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군가산점제 사태는 우리 사회가 여전히 국가주의의 망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잘 보여준다. 1999년 헌법재판소의 군가산점제 위헌결정을 빌미로 일단의 ‘예비역’들이 부산대의 웹진인 ‘월장’에 사이버 폭력을 휘두른 사건은 이 땅에 최초의 사이버 극단주의를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그 마초이즘은 2002년 월드컵의 광풍을 넘어 이제 또다시 군가산점제 부활론을 타고 보수반동의 국가주의로 전향한다.
실제 이 논란의 표면은 군복무로 고생한 남성청년집단과 병역의무가 소거된 여성, 장애인 혹은 병역면제자간의 갈등으로 도색된다. 군대에서 2년간 ‘썩은’ 희생을 공무원시험에서의 가산점으로 보상하자는 주장에다 여성이나 장애인등이 고용상의 차별을 이유로 들이받는 국면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관료주의의 음흉한 속셈은 바로 그 아래 잠복해 있다. 군복무자들에게 강요되는 그 많은 희생과 고통을 오로지 개인의 것으로 치환하고 그들의 사회복귀는 나 몰라라 방기해 버린다. 취업알선, 직업훈련, 생활수당, 의료지원 등 그 좋은 정책들 다 버리고 제대복을 입는 순간부터 그의 모든 생활과 생계의 문제는 오로지 그의 몫으로 떠넘겨 버린다. 그리고는 군가산점제라는 얄팍한 사탕발림 하나로 모든 것을 피해 나간다. 정작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도외시한 채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자들만 남성과 여성으로, 비장애인과 장애인으로, 군필자와 면제자로 나누어 이간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이 갈등의 이면에서 조장되는 국가주의의 망령이다. 국방의 의무는 ‘신성한’ 것이며, 대한민국 장정들에 부과되는 병역은 ‘고귀한 희생’이며, 그 희생을 보상하기 위해서는 차별과 같은 ‘약간의 불합리’는 감내되어야 하며…. 이 무의미의 연속극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군대에 가서 몇 년씩 썩”는다는 말은 대통령의 실언이기보다는 50만이나 되는 인간들이 “군대에 가서 몇 년씩 썩”어도 될 만큼 국가의 존재가 신성함을 강변하는 권력의 집단무의식일 따름이다. 그래서 군부대의 내부에서는 군인의 인권이야 썩어도 어쩔 수 없는 것이며, 외부에서는 그 썩는 고통을 강요당하는 군인들의 희생을 보상하는 또 다른 희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군복무자의 희생을 안타까워하면서 군가산점제 부활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 고통을 그대로 복제해 내는 예비군제도를 내버려두는 것도 이와 연관된다. 정작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제대군인들의 사회복귀가 아니라 그들의 희생을 터 잡아 구성되어야 하는 국가주의의 권력일 따름인 것이다. “전거성 어록”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사이버 마초이즘이 황우석 사태나 ‘디 워’ 소동과 연결되면서 국가주의의 재생이라는 공포를 조성함은 바로 이 때문이다. 어쩌면 프랑스혁명에도 보이지 않는 새 시대를 찾아 헤매는 알 스튜어트의 노래나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시간은 바람 따라 흘러만 간다. 왜 그럴까 방황하며(Out time is wasting in the wind wondering why)”.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