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는 진보, 손발은 보수일 수는 없다
‘진보’적인 통일운동을 오랫동안 이어온 범민족연합 남측본부(범민련 남측본부)가 최근 이러한 모순에 빠졌다. 범민련 남측본부는 ‘조직위원회’라는 이름으로 기관지 <민족의 진로> 3월호를 통해 다음의 내용을 포함하는 「실용주의의 해악에 대하여」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남사회는 갈수록 복잡한 문제들이 발생되고 있습니다. 외국인노동자문제, 국제결혼, 영어만능적사고의 팽배, 동성애와 트렌스젠더, 유학과 이민자의 급증, 극단적 이기주의 만연, 종교의 포화상태, 외래자본의 예속성 심화, 서구문화의 침투 등 불과 몇 년 전만해도 상상할 수 없는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90년대를 기점으로 우리 사회에 신자유주의 개방화, 세계의 일체화 구호가 밀고 들어오던 시점부터 이러한 문제들이 사회문제로 대두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형은 달라도 결국은 이남사회가 민족성을 견지하지 못하고 민족문화전통을 홀대하며, 자주적이고 민주적이지 못한 상태에서 외래적으로 침습해 오고 그것이 또한 확대 재생산되는 구조 속에서 이 문제들이 점차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이 글을 통해 범민련 남측본부는 ‘외국인노동자’문제와 국제결혼, 동성애, 트랜스젠더와 같은 사회현상을 극단적 이기주의 만연, 외래자본의 예속성 심화, 서구문화의 침투 등과 함께 부정적인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원인도 우리 사회가 민족성을 견지하지 못하고 민족문화전통을 홀대했기 때문에 문제가 점차 심각해지고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인권운동진영은 우려를 감추지 못했다. 동성애자인권연대(동인련)는 성명을 통해 “해당기사를 접하며 차이와 다름의 다양성을 바라보지 못하고 오직 단일하고 순결한 혈통 중심의 사고가 사회적 소수자들의 인권위에 군림하는 파시즘적 인식을 보이는 범민련 남측본부 측에 위협감을 느낄 정도”라고 밝혔다. 또 서울경기인천 이주노동자노동조합(이주노조) 역시 논평을 통해 “(「실용주의…」 글의 논리는) 외국에서 노동 이주를 해온 이주노동자들, 결혼 이민을 온 이주자들은 한국의 ‘민족성’과 나아가 ‘혈통’을 어지럽히는 존재가 된다”며 “폐쇄적 국수주의로 비춰질 위험이 있는 사상은 오히려 ‘해악’”이라고 비판했다. 인권단체연석회의도 “혈통중심의 민족지상주의는, 여러 다양한 차이를 갖는 사람들과 이주자들을, ‘우리’와는 다른 이방인으로 규정하고, 이들에 대한 공포와 경멸·적대심을 유발하는 억압적인 이데올로기로 기능해왔다”며 “문제의 기사가 여러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직접적인 위협감과 모멸감을 안겨주는 ‘폭력’으로 기능했었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 범민련 남측본부가 깊이 성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적 약자와 연대하지 못하는 진보가 무슨 진보인가
오랫동안 진보진영 ‘내부’를 향하는 문제제기는 일종의 금기처럼 생각되어왔다. 더 큰 ‘외부의 적’이 있기 때문에 ‘내부’는 분열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였다. 게다가 ‘내부’의 ‘차이’는 쉽게 ‘외부의 적’에 의해 ‘분열의 소지’로 악용될 수 있기 때문에 차이를 드러내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진보진영 ‘내부’의 논쟁이 보수세력에 의해 악용되었던 사례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한 금기는 건강한 비판마저도 금기시하고 죄악시함으로써 새로운 억압을 낳고 말았다. 그야말로 ‘차이’를 ‘차이’로 주장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듯 건강한 비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부의 자정작용을 잃은 조직은 병들기 십상이다. 이에 대해서는 진보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행히 ‘진보의 차이’에 대해 성찰하는 주체들이 다양하게 등장했고, 여전히 조심스럽긴 하지만 진보진영 ‘내부’를 향하는 문제제기들도 과거보다는 ‘과감하게’ 할 수 있는 편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에 대한 인식의 편차가 여전히 진보진영 내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어떤 ‘진보’진영은 ‘진보의 차이’에 대해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사진 | 성소수자차별저지긴급행동 |
너무나도 복잡한 사회 속에서 한 두 개의 모순이 해결된다고 해서 전체 민중의 해방이 도래할 수 있을까? 통일이 되어 분단모순이 사라진다고 해서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억압이 저절로 사라질까? 노동해방과 함께 자본주의가 소멸된다고 해서 가부장제가 한순간에 없어질까? ‘다른’ 억압을 명백하게 부차화하고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약자의 고통에 연대하지 못하는 진보를 과연 ‘진보’라고 할 수 있을까? 나아가, 진보를 억압하는 진보가 과연 ‘진보’일까? ‘진보적 통일운동’을 한다는 범민련 남측본부가, 차별금지법 제정 과정에서 보인 동성애혐오적 보수 기독교계 단체들과 결과적으로 그리 다르지 않은 주장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 앞에서 다시 한 번 정희진의 말이 생각났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더 큰 문제는 인권단체들이 주도한 문제해결 노력 과정에서 발생했다. 처음 「실용주의의 해악에 대하여」를 접한 동인련은 문제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기 보다는 비공개적인 방식으로 범민련 남측본부와 소통하려고 했다. 동인련이 4월 13일 1차 질의공문을 발송한 이후 5월 29일 무려 3차 공문을 발송하기까지 범민련 남측본부는 어떠한 성의 있는 답변도 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3차 공문 기한인 5월 31일 범민련 남측본부는 동인련에 “편집의도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면 보내온 글을 살려 싣고 있”으며 거론된 문제가 “소수자문제를 언급한 것이 아니라 <복잡해지는 사회현상>에 대해 언급한 것”이라는 등의 어이없는 답변을 보냈다. 이후 이주노조와 인권단체들의 항의성명이 이어지자 범민련 남측본부는 교육위원장 이름으로 2차 공문을 보냈다. 2차 공문을 통해 “특정 글 내용과 그에 대한 질의로 시작하는 논의는 처음부터 대립적인 측면이 부각되어 모두에게 이롭지 않을 것”이므로 “입장을 이 정도로 논의”하자고 은근히 위협적으로 ‘문제제기’를 문제제기했다. 또 동성애에 대해서는 “동성애에 대한 관점과 입장의 ‘차이가 분명히 있음’을 확인”한다면서 “인권적 측면에서 동성애 문제를 악의적이거나 배타적으로 대할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적 조건과 당사자의 의식형성과정 또는 생체학적 불가피성과 경향성에 대한 고려 또는 새로운 (또는 원래부터 있은) 사회 및 문화현상 등의 측면에서 신중하게 대해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여전히 납득할 수 없는 범민련 남측본부의 태도
이러한 과정에서 인권단체연석회의는 서로 납득할 수 없는 상태에서 공개적인 비판의 방식보다는 인권운동의 의사를 좀 더 잘 전달하기 위한 의도로 범민련 남측본부와 성소수자인권운동진영의 대화 자리를 주선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조차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은 “성소수자 측에서 잘못 해석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뿐이었다. 심지어 같은 사안에 대해 범민련 남측본부가 이주노조에게는 공식적으로 “해명의 글”을 발표한 사실에 대해 사무처장은 “모르는 일”이라고 대답했다. 결국 그 자리에서 범민련 남측본부의 어떠한 사과나 답변 대신 7월 2일까지 이와 관련해 공식 입장을 내는 것으로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7월 2일까지 범민련 남측본부로부터 어떠한 공식 입장도 없자 인권단체연석회의는 다시 입장을 요청한 끝에 7월 11일 범민련 남측본부 교육위원장 이름으로 겨우 답변서를 받을 수 있었다. 그는 답변서에서 “당사자들에게 불편한 심기를 끼친 점을 사과한다”며 문제제기한 글의 일부를 수정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인권단체들이 지속적으로 요구한 공식사과와 해당기사 삭제에 대한 대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과 역시 ‘불편한 심기를 끼친 점’만을 사과할 뿐이었다.
진보는 모든 억압받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해방의 기획이어야만 한다. 누군가의 억압과 고통을 모른척하거나 누군가에게 또다시 억압이 되는 진보는 이미 진보가 아니다. 게다가 한때의 ‘진보’가 언제까지나 진보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진보는 고정된 패러다임이 아니라 지향해야할 가치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존재하기 힘든 ‘완전한 진보’를 자임하기보다는 끊임없는 자기쇄신 노력으로 진보를 지향해가는 스스로의 의지가 중요하다. 진보 역시 끊임없이 진보해야만 진보적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진보’를 향해 멈추지 않는 ‘운동’이다.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