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세대 인권을 ‘집단권’으로 부르든 ‘연대권’으로 부르든 문제가 되는 지점은 결국 ‘집단’은 인권의 주체일 수 있느냐이다. 집단을 권리의 주체로 인정하기를 꺼리는 경우는 그 집단이 인권을 유린하는 당사자일 수 있다는 점에 보다 많은 주의를 기울인다. 쉽게 생각하면 민족자결권을 주창하면서 식민지에서 해방되고자 투쟁한 민족해방운동세력들이 해방 이후 국가권력을 장악한 뒤에 인권침해의 당사자로 등장하는 경우다. 물론 민족해방운동 중에도 군사적인 분쟁 과정에서 (이번 호에 실린 국제인권 꼭지에서 보는 것처럼) 자민족의 소년병을 강제로 동원하는 군사집단들이 있으며, 이들의 행태는 아무리 민족해방이란 목표가 절실한 것이라고 해도 그대로 인정할 수는 없게 한다. 이럴 때 민족이란 집단을 권리의 주체로 인정한다면, 민족 내부의 인권침해에 대해 결국은 눈을 감으라는 얘기나 마찬가지가 된다. 그러기 때문에 집단을 권리의 주체로 인정할 수 없고, 이에 따라 집단 내부의 개인들이 권리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다.
‘집단’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그런데 집단은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고 부인하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아무리 집단을 개인의 집합체이며, 집단이 자결권을 부정당하여 인권을 침해받는 것도 결국은 그 집단의 개인에게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세계에는 그 집단의 이름으로 권리를 부정당하는 사례는 얼마든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때 집단을 개인이 모여서 구성되는 집합체로 볼 것인가, 아니면 아예 집단이라고 하는 공동체로 볼 것인가에 따라 상당히 다른 논의가 가능해진다. 집단을 권리의 당사자인 개인들이 모여서 이룬 것으로 이해한다면(collective rights), 이때의 집단은 “공동의 문화와 특징적인 생활 형태를 가진 아주 밀착된 공동체일 수도 있고, 공장 오염에 영향을 받는 개인들의 예에서처럼 아무런 공통점이 없더라도 단일한 이익을 공유하는 개인들의 집합”일 수도 있게 된다. 이때의 집단은 공통의 이익이 존재하면 되지 다른 요소는 굳이 필요하지 않다. 이럴 때에는 집단권을 인정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인권은 인간에게 주어지는 권리이기 때문에 인권의 향유 주체인 인간들의 집합체인 집단도 권리를 공유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집단 그 자체를 권리의 주체로 인정한다고 할 때(corporate rights)는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이때의 집단에서는 개별적인 구성원이 아니라 집단을 권리의 주체로 보아야 한다. 여기서 집단은 “그 집단이 가질 수 있는 이익과 권리가 무엇이냐에 관계없이 집단으로서의 도덕적으로 중요한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개인이 그가 갖는 권리와 관계없이 인간으로서의 정체성과 지위를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집단도 그렇다. 그 집단의 이익과 권리는 집단으로서의 정체성에 따라 다음에 오는 것이다.” 이럴 때는 인권은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조직 그 자체인 집단을 권리로 볼 수 없다는 논리로 연결된다.
‘민족자결권’의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개인은 민족에 속하고, 국가의 구성원으로의 지위를 갖는다. 보통 인종청소가 단행된다고 할 때 그 개인은 어떤 개인이냐가 중요하지 않다. 그 개인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그 민족이나 국가의 구성원이 되지 않는다. 태어나 보니 그 민족과 국가에 속하게 되어 있다. 이럴 때는 개인의 특성은 사상된 채 집단의 일원으로만 인지된다. 그럴 때 앞의 집단으로 이해할 때의 문제와 뒤의 집단의 개념으로 이해할 때 인권은 각각 어떻게 적용될까? 집단을 개인들의 집합체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개인의 선택과는 관계없이 그 개인이 어느 강고한 동일성으로 묶인 집단에 속해버렸을 때 과연 그 개인은 그 집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그 개인은 그 집단의 문화전통과 역사와 외부와 구분되는 다른 특질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여기서 문제를 민주주의와 연결하여 생각해 보자. 앞서 들었던 예처럼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나 독립 이후 국가를 수립한 뒤에 비민주적인 권력에 의한 인권침해가 발생한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어떤 집단이 민주주의의 형식과 내용을 잘 갖춘 집단이라고 한다면, 여기에서는 집단을 어떻게 규정하든 상관이 없다. 개인들의 권리들이 제대로 보장되고, 그들의 권리가 모여서 그 구성원들이 집단의 정체성에 자긍심을 갖는다고 할 때 그 집단의 권리가 침해된다고 할 때는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집단을 수호하기 위해 투쟁할 것이다.
그렇지만 집단이 권위를 내부의 민주적인 절차나 내용을 부정하는 방법으로 사용하게 된다면 구성원들은 집단의 안위보다는 개인의 권리를 찾아 탈출하고자 할 것이다. 이럴 때 “집단적 권리에 대한 호소는 대부분 억압적이고 온정주의적인 체제가 진짜 민중의 권리를 부정하거나 억누르는데 자주 이용된다. 민족의 권리니 민중의 권리니 하는 수사는 구체적 인간과 대다수 민중의 권리에 대한 부정을 정당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이 집단권의 실체가 국가라고 하면 “정치적 남용의 위험성이 특히 강하다”는 지적을 피해갈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집단권
그렇지만 집단에 대한 이해가 이런 종류의 것만 있는 게 아니다. 마르크스주의 관점에 따르면 “권리는 개인만이 아니라 공동체, 단체, 집단도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발전에 대한 집단적 권리는 개인만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공동체(community)이다. 또한 사회 속의 특정단체(예를 들어 노동조합, 협동조합)도 보호받을 수 있고 강화되기 위하여 그래서 개인들의 필요를 보다 잘 충족시키기 위하여 권리를 가질 수 있다. 이 권리는 그 단체를 직접 겨냥한 충분한 자원을 의미하거나 또는 그 단체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 특정 활동에 대한 제한을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에게 공동체(community)는 “집단성의 설립을 통해 부르주아사회의 개인 소외를 종식시키기 위해 구상된 자본주의 이후의 발전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이에 따라 마르크스의 관점에서는 인권은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기본적인 물질적 삶의 필요를 충족시킬 권리(사회에서 동의된 최소한의 기준에 따라), 개인적 자율성과 자유에 대한 권리, 자기들 공동체/사회의 필요를 충복시킬 권리”가 그것이다. 마르크스에게 중요한 관점은 실질적인 평등에 있다. 경제적 재화의 불평등한 분배로 자본주의에서 계급이 발생하고, 인권침해가 정당화된다. 이에 맞서는 공동체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논리의 귀결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공동체의 발전을 위한 구성원의 의무가 강조되는 것도 당연하다. 사회주의 인권론이 ‘시민의 권리와 의무’로 구성되는 이유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민주적 정부에 대한 권리와 그에 결합된 정치적 자유를 포함한 위에서의 집단권이 적극적으로 옹호된다고 볼 수 있다.
양대 조약과 집단권의 내용
국제인권조약의 양대 조약으로 불리는 ‘경제.사회.문화적권리에관한국제조약’과 ‘시민.정치적권리에관한국제조약’은 공통적으로 제1조에 자결권을 규정하고 있다.
제1조 1. 모든 인민은 자결권을 가진다. 이 권리에 기초하여 모든 인민은 그들의 정치적 지위를 자유로이 결정하고, 그들의 경제적, 사회적 및 문화적 발전을 자유로이 추구한다.
2. 모든 인민은, 호혜의 원칙에 입각한 국제경제협력으로부터 발생하는 의무 및 국제법상의 의무에 반하지 아니하는 한, 그들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그들의 천연의 부와 자원을 자유로이 처분할 수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인민은 그들의 생존수단을 박탈당하지 아니한다.
(3항 생략)
1948년에 성립된 세계인권선언에서는 볼 수 없는 이 자결권 조항이 양대 조약에서는 대원칙으로 제1부를 독자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집단적 권리는 모든 민중의 것이므로, 만일 그 권리가 부정된다면, 그와 같은 민중의 개별 구성원은 물론이고, 어떠한 민중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인식에 따라서, “자결권은 모든 인권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 조약들이 유엔에서 채택된 것이 1966년이므로 18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인류는 자결권을 인권의 대전제로 인정한 꼴이 된다. 그렇다면 이 시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제3세계에서 민족해방운동이 결실을 맺어 신생독립국들이 대거 탄생했고, 그들이 유엔의 회원국으로 참여하면서 유엔의 지형은 변화되게 된다. 집단권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인 자결권이 양대 조약에 우선적으로 배치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다.
앞선 논의에서 집단권을 부정하는 견해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지만, 국제적으로는 양대 조약의 자결권 논의를 이은 “인권에 대한 집단주의적 접근방법”이 발전해왔다. 양대 조약이 유엔에서 채택된 지 2년 뒤인 1968년에 이란 테헤란에서 열린 세계인권대회는 선언문에서 식민주의, 무력분쟁에 의한 대규모의 인권의 부정, 민족적.인종적 정체성 또는 특질에 기인한 차별(아파르헤이트와 같은) 등에 대해 언급하면서 “긴급하고 심각한 세계적 규모의 정치적 및 경제적 문제에 인권을 관련시키는 최초의 접근방법을 반영”하였다. “1948년의 세계인권선언이 개인을 다양한 사회관계의 중심에 두고 있음에 대하여, 테헤란선언은 인권부정에 따른 대량의 희생자로서의 집단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것이 20세기 후반에 인권에 대한 개인주의적 접근방법을 넘은 집단적 접근방법으로 전환한 획기적인 논의다. 그 후 국제사회는 집단권을 보편적인 인권으로 인정해가고 있는 추세다.
이에 따라 집단권은 민족자결권만이 아니라 발전권, 평화권, 환경권을 비롯해 “지구와 우주자원.과학.기술.기타 정보의 발전 결과, 문화적인 전통.유적.기념물 등의 인류 공동의 유산에 공동으로 참여하고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권리” 등으로 확장되어 간다. 따라서 제3세대 인권인 집단권은 지금도 여전히 형성 중인 인권이다.
퇴조하는 집단권, 그 가능성에 주목해야
그런데 이런 집단권의 발전은 현재 주춤해 있거나 퇴조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이후 제3세계 국가들이 유엔에서 단일한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기보다는 경쟁관계에 돌입하면서 경제적 부국(옛 식민지 모국)에 의존하는 경향성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집단권을 주창하던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하였거나 자본주의 국가로 탈바꿈하였던 데서 연유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경제적, 군사적 패권을 장악한 미국자본주의가 주도하는 자본주의의 세계화이고, 이에 따라 제3세계는 이전처럼 독자적인 정치적 세력으로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없는 위치로 전락했다.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집단권에 대한 논의들, 예를 들어 유엔에서 채택된 각종 집단권과 관련된 선언들은 조약으로 발전하지 못한 채 사장될 가능성이 높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집단권이라는 인권 논의의 발전을 가로막는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 그것이 인권의 발전에 도움일 수는 없다.
반대로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극성맞게 인권의 대원칙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관계로 현재에는 내부 정치권력에 의해 억압당하지만, 민중들은 집단권의 원리들을 저항의 한 방법으로 현실에 적용하는 방향으로 주목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린다. 집단권은 아직도 해결해야 할 많은 논점들을 남기고 있고, 그것이 당장 정리된 기미는 보이지 않지만, 인권현장을 뛰는 인권활동가들에게는 활동에 응용할 거리들을 많이 제공해준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다.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 덧붙이는 말
-
* 이 글에서 인용한 자료들은 인권연구소 ‘창’(www.khrrc.org)에서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