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루소가 말하는 시민종교는 일거에 국가종교로 변질된다. 일반의지에 대한 복종의 윤리가 국가라는 상상적 공동체에 대한 절대복종의 의무로 왜곡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국가주의의 교의는 우리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참여정부에서 그 찬란한 21세기적 외형을 획득한다.
실제 국기에 대한 맹세는 군사정권의 일방적 지시에 근거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대한민국국기법’이 지난 1월 통과됨으로써 이 인권유린의 국가도덕은 40년에 걸친 유랑을 접고 당당하게 법적 근거를 확보하게 된다. 민주항쟁 20주년을 자랑하는 이 시점에, 행자부 관료주의의 은폐·엄폐에 몸을 가린 대통령에 의해 그것은 일반적 구속력을 갖춘 국가법률로 정착하게 될 지경인 것이다.
여기서 미국도 충성맹세를 한다는 항변은 무의미하다. 그것은 남북전쟁 직후 허약한 연방체제를 보호하려는 의도(“one Nation indivisible”)로 구성될 뿐이다. 우리처럼 스스로 정당한 절대자이자 최고의 인격체인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맹세를 강요하지는 않는다(미국의 경우 최소한 “신 아래(under God)” 국가가 있지만 우리의 국가는 신조차 초월하여 그저 “무궁”할 따름이다). 게다가 그들의 맹세는 op-out 방식을 취한다. 아무에게나 ‘경례’ ‘바로’라는 군대식 반말로 강요하는 우리 식과는 달리 그들의 맹세는 하기 싫은 사람에까지 강제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 정도의 맹세조차 그들의 연방법원은 위헌으로 선언해 버렸다.
실제 우리의 맹세는 정확하게 권위주의의 진행과 맥을 같이 한다. 그 출발은 삼선개헌의 시기와 일치하며, 전국적 시행은 유신정권의 출범에 맞추어진다. 그것이 국민의례와 결합하는 것은 제5공화국의 출범에 조응한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와 한미FTA의 엄호를 받으며 경제권력이 본격적인 위용을 과시하는 지금 이 순간 그것의 법률화는 추진된다. 이 국가주의의 맹세가 미국보다 더 위험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20 대 80의 양극화에 눈을 감아버린 정부가 그 직무유기의 백색쿠데타를 은폐하는 또 다른 국가종교를 구성해 내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재벌의 이익으로 대변되는 ‘국가경제’를 위해서는 농민이 희생되어야 하며, 서비스산업의 선진화를 통한 ‘국가발전’을 위해 전국의 환자들은 추가부담을 강요당하게 된다. 이 “자랑스런” 국가를 위해 우리 모두는 몸과 마음을 다 바쳐 그 80의 고통을 견뎌내어야 하는 것이다.
히틀러는 말한다: “내 목적은 수백만 노동자들을 이끌고 민족이라는 관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계급문제를 민족문제로 전환하면서,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이라는 미명 아래 노동계급의 물질적 해방보다는 그들의 “몸과 마음”을 길들이는 훈육의 길만을 열어두는 것이다. 그 결과 유시민의 말처럼 “20세기 문명사회에 가장 무시무시한 ‘조직된 야만’이 등장”한다. 그리고 슬프게도 이런 역사의 오류는 지금 이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서 새삼 그 반복을 기도하고 있다.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