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어지는 이분법적 구도
현재 가족의 모습과 생활의 양상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출생자녀수의 감소로 인해 가구의 크기도 줄어들었으며, 이혼율이 증가하면서 (가족해체가 아니라) 가구의 분리가 일어났고, 단독가구와 1세대가구의 증가로 전체 가구 수가 증가했다. 혈연, 혼인, 입양 등이 가족을 규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겨왔던 생각도 크게 변해 비혈연과 비혼인 상태에서도 친밀감을 형성하고, 돌봄 노동에 대해 연대하며, 자원을 공유하고, 공동생활 및 동반자 관계 등을 맺어가는 가족으로 생각하는 흐름이 뚜렷해지고 있다.
가족의 생애주기와 가족개념의 변화에 따라 가족 범위도 다양해졌다. 부부가족, 부부와 자녀로 이루어진 가족, 한부모가족, 독신가족, 재혼가족, 비혈연 공동체 가족, 독신모·부 가족, 조손가족, 외국인가족, 3세대가족 등 그 형태도 다양하다. 가족의 변화는 그 구성원 모두에게 영향을 미쳐 새로운 가족문화를 낳는 한편 가족기능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그리고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증가로 전통적인 가족모델인 ‘남성=경제활동, 여성=집안일’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도는 점점 더 유지되기 어려워지고 있다. 가족제도 또한 변화하여 가족법, 기초생활보장법, 의료보험법, 남녀고용평등법 등의 제정과 개정을 통해 가족의 기능과 역할, 그리고 이데올로기상의 변화를 반영하거나 초래하였다. 부계혈통 가족관계의 핵심 요소였던 호주제가 폐지되고 남자인 호주를 정점으로 구성되고 서열화 되는 기존의 가족관계가 완화되면서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관계로 변화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고, 가족이라는 집단보다는 가족구성원 개개인에 대한 존엄성이 더 중요한 가치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저출산대책을 비롯한 각종 가족정책에는 가부장적 가족주의가 깊이 스며들어 있다. 건강가족기본법 전면 개정을 촉구하는 사회복지계 모임은 가족에 대한 열린 사고로 가족의 정의와 범위를 수용하는 가족정책기본법의 조속한 통과를 촉구하고 있다. |
가족(변화)에 대한 입장들
가족의 변화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이 있다. 우선 학계와 가족 관련 단체들은 이혼률 증가와 출산률 저하를 들며 현재의 변화를 ‘위기’로 해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건강가정의 정립을 강조한다. 이런 입장은 가정의 기능강화나 가족공동체문화의 조성을 위해 가족 내 여성의 책임을 강화할 우려가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여성단체들은 현 시기 문제의 본질은 여성의 사회참여확대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그 해결책은 가족기능의 강화가 아니라 여성의 사회 및 경제활동의 참여를 보장하는 사회적 지원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가족의 변화는 가족 안에서 여성의 역할변화와 연관이 깊기에 여성의 가족 돌봄은 사회적 연대로 해결해야 하고 가족관계는 민주성과 평등성으로 재구성되어야 하며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자연스럽게 공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한국사회의 ‘가족’ 정의가 갖는 근본적인 속성, 즉 이성애 중심주의와 가족주의의 가치에 문제제기하면서 건강가정기본법 제3조의 가족정의가 혼인, 혈연, 입양으로 이루어진 결합만으로 상정하여 ‘혼인여부, 가족상황, 성적지향’을 이유로 헌법에서 보장하는 평등권을 침해하는 차별행위로 ‘이성애적질서’와는 다른 성적지향을 통해 구성되는 가정을 배제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여전히 견고한 성별분업과 가족주의
반면 이러한 논의 속에서도 여성의 삶은 여전히 가족의 절대적 영향 아래 놓여 여성의 경제활동은 결혼과 출산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여성취업의 증가에도 가족 내 돌봄 노동 또한 고스란히 여성의 몫으로 남아 기존의 성별분업구조를 지속시키고 있다. 아직까지도 거동이 불편한 ‘요보호노인’을 돌보고 있는 사람은 며느리-딸-아들-사위 순이다. 가족 내 돌봄 노동에 대해 여성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그에 대한 사회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현실은 분명히 여성의 경제적 지위와 사회적 참여에 걸림돌이 되고 있으며 출산이라는 고유 역할로 인해 여성은 경제활동의 영역에서 불이익을 초래하고 있다.
우리나라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낮은 그룹에 속하며, 비정규직의 비율은 높고 전문직과 관리직의 비율은 낮으며, 평균임금 면에서도 남성과의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사실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는 이미 선택의 문제가 아님에도 현실에서 여성은 ‘가정이냐’, ‘직장이냐’ 사이에서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이는 양육책임이 사회화되어 있지 못하고 개인 즉 여성에게 전적으로 부과되어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주요하게 작동되고 있는 건강가족 이데올로기는 국가를 대신해 복지를 담당해온 가족의 해체를 막기 위해 가족의 정상화, 가족관계 회복으로 작동한다. 여전히 가부장적 국가의 통제전략으로서 저출산 문제에 접근하고 있으며 고령화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산장려정책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가족정책에 대해 가족의 이해와 여성의 이해는 동일한가, 여성 간의 차이(계급, 취업상태, 혼인상태, 성적취향 등)는 가족정책에 어떻게 반영될 것인가 등과 같은 젠더관점에서의 고민 없이 가족(변화)문제가 인구문제로 직결되면서 성별분업 완화라는 과제들은 주변부로 밀려나고 있다.
그리고 정부의 ‘저출산대책’은 여성의 고용율과 출산율을 동시에 높이는 전략을 추진하고 출산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강화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만, ‘종합대책’ 곳곳에 출산여성, 다자녀가족에 유리한 인센티브 제공 등 가부장적 가족주의에 대한 미련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이는 정부가 혼인을 통한 가족형성과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가족에 대하여 긍정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으며 ‘정상가족’에 대한 편견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반면 수많은 정책내용이 담긴 ‘종합대책’ 속에는 비혼 부모와 그 자녀에 대한 사회적 수용성을 높이기 위한 정책은 포함되지 않고 있다.
가족은 유기체로서 그 구성원인 개인(사람)과 함께 끊임없이 변화해 나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가족은 어떤 모습일까? 진정한 복지사회란 사회구성원들이 일방적인 돌봄 노동에 의해 유지되는 가족제도에 의존하는 정도를 줄이는 사회를 의미한다. 그리고 현재의 여성의 삶의 패턴 즉 자녀양육과 노인부양 등 가족과제에 따라 생애 주기적으로 돌봄 노동과 임금노동사이를 이동하는 노동패턴이 여성·남성구분을 두지 않고 모든 노동자에게 적용 되어야한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출산·양육·돌봄 노동에 대한 사회적 지원을 확대함과 동시에 가족관계의 평등성과 민주성이 정착되도록 다양한 노력과 아울러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인정하는 가족 개념에 대한 열린 사고 또한 필히 요구된다.
모든 개인이 가족을 통하지 않더라도 주체적인 권리와 사회보장혜택을 받을 수 있고, 자본주의체제를 유지하면서 가족 내에서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된 복지를 감당해온 기초단위로서가 아니라 개인과 개인의 친밀성에 기초한 다양한 공동체들이라는 사회적 의미로서의 가족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인정하고 사회구성원 누구이든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가족을 구성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 모든 형태의 공동체, 개인까지도 생활단위로서 소위 ‘정상가족’으로 인정하고 지원을 받는 것까지도 현시점에서는 진지하게 다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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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주. 이 글은 주로 한국여성단체연합·한국가족사회복지학회가 실시한 가족정책토론회 자료집 『저출산과 가족정책, 새로운 출구를 찾자! 2005.08.』에 수록된 내용들을 중심으로 정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