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운동사에서는 1988년 가을, 김호철이 혜성같이 등장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들불처럼 일어난 노동운동. 노동자는 있었으나 노동가요는 없었고, 너무나 많은 투쟁 속에 투쟁의 노래는 턱없이 모자랐던 시절, 그가 만든 민중가요의 고전 ‘파업가’와 ‘단결투쟁가’는 아직도 투쟁현장에서 그칠 줄 모른다. 수많은 민중가요가 만들어진 녹음실이자 노동문예운동단체 ‘노동의 소리’ 사무실이기도 한 사당동 어느 주택에서 그를 만났다.
김호철의 학력은 생뚱맞게도 한국체대 중퇴로 되어 있다. 동네 아저씨 같은 인상의 그는 태권도가 전공이다. 장애가 있는 형의 ‘보디가드’가 되라고 아버지가 시킨 태권도로 한국체대를 특차로 들어갔으니 상당한 고수임에 틀림이 없다. 대학에 들어간 해는 1978년. 폭풍전야와 같던 시기, 그는 예기치 않게 역사의 현장에 툭 던져졌다.
며칠 먼저 겪은 80년 광주
“대학 2학년 때 부마항쟁이 일어났어요. 우리학교는 전국에 있는 학생들이 모였으니까, 부산 마산에 체고 출신 학생들 통해서 소식이 들려오는데, 참 철없이 ‘부산 마산 학생들은 다들 고향으로 돌아가서 정권과 한 판 붙자!’라는 대자보를 붙였죠. 그게 문제가 돼서 수배를 받고 학교를 떠났다가 10.26이 터져서 흐지부지 다시 학교로 돌아왔고. 그게 80년이었으니까 학생회 선거가 처음 생겨서 제가 회장이 된 거죠.
5.18 며칠 전부터 서울역에서 십만이 넘게 모여서, 연일 계엄해제를 요구하며 데모를 하는 와중에 나는 자연스럽게 전국학생회장단 회의에 들어가게 됐는데. 계엄이 확대되자 학생회장들이 이대(이화여대)에 모여 회의를 했었는데, 근데 어떤 여학생 하나가 갑자기 뛰어 들어오며 계엄군이 총 들고 쳐들어와요, 소릴 지르는 거예요.
그때 회의 안건이 서울 주요대학 회장들이 주도해가지고 이제 더 이상 폭력투쟁 그만하고 국회 개원에 맞춰 평화행진 하자, 그때 가슴에 리본을 무슨 색깔로 할 거냐, 그런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말하자면 55개 대학에서 모였는데 몇몇 유명 캠퍼스 회장들이 이미 정해진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자리였죠. 어떤 이는 의결권을 3개나 갖고 있었어요. 누가 누구에게 위임하고, 또 누가 거기에 위임하고. 이 투쟁을 멈춰서는 안 된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듣지를 않으니까 작은 대학 회장들이 아예 뒷자리로 물러나서 묵비권 행사라 그럴까 그런 것도 하고. 투쟁을 멈추는 이유가 서울대가 갖고 있는 정보 때문이라는데, 그 정보의 출처가 뭐냐고 물으니 한국체대가 정보망 있냐고, 정보망이 있는 서울대의 판단을 믿자, 우리 서로 믿자 이런 식이었죠.
쳐들어온 건 합수부(계엄사 합동수사본부) 애들이었는데, 창문을 깨고 도망을 가야 하는데 창문이 두꺼워서 안 깨지는 거예요. 내가 올라가서 커튼을 손에 말고 열대인가를 치니까 그제야 겨우 깨지더라구요. 그때 상처가 아직도 주먹에 이렇게….”
도망친 그는 다음 날 시위에서 계엄군이 휘두른 폭력을 알리려고 학교 안 인쇄소에 숨어들었다가 붙잡힌다. 그 자리에서 총을 든 계엄군에게 무차별적으로 폭행을 당하면서 그는 광주가 아마 그랬을 거라고 나중에 짐작했다고 한다. “장난감처럼 이렇게 발길질도 해보고, 저렇게 주먹질도 해보고, 킥킥 웃으면서 총구를 이마에 대고 철커덕거리고. 죽여서 휴전선에 널어놓는다는 둥 협박을 하고.” 이 장면은 아직도 그의 꿈속에 자주 등장하곤 한다.
밤무대에서 노동운동 무대로
계엄군에 연행된 뒤 곧바로 군대에 강제징집당해 보충대로 갔다. 거기서 운 좋게도 대학 시절 했던 밴드부를 경력으로 군악대로 갈 수 있었고, 제대 후 몇 년간 밤무대 활동으로 음악활동을 계속하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녹화사업이란 말은 없었지만, 우리를 야호부대라고, 데모하다 잡혀왔다는 뜻에서 그렇게 불렀는데, 야호부대는 전방가면 오래 살지 못할 거란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돌았죠. 실제로 그랬고. 마침 군악대에 알엔지라고, 원래는 어레인지인데, 편곡을 하는 사람이 말년이라서 군악대에 뽑힐 수 있었죠. 근데 사실은 군악대에서도 전력이 문제가 됐는데 태권도 가르칠 사람이 없다구 해서 남게 된 거예요. (웃음)
제대하고 나서는 갈 데가 없더라구요. 사우디아라비아 가려고 했는데 신원조회에 걸려서 안 되고. 결국 밤무대로 갔죠. 거기 가니까 별 단 애들이 참 많더라구요. 폭행에, 대마에. 한 3년 하다가, 내가 무대공포증이 있어서 올라갈 때마다 죽겠는 거야. 일당 때문에 겨우 올라가기는 갔는데, 그러다 너무 힘들어서 그만뒀죠. 그만두고 있을 때 동생이 그 당시에 서노련(서울지역노동단체연합)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때는 활동가들 만들어내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잖아요. 내가 사교성도 있고, 운동도 잘 하고, 놀기 좋아하고, 악기도 잘 다루고. 또 나한테 무서운 이야기도 하두만. 오빠가 현장에 들어가서 캐리어를 쌓지 않으면 이후에 올 세상에서 부끄러울 거다.”
현장생활은 적성에 맞았다고 한다. 몇 달 지난 뒤 기타반도 만들었다. 당시 가리봉 5거리에 기타교습소 강습료가 노동자 한 달 월급보다 많은 3만원 정도였으니 따로 조직하지 않아도 여성 동지들까지 모여들었고 기타반이 중심이 되어 임투(임금투쟁)출정식도 해봤다. 그리고 해고된 노동자로 맞은 1987년. 그는 서해복투(서울지역해고노동자복직투쟁위원회)에서 투쟁국장으로 있으면서 한 달에 40회에 가까운 파업현장 지원투쟁을 벌였다. 전경련의 노동운동 음해공작에 맞서 민주당과 민정당 당사를 점거하기도 했고, 버스를 타고가다 버스 채로 영등포 경찰서에 연행되자 경찰서 강당에서 마이크 스탠드를 무기 삼아 2박3일간 싸우며 농성을 한 적도 있다. 경찰보다 동료 노동자에게, 회사 농간에 휩쓸린 노동자들에게 좌경세력, 빨갱이라고 속수무책으로 얻어맞기도 하고, 김대중 당시 대통령 후보의 유세장에 붉은 깃발을 들고 갔다가 그 지지자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기도 했다.
혜성처럼 나타나 자판기가 된 김호철
왕년의 무용담만큼 재미난 것도 없는 법이어서 넋 놓고 듣는데 옆에 있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기관지 <저항하라>의 김종환 편집인이 “도대체 노래 얘기는 언제 할 거냐?”며 핀잔을 준다. 그러고 나서도 한참을 돌아 1988년 서노협(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 문화국까지 왔다. 서노협 문화국에서 그는 문예운동을 시작했고 그때 만들었던 노래가 메이데이 전야제에 처음으로 발표되었던 ‘파업가’다. 반응은? 어느 문화평론가의 말에 따르면 가히 충격적이었다고 한다.
“(이전에는) 노동자들의 노래라기보다는 학생들이나 인텔리들에게 의해 만들어졌던 노래들이었으니까 노동자들 몸에 딱 맞지 않는 옷이었죠. 추위는 막아줄 수는 있었겠지만. 그런데 ‘파업가’는 달랐던 거죠. ‘잘린 손가락’이나 ‘단결투쟁가’, ‘포장마차’ 같은 거는 87년 이전에 현장에 있으면서 만들었던 거고.
포장마차는, 가리봉에 역을 중심으로 5거리 쪽에 포장마차가 많았어요. 우리는 맞교대로 9시까지 일하고 다음 날 아침 9시에 출근해야 하니까, 역까지 한 50미터를 숨 한번 크게 들이마시고 막 뛰어서 계단까지 올라가야 하는데, 거의 막판에 숨을 한 번 쉬면 파토나 버려. (웃음) 계단을 오르면서 고민 고민하다 결국 안 마시고는 못 배기죠. 거의 100프로 닭발에 한 고뿌하러 포장마차 가는 거죠. 그때가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 한다고 세상을 삐까번쩍 만들어놓구, 외국인들 지나갈만한 거리에 추잡하다 싶은 건 다 때려 부쉈잖아요. 소주 한 잔 하다가 만든 노래인데 사람들이 이런 것도 민중가요가 되기는 되나보다… 한 동안 노래판에서는 이건 민중가요가 아니다, 게걸스럽게 놀게 하는 이런 노래는 투쟁성을 깎아먹는다, 그런 얘기들도 있었어요. 그런데 노동자는 맨날 심각하게 투쟁만 하는 게 아니잖아요? 인텔리들 보기에는 그게 맞을지 모르지만 노동자는 그렇게 살지 않거든요.
서노협이 해소되고 나서 내가 대중적으로 검증된 거는 쌈박질하고 노래 만드는 거 밖에 없으니까 노래운동단체, 노동자노래단을 만들게 되었죠. 사실 점거하고 그런 거 빼고 내가 잘 하는 게 별로 없었거든요. 그런데 노래 만들 때마다 사람들이 불러주니까. 그래서 음반도 진짜 어렵게, 학교 방송실 장비 빌려서 녹음하고. 지금이랑 많이 다른데, 그때는 입에서 입으로 알려졌죠. 악보를 들고 가서 직접 불러주는 거죠. 조그만 키보드 하나랑 기타 들고. 그러다 메탈 테이프 하나로 복제해서 2,500원에 팔았죠. 수십만 장이 팔렸어요. 지금이야 2,000장 찍으면 3, 4년 가야 겨우 다 팔리지만. 팔리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때는 참 바람직한 수용자와의 만남이 이뤄졌는데….”
민중가요 자판기라고 불리던 시절이었다. 무노동 무임금이 쟁점이 되면 ‘무노동 무임금을 자본가에게’, 열사 투쟁이 벌어지면 ‘들불의 노래’, 1992년 대선을 앞두고는 ‘민중권력쟁취가’, 그 외에도 ‘딸들아 일어나라’, ‘진짜 노동자’, ‘민중의 노래’…. 노동자노래단, 꽃다지, 노래공장 등에서 활동하며 민중가요를 생산하고 보급하던 김호철. 그의 이름은 원래 김수호이다. 그러던 것이 조직에서 가명을 만들던 방식(중간 글자를 빼고 여자는 마지막 글자 다음에 ‘철’, 남자는 ‘순’을 넣는 방식)을 따라 김호순이 되어야 했지만 너무 티가 난다고 해서 김호철이 되었다고 한다.
물소도 공동체가 위협받으면 사자에게 반격한다
90년대 초 국가사회주의가 몰락하고 “문학으로 운동하려했던 사람은 문학하러, 철학하다 이론가 되려했던 사람은 철학공부하러” 다 떠났지만 “애초부터 신분이 다르고 그릇이 다른 나 같은 사람들은 두발 퐁당 담그고” 있었고, 떠나기에는 “너무 긴 추억”이 있었고, 떠나면 “더 이상 짜릿한 술맛”을 느낄 수 없을 것 같아 “노래로 저항하는 일”을 계속했다. 그리고 90년대 중반 ‘장애해방가’를 계기로 현재 김종환 씨 등과 함께 장애인문화창작단 활동을 하고 있고, IMF를 거치면서 드러난 노동운동의 문제의식 속에서 ‘노동의 소리’를 만들게 되었다.
“‘장애해방가’는 부끄럽죠. 장애운동이란 게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만들어서, 아마 장애인 문화창작단에서 더 나은 ‘장애해방가2’가 곧 나오겠죠?
노동자 문화운동에 대해서는… 참, 우리도 반성할 게 많죠. 총액임금 얘기 나오면 ‘총액임금철폐가’, 전노협 만들자 그러면 ‘전노협 진군가’, 물론 현장이 요구하는 노래를 만드는 건 맞는데 그것만이 아니라, 투사의 문화뿐만 아니라, 삶 속에서 쳐진 어깨로 퇴근하는 노동자의 모습, 자본에 착취 받는 모습, 착취 받다가 에이~ 닝기미 씨발! 하고 다시 일어서는 모습 있잖아요? 그런 진짜 노동자들 가슴 속을 파고들어가는 문화에 대해 더 고민하고 노래했어야 했는데. 단체 문화부장의 역할도 그래요. 이런 고민들보다 박준, 류금신 같은 민중가수 50만 원 줘야 하는데 30만 원에 데려오면 야, 너 대단하다, 어떻게 50만 원 줄 거 100만 원 줄 수 있을까, 그래서 노동자문예운동 살릴까 고민하기보다는 말이죠.
그 와중에 IMF가 터지고 자본과 대화하겠다는 사이비 노동운동이 슬그머니 현장을 장악하고. 그게 지금 비정규직, 나랑 옷 색깔이 다르다고 밥도 같이 안 먹고, 뉴코아 동지들 한 달에 6, 70만 원 받는다고 하면 그래도 잔업하고 그러면 100만 원은 받겠지 하는 소리나 해대고. 이게 노동운동의 문화와도 밀접한 문제거든요.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토론할 게 있으면 토론해보고, 욕할 게 있으면 욕도 해보자, 그래서 만든 게 ‘노동의 소리’이죠.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봤는데 물소들이 사자한테 막 덤비더라구요. 새끼들이 공격을 받으니까. 물소들은 자기의 유전자 정보까지 거역하면서, 공동체가 위기에 몰리면, 자기 공동체에 약자가 공격을 당하면 물소도 반격을 하잖아요.”
그러면서 문화촌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꺼낸다. “노숙하시는 분들이 서울역으로 모이듯이 그런 심정으로” 모이자고, 절박하게 말하면서도 힘드니까 모여 살자는 것 이상으로 그의 구상은 꽤나 구체적이다.
“남들이 볼 때 쟤들이 어떻게 먹고들 사는 지 도대체 궁금한 삶을 살아온 지 너무 오래 되었죠. 과연 어떤 걸로 경제적 자립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다가 적당한 장소에다가 문화공동체를 꾸며 놓으면 노래패나 단체가 MT를 온다거나 그럴 수도 있고, 또 지자체에서도 노동문예일꾼들의 문화공동체다 그러면 뭐 노동문화, 민중예술 이런 거에 대한 홍보효과도 있을 수 있으니까 행정적 편의를 기대할 수도 있겠죠. 무엇보다 노동자 문화, 문예운동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전문적으로 교육하고 그럴 수 있는….
지금 남아있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앙꼬만 남은 거거든요. 갈 사람들은 다 갔으니까. 우리가 10년, 20년 동안 경험했던 노동문화, 노동문예활동가로서 축적했던 경험, 우리가 만들었던 노래와 매체, 돈을 위해 만들어진 것들보다 더 낫다고 자부하는 이것들이 지속되기 위해 지금 가장 중요한 게 뭘까 생각하다 나온 거죠.
사실 노조에서 부르면 가서, 거기서 받은 돈으로 내 새끼들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구조 아래서는 문예 활동가들이 자유로울 수 없거든요. 문예일꾼이 노래하고 공연하는 거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지금 구조에서는 반동적인 노동운동에 대해서도 개입하기가 쉽지 않아요. 자본에 대해서도 그렇고. 물론 몇 백만 원씩 벌면 노동문예가 안 나오니까 최소한의 경제적으로 자립만이라도 이뤄보자, 그게 문화촌이에요.”
자본을 향해, 노동운동 내부를 향해, 그리고 그 모든 일상을 향해 그는 반격을 준비 중이다. 이번에 자신의 노래운동 20년을 정리하면서 내놓은 『단결, 투쟁, 승리, 해방의 노래』 음반도 그 반격의 일환이리라. 생각해보면 기자도 민중가요 음반을 사본 게 언제인지 까마득하다. 오랜만에 그 노래들을 다시 듣는다. 어쩌면 원래 인간의 유전자 정보는 반격하도록 되어 있는데 애써 거역하며 살아온 건 아닌가.
인터뷰 강곤 | 기자
사진 박김형준 | 객원기자
노동, 민중가요 94곡선 『단결, 투쟁, 승리, 해방의 노래』
노래 만들기 20년, 아직도 ‘김호철 1집’은 없다. 만들다보니 자신의 일기장처럼 되어버렸다는 이 음반은 그래서 더 남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왜 100곡이 아니라 94곡이냐는 물음에 그것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했다고, 그래서 부인에게 핀잔도 들었단다. 음반은 ‘노동의 소리’ 홈페이지(http://www.nodong.com)를 통해 구입할 수 있다.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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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민중가요 94곡선 『단결, 투쟁, 승리, 해방의 노래』 노래 만들기 20년, 아직도 ‘김호철 1집’은 없다. 만들다보니 자신의 일기장처럼 되어버렸다는 이 음반은 그래서 더 남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왜 100곡이 아니라 94곡이냐는 물음에 그것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했다고, 그래서 부인에게 핀잔도 들었단다. 음반은 ‘노동의 소리’ 홈페이지(http://www.nodong.com)를 통해 구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