 증명하는 서류를 국가기관이 발급하는 일도 당연하게 여긴다. 이는 가족이 결국 등록의 절차로 꾸려짐을 드러내는 것임에도 가족애란 이름으로 무조건적인 단합과 희생, 헌신과 복종을 서로에게 요구하는 것 역시 당연시한다. 사랑하면 결혼하고 싶은 게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면서도, 전통 수호와 사회 안정이라는 이유로 계급 간, 인종 간, 이민족 간의 결혼을 반대했던 역사의 과오를 알면서도 동성애자의 파트너십은 너무나도 쉽게 부정해버린다.
이렇듯 우리 사회는 법적으로, 제도적으로, 정책적으로, 관습적으로 가족을 조작해내고 박제시키고 있다. 오히려 자발적 의지대로 탄생하는 가족들의 목을 조르고 뒤춤으로만 감추어두려 한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탄생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가족은 탄생하지 못하고 있다.
가족을 구성할 권리라는 전략
가족을 구성할 권리가 필요하다는 말은 가족을 구성할 수 없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반증한다. 가족임을 증명해주는 공문서가 있다는 것은 국가가 인정하는 가족들만이 갖는 사회적 법적 특권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특권이란 배제와 탈락의 기준이 있어야 제공이 가능해진다. 그런 까닭에 가족구성권 운동이 이 특권을 획득하기 위해 소외된 자들끼리 벌이는 줄서기가 될까봐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아마도 가족구성권은 썩어빠진 가족제도와 결혼제도에 편입하려는 잘못된 시도라는 비판은 가족과 유사한 역할을 한다면 가족의 자격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논리로 사회적 동의와 국가의 승인을 기대하는 이들의 경각심을 불러오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만약 한부모 가족도 정상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어머니 혼자서도 아버지의 역할까지 잘 소화해낼 수 있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어쨌든 부와 모의 결합만이 이상적이라는 전제를 응용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정상과 유사해지기 위한 짝퉁의 노력치고는 가상하고 대단하다는 칭찬은 받을지언정 결코 진품은 될 수 없다.
가족을 구성할 권리는 “어떻게든” 가족을 만들어보겠다는 의지의 발로는 아니다. 가족이란 근본적으로 개인에 기초하는 것이며, 개인 간의 결합일 수 있으며, 개인의 의지에 의해 유지되며, 개인의 결정으로 해지될 수 있음을 전제한다. 가족구성원은 1인부터 그 이상의 수로 가능하며, 가족구성원간의 성별, 연령 등 그 어떤 차이도 제한의 이유가 될 수 없다. 가족구성권은 기본적 인권이자 기본적 시민권이며 국가의 역할이란 그 결정과정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정이 실현될 수 있도록 돕는 정도임을 분명히 한다.
물론, 이렇게 가족구성권을 정의하면 실현 불가능한 이상향이거나 혹은 지나친 개인주의나 자유방임주의가 아닌지, 정말 개인에게 이런 자유를 주고도 사회질서가 유지될 수 있을지 걱정된다는 의견도 있을 것이다. 아무도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이성애 중심적, 가부장적 가족제도 하에서 발생하는 억압과 차별, 오로지 국가에게만 효율적인 복지시스템에 대한 고발을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장애인운동계에서 지적하다시피, 복지시스템이 개인 단위가 아니라 ‘(서류상) 가족 단위’로 운용되는 현실에선 장애인들의 삶의 질이 보장되지 않는다. 예상 가능하듯이 가족마저도 가난한 장애인과 가족은 제법 살 만한 장애인을 상정한다면 응당 지원을 받아야 할 우선순위는 ‘가족마저도 가난한 장애인’일 것이다. 이런 논리는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얻는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되는 것은 가족 안에서의 장애인의 위치다. 만약 가족은 부자지만 가족으로부터 애물단지로 취급받고, 욕설과 폭력, 착취의 대상이 되고 있다면 이 장애인 역시 도움이 필요하다. 자기만의 주거공간 확보와 경제적 자립, 보다 원활하고 편안한 정서적 심리적 유대를 위해 공동체를 꾸린 사람들이 있다면 이들에게 필요한 사회적 지지와 법적 보호가 필요하다. 이것을 가족구성권이란 이름으로 역설하는 것이다.
흔한 오해 중의 하나로 통계조사결과에서 드러나듯이 이미 현대 가족의 형태는 매우 다양해졌고 이런 변화에 맞추어 정책을 짜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가족구성권은 지금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권리를 신설하자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미’가 아니라 ‘원래’ 가족은 다양했다. 가족의 형태가 들쑥날쑥 생겨났다 없어지며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가족에 대한 선호가 시대마다 달랐을 뿐이다. 가족구성권은 드디어 복원되는 권리이며 뒤늦게 발견된 권리이며 이제야 명명되는 권리인 셈이다.
해체할 수 있어야 조립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꼭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 가족을 구성할 권리에 대한 논의와 상상은 모든 가족은 해체될 수 있는 것이라고 전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 가족 관련 담론에서 ‘가족해체’란 단어는 매우 민감하다. 새로운 가족정책을 요구할 땐 반드시 이것이 가족해체를 불러오진 않는다고 안심시켜야만 했다. 해체는 나쁜 것이다가 전제였다. 그러나 이제 해체의 기미가 오로지 불안과 위기로만 해석되는 방식 자체를 뒤집고 해체에 대한 해석의 새로운 출구를 열어야 한다.
해체될 가능성은 곧 조립될 가능성이기도 하다. 해체를 받아들여야 구성이든 선택이든 같은 선상에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의 문제점을 실컷 지적하고도 그 다음 논의는 항상 다시 혈연중심, 이성애중심, 남성중심의 가족을 전제로 돌아오곤 한다. (정상)가족을 (차마) 해체하자고 말할 수 없기에 결국 모든 가족 형태를 고정적 형태로 그리게 되고, 다양한 가족들의 이름을 열거하는 방식으로 가족구성권의 확대를 읍소하게 되는 것이다.
한부모 가족, 독신 가족, 여성홑벌이 가족, 맞벌이 가족, 미(비)혼 가족, 결혼이민자 가족, 동성애자 가족 등으로 열거하는 것은 이렇게나 다양한 가족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식시켜준다. 그러나 가족 구성원의 수나 형태를 중심으로 한 분류에서 갑자기 ‘동성애 가족 또는 동성애자 가족’이 들어가면 결국 이외의 모든 가족은 결국 이성애자나 이성애관계로 구성되어 있음을 암시하게 된다. 동성애자 한부모, 동성애자 독신, 동성애자 공동체의 가능성 대신 그나마 정상형태에 가까운 동성 부부라는 형태만 남고 다양성의 미덕은 이성간 결합을 세분하는 것에 갇힌다. 그러나 이것은 다양한 열거를 시도한 연구자의 잘못은 아니다. 이런 식의 열거를 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 이유들이 더 크게 작용한다.
어차피 완벽히 분류할 수도, 끝없이 열거할 수도 없다. 실제로는 모호하기 짝이 없는 실체 없는 정상가족은 더욱 분명하게 강화된다. 어쨌든 그 모든 것은 ‘그 외’의 범주에 속한다. 더군다나, 1위와 2위를 다투어 먼저 열거된 순서대로 가족구성권을 허용해주는 것이 합리적인 해결처럼 보이는 착각마저 불러일으킬 수 있다. 중심성을 해체하고 정상성을 해체하며 주변성도 고정된 것이 아니라고 볼 때, 해체를 통해 다양한 조립이 가능한 전제를 열어두어야 하지 않을까. 결과보다는 싸움의 과정에 굉장한 집중도와 섬세함을 기울이며, 부지불식간에 우리 앞에 놓이는 전제들을 항상 다시 의심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사회적 소수자로서의 싸움은 ‘그들처럼’ 되는 것이 목표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가령, 1993년 미국 하와이 주 최고재판소가 동성 간 결혼 금지는 하와이 주 헌법의 평등보호조항을 위배된다는 판결을 내리자, 연방정부는 ‘혼인(marriage)’은 오로지 남녀사이에서만 가능하다고 명시하는 혼인보호법(Federal Defence of Marrage Act)을 제정해버렸다. 이를 통해 우리는 동성 간 결혼 합법화 투쟁은 ‘동성애자도 결혼할 권리’의 획득이 목표여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을 수 있다. 우리는 보다 분명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결혼을 독점하는가?” 동등한 권리를 베풀어달라고 청원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고 대답과 설명을 요구해야 한다. 기존 제도에 편입하는 승리가 아니라 기존 제도의 부조리를 드러내야 한다(여기선 결혼을 중심으로 이야기했지만 양육권이나 입양권 등도 앞으로 뜨거운 주제가 될 것이다.).
가족구성권에 관한 논의와 연구가 아직 구체적인 실천방안과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는 단계까지 도달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가족구성권은 그 자체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상상을 멈추지 않음으로써 끊임없이 소외와 차별을 그 뿌리부터 흔드는 힘이 나오길 바란다. 어쩌면 너무 소박하기만 한 결론이 필자의 역량부족 같기도 하지만, 이것이 출발점임을 믿는다.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