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서울과 경주의 법원에서 형법상의 간통죄에 대해 연이어 위헌심판을 제청하자 세간은 이를 둘러싸고 격한 논쟁으로 시끄럽다. 혹자는 성적 자기결정권은 형벌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며 위헌을 주장하고, 혹자는 가정은 여전히 보호되어야 하기에 그 폐지는 시기상조라 한다. 하지만 이 논란은 2%가 부족하다. 그 모든 주장들 이면에는 저 유구한 빅토리아조의 가족이데올로기의 재생산이라는 혐의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위헌론은 이성애에 고착된 남녀 간의 사랑의 문제로 가족과 인간에 대한 배려와 책임의 문제를 넘어서려 한다. 형사벌까지 동원해서라도 보호해야 할 공동체적 가치-그 최소한의 단위가 가족이다-를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개인의 권리문제로 환원시켜 버리는 것이다. 시기상조론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이 보호하고자 하는 가정이란 일부일처제의 ‘정상적’ 가족에 고착된다. ‘가장’이 떠나간 가족, ‘모성’의 주체여야 할 주부가 떠나간 가족의 문제만으로 그들의 합헌론이 펼쳐지는 것이다.
김곰치의 소설 『엄마와 함께 칼국수를』은 엄마의 뇌종양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아들의 무력감을 인간 실존의 조건처럼 펼쳐낸다. 허름한 분식집에서 엄마와 함께 “가짜 칼국수를 임금님 칼국수처럼” 먹는 것, 그렇게 무력한 사람들끼리 서로 의존하게 되면서 혈연의 압박을 넘어 엄마는 “한 여인이었고 한 사람이었고 한 생명”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 그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그러나 최선의 선택이었다.
가족이라는 것, 실존주의자 G. 마르셀이 ‘존재가 드러나는 장소’라 했던 그 가족은 이렇게 ‘빗소리 와와 할 때’ 엄마와 함께 먹는 칼국수 속에서도 꿈틀거린다. 별 의미도 없는 그곳da에 놓인 존재Sein로서 인간의 현존재Dasein가 구성되지만, 그럼에도 그 피투성이Geworfenheit가 스스로의 의미를 생성하고 확장하는 가장 원초적인 관계가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이 가족이다. 그리고 그 관계가 있기에 서로의 존재가 공동존재le co-esse로 발전하는 공동체적 삶으로 구성된다.
작금의 간통죄 위헌논란은 이 점을 놓치고 있다. 단위로서의 개인이나 가족은 생각하되 배려와 책임에 입각한 관계의 시작으로서의 가족은 고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냉전시대의 인권논의가 개인의 권리담론으로 치환되면서 법과 권력의 문제로 변질되었듯이, 이 간통죄 존폐론은 인간의 문제를 또다시 개인의 권리와 의무라는 법률관계로 환원하고자 하는 것일까? 아무래도 98%의 포만보다 2%의 갈증이 더 아쉬운 모양이다.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