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人터뷰] 미네르바의 부엉이, 날다

정신장애인 당사자 인권운동을 준비하는 김충배 씨

미쳤다. 이 말은 좀 묘한 말이다. 한동안 예술가를 꿈꾸던 이들과 지낸 덕택에 심심치 않게 ‘미친’ 이를 만날 수 있었다. 한 친구는 어느 날 V자를 그리며 나타나 정신이상으로 군 입대를 면제받았다며 술을 한 턱 내기도 했다. ‘정상=평범함’, ‘비정상=비범함’이라는 등식 아래 미친 척 위악(僞惡)과 기행(奇行)을 일삼는 예술가 지망생들의 치기어린 행동에도 주변의 시선은 참으로 관대했다. 하지만 예술가가 되지 못한 그들이 정작 사회에 나왔을 때 사회는 냉정했다. 미쳤다는 것이 어떤 결과를 내놓지 못할 때 그것은 여전히 불량품이거나 돌연변이로 취급될 따름이다.


“그래, 난 조울증 환자다”



9년째 조울증을 앓고 있는 김충배 씨는 스스로 미쳤다고 말하는 정신장애인이다. 더 나아가 그는 한 번 미쳐보는 것도 좋으며 미친 사람들에게도 당연히 인권이 있다고, 인권을 위해 이제 당사자들이 나서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바람이 몹시 부는 6월 어느 날 한 대학 교정에서 그를 만났다.


“콤플렉스가 심했어요. 어려서 여자애들한테 놀림을 받고는 여자에 대한 콤플렉스도 생겼죠. 군대에서 제대하고 다시 대학에 들어갔는데, 늦은 만큼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스트레스가 된 모양이에요. 모든 사람들이 저를 주목하는 것 같았죠. 축제 기간이어서 학교 주변이 시끄러웠는데 사람들이 술 먹고 내 흉을 보는 환청이 들리기 시작했어요. 고시원에서 생활했는데, 환청에 시달려 식사도 거르고 잠도 못자고…. 그때가 99년도였어요. 처음에는 정신분열증이었죠. 1주일 동안 잠도 못자고. 병원 가서 진정제를 놔주니까 잠에 곯아떨어졌죠. 잠은 정신과 많은 연관이 있거든요. 입원을 해서 3주 만에 퇴원을 했죠. 매우 빨리 퇴원을 한 거예요. 그리고 휴학을 하고 집에서 하루에 18시간씩 잤어요. 집에서도 정신병이 났다고 하니 뭐라고 이야기 할 것도 없고, 자고 있으면 가족들도 덜 불안하니까.
병에 걸리기 전에 미셀 푸코의 책들도 여러 권 읽었고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라는 영화도 봤고. 그렇게 비교적 오픈 마인드였는데도 직접 내가 병에 걸리니까 차원이 틀리더라고요. 정신과에서 당신은 분열증 환자입니다, 하는데 사형선고로 들렸죠. 우리사회가 이성 중심의 사회다보니까 당신은 머리가 잘못 됐습니다, 하는 판정은 당신은 스스로를 믿어서도 안 되고 이제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하는 판정이죠. 저 같은 경우에도 어떻게 보면 머리만 믿고 살아왔는데 하루아침에 머리가 대가리가 되어버린 거예요. 분열증은 약을 먹고 얼마 뒤에 치료가 되었는데 곧 조울증에 걸렸어요. 그 뒤 9년의 시간을 말로 다 이야기할 수 없죠.”



학교를 휴학하고 조울증 치료를 받던 도중 한 사회복지사의 추천으로 그는 지금 하고 있는 학원강사를 시작했다. 현재 그는 인기 있는 영어강사다. 사실 그는 학력고사와 본고사, 수능을 거치며 오랜 기간 수험생활을 했고 그 결과 그의 학력은 꽤나 복잡하다.


“고등학교 때에는 변호사가 되는 게 꿈이어서 법대에 썼다가 떨어지고, 후기로 다른 학교를 다녔는데 얼마 못 다니고 다시 시험을 봐서 다른 대학 들어가고. 군대 제대해서 지금 휴학 중인 고려대 영문과에 들어가게 되었죠.
처음에 들어갔던 대학에서 야학을 한 적이 있어요. 제가 공부를 잘 할 수 있었던 것은 제가 똑똑했다기보다는 환경이 좋았기 때문이었죠. 형이 돈을 벌었으니까. 그래서 부채의식이 있죠. 노동자를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는 부채의식. 저희 형이 세 살 위인데 학년은 2년 차이고, 형이 고등학교 때 운동을 했었거든요. 형이 던져놓은 책들을 중3때부터 봤어요. 형제끼리는 경쟁의식이 있잖아요. 형이 하는 거 나도 해야 하고. 그때부터 체 게바라도 알게 되었고. 형은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을 포기했지만….
아버지는 건설노동자였죠. 잡부에서 현장소장까지 올라가신. 그만큼 성실하게 사신 분이죠. 요즘 건강이 안 좋으시지만 계속 술 드세요. 최근에는 제가 집에 갈 때 한 병씩 사다드리죠. 취미가 거의 없으시고 가난한 삶이었지만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하죠. 작년에는 아버지를 모시고 ‘괴물’을 보러 극장에 갔어요. 25년만이라고 하시더라고요. 더 연로하시기 전에 함께 문화생활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루나틱’이란 정신장애 관련된 뮤지컬도 보고.
제가 정신장애를 겪으면서 당연히 아버지와 관계가 안 좋았죠. 소통이 잘 되지 않았고 커뮤니케이션이 결핍되었으니까. 제 병이 아니었더라도 우리 부모님 세대가 의사소통에 능하지 않잖아요? 어디서 가르쳐주지도 않았고. 권위적이기만 한 부모가 약해져 보일 때 의사소통이 가능해진 거 같아요. 원망 보다는 나 자신을 반성하고 성찰하면서 아버지를 달리 보게 된 거 같아요.”



“반성하고 성찰하면 소통이 가능해진다”



그가 정신장애를 가지고 나서부터 그의 주된 고민은 커뮤니케이션이었다. 정신장애인 당사자 운동을 고민하게 된 계기 또한 자신감과 의사소통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부터이다. 정신분열증을 치료하고 조울증이 시작될 무렵인 2000년. 그는 대학에 복학은 했지만 거의 모든 시간을 PC방에서 보냈다고 한다.



“윈앰프란 프로그램이 나와서 인터넷 라디오가 한창 유행할 때 ‘테크노 짱’이란 아이디로 테크노 음악만 틀었죠. 본래 목적은 음악이 아니라 음악 도중에 하는 멘트였어요. 조증 때는 기분이 업 되니까 생각이 막 샘솟고. 방송을 하면서 30분 동안 멘트만 한 적도 있죠. 그러니까 매니아가 생기고. 엽기자키다, 말이 엄청 빠르다 하며. 거의 6개월 동안 PC방에서 자신감, 자기 확신에 차서 그렇게 지냈죠. 가장 즐거웠던 시절이었어요. 인터넷을 통해서 간접적이나마 소통을 했다는 것,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했다는 것이. 또 방송을 계기로 애청자였던 여자 친구를 만났어요. 가정형편, 내가 아픈 것까지 다 받아줬죠. 덕분에 여성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어졌어요. 지금은 헤어졌지만 무척 고맙게 생각하죠. 또 학교에 갈 때도 머리에 브릿지를 하고 주황색 가방 메고, 녹색 선글라스 끼고 PC방에서 디스크자키 하니까, 학교에서도 유명했죠. 행복했고.
어느 날 컴퓨터를 잘 다루는 걸 보고 조립식 PC 파는 사장님이 외판 사원으로 픽업을 했어요. 그때는 조증 때여서 한 대 팔면 3만 원 받기로 했는데 6개월 동안 3대 팔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게 좋아서 내가 밥 사주고, 칵테일 마시고. 술을 못하지만 칵테일은 몇 잔 마시니까. 그때 처음으로 내 생일파티를 했는데 거기 온 사람들이 다 내가 길거리에서 만나서 명함 주고 사귄 사람들로, 서로서로 모르는 사람들을 초대해 파티를 연 거죠. 조증이어서 가능했죠. 경제적으로도 이렇게 써도 나는 또 벌 수 있다는 자신감이 조증 때문에… 그래서 형에게 제일 미안해요. 그때 신용카드로 긁은 걸 형이 다 메워줬거든요. 형은 주유소에서 월급 소장 하면서 번 돈을 제가 다 까먹은 거죠.
지금도 학원에서 말이 빠르고 자신감이 넘쳐 있어서 별명이 수다맨이에요. 생긴 것도 좀 닮았죠. (웃음) 인기도 있고. 원장이나 애들 앞에서 커밍아웃도 했어요. 정신과 다니는 미친 선생이 가르친다는 소문도 났죠. 물론 처음부터 밝히지는 않았고 내가 성실히 생활을 하고 신뢰를 준 다음에 사실은 조울증 환자입니다 해요. 그러면 별 문제 없다고 하는 경우가 많아요. 학원 입장에서는 잘 가르치는 게 중요하니까. 그래도 아이들은 좀 놀랬겠죠.
인터넷 카페에 글을 썼는데 그 글을 복사해서 의사선생님에게 보여드렸더니 지지를 많이 해주셨죠. 처음에는 개인적인 내용, 사생활이나 개인사였는데 조금씩 지나다보니까 정신장애인의 인권 문제도 쓰게 되었고. 그걸 의사선생님이 보고 정신보건센터(수원정신보건센터)에서 자원활동을 해봐라 권유를 해서 6개월 정도 자원봉사를 하게 되었고.
어느 날 외국의 조울증 환자 사이트에 갔더니 커밍아웃이란 말이 적혀 있더라구요. 이 사람은 정신장애인에 동성애자인가, 그런데 알고 보니 커밍아웃이 꼭 그 의미만은 아니더라구요. 동성애자와 마찬가지로 내가, 정신장애인이 벽장 안에 숨을 이유가 없지요. 내 잘못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벽장 밖으로 나오는 것, 정신장애를 비롯한 모든 콤플렉스를 가진 일반 국민들도 커밍아웃을 해서 자신의 핸디캡, 남들과 다른 점들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터놓고 내보이자. 이런 생각을 하게 되죠. 그래서 커밍아웃이 가장 첫걸음이자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점이죠.”



그의 말마따나 그는 한 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수다맨처럼 속사포를 쏘아댄다. 하지만 매우 잘 정리된 문장을 속도감 있으면서도 조리 있게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서 그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화장실 핑계로 한 숨 돌리고 돌아와 그가 생각하는 당사자 운동은 무엇일까,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당사자 운동을 하려면 자신의 장애를 인정해야 하죠. 그렇지 않고 당사자 운동은 할 수 없어요. 정신장애는 자신의 장애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더 큰 용기가 필요해요. 가족들을 만나보면 다들 지금은 때가 아니다,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하겠는가 하며 슈퍼맨 같은 사람이 나와야 한다고.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런 사람, 성공한 사람은 성공한 다음에는 자신의 장애를 속일 가능성도 크고 또 한편으로는 사회적으로 미화시켜서 인간성공, 극복으로 치장해버리기도 하죠.
그래서 당사자 운동의 출발점은 커밍아웃을 통해 자신이 자신의 장애를 부끄러워 하지 않는 것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해요. 꿈이 있다면 좀 안정된 학원에 월급 넉넉하게 받는 강사가 되는 것도 있지만 정신과 환우의 이름으로 누군가의 얼굴을 만들어 신문광고에 내는 꿈도 있어요. ‘트루먼 쇼’ 영화 포스터처럼.
애인이 있거나 직장이 있는 정신장애인이 회복 가능성이 높아요. 숨기는 것은 대안이 아니죠. 가족들도 점차 깨닫고 있어요. 커밍아웃이 도움이 된다는 걸. 의사들은 커밍아웃을 말리고 심지어 장애등록도 말리는 경우가 있죠. 장애등록이야 해봐야 혜택은 별로 없으면서 정부에 등록되고 낙인만 찍히니까. 하지만 정신과에서 정신장애를 더 부끄럽게 여기는 문화가 있는 건 문제예요. 의사가 환자를 관찰하고, 약을 통해 임상실험을 하고, 상담치료를 하지만, 정신장애를 유전적 요인이나 개인의 정신상의 문제로만 보지 사회문화적인 존재로 의식하지 않아서 의사의 커밍아웃에 대한 인식도 낮은 거죠. 그러니까 커밍아웃에 대한 프로그램, 지지해줄 수 있는 환경 조성이 부재하고 오히려 고해성사 하는 장소가 되어버리죠.”



“단역배우가 되고 싶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해본 적 있나? 갑자기 슬퍼지거나 즐거워졌던 경험은? 인터뷰를 진행할수록 정신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가 점점 허물어졌다. 과연 정신장애는 그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무엇인가.



“조울증은 살다보면 누구나 겪을 수 있고, 그것이 삶에서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작용을 할 수도 있어요. 자신의 한계와 가능성을 알 수 있거든요. 그런데 콤플렉스 때문에, 시선이나 고정관념 때문에 그것을 못하고 있는 측면도 있어요. 학교 교육만 봐도 획일화시키면서 너는 이런 사람이야 하고 한계를 짓죠. 사회생활도 마찬가지이고.
다른 책에도 있는 말이지만,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자, 그런 글을 쓴 적이 있어요. 장애인은 5미터 뒤에서 출발해서 비장애인과 같이 100미터를 뛰고 또 몇 십 미터를 더 뛰어야만 주목을 받는 세상이죠. 그렇지 못한 장애인은 열등감을 가져야 하고. 저도 학원강사에 인권강의도 다니고 이렇게 인터뷰도 하니 특별 케이스라 할 수 있죠. 하지만 제가 정신장애인을 대표한다거나 그렇게 다뤄지는 것을 절대 바라지는 않아요. 제가 대변할 수도, 대표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죠. 정신장애를 고쳐야 할 것, 비정상적이어서 정상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는 존재로 보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아요. 20세기는 효율성, 속도, 정확하게 제품을 생산해내는 것, 이런 게 중요하죠. 그 가운데 약자는 노동에서 소외되고, 약자들, 소수자들이 가진 고유한 장점이 사라지고 말아요.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천시 받으면서. 과거에는 정신병이 아니었음에도 현재에서는 정신장애인으로 차별받는 경우도 있어요. 과정이 아니라 결과가 중요해질수록 결과에 도달하지 못하면 장애인이 되어버리니까. 속도와 효율성 속에서 정신장애인이 노동을 하려면 새로운, 대안적인 노동문화가 만들어질 필요가 있어요. 인간적인, 효율성보다 창조성, 독창성이 강조되는 노동문화. 소비문화가 점점 다양해지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 점에서 정신장애인이 가진 단점은 사회의 장점이 될 수 있고 사회를 보다 낫게 만드는 운동이라고 믿어요. 그리고 저는 이러한 운동에 능력이 주어지는 한 최대한의 노력을 다하겠지만 그것은 저와 같은 사람들이 더 사회 밖으로 나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에요. 저는 단역배우, 주인공이 아니라 단역이 되었으면 해요.”



그는 운동을 꿈꾸고 있다. ‘미치다’는 말은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이기에 ‘운동’과 제법 잘 어울릴 것 같다. 독일 철학자 헤겔은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짙어지자 날기 시작한다.’라며 진리에 대한 인식은 시대에 뒤따른다고 했다. 그의 블로그(http://blog.daum.net/minervaowl) 이름 역시 미네르바의 부엉이, 그의 닉네임도 부엉이다. 저녁이면 날아 인간의 대지를 샅샅이 살핀 뒤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에게 알려주었던 부엉이. 그는 날개를 편다.



사진 박김형준 |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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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선

    저는27세의아들을둔엄마입니다김충배씨의사연을어느정신장애인의리드쉽트레이닝교육을참석하면서접하게되었네요당사자인권운동을위해대단한용기에진정감사드리며작은힘이나마도움이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