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다녀오신 분들은 다들 아는 얘기겠지만 내 친구의 말로는 군대에서는 일과시간에는 군복을 입고 일과 시간 이후에는 활동복을 입었다고 한다. 민간인(이라는 표현은 좀 우습지만)들처럼 여러 벌을 구비해 두고 입는 것이 아니라서 옷은 자주 빨아야 하고, 매일 입는 것이기 때문에 옷이 해지는 것도 금방이다. 최근에 활동복의 색이 바뀐다는 기사가 나오긴 했지만 내 친구가 군대에 있을 때는 활동복이 아주 화려한(?) 주황색이었단다. 속칭 ‘떡볶이’라고도 불리는 모양인데, 나도 가끔 본 적이 있다.
탈영을 대비한 주황색 활동복
주황색을 많이 넣은 음식은 그만큼 맛깔스러워 보인다는 이야기도 있고, 주황, 노랑, 빨강색등의 난색계열은 미각을 돋우기 때문에 패스트푸드점에서 많이 사용한다고 한다. 그만큼 주황색의 가시성은 높은 편이다. 그런 주황색을 하루 종일 입고 있어야 한다니 상당히 눈이 피로하겠다 싶었는데, 활동복 색을 주황색으로 쓴 이유를 듣고 나니 어이가 없었다. 탈영을 방지하기 위한 이유라는 것이다. 어딜 가건 멀리서도 눈에 확 띄는 주황색을 입으면 탈영을 하더라도 쉽게 잡을 수 있다는 게 활동복 색을 정한 이유였다는 것이다. 모든 군인들은 잠재적 탈영병이라는 표식을 몸에 달고 있는 것이다.
늘 보는 학생들의 교복도 마찬가지이긴 하다. 혹자는 교복이 주는 무게와 책임 때문에 학생들의 비행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해가 갈수록 청소년 관련 범죄나 학교 폭력의 문제는 점점 늘어나고 있지 않은가. 예전이야 사복을 입으면 교실에서 함께 공부하는 학생들끼리 위화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일부러 교복을 입혔다지만 요즘 교복은 웬만한 사복보다 훨씬 비싸다. 다리가 길~어 보이고 S라인이 드러난다는 교복은 꽤나 비싼 값으로 구입해야 한다고 들었다. (게다가 교복 광고에 나오는 수많은 그 연예인들을 생각해보니 그 때문에라도 단가가 비싸질 만하다.) 이제는 억지로 우기면서 교복을 입혀야 할 이유조차 없어진 상황에서 몸매 선이 돋보이고 다리가 길어보이게 하는 등 신체결점을 커버해준다는 값 비싼 브랜드의 교복을 입히게 하는 저의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어차피 똑같은 색과 똑같은 구성, 똑같은 이름표를 다는 교복일 텐데.
이제 교복이 주는 무게감이라 봐야 문제를 저지르는 사람이 학생이냐 아니냐를 구분시켜주는 표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 교복을 입은 학생들은 청소년이기 때문에 탈선해서는 안 되고 활동복을 입은 군인들은 탈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교복을 입건 안 입었건, 활동복을 입건 안 입었건, 해도 되는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금연 장소에서 담배 피우지 않기, 고성방가로 피해주지 않기, 타인에게 폭력을 가하지 않기, 자신의 책임이라고 판단되는 일에는 최선을 다하기 등등 말이다.
옷이 허름하다는 이유로 외면당했던 천문학자
지금이야 농담처럼 얘기를 꺼내며 웃곤 하지만, 초록색이었던 고등학교 교복을 입을 때마다 배추벌레라는 놀림을 받았던 게 너무 싫었다. 한참 외모에 관심을 가질 꿈 많은 고등학생 시절에 그런 놀림이 과히 기분 좋을 리가 없었겠지만, 내가 가진 나만의 개성 따위를 완전히 묻어버리는 옷이 싫었더랬다. 한 달에 한 번씩 하루 종일 진행하는 특별활동 시간 때는 사복을 입고 다닐 수 있는 활동반에 들어가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기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어쨌거나 누가 나를 어떤 형식으로 규정해버리는 것은 과히 좋은 경험은 아니다. 나는 우리 엄마 딸이자 월간 <사람> 편집위원이고 친구들에게는 레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내가 내 관계 속에서 타인과 나와의 관계를 규정할 권리는 나 자신에게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 사이에서 자신의 모습에 균형을 잡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은 결국 자신이 부여하게 마련이다. 노동운동가가 태어날 때부터 빨간 옷을 입고 머리띠를 묶으며 태어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환경에서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만들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제복 따위를 입히는 것은 말 그대로 ‘통제가 편한’ 복장이기 때문이다. 하기야 옷이라는 게 그냥 걸친다고 다 옷이 아니라더니, 공무원에게 하지 말아야 할 일상 언어 1위가 ‘옷 벗으시죠.’라는 농담은 옷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중요한 세 가지(의·식·주) 중 하나인지를 새삼 실감나게 한다.
가끔 단정하게 똑 떨어진 교복이나 제복이 부러울 때가 있기는 하다. 특히 해군 같은 경우는 모자에서부터 발끝까지 어디 먼지 하나 앉아 있을 것 같지 않은 깔끔함에 나도 모르게 흘깃 돌아보기도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역시, 교복이나 제복은 옷을 갈아입거나 신경 쓰고 싶지 않을 때가 제일 좋다. 가끔 아침에 옷을 챙겨 입을 때 뭘 꺼내 입을까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는 제복을 따라올 옷이 없다. 그래도 아침 찰나의 시간만큼의 고민과 멀리서도 알아 볼 수 있는 나의 특징들을 온 길거리에 공개하고 다니는 상황 중 무엇을 택하라 물으신다면 (솔직히 귀찮은 게 싫어서 아마도 잠시 고민하겠지만) 절대 제복 따위는 입지 않으리라 답할 것이다. 아무리 귀찮은 것이 싫다고 해도 그 잠시 잠깐의 고민조차 하지 않는 삶이라면 내가 나 스스로에게 너무 무책임해지는 기분이 들 것 같다.
군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받겠다는 둥, ‘통합적이고 열린 사고’가 필요하다는 둥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려면 우선 그 제복부터 입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주시하는 순간 ‘탈영병’, ‘학생’이라는 나의 상태까지도 전달되는 게 너무 끔찍하다. 세련된 옷이 없어서 새 별을 발견했는데도 옷을 허름하게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모두에게 외면당했던 ‘어린 왕자’의 천문학자의 이야기처럼, 옷걸이가 사람의 내용을 대변해 주는 것은 아니다. 밧줄을 대신해 옷으로 사람을 묶어두는 제복은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면서도 누구도 필요하지 않은, 그런 애물단지 같은 존재가 될 뿐이다.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