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월드컵 때 ‘붉은 악마’한테서 신문명의 원형을 봤다는 김지하는 “미국을 덮어놓고 제국주의라고 해서는 안 되고, 한국과 미국이 손잡고 네오 르네상스를 창출”해야 한다지만, 이미 한국은 미국의 뒷자리에 앉아 열심히 국익을 주워 담고 있다.
여론조사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략 50%에 가까운 사람들이 이라크 자이툰 부대의 파병연장에 찬성한다. 또 50%를 훨씬 웃도는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유력 대선주자는 “미래의 에너지 전쟁에서 자이툰 부대의 역할은 중요하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닌다. 파병연장에 반대하는 대선후보들도 그 이유가 “국민과의 약속이 중요하다”(국민이 원하면 더 있을 수 있다?)거나 “더 이상 국익에 보탬이 안 된다”(더 챙길 게 있으면?)는 것이니 국익을 위해서라면 전쟁도 불사할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
이런 우울한 시국에 마눌님이 출산을 한다고 덩달아 책 한권, 영화 한편 못 보다가 우연히 주말의 영화로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보게 되었다. ‘빵과 장미’로 유명한 좌파 감독 켄 로치의 이 영화는 아일랜드 독립운동을 다루고 있는데, 후반부는 아일랜드 독립군 우파인 형 ‘데디’와 좌파 무장투쟁 노선을 견지한 동생 ‘데미안’의 갈등에 초점을 맞춘다. 이 둘은 좌우파의 대립이 생기기 전까지 함께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해 싸웠고, 형을 대신해 동생 데미안은 조직 내 반역을 했던 친구를 직접 총살하기까지 한다.
“조국이란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는 거겠죠?” 동생은 총을 쏘기 직전에 묻는다. 하지만 그는 결국 다른 조국을 꿈꿨다는 이유로 형 앞에서 죽임을 당하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결국 조국이니 국익이니 하는 것들은 그 앞에 ‘어떠한’이란 수식이 없는 한 그저 추상명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 영화를 굳이 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너무나 많은 피의 대가로 역사를 통해 배우지 않았나.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