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땅에 예수가 살고 있다면
‘그는 대학을 다닐 때 서울에 있는 대학들의 가톨릭학생회연합(서가대연)에서 활동하기도 했으며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졸업한 뒤에는 사회복지사로 일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의 평화에 대한 이야기는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에 입학하고 가톨릭학생회에 들어갔어요. 뭐 정말 우연히 동아리방을 기웃거리다가 거기 있는 사람들이 좋아서…. 저는 모태신앙인데 사실 엄마 아빠 따라서 성당 다닐 줄만 알았지 내게 있어서 신앙이란 게 뭔가 그런 고민은 없었거든요. 그런데 가톨릭학생회 활동을 하다보니까 고민들이 생기게 됐죠. 나에게 신앙이란 무엇이고 신을 믿는다는 건 뭔가 하는.
또 2001년에 9.11이 터지고, 미선이 효순이 사건이 그 다음 해 있었고, 2003년에는 이라크 전이 일어났잖아요. 2003년에는 서가대연 중앙집행부를 하고 있었는데 지금 이 땅에 예수가 있다면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지금 우리가 뭘 해야 할지 참 명확해지더라구요. 자연스럽게 반전운동에 참여하게 되고 평화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거죠.
원래는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어서 대학에 들어갔어요. 고등학교 1학년 때 방황을 많이 했거든요. 중학교까지는 여수에 있는, 아빠가 다니던 회사에서 만든 사립학교를 다녔구. 그 학교는 다 그 회사 자녀들이어서 집도 같은 단지에 살구 그래서 전혀 몰랐는데. 여수는 비평준화여서 다른 고등학교에 들어가니까 글쎄 학비를 못 내는 아이들이 있는 거예요. 도시락 못 싸오는 친구들이 있다는 게 충격이었죠. 게다가 중학교 때는 성적이 상위권이었는데 공부 잘하는 아이들 모인 학교니까 성적도 약간 떨어지구. 거의 인생의 패배주의에 젖어 있다가 한 수녀 분을 만났는데 그 분이 사회복지사였어요. 아, 내가 의미 있는 삶을 살 수도 있겠구나.”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한 작은 지역복지단체에서 그는 이론과 실제가 다르다는 것을 절감했다고 한다. 박봉은 둘째치고라도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다보니 어느 순간 단체는 월급 받는 직장이, 사회복지운동은 그저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얻은 게 많고 소중한 경험이어지만…. 사회복지사는 사람 만나는 게 일인데 약사들 조직해서 독거노인 방문하고, 청소년 자원활동가들 조직하고, 장애인 치과 진료사업을 하고, 그러니까 일에 부대껴 즐겁게 일을 할 수 없게 되더라구요.
그쯤해서 동아리 선배고 남자친구이기도 한 고동주 씨가 병역거부를 했죠. 그러면서 ‘전쟁없는 세상’을 알게 되었고. 사귄 게 대학 1학년 때부터이니까 7년째네요. 병역거부를 고민하기 시작할 때부터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고 다른 CO들을 같이 만나기도 하고 그러면서 이 사람들의 뜻이 존중받는 사회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 거 같아요. 또 그 사람들이 내 친구가 되고 친구들이 계속 감옥에 가야 하니까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그게 병역거부운동을 시작한 계기이죠.”
옥바라지 하느라 고생한다고?
“사실 ‘전쟁없는 세상’ 활동을 시작한 지 이제 1년 쯤 된 것도 있지만 남자친구가 병역거부를 해서 감옥에 있다 보니 주변의 시선이랄까 부담감이랄까 하는 게 있는 거 같아요. 한번은 어느 대학신문에서 인터뷰를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마치 내가 애인 때문에 평화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처럼 그려져 있는 거예요. 학교 선배들에게 옥바라지 하느라 고생한다는 말을 들을 때도 있고. 그런 오해 때문은 아니지만, 활동을 하면서 조급한 마음이 있는 거 같아요. 빨리 내 활동영역을 만들고 자리를 잡아야 겠다 뭐 그런.
그래도 ‘전쟁없는 세상’은 참 좋아요. 여기는 일하는 거와 노는 게 분리 되지 않아서 정말 즐겁게 활동하죠. 사실 일도 많이 안 해요. (웃음) 한 달에 5만원 활동비를 받으니까 생계를 위해 알바도 해야 하고. 장단점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여기가 직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큰 매력이고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본인이야 그렇겠지만 어르신네들이 들으면 이게 무슨 철딱서니 없는 소리인가 싶은 이야기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지난 겨울 다 자란 스물아홉 나이에 비자발적 ‘가출 청소녀’가 되어야 했다.
“부모님은 병역거부는 인정할 수도 없을뿐더러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이렇게 활동하는 거를 도저히 지켜볼 수 없었나 봐요. 부모님이 반대하실 건 알았지만 사실 알면서도 모른 척 해주시길 기대한 마음도 있었죠. 집에는 직장 구하고 있다고 둘러댔는데 구글 검색기능이 너무 좋아서 아빠가 혹시나 하고 내 이름을 검색을 했더니 내 활동이 쫙 나온 거죠. 작년 12월 어느 날에 부모님이 사무실로 들이닥쳤어요. 그리고 바로 질질 끌려서 여수까지 내려갔어요, 울면서. 이 가슴 아픈 이야기를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집에 감금당해서 이틀인가를 밥도 안 먹고 물도 안 마시고 있다가 잘못해서 넘어져가지구 약간 다쳤어요. 엄마랑 병원에 갔다가 그대로 도망쳤죠.
그리고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라고나 할까, 얼마동안은 무서워서 사무실도 못 나왔고 가끔 부모님이 찾아와서 도망가는 꿈도 꾸고. 엄마가 가끔씩 이메일을 보내세요. 잘 지내냐, 엄마 보고 싶지도 않냐? 가족과의 관계를 이렇게 계속 가져갈 수는 없다고 나도 생각하고 언젠가는 풀어야 할 숙제인 셈인데 아직은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모르겠어요. 사실 고동주 씨랑 만나는 것도 부모님은 반대가 많으셨거든요. 병역거부에 대한 편견이 심하시니까, 나에 대한 기대도 있고 그러니까 부모님이 그러시는 게 이해는 되지만….
서울에서 언니랑 동생이랑 같이 살았는데 지금은 거기도 못 가고 고시원에 살아요. 그날 핸드폰도 지갑도 없이 호주머니에 동전 몇 개 가지고 나왔으니까 당장 먹고 사는 게 급했죠. 지난 1월인가 인권활동가대회 갔다가 이런 고민을 나누던 중에 좋은 아르바이트 자리를 소개를 받았죠. 은평구 뉴타운 개발지에서 유적이 발견되어 발굴 작업하는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거기가 조선시대 공동묘지 같은 데라서 땅을 파면 유골이 나와요. 공사가 계속 지연되고 아파트를 지어야 하는데 계속 나와서. 지금까지 거의 그걸로 먹고 살았죠. 얼마 전부터는 논술첨삭 일도 시작했고.
사실 부모님에게 손 안 벌리고 어쨌든 제 힘으로 잘 살아 보겠다 그러고 있는데 뭐 그렇게 큰 어려움은 없지만 서울에서 목돈이 없으니까 집을 구할 수가 없는 게 제일 큰 어려움이지요. 그래도 어떻게 살까 했는데 신기하게 살아지더라구요. 살만해요. (웃음)”
그가 만난 평화
‘“가족의 평화를 깨면서 무슨 평화운동이냐?”라는 동생과 언니의 핀잔을 들었다는 그는 평화운동을 정말 열심히 해야 할 처지가 되어버렸다며 또 웃는다. 그렇지만 가족의 평화를 지키기가 쉽지 않듯 전쟁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 또한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지금 전쟁없는 세상 활동은 그동안 해왔던 병역거부자 지원이나 병역거부 하려는 사람 상담하는 거 외에 평화에 대한 연대활동이 많아졌죠. 활동가들이 젊으니까 가능성이 많이 있는 거 같아요.
저는 얼마 전에 모임을 시작했는데 전쟁수혜자와 관련된 모임이거든요. 무기상인들처럼 실제로 전쟁을 하면 이득을 보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우리나라도 군대를 축소한다, 현대화 한다 그러면서 무기를 생산하고 수입하기도 하면서 또 수출도 하고 있어요. 평화를 위해 파병을 한다고 겉으로는 이야기하지만 뒤로는 무기를 팔아서 이익을 챙기는 일을 거리낌 없이 하는 거죠. 그래서 군대가 없어져야 한다는 당위에서 한 발짝 나가 무기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게 너무나 방대하고 극비에 쌓여 있는 게 대부분이고. 그래도 이런 부분에 계속 관심을 갖고 활동을 할 생각이에요.
병역거부는 사실 좀 답답한 상황이랄까. 바로 어제 정부에서 병역제도 개선안을 발표했는데 병역거부에 대한 언급이 쏙 빠졌죠. 그래서 지금까지 거의 공황상태에요. 정부에서는 대체복무제 도입을 검토하면서 48개월이니 56개월이니 하는 말이 나온다고 하는데…. 기간만이 아니라 대체복무제가 병역거부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도 있어요. 그래도 어쨌든 지금 당장 계속 감옥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으니까 대체복무제 도입이 시급하지만 대체복무제나 사회복무제 이런 것이 국가주의가 확대되고 강화되는 방향으로 갈 우려가 크거든요. 그리고 병역거부운동 자체가 처음에 주목을 받았지만 이제는 새롭지만은 않은 주제여서 뭔가 새로운 담론을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게 뭔지 딱 잡히지 않으니까.
병역거부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보며 힘이 빠질 때도 많죠. 사무실에 전화를 해서 이것저것 물어보는 분들이나 인터넷 게시판에 계속 글을 올리는 사람이나 사실 궁금해서라기보다는 비난을 하고 싶은 거니까. 한 번은 나이 드신 분이 사무실에 자꾸 전화를 해서 계속 질문을 하는 거예요. 그런 전화를 받다보면 아무 일도 못하니까 대게는 적당히 넘기는데 참고 끝까지 들으니까 결국 이야기 끝에 나는 니네가 정말 군대에 갔으면 좋겠다, 뭐 결국 그 얘기가 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 이후로는 전화를 안 하시더라구요. 이건 그나마 좋은 경우죠. 다짜고짜 전화해서 남자 바꾸라는 건 다반사고.
여성이라서 어려운 점은 사실 여자는 군대에 대해 지식이 부족할 수밖에 없잖아요. CO들이나 군대 안 갔다 온 남자들도 군대에 대해서는 참 많이 알더라구요. 뭐 이런 거야 사소한 문제들이고 활동에서 성역할 분담에 대한 고민이 많죠. 아무래도 여자들이 잘 챙기고 잘 보살피는 측면이 있으니까 CO들과의 소통을 여성이 전담하게 되거든요. 한편으로는 자연스러운 거 같기도 하고. 그렇지만 이렇게 모임에서 성역할이 나눠지면 문제가 분명 있는 거니까 같이 고민하는 중이죠.”
평화는 약자들이 만들어 가는 것
‘공장에서 쫓겨난 노동자가 원직복직하는 세상이 아니라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차가운 소주를 부어야 하는 세상*이기에 평화는 뭇사람들에게 아직 먼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평화’는 다들 아는 단어이지만 이 말의 쓰임새는 천차만별이고 상상 속의 그 참모습은 참으로 낯설은 풍경이다.
“평화를 사는 수단으로써 폭력을 쓰는 것은 평화로 갈 수 없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평화는 어떤 과정 아닐까요? 그러니까 평화로 가기 위해 폭력을 쓴다는 말은 존재할 수 없죠. 평택에 미군기지를 막아내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무언가를 느끼고 그게 더 확장되고 그런 의미에서 평화가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 병역거부도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대를 가는 사람을 비난할 수는 없지만 전쟁은 그렇게 되풀이되어 왔기 때문에 누군가가 먼저 총을 내려놓지 않으면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잖아요. 물론 폭력에 맞닥뜨린 상황에서 비폭력을 하기는 정말 쉽지 않고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죠.
서른이 넘으면 귀농을 할까 생각중이에요. 뭐 본격적으로 준비하고 있지는 못하구. 서가대연 활동을 하면서 5년 동안 생태농활을 했었거든요. 지금은 관심있는 사람들과 텃밭을 가꾸고 있어요. 주말농장인 셈인데 4년째. 과연 도시에서의 삶이 평화로울 수 있을까, 내가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또 내가 불편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땅에 가깝게 자연에 가깝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생명을 키워내는 게 사람을 성숙시키잖아요. 텃밭을 가꾸면서 도시에서 느끼지 못하던 하나님의 존재도 느끼고, 평화를 보고 체험하게 되죠.”
‘종교를 가진 사람은 약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약함을, 인간의 나약함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했던가. 어쩌면 결국 평화라는 것도 그 비슷한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무엇이라면 평화는 희망의 다른 말일 수도 있고 평화가 곧 양여옥이 될 수도 있을 성 싶다.
“누구는 가끔 내게 그래요. 너 정말 용기 있구나. 그런데 저는 용기를 낸 게 아니라 두려웠던 거 같아요. 부모님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반대해서 집을 나온 거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다가 이게 내가 즐겁게 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을까봐 두려워서 사회복지사를 그만두고 활동을 시작했던 거고. 또 한편으로는 내가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것도 어떤 뜻이 있었겠구나 싶기도 하죠. 용기가 있어서 기득권을 버리고 이걸 선택한 게 아니라 즐겁게 살지 못한 내가 두려워서 도망쳐서 이걸 선택하고 활동하는 거지만 정말 하루하루 행복하게 활동하니까 후회는 없어요. 부모님도 언젠가는 이해를 해주시지 않을까요?”
인터뷰 강곤 | 기자
사진 박김형준 | 객원기자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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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골의 노래 ‘평화가 무엇이냐’와 박노해의 시 ‘노동의 새벽’에서 빌어다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