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이슈] 문제는 열정과 상상력이다!

인권, 그리고 인권운동과 선거

1. 통계의 정치 혹은 정치적 통계


‘통계’(統計)는 “어떤 현상을 종합적으로 한눈에 알아보기 쉽게 일정한 체계에 따라 숫자로 나타내기 위해 한데 몰아서 계산하는 행위”를 말한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가 채 한 달도 남지 않은 지금, 시종일관 여전히 경탄스러운 것은 바로 이 통계의 힘이다. 미디어 선거(97년), 인터넷 선거(02년)를 거쳐 이번 선거는 바야흐로 ‘통계에 의한, 통계를 위한, 통계의 선거’로 귀결되고 있다. 정치의 원리, 선거의 개념은 오로지 수치화되는 통계에 의해서만 겨우 존재를 입증할 따름이다.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는 후보가 불안하다며 천문학적 차떼기를 감행했던 올드보이가 컴백한 상황은 이번 대통령 선거의 한 단면이다.


그러나 통계는 정말 중요한 진실과 진짜 유쾌한 상황을 외면할 때가 많다. 예를 들어보자. 정치과잉/지배욕망이 지배하던 과거 군부독재시절 대다수의 꿈은 대통령(혹은 국회의원)이었다. 그토록 정치와 지배를 욕망하던 이들은 지금 무엇을 하며 이번 대선에서 누구를 지지하고 있을까? 정치과잉/지배욕망의 양면적 측면(정치를 불신하지만 위계적 권력의 꼭대기에 서려는 의지)이 어떻게 대선이란 용광로에서 끓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통계는 그런 것을 말할 수 없다. 통계에는 한 치의 서정적 추적도 허용되지 않는다. 통계는 단지, 서사적 현상을 기록할 뿐이다.



2. 경제과잉/소비욕망의 시대


말하기에 따라서 정치과잉/지배욕망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철저한 그러나 훨씬 강력한 대체제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경제과잉/소비욕망의 시대이다. 대통령(혹은 국회의원)에 대한 꿈은 연예인(혹은 공무원)으로 대체되었다. ‘BBK’가 아닌 ‘Tell me’가 검색어 1위에 오르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대박(연예인)과 안정적 소비(공무원)로 극단화된 욕망은 또 이번 대선에 그리고 통계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 것일까?


어찌되었건 통계의 지배를 받게 된 정치는 한 개의 토목공사로(경부운하), 표현의 뉘앙스 차이로(안보관), 집단에 대한 명명의 방법으로(평화개혁세력) 대립하고 갈등할 수밖에 없는 초라한 행색이 되었다. 그리고 모든 후보가 경제와 소비의 관계를 개선하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으로 전환되었다(국가 경제 성장을 약속하는 이명박의 747, 가족 소비 개선을 선언하는 정동영의 가족행복시대, 따뜻한 시장 경제를 변으로 하는 이회창의 출마, 사람중심 진짜 경제를 표방하는 문국현 등).



3. 인권, 그리고 인권 운동과 선거


이런 상황에서 ‘인권, 그리고 인권운동과 선거’라는 제목으로 청탁된 글에는 무엇을 적어야 하는 것일까? 답답한 마음을 덜어보고자 인권과 대선을 동시에 뉴스 검색해보니 ‘북한 인권 증진을 위해 노력하는 자유주의 정권 창출’에 앞장서겠다는 뉴라이트 아저씨들이 결의가 맘을 더욱 산란하게 한다. 민주주의, 인권, 선거 이런 제목이 들어간 두꺼운 책을 ‘급독’하고 모범 답안에 가까운 아주 원론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겠다. 왜냐면, 한국 사회에서 선거는 그런 것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오늘 선거는 당선 가능한 후보 중에 누가 덜 부패했는가의 게임이고 누구의 인식이 그나마 상식에 근접하는지조차도 제대로 검증하기 힘든 복마전이다. 8대 의혹을 넘어 ‘의혹의 오아시스’라고 불리는 후보가 압도적 지지율 1위를 기록하고, 이 후보가 불안하다며 천문학적 차떼기를 감행했던 올드보이가 컴백한 상황이다. 이 두 후보의 지지율 합계가 70%에 육박하고 있다. 선거와 인권, 역사적으로 필연의 관계라지만, 대선과 인권, 현실적으로 획기적 계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불행히도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는 이런 것과 무관하다.



4. 정치는 무엇인가?


2007 대선은 이른바 ‘87년 (헌법)체제’를 둘러싼 논쟁으로 시작되었다. ‘87년 (헌법)체제’에 대한 다양한 입장 개진으로 시작된 정치 지형의 격변은 ‘진보논쟁’ 등으로 이어지며 실로 오랜만에 사회구성에 관한 논쟁으로 번질 듯했으나 몇몇 시민운동 브로커의 도로 열린우리당 참여와 이명박이라는 깨지지 않는 막강한 벽 앞에 초라한 막을 내렸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정치란 그리고 또 선거란 무엇인가?


2000년 이후 시민운동을 중심으로 매 선거 때마다 정책제안 및 공약검증을 기본 골격으로 하는 총선연대, 낙선연대 등의 활동이 정치적 사회운동을 대변해왔다. 이는 절차적 민주주의의 확장의 맥락에서 선거 국면마다 중요한 의미들을 만들어온 것이 사실이나 한편으로는 민주노동당의 제도화 이후 본질적 의미에서의 계급운동적 성격의 정치사회운동의 입지와 가능성을 옭아매는 이중의 덫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나마 이러한 형식의 정치사회운동의 생명력은 2000년 총선연대(정치사회운동)와 2004년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후보전술)을 정점으로 하여 쇠락의 국면으로 돌입했다고 봐야 할 것이며, 최근 우익 조직의 활성화에 따른 구도로 인해 향후 전망 역시 매우 불투명한 상황이다.



따라서 선거 국면의 정치사회운동은 ‘절차적 민주주의’에 방점을 찍는 시민운동 중심의 활동으로 자리매김 되어 급격히 관성화 되었으며, 독자적 후보전술은 당위적 의미 이상으로 실효성 있는 추진이 불가능한 상황의 무기력이 반복되면서, 정치 자체에 대한 악순환과 현기증을 일으키며 ‘절차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의 괴리가 확대되고 있는 상황이다. 민주적/인권적 지평을 넓히지 못하는 선거라는 형식, 이것이 한국 사회의 정치였다.



5. 다시, 열정과 상상력이다!


87년 체제 이후 꾸준히 실패하고 있는, 확고한 경제과잉/소비욕망의 시대를 맞이한 난삽한 통계의 정치가 횡행하고 있는 07년 대선을 해석하는 왕도는 없다. 요행은 없다. 우선 참여정부를 읽어야 한다. 임기 초부터 권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뭣한 수준에서 참여정부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그렇지만 운동의 지평은 여전히 양극단에서 휘청거리고 있다. 이것은 중요한 역설이다. 각종 사회 지수가 악화되고 주류 경제학자들조차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인정하고 있지만, 비정규직 투쟁은 동력을 잃고 FTA 체제는 일방통행으로 질주하고 있다. 87년 이후 오늘의 ‘운동’을 약평해보자면, 민주주의의 형식적 제도화와 자유주의 확대에 따른 시민사회의 성장과 자본주의의 성장과 고도화에 따른 계급운동으로서의 사회운동의 역동성 축소를 동시에 경험하는 상황으로 집약된다.


2007년 대선을 맞이하는 과정 역시 아무런 상상력이 발휘되지 못했다. 시민운동은 정치적 중립의 허상에 갇혀 반한나라당의 주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고, 좌파 그룹은 전통적인 행동반경을 넘어서지 못했다. 사회 모든 분야의 쟁점은 소멸되고 몇몇 대선용 이슈가 경제의 외피를 쓰고 급격히 확산되는 과정만이 반복되고 있다. 이는 결국, 신자유주의 지배 세력과 담론들의 정치적 영향력만을 강화하고 있는 상황으로 나타난다. 답답하고 또 답답한 상황이다.


따라서 이번 대선 국면에서 어떤 정치사회운동을 할 것이냐, 또는 선거와 인권은 어떠한 관계인가 하는 질문이 특정 정치 세력의 지지문제로 변질되지 않으려면, 그 답은 ‘선거’라고 하는 직접민주주의 실현의 가장 큰 계기에서 소수 지배 분파의 권익을 중심으로 ‘선거’를 선택할 것이냐, 더 많은 민주주의 요구들을 가장 급진적으로 표현하는 장으로 ‘선거’를 활용할 것이냐는 것이 되어야 한다. 범여권에서 한나라당으로 정권이 넘어간다고 해도, 혹은 문국현으로 대변되는 일부 플러스알파 집단이 집권에 성공한다고 해도 사회지배체제로서의 신자유주의 완성과 공고화라는 사회적 흐름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고 이와 같은 체제가 인권을 ‘보이지 않는 궤멸’로 몰아갈 것임은 자명하다.



6. 알았으니까 어떻게?


따라서 선거의 가이드라인에 ‘인권’을 포함시키고 현재의 정치적 국면을 ‘반 신자유주의 전선’으로 사고하며 투쟁으로 돌파하겠다는 선언적 언어는 하등 중요하지 않다. 대선이라는 상징적 세레모니를 통해 민주주의의 ‘환상’만을 공고히 하고 인권을 이용하는 이들에 맞서는 정치적 기획에 관한 꿈을 꾸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조금이라도 부각시킬 수 있는, 실체화할 수 있는 지향적·호혜적·급진적 전략이 마련되는 것이 필요하다. 꼬투리를 잡는 행함이 절실하다.


결국, 경제과잉/소비욕망의 회로에서 알량한 통계에 의존하여 미래가 결정되는 작금의 상황은 우리가 상정하고 있는 비균질적 대상으로서의 민중 혹은 시민 혹은 대중의 삶의 질감들과 운동이 직접 교감하지 못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야 말로 선거 기간 중 인권이 ‘너는 어느 편이냐?’는 질문으로 대체되는 편협과 폭력의 정치가 아닌 민주적 상식과 인권적 내용의 정치를 기획할 수 있는 길이다. ‘세상이 변했다’는 단순하지만 구체적이고 두터운 상징을 뚫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너희들이 말하는 ‘인권’과 그 대안은 무엇이냐는 일방적 폭력에 정당한 저항권을 행사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행복은 끝내 수몰되고 말 것이다. 이쯤에서 이 글을 읽는 당신 마음속에 “당연한 말씀 감사히” 하고 있는 필자를 향한 강한 불신이 치밀 것이다. “알았으니까 어떻게?” 마땅한 답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고 사회운동의 전망과 변혁을 모색하며 민중 고통의 근원을 섬세하게 관찰해온 당신과 함께 급진적 행복의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민중의 답답함에 답하는 것이다. 몰인권적 상황에 살 떨리는 세상은 구호로 저절로 극복되지 않는다. 우리를 옭아맸던 현실 운동의 당위와 한계를 벗고 가장 급진적인 그래서 가장 선명할 전술을 다시 실험해야 한다. 문제는, 열정과 상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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