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정말 가정부가 되어버리면 어쩌나?
최현숙 위원장은 대학시절 사회운동과는 거리를 둔 채 “파열할 거 같은” 정신적 방황의 시기를 거쳤다고 한다. 졸업 후에는 “공부하는 게 개중에 재미있어서” 대학원에 가려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기집애가 무슨!”, 이 한 마디에 물거품이 되었다고. 안 그랬으면 지금도 공부하고 있었을지 모른다지만 이 타고난 조직가이자 선동가가 대학원을 갔다한들 얌전히(?) 학문만 하며 살았을까.
“대학 4년을 그럭저럭 파트너로 지내던 남자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에게는 굉장히 무례하지만 악세사리처럼 보여주기 적당해서 만남을 계속했던 친군데 공대 출신이었고 군대를 안 가고 산업체 근무를 택해서 창원에 내려가 있었죠. 대학원을 못 가게 되자 가출을 해서 창원에서 두 달 정도 같이 살았어요. 그러다가 정말 추락해보고 싶다, 밑바닥까지 가보고 싶다는 생각에 창원이 공업도시고 유흥문화가 많은 지역이어서 유흥업소 한 군데 취직을 해보자, 그 시절에 내가 생각하는 밑바닥 사람들의 삶속에 정말 진실이 있겠다는 생각에 한 업소에 갔었어요. 내가 별로 이쁘지도 않았는데 좋다 그러더라고요. 딱 보니까 학삐리 냄새가 났을 텐데. 그럭저럭 아가씨들이랑 같이 앉아서 이야기 하고 저녁때가 되어서 일을 해야 하는 시간이 되었는데 그게 뭔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온 몸이 막 부들부들 떨려요. 도저히 못 하겠는 거야. 그게 내 인식으로 이 일이 나쁜 거다, 이런 게 전혀 없었거든요. 하여튼 온몸이 반응하는 두려움. 그것 때문에 계속 혼자 떨다가 주인한테 미안하다, 나 못하겠다. 그러니까 그냥 나가라 그러더라고요. 설명이 안 되지만 예수쟁이들이 말하듯이 예수가 나를 돌려놨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가정부로도 일을 해봤는데, 직업소개소를 통해서 소개를 받고 들어갔는데 연대 교수 집이었어요. 나 말고도 전문적으로 요리하는 사람을 따로 쓰는 그런 집이었는데 그 집에서 한 20일 정도 일했죠. 어쨌든 그때 내 생각은 진짜 식모가 되자, 작정을 하고 그 집에서 나한테 주어지는 일들을 하면서, 그러면서 어느 순간 내가 정말 가정부가 되어버렸나? 내가 진짜 가정부가 되자는 생각이 없어지는 순간, 정말 내 인생이 가정부가 되어버렸나? 그러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 그때의 저의 한계겠죠.”
그렇게 돌아와 다니던 직장에서 전 남편을 만났고, 집안 반대를 무릅쓰고 사윗감 대접을 받던 남자친구와 헤어진 뒤 전 남편과 결혼을 했다. 6~7년을 주부로 어머니로 살던 그는 남편의 사업실패로 찾게 된 천주교 성당에서 사회운동의 첫 발을 내딛게 된다.
“살아놓고 나서 해석을 해보면 전 남편과 살면서 아, 내가 가난하게 살기 시작했구나. 실제로 가난하게. 큰 아이가 중학교 들어갈 때까지 단칸방 월세 살이를 했으니까 가난을 살게 되었고 가난한 사람들과 같이 동네에서 어울리게 되었고.
아이는 결혼 첫해 임신해서 낳았는데 첫 아이랑 둘째 아이가 3년 터울인데, 단칸방에서 두 아이를 키우면서 큰애가 네 살이고 작은 애가 한 살이면, 큰애는 낮잠을 한번 자고 둘째가 두 번을 자요. 그런데 두 아이의 낮잠을 한 번은 꼭 맞춰야 해. 자는 애를 깨워서라도. 그래봤자 한 시간인데 그래도 그 시간에 뭔가 책을 봐야 하고 내 생각을 해야 하고. 아니면 다 잠든 시간에 단칸방, 독산동에 닭장집이라고 벌집이라고 해야 하나. 방문열고 나오면 바로 부엌이고 그 앞에 한 1미터도 안 되는 골목길이 있는데 세 사람을 다 방에다 재우고 부뚜막에 앉아서 밥상을 펴놓고 책을 봐야 하는, 그러지 않고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예수, 당신의 뜻은 도대체 뭔가?
남편이 사업을 망하고 나서 성당에 가자고 해서 남편 따라 간 성당이 저한테는 이제 소위 예수에 대한 추구를 시작한 계기가 되었어요. 계속 내 고민을 하는 사람이니까 아마 교회의 가르침이나 신부의 이야기보다 예수랑 대화 뭐 이런 것들. 기도를 하더라도 뭐 어떻게 해주십시오, 이런 거 보다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네 뜻이 뭐냐? 질문하는 과정이었고.”
독산동 성당에서의 빈민 활동을 시작으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장기수가족후원회 활동까지 그는 활동반경을 넓혀갔다.
“순전히 예수쟁이 논리죠. 한국사회에서 분단이 일종의 원죄라면 거기서 가장 핍박받는 사람이 누구냐? 골수 빨갱이, 철저하게 김일성 주체사상가들이었던 비전향장기수였잖아요. 나중에 사상문제, 노선문제로 많이 싸웠고 어떻게 해서든 나를 꼬셔보려고, 예수쟁이 이빨이 세냐? 빨갱이 이빨이 세냐? (웃음) 처음에는 석방운동을 하다가 90년대부터 석방이 되기 시작됐고, 97년에 이인모 선생이 송환되는 걸 계기로 물꼬가 터지고. 한꺼번에 70명 정도가 한바탕 송환되고 나서 내가 떠날 때가 됐다, 그러고 민주노동당으로 온 거죠.
2000년 3월 달에 당에 가입을 했죠. 당사에 와서 당원가입 하려고 왔다니까 굉장히 당황해 하더라고요. 웬 아줌마가. (웃음) 당원 가입서 그거만 받고 아무런 안내도 안 해줘요. 뭐 이런 게 다 있나 그랬는데 아직도 그러네. (웃음) 시간이 지나고 지역에서 여성위원회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러더라고. 천주교 쪽에서 여성위원회 활동을 했던 경험도 있고, 그때 내가 한 여성으로 아이들을 낳아서 키워오고 남편과의 갈등과 이런 여러 가지 속에서 한 여성으로 사는 게 나한테 첨예한 문제였어요. 맨날 칼날 위에 올라서서 균형을 잡기위해서 노상 바들바들 떨다가 이쪽으로 떨어지는가, 저쪽으로 떨어지는가.”
지역 차원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여성위원회 성과를 바탕으로 그는 서울시당 여성위원장을, 그리고 중앙당 여성위원장을 맡게 된다. 그때가 2003년 말. 슬슬 비례대표 논의가 시작될 무렵, “여성위원장이면 당내 여성위원회 위상을 위해서라도 비례대표에 출마를 해야 하고 앞 순위에 가야 하는” 상황에서 그는 “정말 내가 국회의원이 재미있을까” 고민했고 대답은 “행복할 수 없겠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노회찬 당시 사무총장에게 죽을병에 걸렸다고 거짓말을 하고 훌쩍 인도로 여행을 떠났다.
“돌아와서 최고위원회 선거 과정에서 한 최고위원회 후보가 ‘동성애는 자본주의의 파행적 산물이다’ 뻘 소리를 하는 바람에 낙선운동이 벌어지고, ‘붉은 일반’이라고 당 내 성소수자 동아리인 ‘붉은 이반’을 지지하는 모임에서 활동도 하고, 그 과정에서 성소수자위원회가 만들어졌죠.
우리가 이성애라는 용어를 먼저 듣지 않거든요. 동성애라는 이야기를 맨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양성애겠지. 왜 한 쪽만 가능해? 중학교 때도 나를 좋아했던 여자애가 있었고 고등학교 때 서로 좋아했던 친구가 있었고. 성정체성에 대해서는 양성애자겠지 그때부터 그렇게 생각했었고. 누가 나한테 동성애적인 지향을 보일 때 별로 놀라지 않았었고. 당 게시판에 커밍아웃을 했더니 당 내에서는 일반을 하더니 이반한테 전염됐냐? 호기심 아니냐? 뭐 이런 반응도 있었어요. 이런 게 있는 거 같아요. 다르다는 거에 대해서 어 재미있네? 처음에 즉각적으로, 정서적으로 나오는 반응이 나는 굉장히 중요한 거라고 생각해요. 그걸 사회가 어떻게 교육하고 구조화 하느냐는 다른 문제이고. 제 경우에는 차이들에 대해서 그냥 재미있어 하는 사람이죠.”
욕망에서 시작된 변혁
2004년 그는 당에서만이 아니라 가족에게도 커밍아웃을 하고 남편과의 이혼도 결정했다. 본격적인 “욕망에서 시작된 변혁”의 출발이었다.
“내 근본적인 실존에서 출발하는 운동, 욕망에서 시작된 변혁이란 표현을 이메일에서 쓰는데 내 스스로 정당하다고 생각되는 내 욕망이 있죠. 이걸 부당하다고 하는 사람들 주장을 보니까 가부장적이고 이성애중심적이고. 나에 대한 비정상화가 부당하니까 내가 싸워야 하는 거죠. 더군다나 이 진영이 잘 싸우고 있다면 모르겠는데 힘드니까 여기서 싸워야겠다, 사회변혁도 함께 간다.
남편과의 관계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았으니까 이혼까지는 생각 안 했어요. 또 낳아놓은 아이들도 있고. 근데 25년 정도를 살아오고 아이들도 이제 컸고 저도 같이 살고 싶은 여자 친구도 생겼고. 이혼할 이유가 생긴 거죠. 첫 번부터 남편한데 내가 여자를 좋아 한다 그러면 이 사람이 너무 소화하기 힘들 거 같아서 처음에는 우리 둘이 이미 사랑하지 않는 것으로 알지 않느냐? 그 사람은 못 받아들였죠. 한 달 반 정도를 더 있다가 두 번째는 이제 내가 여자를 좋아한다, 그 여자랑 살 거다, 당신이랑 끝났다고 생각한다. 집안에서 이야기하면 어떤 상황이 될지 몰라서 바깥에 레스토랑에서 이야기를 했는데 한 바탕 난리가 났죠. 구역질이 나고 애들 키운 사람이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냐?
막내 동생은 비교적 이 문제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는데 큰 오빠는 이 사람이 대학교수인데 걱정을 좀 했어요. 다행히 오빠가 만나서 하는 첫 소리가 ‘니가 그렇다면 우리는 당하는 수밖에 없다.’ (웃음) 밤새 정리를 하고 왔더라고요. 그 다음에 여동생 둘이, 얘들도 예수쟁이, 보수적인 기독교인데 한 번씩 전화를 해서 난리를 치는 거야. 볼 용기는 없고 전화를 해서. 내가 한 번은 들어주겠다. 니네가 사회적으로 누구 돈으로 공부를 했든 혜택 받은 인간인데 이 문제로 이 정도밖에 인식을 못 하는 거는 사회적으로 무책임한 거다. 의사에 무슨 원장 그렇거든요. 일단 나는 귀찮고 그럼에도 니네가 나랑 대화할 용의가 있다면, 모르면 제발 물어봐라, 아무데나 예수 끌어들이지 말고.”
그는 다른 성소수자들과는 다르게 한 번도 커밍아웃을 힘들게 고민을 해본 적이 없어 “다른 성소수자의 커밍아웃을 예민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도 두 아이의 어머니 아닌가.
“아이들이랑은 다행히 크는 과정에서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성에 대해서도 굉장히 편하게. 지네가 나보다 젊고 힘도 쎈데 그걸 왜 말려? (웃음) 물론 어떻게 책임질 지의 문제, 둘 다 남자아이다보니까 여성들에게 임신이 얼마나 치명적일 수 있는지 이야기하고. 10대 후반이 되니까 여자 친구를 데리고 와서 섹스를 하는 거 같더라고요. 내가 안다, 그러니까 편하게 해라, 이런 이야기 슬쩍 해주고. 한 번은 제가 여성위원장 할 때인데, 우리 작은 애가 컴퓨터 하는 제 뒤에 와가지고 엄만 동성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이렇게 물어보더라고. 그 순간 내가 딱 멈춰지더라고. 저 새끼가 동성앤가? 그게 내가 뭐 동성애에 대한 혐오나 안 좋은 생각을 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쟤가 사는 게 얼마나 힘들까 때문에 선뜻 무심한 얼굴로 대화가 되지 않는…. 딱 멈춘 채 좀 있다 이야기하자 이랬더니 벌써 애가 낌새를 알고 나 말고 내 친구 그러더라고. 그 경험을 통해 내가 동성애에 대해서, 대체로 부모들에게 동성애 이야기하면 나는 다 이해하는데 내 자식은 못 본다, 이런 거잖아요. 그 한계가 나한테도 있다는 걸 느꼈었고. 둘째는 나를 참 잘 이해하고 있고, 큰애도 처음에는 멋있게 받아들였어요. 요즘은 연락이 잘 안 돼서 뭔가 얹힌 게 있구나 생각을 하는데, 아직은 이야기를 안 하고 있고.
큰애 결혼식에 안 갔어요. 살아오면서 가장 큰 아픔이었는데 버스 안에서도 그것만 생각하면 줄줄줄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새끼의 문제는 이렇게 별 수 없는 거구나. 전 남편이 큰애 결혼식에서 나한테 요구하는 것이 아무 문제없는 단란한 가정에 혼주의 부인 역할이었어요. 나는 그거는 아니다, 그럼에도 결혼의 당사자인 큰애가 엄마가 와달라고 한다면 올바르고 뭐고를 다 떠나서 가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큰애가 전화해서 엄마가 이 자리에 오고 안 오고가 내 결혼식에서 그렇게 중요한 거는 아니다, 엄마 소신대로 했으면 좋겠다, 그러더라고요. 여러 가지 아픔 속에서 그 얘기를 한 거겠죠. 심지어 신랑 엄마가 입는 적당한 한복 있잖아요? 한복도 빌려놓고 그 전날 밤까지 고민을 하다가 안 가겠다고 결심을 하고… 저 독하죠?”
소수자가 다시 그리는 종로를 상상하자
독하지 않다면 이 편견과 차별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커밍아웃에 출마까지 가당키나 한 일인가. 어쩌면 그는 앞으로 더 독해져야 할지도 모른다.
“국가가 시민을 관리하는 편하고 적절한 방법이 가부장의 가족을 단위로 시민들을 관리하고 노동력을 제공받고, 사회에 노동력으로 나오기 전까지 부모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뼈 빠지게 만들어주면 자본은 싼 값에 노동력을 써먹다가 써먹을 수 없게 되면 다시 가족에 돌려보내주는, 이게 가장 기본적인 노동력 재생산의 단위이죠. 성정치 입장에서 봤을 때 국가가 시민을 관리하는 방식이고 자본이 착취하는 방식이라고 할 때 교회도 거기서 교회의 권력관계를 유지하는 것이기도 하죠.
지금 성소수자 진영 안에서 국회의원 하나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성소수자 운동에 굉장히 중요한 과정일 수도 있을 수 있겠고. 그러니까 이 의제라면 정말 싸울 맛도 나는 거죠. 반대할 진영들이 지랄 지랄을 할 거기 때문에. (웃음)
다양한 소수자들이 권력의 영역, 재화를 나누는 정치 영역을 향해서 우리도 우리 대리자를 넣겠다는 운동 자체가 사회적으로 파장을 일으킨다는 의미도 물론 있겠지만 성소수자 운동의 공세적인 한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또 단순히 성소수자 의제는 우리가 말을 안 해도 계속 말을 시킬 테고, 우리는 오히려 다양한 소수자 영역들이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는 새로운 우리 사회의 상을 보여주자.
종로가 재미있는 지역이더라고요. 종로 3가는 낮에는 노인네들이 자발적으로 모이고 밤에는 게이들이 알아서 그렇게 모이고, 대학로나 이런 데는 청소년들이 또 그렇게 모여서 놀다가 들어가고, 인사동 이쪽을 중심으로는 문화를 즐기고 싶어 하는 구경꾼들이 있고. 평창동 이쪽은 굉장히 부촌이고, 창신동 이쪽은 또 쪽방촌이나 가난한 동네들이 많고. 이 공간 자체를 사회적 소수자들이 함께 어울려서 살 수 있는 곳으로 재구성하는 거, 이런 그림이 가능하다고 보여주는 거죠. 종로가 정치1번지라고 떠들기도 하니까. 또 성소수자들에게는 열린 공동체가 아니라 게토라 하더라도 상징적인 장소이기도 하고.
질문들이 있어요. 왜 2008년이냐? 지금 가능하니까! 몇 프로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캠페인도 안 되는 한국사회에서 후보전략이 맞는 거냐? 이 자체가 굉장히 공세적인 캠페인이라고 봐요. 다음 세대 성소수자들에게, 자기 비하와 자기 부정, 자기 긍정을 했다 하더라도 사회에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몰라서 전전긍긍하는 이들에게 아주 낮은 단계라도 어 나랑 같은 정체성의 사람이 국회의원 후보로 나왔네 하고 말지라도. 차별금지법 문제로 드러났듯이 싸울 의지가 있는 사람이 대단히 많거든요.”
바로 그 사람들이 최현숙을 종로로, 정치판으로 밀어 넣고 있다. 흥미진진한 싸움? 퀴어와 정치의 뜨거운 한 판 사랑*이 시작된 건지도 모른다.
인터뷰 강곤 | 기자
사진 박김형준 | 객원기자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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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현숙 성소수자위원장 블로그 ‘퀴어 정치와 사랑에 빠지다’ (http://blog.naver.com/bebreaking)에서 빌려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