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 현곡산업단지에 위치한 삼성 하청업체 코레노(한국니토옵티칼) 노동자 노경진 씨는 2006년 10월, 2년 동안 다니던 공장에서 대학졸업 사실을 숨기고 취업했다는 이유로 해고되었다. 하지만 보다 정확한 해고사유는 다른 데 있는 것 같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삼성 하청에서 노조? 어림없는 소리
“2006년 1월부터 4월까지 회사에서 주문량이 많이 늘었다며 잔업이랑 특급을 거의 안 빼줬어요. 여기서는 삼성이 고객인데, 고객이 원하는 물량이 너무 많아서 어쩔 수 없다, 대신 충분한 대가를 주겠다. 3개월 동안 사람들이 안면근육 마비가 올 정도로 아프고 힘들고, 그런데 병원도 못 가고, 생휴(생리휴가)도 못 쓰고. 이사라는 사람까지 다 라인에 들어와서 기대해도 좋다, 10만원 이상 오를 거다. 10만원 이상 오르면 엄청 오르는 건데. 그거 하나 믿고 다들 진짜 이를 악물고 일을 했죠. 근데 월급 명세서를 받아보니 시급 10원, 잔업, 특근수당 다 합쳐서 만원이 오른 거예요.
그때가 오후 3시쯤이었는데 다들 너무 열 받아서…. 이래도 잔업을 하면 우릴 바보취급 할 거다. 이런 대접받고 아무것도 안 하면 우린 사람도 아니다. A, B, H 이렇게 세 동으로 나눠져 있는데 우리가 있던 A동은 잔업을 다 뺐어요. B동 언니들은 잔업하고 저녁 먹으러 식당에 왔다가 A동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식당에서 논의해가지고 잔업 안 들어갔고. H동은 그날 회식이 있었는데 아무도 회식을 안 간 거예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창사 이래 처음이라 했다. 그날 밤, 각 동 대표격 되는 사람들이 몇 명 모여 앞으로의 일을 논의했다. 여러 이야기가 오가고 의견이 모아졌지만 그것을 집행할 체계도 조직도 없는 상태였다.
“그 자리에서 노조 이야기도 나왔는데 단칼에 잘렸죠. 삼성이니까 노동조합은 안 된다, 삼성이 물량 끊으면 회사 망하는 거 아니냐? 잔업 뺀다는 사람도 노조 만든다고 하면 안 할 거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가 가장 아쉽죠. 어설프게 각 동 연락책임자도 정하고 행동지침도 공유하고 설명회와 월급 재검토도 요구하고 투표도 한번 해보자, 이야기는 되었지만.”
“우리에게 이런 힘이…”
“어쨌든 다음 날도 잔업을 거부하기로 하고 쪽지를 돌렸어요. 우리가 일하는 곳은 암실인데 각자 자리가 따로 있고, 책상에 형광등이 하나씩 있어서 한 장씩 필름을 놓고 불량을 찾아내는 거죠. 주변에는 필름 올려놓을 자리가 있어야 하니까 책상도 조금씩 떨어져 있고 중간에 칸막이가 있어서 앉으면 서로 안 보이고 누가 일어나면 얼굴이 보여요. 불량필름에 쪽지를 써가지고 옆으로 앞으로 던져요. 김밥 사서 먹을 사람하고 돌리면 그 밑에 이름을 쭉 적는 거예요. 중고등학교에서처럼 쪽지 돌리는 게 일상화 되어 있죠. 전달, 전달, 전달하면서….
과연 얼마나 나올까 하면서 쪽지를 돌렸는데 한 명 빼놓고 다 서명을 했어요. 잔업 시간이 되니까 앞에서 한 언니가 나갑시다! 하고 일어서는데 사람들이 다 따라서 일어서요. 얼굴이 하나씩 하나씩 떠오르는 게 정말 감동이었죠. 사람들도 그래요. 그때 정말 좋았다고. 우리에게 이런 힘이 있었구나!”
곧이어 주동자 색출을 위한 회사의 개별면담이 이어졌고 경진 씨에게는 해고의 절차만 남겨져 있었다.
“해고되기 전까지 개별면담을 7차례인가 했어요. 두 번째로 들어갔더니 학교 이름, 과, 경력사항을 다 알고 있는 거예요. 또 다른 언니는 혼인신고도 안 했는데 신랑이 대학 중퇴했다는 사실까지 회사가 알고 있어요. 어떻게 알았냐고 하니까 청첩장을 보고 알았다나? 청첩장만 보고 그걸 어떻게 아냐고 하니까 인터넷으로 알아봤대요.
좀 있으니까 사무직으로 발령이 났어요. 없던 자리를 만들어서 가서도 할 일이 없었죠. 일본에 보내준다며 일본어 공부를 하라는 둥 회유도 있었어요. 그래서 유인물을 돌렸죠. 작년 6월부터 일어났던 일들, 노동조합 못 만들게 회사에서 협박하고 개별면담에서 했던 말들, 발령이 나게 된 과정, 어차피 해고될 거니까 다 적었죠. 그때 학교 졸업한 거, 민주노동당 당원인 거 다 썼어요. 그런데 회사가 나를 해고하자마자 입사할 때 이력서를 전체 1,200명에게 공개를 했어요. 주야 밤낮으로 3일 동안 작업 들어가기 전에 빔으로 쏴서. 우리 아버지 이름부터 내 개인 신상을 몽땅 공개한 거예요. 마녀사냥을 한 거죠. 노조를 만들려고 하면 이런 식으로 다 까발려진다고.
해고되고 출근 선전전을 하고 있는데 한 언니가 찾아왔어요. 회사에 소문이 파다하다. 경진이가 어떤 아이인 줄 아느냐? 북한도 2번이나 갔다 온 빨갱이라더라, 민주노총인가에서 돈 준다고 해서 하는 거다, 회사에 1억을 요구했다더라, 이런 이야기가 공장이며 기숙사에 쫙 돌았다고.”
회사의 심기를 건드린 경진 씨는 이력은 이렇다. 학교에서 여학생회 활동을 하다가 총여학생회장이 되면서 지명수배를 받아 5년 동안 수배생활을 한 운동권. 정말 경진 씨는 회사 말 대로 삼성 하청에 노조 깃발을 꽂기 위해 위장취업을 한 것일까.
“제일 미안한 것은 내가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
“언니들은 농담 삼아 정말 그런 거 아니냐고 물어보면, 준비하고 들어왔으면 이렇게 됐겠냐? 혼자 해고당했겠냐? 하며 같이 웃어요. 사실 나는 여기서 사회생활을 배우려고 들어왔기 때문에 조심스러웠죠. 조용히 탄로 나지 않게 일만 하자, 그랬거든요. 그런데 상황이 그렇지 않았죠. 그나마 조금 더, 노동법이란 게 있는 줄 알고 그러니까 가만히 있을 수 없었죠. 지금도 제일 미안한 건 내가 잘 훈련되고 준비된 사람이어서 좀 더 잘 했더라면…. 그런 게 미안하죠.
98년에 총여학생회장을 했어요. 대학 입학해서 과 여학생회에서 일을 쭉 했죠. 저희 과가 분위기가 좋아서 자연스럽게. 대학에 가기 전부터 여성학이나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았고. 그 전까지는 교회 열심히 다녔고 나중에 선교사가 되려고까지 했어요. 처음 집회 나가서 충격을 많이 받았죠. 평화의 나라이어야 하는데 방패로 찍고 때리고…. 사실 전경도 같은 젊은이들인데.
97년에 선배들이 힘들어하면서 많이들 떠났어요. 탈퇴서 쓰고. 그런 걸 보면서 정말 실망스러웠어요. 또 여학생회에 애정이 많았고. 그런데 선거조차 하기 힘든 상황이 된 거예요. 원래 3학년이 회장후보가 되어야 하는데 선배가 없어서 2학년이던 제가 총대를 멨죠. 평생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내가 결심을 하지 않으면 총여학생회가 없을 수도 있고, 아니면 나 아닌 누군가 해야 하고. 여학생회를 정말 잘 해보고 싶은 생각, 욕심도 있었죠.
우리 학교 여학생운동은 한총련의 지침을 전달하는 수준이 아니라 여성운동에 대한 관심과 생각이 어느 정도 확고했어요. 페미니즘의 과도한 부분에는 문제의식이 있지만 여학생들이 사회 나가서 여성노동자들이 되는데 대학사회에서 여성운동이 해야 할 일이 있는 거죠. 98년 IMF가 터지면서 여학생들 취업자리가 제일 없었어요. 여성들 취업이 가장 힘들었고 직장이 있던 여성들도 제일 먼저 잘려나가고. 그런 부분을 문제제기 하는 일에 집중했던 거 같아요. 뭐 수배여서 많은 일을 하지는 못했지만.”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가는 옛 이야기다. 96년 연대 사태와 97년 한총련 출범식에서의 이석 씨 치사사건으로 대학생들이 수도 없이 구속되고, 구속자들은 신종 전향서라 할 수 있는 한총련 탈퇴서만 쓰면 바로 풀려나는 것은 물론 동료에게 비밀을 보장하기도 했다. 그 파릇파릇한 젊은이들의 양심에 대못을 꽝꽝 박던 시절.
“총여학생회장이 되니 쥐약이랑 사망통지서, 한총련 탈퇴서, 이렇게 들고 학교를 오셨더라고요. 죽든가 탈퇴를 하던가. 눈물 콧물 쏟아가면서 부모님을 설득한다고 했지만…. 결국 얼마 있다가 삼촌들에게 납치당하다시피 해서 경찰서로 끌려갔고 탈퇴서를 썼어요. 그리고 3주 동안 학교를 다니다가 탈퇴무효 선언을 하고 다시 수배생활을 들어갔죠.
그 3주 동안이 살아온 인생에서 제일 힘들었어요. 후배들은 모르는 거예요. 당시는 학교 안에도 삼엄했으니까 건물 하나를 옮겨도 후배들이 혼자 다니면 안 된다고 따라오고. 그동안 선배들 욕하고 그랬는데 제가 그 입장이 된 거잖아요. 후배들에게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는 거예요. 너무너무 힘들었죠. 또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선배들도 딱히 뭐라고 하지 못했죠. 과정을 다 지켜봤으니까. 서로 묵묵히 답답해하면서 있을 수밖에 없었죠.
그때 한 선배가 말한, 양심을 걸고 지켜야 할 가치가 있다면 그것을 지키는 것도 의미 없는 일은 아니다, 이 얘기에 용기를 냈죠. 탈퇴번복 선언을 하기 전에 짐 싸서 집을 나오며 부모님 방문 앞에서 울면서 절하고 나왔어요. 드라마를 찍었죠. (웃음) 학교에 부모님이 찾아와도 피하고. 시간이 좀 지나서 집에 전화를 했는데 어머니가 “우리 집에 딸 없다”고 전화를 끊으시는 거예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나쁜 짓 하는 거 아니란 사실에 이해라기보다는 결국 져주신 거지만.
자기 스스로 한번 무너졌다는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다시 운동을 하게 되기 힘든 거 같아요. 그때 탈퇴서를 썼던 주변 사람들 보면. 사실 종이 한 장 쓴 게 뭐가 큰 문제겠어요. 또 번복한다는 의미가 크게 있지도 않잖아요. 경찰서에 제출했는데 원천무효를 시킬 수도 없고. 그래도 그때 그렇게 안 했다면 아마 여기 이렇게 있지도 못했을 거예요.”
“조용히 살고자 했으나…”
그렇게 5년을 학교 안에서 ‘편하게’ 지냈다는 경진 씨는 2002년 10월 말 미선이 효순이 죽음에 대한 항의로 미 대사관 담을 넘으면서 수배생활을 정리했고, 집행유예로 풀려나와 2004년에 오산의 한 공장으로 들어갔다.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수배생활 하면서 잃은 건강도 되찾고, 무엇보다 학교에만 갇혀 있으니까 사회생활을 배우고 싶어서 선택한 것이 공장이죠. 근무 여건도 좋다고, 더 큰 공장이라고 해서 여기로 왔죠. 들어오기 전에 삼성 하청인 것도 몰랐어요.
학교 다닐 때 여성운동 했고, 공활도 경험해봤지만 이게 현실에 적용가능한가 의문도 들고 탁상공론 하는 거 아닌가 싶고. 그리고 어쨌든 노동자로 사는 게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삶이니까 여기서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찾고 싶었죠.
회사에 들어오니까 너무 깔끔하고 관리자도 친절하고, 식당도 푸드 업체가 들어와서 깨끗하고. 와! 여기서는 노조 만들자고 하면 사람들한테 칼 맞겠다, 그게 한 2개월 갔나? 생산직을 뽑는데 사장이 면접을 보고, 1박2일로 용인 수련원에서 연수도 하고, 1주일 동안 오리엔테이션을 하면서 처음에는 전문가가 된 기분인거죠. 그런데 현장에 투입되니까 역시 노동자인거죠, 뭐. 남편도 학생회 활동 하고 그랬으니까 지금은 그냥 직장인이지만 이해를 잘 해줘요.”
결국 이 천박한 자본, 정확히 말해 삼성의 무노조 경영이 한 사람을 노동자로 일깨우고 학습시킨 셈이다. 얼마 전에는 경진 씨는 삼성SDI 울산 사업장, 셀콤 등 삼성 관련 사내하청, 비정규 노동자들과 함께 삼성 본관 앞에서 집회를 열기도 했다.
“해고 전에도 언니들이 쟤는 삼성까지 올라가서 싸울 애야, 그랬는데 진짜 삼성 본관 앞에서 집회를 하고 오니까 무지 좋아하는 거 있죠. 천막도 언니들이 야, 싸우려면 뽀대 나게 천막 딱 치고 싸우라고. 그래서 천막 치니까 아니 친란다고 진짜 치냐? (웃음) 잠도 거기서 자냐? 신랑이 뭐라 안 그러냐? 하면서 먹을 거 사다주고….
코레노 문제 하나만 가지고 싸우기 보다는 삼성이라는 공통점으로 뭉친 사람들끼리 서로 지원해주며 같이 하려고 해요. 다들 외롭게, 절박하게 싸워온 분들이라 함께 삼성 본관에서 집회를 열고 그런 게 너무 좋고 감동적이죠.
언니들 중에는 7개월도 넘었으니까 그만하라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면 내가 여기서 포기하고 가면 사람들이 노조를 어떻게 인식할 거며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냐? 물론 그런 거 때문에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 할 일이 많으니까 해볼 거 다 해보고 더 할 거 없으면 그때 그만 두겠다고 하죠.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여유 있게, 쉽게 끝날 싸움 아니라고 마음먹고 있어요. 해고 싸움 해본 선배님들이 3년, 5년 싸움은 기본이다, 그래도 해결될까 말까 한다, 삼성이니까 최소 5년은 봐야 하는 거 아니냐? 하며 놀리지만요.”
사진 박김형준 | 객원기자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