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도 그랬듯이 그는 핸드폰을 갖고 있지 않다. 그에게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은 이메일을 보내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그는 메일을 보내자마자 연락을 해온다. 하루에도 몇 번씩 게릴라성 집중호우가 오락가락하던 8월초, 그가 귀국했다는 확실한 정보를 입수하고 메일을 보냈다. 흔쾌히 약속을 했고, 막걸리는 자기가 살 테니 술 한잔하면서 편안하게 얘기나 하자고 했다. 그와의 대담은 빗줄기가 잠시 머뭇대지만, 언제고 다시 쏟아 부을 것만 같던 고르지 못한 일기 속에서 시작됐다. 인권운동사랑방 회의실에서 막걸리 대신에 그가 사온 맥주를 나누면서 (가게에 막걸리가 없더라고 한다), 그리고 파전을 먹으면서 약 2시간 동안 진행된 대담에는 <사람> 편집부만이 아니라 소식 듣고 달려온 인권활동가들도 참여했다.
“요즘 인권이란 말을 부쩍 많이 쓰고 있고 모두가 인권을 잘 아는 것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로 다른 눈높이, 관점, 방식으로 인권을 제각각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 모두가 인권을 서로 다르게 이해하면서도 그 차이를 덮어두고 추상적인 차원에서만 인권에 동의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가 책의 서론에서 밝히고 있는 책을 쓴 이유다. 그렇지만 이런 대답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은가. 그래서 대담은 그가 책을 쓰게 된 동기부터 듣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솔직하고, 열정적인 태도로 대담에 임했다.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책을 쓰고 싶었다
“그동안 한국사회에 나온 인권 관련 책들에 불만이 많았다. 가려운 데를 긁어주어야 하는데 너무 동떨어져 있던 게 사실이다. 마침 후마니타스 출판사에서 책을 내자는 제안을 했고, 그래서 집필을 시작했다. 이전에 나온 책들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고 했는데, 그게 너무 법학적이라는 점 때문이다. 국제인권법의 논리들을 끌어다가 법적인 권리들을 설명하니까 법을 모르는 사람들로서는 어렵다고 느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리고 무슨 무슨 권리가 있다고 권리항목별로 정리해서 제시하는 것도 문제다. 무슨 권리가 있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권담론이 가진 그 함의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론적인 연구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권문제들을 이해하고, 현실문제에 적용하는데 법적인 권리항목이 있다는 것만 알아서는 쓸모가 없다. 인권 서적들이 이런 설명 방식을 택하다 보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인권을 너무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는 강연을 종종 가는데, 그럴 때마다 당황스런 상황을 경험한다고 했다.
“중학생들을 상대로 인권 강연을 한 적이 있는데, 다 끝나고 질문하라고 했더니 한 학생이 ‘인권은 너무 엘리트적이어서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아, 그렇구나. 우리가 쓰는 용어나 개념부터 법적인 용어가 너무 많고, 법학적인 설명 위주니까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 번은 대학생들을 상대로 성소수자의 인권을 강연했는데, 강연 끝나고 나니까 한 학생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동성애는 치료해 줘야 그들의 인권을 진정으로 배려해 주는 게 아닌가요?’ 참 맥이 풀렸다. 내 깐에는 쉽게, 열심히 설명한다고 한 건데…. 그런데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무시하고 넘어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질문들에 정면으로 대결해서 풀어갈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질문들은 근본적인 질문들이다. 이런 질문이 무지하다고 해서 그대로 놔두면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결국 보수화된다.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피상적인 대답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의문들이 풀릴 수 있게끔 설명하고, 계몽해야 한다. 차이를 드러내는 방식의 소통이 중요하다. 차이를 감추고 하는 형식적인 연대로는 한계가 있다. 또한 아주 악의적인 비난이 아니라면 인권에 대한, 인권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비판에 대해서도 주의 깊게 귀를 기울여야 하고 인권이론과 인권운동이 다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면으로 대치되는 비판에 귀 기울여야
이런 질문들에 답할 수 있는 인권관련 이론서가 필요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던 게 이번 책을 쓰게 된 동기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이번 책이라고 해서 쉬운 것만은 아니다. 그는 책에서 다양한 인권 관련 이론들을 섭렵한다. 그리고 비판적인 이론들도 검토한다. 거기에다가 책 제목에서부터 ‘문법’이라고 붙였으니 자신은 쉽게 쓴다고 썼다지만, 아무래도 이론서의 한계는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그런 점을 인식해서인지 그는 책 중에서 ‘썰렁개그’ 같은 것을 집어넣고는 했다. “책을 쓰면서 아무래도 재미없을 것 같으니까 고심해서 재밌게 하려고 그런 재밌는 예를 많이 만들었지. 그런데 원고를 읽어본 사람들이 너무 심하다고 해서 대부분 빠졌어.” 그는 그러한 반응을 자못 아쉬워했다.
그의 얘기는 묻기도 전에 인권이론이 지나치게 국제인권법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의 문제로 넘어갔다. 아무래도 그는 거기에 불만이 많았던 모양이다.
“인권이론이 너무 고답적이다. 현학적이고, 국제인권법적이다. 인권연구는 가히 ‘법학제국주의’라 할 만하다. 우리나라의 인권변호사는 비교적 매우 양심적이고 외국에 비해 상당히 법 중심주의에 빠져있지 않은 편이지만 그럼에도 분명 한계가 있다. 솔직히 나조차도 생경한 법률용어에, 법 논리에 주눅이 든다. 회의에 나가면 다수가 법률가인데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를 알아듣기 힘들어도 아는 척 하게 되고, 고개 끄덕이고 아는 용어 하나 나오면 그걸로 아는 척하고…. 각종 위원회, 자문위원회에도 위원장은 법률가이고 법률가들 틈에 비법률가를 고명으로 끼워놓고, 여성을 끼워놓고…. 그 한계를 빨리 벗어나야 한다.”
고명은 음식에 보기 좋으라고 장식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도 대학 교수인 그가 이런 대접을 받았다니. 그의 말 중간에 누군가가 사회권은 법적인 지위를 확보하는 게 필요하다며 인권을 말하는 것을 법률 중심주의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내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 것인지는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회권은 오히려 법적인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과제를 안고 있음을 왜 모르겠나. 그렇지만 법률의 한계를 넘는 게 인권이다. 세계인권선언의 전문은 펄펄 끓어오르는 막걸리 같은 거다. 뒤의 조문들은 법조문과 같다. 이것은 양주다. 아주 정제되어 있고 비싸서 고급스럽다. 뒤끝이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막걸리는 발효하고 머리도 아프지만 싸서 누구나 마실 수 있다. 인권의 언어는 그래야 한다. 우리나라의 모든 예산을 사회보장으로 쓴다고 해도 우선순위가 생길 수밖에 없고 사회권의 문제가 없을 수 없다. 사회권의 법적, 제도적 보장이 대단히 필요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으로 접근하는 편이 맞는 경우도 있다. 아무리 불가분성을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 문제는 웰빙 패러다임, 공리주의와도 관계가 있다.”
인권은 양주보다는 막걸리다
여기서 잠깐, 그는 책에서 독특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인권의 패러다임을 ‘탄압 패러다임’과 ‘웰빙 패러다임’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근대시민혁명 시기를 1차 인권혁명기로 설정하고, 이때 형성된 인권 패러다임이 ‘탄압 패러다임’이라고 정의한다. 국가권력의 탄압에 맞서서 개인의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명제를 중심으로 인권이 구성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2차 세계대전 이후에 형성되는 2차 인권혁명기에서는 국가권력의 탄압을 넘어서 경제적인, 사회적인, 문화적인 권리로까지 인권이 확장된다. 인권이 저항과 생존권 중심에서 삶의 질 강화로 확장된다고 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 웰빙 패러다임이다. “웰빙 패러다임 아래의 인권은 예산배정이나 의사결정에 있어 정치적 고려의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하기 어렵다.”라고 그는 책에서 주장한다.
그렇지만 이런 웰빙 패러다임 개념에 대해서 활동가들은 순순히 동의할 수 없다고 제기하고 나섰다. 이런 개념이 너무 단순하게 무 자르듯이 나누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국가권력의 탄압은 계속되고 있고, 다만 탄압의 방식이 훨씬 더 교묘해지거나 양상이 바뀌었을 뿐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과정에서는 이런 폭력화된 국가권력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은 더욱 격화될 것이고, 생존권은 더욱 악화되지 않는가라는 점을 지적했다.
“그렇다. 이게 내가 만든 용어인데, 꼭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이 말보다 더 좋은 말이 있으면 양보할 수 있다. 어떤 경우든지 역사적인 시기 구분이 필요한데, 그럴 때 이와 같은 문제가 생긴다. 2차 인권혁명기에서는 탄압 패러다임과는 다른 인권의 패러다임이 형성된다. 먼저 경제에 관한 인식의 전환이 있었다. 빈곤이 인권에서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고,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개입이 필요하고, 개인에게 청구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권리 개념이 바뀌었다. 1차 인권혁명이 고전적인 자유주의에 뿌리내렸다면, 2차 인권혁명에는 사회주의적 요소가 대거 포함되어서 이념으로는 ‘사회주의적 자유주의’ 또는 ‘자유주의적 사회주의’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어느 순간 단절되어 다른 패러다임으로 넘어가는 것으로 단순히 이해할 수는 없다. 지금 신자유주의에서 나타나는 탄압 패러다임은 분명 심각하다. 인권의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것이다.”
그는 신자유주의가 강화될수록 “복지의 햇볕정책” 같은 게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것으로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마쳤다. 숨 가쁘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벌써 약속한 두 시간 중에서 절반이 지나고 있었다.
그는 커피를 마시고, 활동가들은 앞에 놓인 맥주를 파전을 안주 삼아 마시면서 얘기를 돌렸다. 그는 책에서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을 흔들어 깨워 그들을 인권이라는 합의의 영토 안에 모으는 것이 인권을 위해서나 민주주의를 위해서나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믿는다. … 자유주의자들이 인권의 중간허리를 받쳐 주지 않을 때 인권의 진보적 발전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인권을 지키기도 어려워진다.”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그만의 독특한 주장이다. 그렇다면, 자유주의자들을 어떻게 합의의 영토로 끌어들일 것인가.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그들은 아직도 국가보안법의 폐지에 반대하는데 말이다. 이상적인 발상은 아닌가.
친국가보안법 자유주의자란 말은 ‘왕새우’ 같은 모순어
“인권은 마닐라 삼으로 만든 밧줄이다. 다양한 이념이 서로 꼬여져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이념이 엮여서 인권의 개념을 만들어낸다. 자유주의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명박이나 박근혜의 지지자들로 가는 것은 참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을 친국가보안법적 자유주의자들이라고 불러보자. 국가보안법을 지지하면서 자유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완전 어불성설이다. 마치 그들이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면서 진짜 보수세력과는 달리 양심적이고 합리적인 것처럼 행세한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그들은 그래봤자 왕새우 같은 ‘모순어’적 상황에 처해 있다. ‘왕’이면서 동시에 ‘새우’인 것은 불가능하듯이 말이다. 자유주의자들이 국가보안법의 폐지에 반대하는 것은 자신들이 사실은 자유주의자들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다. 자유주의자라면 당연히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위해서 같이 싸울 수 있어야 한다. 자유주의자들이 인권이라는 합의의 영토 안에 들어오면 그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같이 고민할 수밖에 없다. 해결할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나를 논의하는 단계로 넘어간다. 자유주의자들을 합의의 영토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정치가 필요하다. 정치적 개입에 의해서 진정한 자유주의자들과 대화를 할 수 있고, 그렇다고 하면 그들과 이후를 논의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자유주의에 대해 무척이나 크게 오해하고 있는데, 자유주의가 근대의 역사발전에 기여한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 자유주의, 특히 정치적 자유주의라면 특권타파, 자유지향, 개인의 가치 존중 등 당연히 인권을 인정해야 하는 게 아닌가.”
어떻게 그들을 합의의 영토로 모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뾰족한 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정치의 영역이라는 데에야 뭐라 더 말해겠는가. 그는 시종일관 인권을 정치와 분리하려는 경향들에 대해서 반대했다. 정치적 역량을 키워서 개입력을 높이는 것은 아무래도 인권운동의 몫이지 않겠나 생각했다. 이제 얘기는 원론적인 문제를 넘어서 현실 인권운동과 관련된 화제들로 넘어갔다.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그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나는 민족주의자라고 생각하지는 않고 오히려 세계주의에 공감하는 편이지만 요즘들어 민족문제에 대해 많이 고민하게 된다. 우파, 자유주의자에게 국가보안법이 아킬레스건인 것처럼, 좌파에게는 북한인권이 민감한 약점이 된다. 국가보안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자가 말도 안 되듯이 북한인권 문제에 침묵하는 좌파도 자기모순적인 입장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좌, 우파를 통틀어 한국의 인권담론이 ‘정상화’되려면 한반도 인권 상황을 인권의 눈으로 논리적 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본다면 민족문제는 인권운동에 있어 여전히 하나의 중심적인 과제로 남는다. 역사적으로 어떤 민족이라는 유니트(단위, 집단)가 다른 민족 유니트를 탄압할 때 저항의 주체는 민족이라는 유니트를 기본으로 조직될 수밖에 없다. 이건 어떤 분야에서건 마찬가지다. 동성애를 차별할 때 결국 동성애 집단이, 주변에서도 함께 해야겠지만, 나설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남과 북이 어떻게 민주적으로 통합될 것인가의 차원에서 북한인권 문제를 고민해야 하고 이것이 결국 현대 한국인권담론의 핵심 문제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다만 그렇다고 민족이라는 집단이 한 개인을 억압하고 하는 문제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래서 다음 책에서는 인권의 프리즘으로 한반도 문제를 정면으로 다뤄보고 싶다. 또 다른 한편, 인권이 현실 속에서 실현되는 메커니즘을 다뤄보고 싶은 생각도 있고. 어쨌든 둘 중의 한 주제를 쓸 생각이다. 시간이 늘 부족하다.”
그는 확실히 보통의 의미에서 민족주의자는 아니다. 북한에서 인권침해가 벌어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같은 민족이기에 덮어두어야 한다는 것에 그는 반대의사를 밝혔다. 북에 대한 인도적 지원, 지속적인 화해와 협력 정책을 분명히 지지하면서도 그것과는 도 다른 차원에서 인권문제에 대한 관심과 행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다음 책은 아무래도 논쟁거리를 많이 제공해줄 것이다. 그런 논쟁이 인권이론진영이나 운동진영에서 모두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어떤 문제고 논의는 되지 않은 채 무시되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그가 어떤 관점과 방식으로 북한 인권문제에 접근할 것이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그는 아마도 다음 책을 쓰면서는 동아시아, 나아가 아시아 전반의 인권문제까지 확장할 것 같다. 이 책에서 부족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아시아에서의 인권담론이 개인적으로는 쉽게 만들어지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고 있다. 백태웅 씨가 연구를 하는 분야로 알고 있다. 아시아는 정말 역사적 경험도 그렇고 문화도 그렇고 다른 대륙과 비교할 때 많이 다르다. 마치 해물탕 같다. 그나마 아세안이 동질성 있어 보이지만….” 이런 말로 그의 앞으로의 작업이 쉽지 않은 여정을 거칠 것임을 암시했다.
한반도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싶다
대담이 시작된 지 1시간 40분이 지나자 이미 날은 어두울대로 어두워졌다. 그와 약속한 시간은 단 2시간이다. 이제 그를 보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대담자의 마음은 초조했다. 그에게 물어보자고 준비한 질문이 아직도 많은데 말이다. 특히 독자들이 꽤나 관심 있는 부분이 인권의 비판이론을 다룬 2부일 것이다. 사회주의, 페미니즘, 상대주의, 어느 것 하나 만만치 않은 주제이고, 그런 비판이론으로 인권이론은 더욱 풍부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오늘은 욕심을 더 이상 부릴 수 없었다. 그래서 이제는 “한국 인권운동의 문제점과 과제”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어보기로 했다. 인권운동에 참고하기 위해서다.
“성공회대 강의를 하다 보니 종교인과 대화할 기회가 많이 생긴다. 교회의 역사에서 로마에서 탄압받던 그 한 줌도 안 되는 기독교인이 결국 로마를 바꾸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치는 결국 쪽수의 문제이지만 한편으로는 각성된 소수가 세상을 바꿔가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권운동은 숫자와 관계없이 중요하다. 또한 파스퇴르 광고에서처럼 비약, 또는 도약을 하는, 의표를 찌르면서 한편 논리적으로 대중에게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한다. 현재 인권상황에 대해선 제도라는 배가 만들어져 있는 상황인데 그 배만 그럴듯하게 만들었지 배 자체는 강물에 떠밀려 후퇴하고 있다고 본다. 인권운동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듯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것이고 죽도록 노력해도 제자리를 지키기가(후퇴하지 않기가) 쉽지 않다. 인권운동은 결국 계속 싸워갈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가 잘못 가고 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란 거는 없다. 절차적 민주주의의 완성이라는 말도 사실은 정확하지 않다. 민주주의는 결국 계속 만들어가는 것이고 모든 영역에서 민주화운동은 중단 없이 계속되는 것이다. 절차적 민주주의 또한 끊임없이 재구성하는 것이지 절차적 민주주의는 완성되었으니까 이제 모든 일을 대의민주주의의 틀내에서만 해결하라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을 모르는 것이다.”
그는 인권운동이 ‘국가’를 활용할 필요성에 대해서 정색하면서 강조했다.
“미국에서의 경험을 이야기해보면, 미국 로스쿨에서도 국제법은 비주류이고 국제인권법은 거기서 더 비주류이다. 미국이 교토의정서도 깨고, 국제형사재판소도 훼방 놓고 하는데 미국의 인권이론가들은 자괴감을 많이 갖고 있다. 한국의 경우는 미국보다는 낫다. 한국의 경우에는 유엔에서의 논의가 대단히 빨리 파급력을 가지고 전파된다. 물론 부작용도 있다. 국제적 사조가 지나치게 빨리 비판없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논란거리가 많은 제안인데도 외국에서 나왔다고 하면 전혀 걸러지지 않은 상태에서 대단한 권위를 가진 문서인 양 국내에 전달되는 것이다. UNese, 유엔어(語)라고 할 수 있는 급조된 용어들이 그것의 생성배경이나 정치적 함의에 대한 깊은 이해없이 마구 수입되어 들어와 한국의 자생적 인권담론 위에서 군림한다. 이런 점은 우리가 ‘건강한 회의주의’의 눈으로 비판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적 인권담론은 중요하다. 예를 들어 국가가 자승자박인 줄 뻔히 알면서도 왜 국제인권조약이나 규약에 가입하는가. ‘쪽팔림 이론’이라고 이름붙이고 싶다. 창피주기가 통한다는 것이다. 헤겔의 국가이론 이후 국가는 법을 만들어서 집행하는 가장 도덕적인 집단, 최정상에 있는 집단이다. 그래서인지 뒤로는 어떤 나쁜 짓을 하더라도 앞으로는 도덕적인 척 하고 선한 척한다. 또한 국가 간의 동형화(同形化)도 작동한다. 다른 나라들이 인권조약들에 찬성하고, 가입하는데 독불장군으로 혼자만 가입하지 않기는 어렵지 않겠나. 이런 점들을 잘 이용할 필요가 있다.”
국가를 쪽팔리게 하자
대담을 끝내기 전에 인권운동에 할 말이 없는가를 물었다. 그는 자기가 인권운동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주저하는 빛을 보였다. 그러나 대담자에게는 그의 말이 인권운동을 내부로부터 혁신하라는 말로 들렸다.
“인권은 원칙적이다. 개인적으로 인권이론을 강의하면서 대단히 조심스럽다. 말실수를 하게 되지 않을까, 행동을 잘못하지 않을까…. 인권은 원래 이상적인 것이어서 살얼음판을 밟는 기분으로 대하게 된다. 어떻게 다른 인간을 나와 같이 대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 인권이기 때문이다. 일반 사회운동은 인권운동과 닮을 필요가 있다. 권력에 대해 예민한 것이 인권운동의 속성이다. 모든 시민사회운동은 안과 밖이 모두 민주적이어야 한다. 내부에서 민주적이지 않은 집단과 운동이 밖에서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듣기에 따라서는 내부의 민주주의도 못하면서 무슨 인권운동을 하냐는 비판인 것 같기도 하다. 어쨌거나 그와의 대담은 아쉽게 이렇게 끝났다. 그와의 대담은 유쾌했고, 그런 덕에 지루한 줄 몰랐다. 그렇지만 그는 인권운동이 순혈주의적으로 원칙만 고수하는 모습에 대해 답답했나 보다. “오히려 원칙이 있다면 떳떳이 타협할 수 있다. 원칙이 흔들릴 때 협상하고 타협하기 힘들다. 원칙이 없는 사람은 쉽게 알 수 있다.”라고 한다. 캐나다에서 사회주의적인 보건의료제도를 관철시켰던 토미 더글라스라는 정치인이 즐겨 말했다는 ‘촌놈 실용주의’(prairie pragmatism)를 설명했다. 자신의 원칙과 목표가 확실히 서 있을 때에는 그 길을 위해 단기적으로는 투박하고 대범하게 실용적인 노선을 선택하는 것이 오히려 지혜롭고 떳떳한 정치노선이라는 것이다.
그는 인권운동을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미안해한다. 현장에서 같이 뛰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그렇지만 인권운동에게 그는 이론을 공급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인권단체들에서 그의 책을 읽는 세미나들이 조직되고 있다. 그만큼 그의 역할이 필요한 것이다. 그의 이후의 책이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리 박래군 | 편집인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