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것을 경험했고 나보다 살기 불편한 곳에 사는 사람들도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서울보다 경치 좋은 곳에서 생활한 일주일은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이었다.”
- 성미산학교 9학년 박민수의 ‘성미산 친구들의 미얀마 여행기’ 중
선물’은 올 1월 성미산학교의 학생과 교사들이 버마의 소수민족인 카렌 족들의 난민촌을 방문한 이후 만든 국제교류단체이다. 성미산학교와 성미산마을 이야기를 하자면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4년 육아문제를 고민하던 사람들이 마포구의 성미산자락에 ‘우리어린이집’을 세우자 공동육아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공동육아운동은 꾸준히 확산되었고, 이 아이들이 자라면서 부모들은 교육문제를 고민하게 되었다. 기존 공교육에 회의와 갈증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성미산학교를 만들었다. 성미산학교는 마을 공동체의식을 바탕으로 자발적인 학습과 체험을 중시한다. 이번 버마 난민촌 방문도 공동체의식의 확장에서 비롯했다.
선물은 공동체적인 재화의 순환
중등학교 프로젝트 수업 중 <일센터프로젝트>라는 게 있다. 중등아이들의 창업 프로그램으로 ‘왜 돈을 벌어야 하나? 돈을 벌려면 어떤 사업아이템이 있을까?’ 사업아이템을 조사하고 시장조사를 해서 사업계획을 수립하고 투자자를 유치한다. 그리고 한 학기동안 성미산 마을에서 실제 장사를 하는 것이다. “돈 문제를 아이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전달하는 게 좋을까? 막연한 추상적인 가치만으로 접근하는 것도 옳은 건 아니고… 또 어떤 과업을 놓고 주변 사람들, 지역사회와 소통한다는 게 무얼까? 일을 이루어내기 위해서 일을 책임 있게 한다는 게 뭘까 하는 문제의식에서 시작했어요.” 당시 교사였던 짱가가 ‘선물’의 발단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센터프로젝트>가 끝나고 수익금의 사용을 논의하면서 ‘우리도 선물(투자)을 받았으니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자’고 결정했다.
“선물은 내가 이 사람에게 주면서 대가를 바라지 않잖아요. 그리고 이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선물을 주고, 그 사람이 또 제3자에게 선물을 주고 결국은 이 사람이 나에게 선물을 주는 다자간의 교환, 다시 말해 공동체적인 재화가 순환되는 과정이라고 봐요.” 짱가는 호혜적인 선물의 메시지를 아이들에게 전달할 방법을 고민했다. 그때 마침 ‘선물’의 정성미 선생님을 통해 동남아시아 NGO방문과 현지 활동을 해 온 유해정, 이상희 활동가를 만났고 버마 카렌 난민촌을 알게 되었다. 프로젝트 수익금을 난민촌 아이들에게 전달하기로 하고 학생 네 명, 선생님 세 명이 자원봉사를 떠났다. 10일 간의 버마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아이들의 후기는 어른들을 감동시켰다. 선생님들 또한 큰 감동을 받고 돌아왔다. 제3세계에 베풀러 간다는 오만함이 마음 한켠에 있었을 법도 한데 오히려 배우고 왔다며 어른들이 꼭 가볼 곳이라고 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다음 방문을 준비하는 모임을 만들고 마웅쩌 씨를 초청해 버마의 정치현실과 역사에 대해 배웠다. 마웅쩌 씨는 버마 8888항쟁에 참여했던 분으로 한국으로 망명하셨다. 버마의 근황은 유해정, 이상희 활동가를 통해 들었다. 그러던 중 지난 3월 성공회대학교 인권평화센터가 주최한 <평화공감 오인오색>에 참석했던 지지윈이 성미산 마을을 찾았다. 지지윈은 카렌 난민촌의 활동가로 성미산학교가 방문했을 때 가이드가 되어주었다. 지지윈에게 카렌 난민촌을 다시 방문할 것을 약속하면서 모임도 보다 구체화, 체계화 할 필요가 있었다. 회원을 모으고 이름도 정했다. 처음 모임의 취지를 살려 ‘선물’로 결정했다.
선물 하나, 복주머니
큰 범주에서 ‘선물’의 활동은 성미산마을과 카렌 난민촌 학교 교류 프로젝트가 전부다. 카렌 난민촌 학교를 정기적으로 후원하고, 단순한 후원이 아닌 공동체 간의 교류로 만들기 위해 버마에 대한 학습과 영화제를 진행한다.
카렌 난민촌 학교를 다녀온 이들은 무엇보다 시급한 건 아이들이 끼니를 제대로 먹을 수 있도록 하는 문제와 기숙사 운영을 위한 안정적인 지원이라고들 했다. 그리고 교육교재와 학용품이 매우 모자란다고 한다. 아이들이 제대로 먹지 못한다는 말에 주민들로부터 우선 되는대로 모아서 지원했다. 지금은 10여 명의 회원들이 정기후원을 한다. “우리 아이들이 놀라고 온 게 거기 아이들이 열심히 공부하는걸 보고, 교재도 같이 보고 요만한 몽당연필 가지고도 열심히 공부하는 거 보고….” 짱가는 직접 학용품과 여름옷을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마을의 아이들에겐 조그만 복주머니를 나눠줬다. 한 달 동안 저금을 해서 마을의 ‘작은 나무’라는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져다 놓으면 ‘선물’은 그걸 기금으로 활용한다. 조금씩 주변인들을 상대로 소액의 후원을 권유하려고 한다. “보통 만 원 이상 하잖아요. 근데 한군데만 하는 게 아니니까 합치면 좀 부담스러운 면도 있잖아요. 천 원, 이천 원, 삼천 원하면 쉽게 참여할 수 있지 않을까.” 짱가는 연말에는 소액기부자를 조직해 볼 생각이다. 후원금액에 관계없이 좀 더 많은 사람들과 선물을 나누고 의미를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
선물 둘, 영화 한 편
‘선물’의 활동은 대중화보다는 지속성이 중요하다. 먼 거리의 공동체와 관계를 맺는 일이다보니 조심스러울 밖에. 참여하는 사람이 적더라도 꾸준히 차근차근 접근하기로 했다. 상대방을 알고자 할 때 우리는 그의 이력이나 주변 환경을 헤아린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영화제다. 지난 8월 ‘경계를 넘어’와 함께 첫 번째 영화제 ‘팥빙수 한 편’이 문을 열었다. 한 평 크기 자투리땅을 공원으로 만든 한평공원에서 야외상영을 했다. 두 번째 영화제 ‘부침개와 베게 한 편’은 10월 12일 성미산학교에서 열렸다. 상영시간이 가까워오자 ‘선물’ 회원들이 부침개를 내왔다. 마을 사람들도 고구마, 밤, 커피 등 먹을거리를 들고 모여들었다. 정말 베개를 들고 온 주민도 있었다. 조금씩 모여든 주민들로 성미산학교 4층 음악당이 꽉 찼다. ‘경계를 넘어’ 최재훈 님의 발칸반도의 역사 강론을 시작으로 영화제가 시작됐다. 오늘의 영화는 군사용어로 교전 중인 양 진영 사이의 중간지대를 뜻하는 “No man’s land(노 맨스 랜드).” 1990년대 초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내전을 코믹하면서도 처참하게 다룬 영화에 주민들은 함께 환호하다가 안타까워하기를 반복했다. “가깝지만 사실 잘 모르는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해 좀 쉽고 편하게 알아가기 위해 마련한 자리죠. 주민들이 늘어난 거 같아서 좋아요.” 참여인원이 많이 늘었다며 짱가는 매우 기뻐했다. 영화제를 통해 많은 주민들이 ‘선물’의 취지에 자연스럽게 공감하고 동의하면 참여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번 ‘부침개 한 편’에서는 커다란 왕주머니와 작은 복주머니가 모두 마련됐다. 왕주머니는 영화를 보고 돌아가는 길에 오늘 영화와 부침개에 대한 감사 표시를, 작은 복주머니는 가지고 돌아가 한 달 뒤 ‘작은 나무’에 가져다 놓으면 된다. 어른도 아이도 이런 계기를 통해 관심을 가질 수 있다. 직접 교류하는 것은 어렵지만 마음으로 교류하는 것은 중요하고도 쉬운 일이다. 현지 활동가 지지윈이 마을을 다녀간 후 서로 이메일을 통해 연락을 하고, 이 메일을 동네 게시판에 올려서 상황을 공유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선물 셋, 마음
지금은 버마 카렌 난민촌뿐이지만 가능한 한 교류범위를 넓혀보고 싶은 바람도 있다. 짱가는 “스리랑카에 고아원을 지으려고 준비하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는데 여력이 되면 같이…”라는 바람도 있지만, 일을 벌여놓고 책임 못 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며 단호하다. 그래서 ‘선물’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 카렌 난민촌 교류도 내년 8월까지로 기한을 정해놓고 있다. “있을 때 주고 없을 때 안 주면 받는 사람 입장에서 차라리 안 준만 못하다구요. 계획도 못 세우고.” 짱가는 서로 예측 가능한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선물’과 카렌 난민촌 학교와의 교류도 안정적인 기간을 설정하고 있다.
주민들의 소박한 관심과 연민. 그 자체가 선물이다. 단순한 동정에 그치지 않으려면 현지에 가서 보고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살을 맞대고 부딪칠 때 소통과 연대는 가능하다. “연대요? 같이 영화 보다가 애가 뽀로록 나가면 내 애가 아니어도 관심 가져 주는 거. 필요한 것들을 모여서 함께 만들어 가는 걸 연대라고 하면 촌스러운가?” 짱가가 이런 거라면 할 수 있겠단다. 거대한 정치적 이슈와 운동의 연대도 있겠지만 이 또한 마음과 마음을 통한 연대와 소통이 아닐까.
어른은 아이의 길잡이다.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선물이자 동력이다. 삶에 지치고 고단할 때 아이들의 버마 카렌 난민촌 방문후기와 같은 성찰을 마주하면 어른들 또한 성찰과 힘을 얻게 된다. 이미 우리의 삶 속에는 보이지 않는 선물이 오고간다.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나누지만 결국은 나를 돕는 길이고 우리(공동체)를 돕는 길이다. 카렌 난민촌 학교와의 교류는 마을 안에서 실천했던 선물의 의미를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고 되새기는 과정이다. 내년 초 약속했던 두 번째 방문을 할 예정이다. 어떤 선물꾸러미를 주고받게 될까?
사진 박김형준 | 객원기자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