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 잡는 데 고양이 색깔은 아무 소용없다. 오로지 쥐 잘 잡는 고양이와 그렇지 못한 고양이의 구분만이 중요하다. 절대빈곤의 상태에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선택만이 가능한 상태에서 고양이의 색깔은 절대 무의미하다. 황후의 밥이든 걸인의 찬이든 어떻든 주린 배를 달래는 한 움큼의 음식만이 필요할 따름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 쥐와 고양이가 주인공이듯 주린 배와 무미한 음식 한 조각만이 서사의 전부를 차지한다. 마치 자본제적 교환이 인간과 세계의 관계에서 인간을 제거하고 오로지 교환의 대상이 되는 상품만을 남겨 놓듯이, 이 흑묘백묘론은 삶의 방식을 그대로 ‘상품형식’으로 바꾸어 버린다. ‘어떻게 사느냐’라는 지극히 복잡하고도 미묘한 삶의 문제를 그냥 ‘먹고 죽지 않는’ 문제로 단순화시키고 인간을 세계로부터 분리시켜 버린다.
배고픈 소크라테스의 고민은 빵 하나로 해결되지 않는다. 흑묘백묘론이 제공하는 빵으로는 소크라테스의 배를 결코 채우지 못 한다. 그것은 몇몇의 포식자를 위해 수많은 주린 배들을 기만하기 때문이다. 과외 안 해도 저만 열심히 하면 되지 해 봐야 수능 결과는 뻔하고, 명문대 무슨 소용 있나 취직만 잘 하면 되지 해 봐야 서류심사 결과 또한 뻔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민초들은 ‘저만 열심히 하면 되겠지,’ ‘노력하면 되겠지’를 외친다. 어떻게 몸부림쳐도 바꾸지 못하는 이 거대구조의 위력 앞에서 한없이 비굴해지는 자신을 달래는 목소리들이다.
그래서 흑묘백묘론은 잔인하다. 그것은 좌절이요 포기요 굴복이다. 그것은 나의 배를 주리게 만드는 그 어떤 것에 대한 항의를 제거한다. 나의 생을 지탱하던 그 어떤 가치와 희망과 열정을 박탈한다. 심지어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배부른 돼지로 바꾸지도 않는다. 그저 배고픈 소크라테스에게 소크라테스이기를 포기하도록 강요할 따름이다. ‘죽지 않을 만큼 먹을 수 있음’만이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하는 가치로 삼을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흑묘백묘론이 포식자의 입에서만 회자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해가 바뀌어 쥐의 해가 되었음에도 쥐 잡는 고양이 이야기로 말문을 여는 것이 참으로 뒤숭숭하다. 하지만 민주화와 산업화를 넘어 선진화를 향해 일도매진하자는 새 정부의 제안은 여전히 싱숭생숭하다. 마치 경제의 선진화가 삶의 질의 선진화를 위한 조건인 양 목적과 수단을 뒤바꾸어 놓는 그 화법 속에서 포식자의 미소가 느껴지는 것이다. 그들이 잃어버린 세월은 10년이라지만 그렇게 잃어버릴 세월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우리에게는 앞으로의 5년조차도 어쩌면 쥐 잡는 고양이 타령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