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사회보장은 상대적 빈곤과의 싸움

사회보장권의 역사와 개념에 대하여




사회보장, 시혜가 아닌 권리로


굳이 예비군통지서를 받지 않더라도, 꼭 세금 납부 독촉장을 받아들지 않더라도 시시때때로 드는 생각이 ‘국가가 내게 해준 게 뭔가’ 하는 푸념이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살아 돌아와 올 연말 대선에서 “국가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지 말고,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어보라”고 한다면 그는 몇 표나 얻을까. 독재정권에 시달리다 이제 또 양극화에 시달리는 민초는 고달프다. 민심은 국가를 향해 폭발 일보직전이다.
새삼스럽게도 사회보장은 권리다. 그리고 시혜와 온정처럼 들리는 사회복지 대신 사회보장이 권리로 규정된 사회권규약에 대한민국은 이미 가입 당사국이다. 인권으로서 사회보장권. 그 역사와 우리의 현실을 꼼꼼하게 따져보자. 거기서 희망을 찾아보자. 이제 ‘국가가 당신에게 해야 할 일을 즉각 제대로 하라’고 요구하자.


사회보장은 상대적 빈곤과의 싸움
함께 가는 희망한국?
다문화사회에서의 사회보장권
공적 보호장치를 발동하라
새로운 인권 문화를 꿈꾼다







고층 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선 지금의 도시와는 달리 어려서 내가 살던 동네는 단층집들이 옹기종기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아이들은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혼자 심심할 틈이 많았다. 심심할 때면 대문 앞에 나와 쪼그려 앉아 지나가던 사람들도 보고 하늘도 보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때만 해도 어려울 때라 거의 매일같이 구걸하는 사람들을 만나곤 했다. 구부정하고 초라한 뒷모습을 남기고 걸어가는 어느 구걸하는 사람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며 아릿한 연민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그날 난 내내 그 아저씨와 같은 사람을 도우려면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한 지를 헤아렸던 것 같다. 돈에 대한 개념이 없던 어린 시절인지라 내 샘은 백만 원을 넘어서지 못했다. 백만 원이면 가난을 없애고 나라를 사고 지구를 사고도 남을 거 같았다. 풍경은 조금 달라졌지만 30여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도시 한 켠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즐비하다. 이는 훨씬 더 오랜 옛날 적어도 사유재산제도가 생기고 난 후부터 지금까지 줄곧 존재해왔던 풍경이다.

사진 | 참세상


사회보장은 시혜인가, 권리인가


월간 <사람>이 사회보장권을 특집으로 다루기로 했는데 이를 어떻게 다루면 좋을 지를 물어왔다. 이상하게도 사회복지를 인권과 연결하는 일은 그다지 쉽지 않다. 사회보장권은 세계인권선언 22조, 사회권 협약 9조와 각 국의 헌법을 통해 “모든 사람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 권리가 있으며 이를 위해 국가가 사회보장을 위해 노력할 의무가 있다”는 내용으로 명시적 권리로 규정되어 있다. 규정을 통해 권리가 확립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이런 규정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사회보장을 권리가 아닌 시혜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왜일까? 이러한 관념은 사회보장권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 같다.


인권의 역사를 다룰 때도 그러하듯 사회보장 혹은 사회복지 역시 서구의 역사, 그중에서도 영국의 역사를 통해 주로 접근하곤 한다. 각각의 다양한 문화들 속에 나름의 사회연대와 사회보장 제도가 발달해 왔으며 그 역시 다양한 형태를 취하고 있을 텐데 이에 대한 자료도 많지 않거니와 나의 짧은 식견에 이를 논할 수준도 못된다. 그러니 아쉬운 대로 서구의 역사를 통해 살펴보자.


사회보장은 빈곤에 대한 사회적 돌봄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적으로 빈곤은 늘 존재해왔다. 흔히들 빈곤을 굶주림의 상태인 절대적 빈곤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또 사람들의 삶을 정작 힘들게 하는 빈곤은 절대적 빈곤보다는 상대적 빈곤이다. 빈곤을 다루는 학문에서도 빈곤은 주로 상대적 빈곤을 뜻한다. 사회보장의 역사는 이런 점에서 상대적 빈곤 즉 빈부격차를 강화해온 산업화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산업화 이전의 빈곤문제는 국가체제나 행정이 미치기도 어렵거니와 빈곤의 발생정도도 주로 작황에 따른 ‘절대적 빈곤’으로 구제 자체가 쉽지 않았다. 따라서 빈곤의 발생원인은 ‘신의 뜻’이거나 ‘게으른 개인의 책임’으로 여겨졌으며 자선과 박애심에 기댄 비공식적인 구제가 주를 이루었다. 실제로 중세에서는 교회가 사회적 자선을 주도하고 관리하였다. 이러한 사회보장의 역사적 기원은 수백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사회복지정책과 제도에 깊게 배어 있으며 사회보장에 대한 대중의 인식에도 깊게 자리하고 있다. 사회보장을 권리로 인식하기 힘든 이면에는 이런 역사적 배경의 영향이 큰 것 같다.



산업화와 사회보장권


그렇다면 오늘날과 같은 사회보장권의 시작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또 빈곤에 대한 사회적 책임과 국가적 차원에서의 개입은 어떻게 이루어지기 시작했을까? 16세기 영국에서 제정된 튜더 빈민법은 사적 영역으로 여겨졌던 사회복지의 근대적 시작으로 평가된다. 엘리자베스 1세 말년인 1598년에 완성된 튜더 빈민법은 규제와 처벌 일변도였던 종전의 법률이나 포고령과는 구별되는 빈민구제원칙을 확립하였다. 첫째, 구걸과 개인적 자선 행위를 금지하는 동시에 사회적 구제의 원칙을 제도화하였다. 둘째, 빈민구제에 필요한 재원은 강제적으로 징수되는 구빈세에 의해 충당되도록 하였다. 셋째, 노동 능력이 없는 ‘신체무능력 빈민’과 노동능력이 있는 ‘신체건강 빈민’을 구분하여 전자는 구빈세 재원으로 구제하는 한편 후자에게는 공공사업을 통해 일자리를 제공하도록 하였으며 지방 정부의 직업 창출 노력을 의무화하였다. 넷째, 각 주별로 한 개 이상의 교화소를 두어 배정된 공공사업의 일을 거부하는 노동 기피자와 부랑인들을 수용하여 일정기간 동안 강제노역을 부과하도록 함으로써 신체 건장한 빈민의 노동을 의무화하였다. 튜더빈민법은 사회적 자선이던 사회보장의 의무를 국가의 관리와 통제 속에 편입했으나 빈곤 발생의 사회적 책임을 인정하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여전히 빈곤의 원인을 개인적 책임으로 바라보고 국가의 사회보장의무에 대해 잔여적이고 시혜적인 입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튜더 빈민법은 1834년 신빈민법이 제정되기까지 가난한 사람들이 가족과 함께 마을에서 일정한 구제를 받을 수 있도록 원외구호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 그나마 인간적 면모를 가진 법이었다. 산업화가 가속되면서 질병과 장애가 심각해지고, 경작할 땅을 잃고 떠돌게 된 유랑민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고 자본가의 권력이 강화되면서 1834년 제정된 신빈민법은 빈민들에 대한 원외구호를 금지하고 모든 구제를 노역장과 구빈원으로 일원화하게 된다. 신빈민법은 노동능력에 따라 가족들을 억지로 떼어놓고 어린 아이들까지 강제노역을 시키는 등 복지수혜자에 대한 통제와 열등처우원칙을 강화했다.

사회보장의 역사는 빈부격차를 강화해온 산업사회와 함께 시작되었다. 사진은 가장 먼저 산헙화 되었고 근대적 사회복지가 시작된 영국의 의사당 건물


사회보장권의 가려진 얼굴


근대적 사회보장의 역사를 통해 사회보장은 야누스의 두 얼굴을 갖게 되었다. 사회보장의 한쪽 얼굴이 “사회적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위한 인간다운 삶의 보장”이라면 또 다른 얼굴은 “구제를 받는 사람에 대한 낙인과 통제를 통해 수혜자의 입장을 벗어나도록 자활의지(?)를 심어주고 재원의 낭비를 최소화하기 위한 감독관”으로서의 얼굴이다.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로서의 사회보장에 대해 사람들은 선망하면서도 한편 자신은 수혜자가 되고 싶지 않은, 즉 피해가고 싶어가는 두 마음을 갖게 되는 것 같다. 나 역시도 머리로는 사회보장을 권리로 인식하지만 몸속 깊이 수혜자로서의 낙인과 부끄러움을 체화하고 있기 때문에 교육이나 노동과 같이 사회보장권을 구체적인 권리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현대 철학의 거장 푸코는 이런 점에서 사회보장제도를 현대 사회의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한 모세혈관으로 사람들의 몸을 지배하는 생체권력이라 칭하며 사회보장제도의 가려진 얼굴을 드러내려 했다.


빈곤과 빈곤의 원인인 질병과 장애, 실업 등 다양한 사회문제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 현대적 의미의 사회보장권의 유래는 그리 길지 않다. 16세기 영국의 튜더 빈민법을 뛰어넘어 사회보장권이 주요한 인권으로 다루어지고 확대된 역사적 배경에는 1929년의 세계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생존권에 대한 위협의 경험이 크게 기여하였다. 2차례의 전쟁과 세계대공황은 빈곤 등의 사회적 위험이 단순히 개인의 노력으로 피해갈 수 없는 사회구조와 관련된 문제로 보편적으로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는 사회적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우리는 지금 어디쯤 와있는가


빈곤에 대한 사회적 책임과 사회보장의 보편성을 강조한 현대적 의미의 사회보장권은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에 처음으로 명시되었으며 1948년 세계인권선언(22조)을 거쳐 사회권 협약에 포함되면서 그 중심을 형성하는 권리로 확장되어왔다. 바이마르헌법은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 제정(帝政)이 붕괴된 후 보통.평등.비례선거에 의하여 선출된 국민의회에 의해 의결되었다. 이 헌법은 민주주의 원리의 바탕 위에서 사회국가적 이념을 가미한 최초의 헌법으로 처음으로 소유권의 사회성을 인정하고 재산권을 행사할 때 공공복리에 적합해야 한다는 내용을 규정하고, 인간다운 생존을 보장함으로써 20세기 현대 헌법의 전형(典型)이 되었다. 사회권 협약은 제9조에서 사회보장의 권리를 ‘사회보험과 사회원조를 포함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즉 권리로서 사회보장은 즉 누구나 사회를 살아가면서 만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위험에 대비한 보편적인 제도인 사회보험과, 어떠한 이유에서든 사회적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이 필요한 지원을 받을 권리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동시에 권리를 보장할 제도와 재원이 마련되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좀 당위적이긴 해도 이런 점에서 과거 생활보호법이 기초생활보장법으로 명칭을 바꾸고 수급권을 청구권적 기본권으로 법에 명시하고 절대 시혜가 아닌 권리라고 명시한 것이다.
한편 사회보장권은 자유시장 경쟁체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부의 불평등한 분배, 즉 빈부격차를 보완하기 위한 일종의 자본주의 체제유지를 위한 기제이기도 하다. 일찍이 산업화를 시작한 서구국가들의 경우 사회보장제도가 발달하여 ‘복지국가’로 불리게 된 근저에는 사회보장제도의 이런 체제유지를 위한 순기능이 작동한 결과인 것이다. 그렇다면 후발 자본주의 국가로 해를 더할수록 상대적 빈곤의 정도가 높아가는 한국의 상황은 어떨까? 안타깝게도 한국의 경우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국가투자와 국민의 인식은 매우 낮은 상황이다. 지난 6월 19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2007년 고용전망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회원국(20개국)가운데 소득 격차가 헝가리, 미국 다음으로 세 번째로 큰 나라로 보고되었다. 또 한국은 10년 새 소득격차가 가장 크게 벌어진 나라로 나타났다. 2003년 일반세의 사회보장 부문 사용비율이 3%로 나타나 조사 대상국 가운데 꼴찌이며, 평균 43%에 크게 못 미쳤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사회적 비용의 규모가 10% 미만인 나라는 한국과 멕시코뿐이었다.

수치로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지만 한국의 사회보장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해 볼 수는 있다. 빠르게 자본주의와 세계화를 추진하면서도 소득 분배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사회보장제도의 발달은 가장 뒤쳐진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 한국이다. 고령화, 저출산, 빈부격차가 세계 3위 정도로 커진 한국의 상황에서 사회보장제도의 확대는 이제 피해갈 수 없는 중요한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