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주의적 폭력으로부터 겨우 숨 쉴 공간 정도 찾아낸 우리 인권의 현실 또한 마찬가지다. 87년 이래 민주화는 진전되었으되 정치권력의 후퇴로 확보되는 빈 공간을 시민사회가 채 전유하기도 전에 자본권력이 새로운 지배력을 형성하는 이 억장 무너지는 상황에서, 또다시 실용과 선진화를 내세우는 정치권력이 집권하면서 공공연하게 인권적 가치를 상품가치로 대체하는, 그래서 국가 자체가 사사화(私事化)되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사진 | 박김형준 |
실제 이 지점에서 진보정당과 인권을 연계하여 논의하는 것은 그리 적절하지 못하다. 어떤 진보정당은 표리의 이동(異同)을 차치하고서라도 대선의 실패가 안겨준 후폭풍을 견뎌내는 데에 급급할 뿐이며, 어떤 진보정당은 분당의 기로에 서서 자기 정체성을 잡아가기에도 바쁘기 때문이다. 오히려 중요한 의제는 ‘어떻게 인권의 문제를 정치화하여 그 실천력을 담보해 낼 수 있을 것인가’이며, 그 전제로서 ‘어떤 인권이 진보적 관심의 대상으로 자리매김 되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그래서 이 글은 특정한 정당이나 정치세력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으려 한다. 오히려 인권의 문제 자체를 진보적 시각에서 재구성하고 그에 상응하는 정치화의 가능성을 찾아나서 보고자 한다.
지배적 인권담론의 문제점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인권담론은 지나치게 보수적이다. 한마디로 지나치게 법률적 권리개념을 중심으로 인권이 구성되어 온 탓에 정치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자유권적 인권 관념에는 익숙하지만 그 수준을 넘어서는 인권-소위 사회권이나 자본권력으로부터의 자유-을 담보해내기에는 역부족인 것이 현재의 실정이다. 인권을 인간의 권리로 풀어쓰면서도 그것을 ‘공동체나 맥락·관계들로부터 고립된 개인의 이기적 의지에 대한 국가적 보호’라는 관념으로 이해하는 수준에 고착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권위주의체제로부터의 민주화 이행에 값하는 인권담론들은 별무리 없이 구축할 수 있었다. 독재정권에 포획당한 국가기구들이 휘두르는 공권력으로부터 인신의 자유를 주장할 수 있었고 음흉한 사찰과 정보정치에 대하여는 언론과 집회시위의 자유를 선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해방의 요청이 가지는 개인주의적 성격으로 인하여 민주화의 과정에 시장적 자유주의가 중첩되는 현상을 인권담론들이 제대로 통제할 수는 없었다.
문민정부 이래 세계화 혹은 신자유주의의 압박은 종래의 권위주의체제의 개혁을 강제하기는 하였지만, 그 개혁작업 자체가 임기응변적으로 이루어지거나 혹은 민간부분-특히 자본에 의하여 권력이 사유화되는 과정으로 변질되었다. 대체로 기업의 투명성·공명성 확보, 금융구조개편, 노동시장의 유연성 확보 등을 주요골자로 하는 IMF관리체제 및 그를 고리로 본격 침투한 신자유주의는 세계투기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일련의 초국적자본들이 보다 자유롭고 안정적인 수준에서 국내에 유입되어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형성하도록 만든다. 민주화를 통해 국가로부터 자유로운 공간은 창출하였으되 그것이 경제정의와 사회정의를 구축하는 수준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되려 자본권력의 해방공간으로 전도되는 현상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보수진영에서 그토록 아쉬워하였던 “잃어버린 10년”은 이런 식으로 자유의 개념과 내용이 전도되는, 그래서 보다 효율적인 자본운동공간이 구축되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이행의 기간이었을 뿐이다. 다만 그들은 그러한 이행이 정권의 차원에서 보다 공식화되고 보다 가속화되었어야 했음을 안타까워함에 불과하다.
진보적 가치로서의 자유
그렇기에 이 지점에서 자유주의적 인권개념을 비판하는 마르크스의 언술은 유의미하다. “인간은 재산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소유권을 부여받았다. 인간은 사적 영리활동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영리활동의 자유를 부여받았다.” 재산을 인격의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의 연장으로 이해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는 진정한 해방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무엇인가에 대한 “완전한 종속, 완벽한 비인간성”만을 초래할 따름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유의 개념을 급진적으로 변형하여야 할 당위를 가진다. 해방을 위한 자유가 도리어 인간소외를 결과하는 이 이상한 불가역반응의 도식을 넘어, 인간성의 실천을 가능케 하는 삶의 조건으로서의 자유를 상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자유는 의연히 “해방으로서의 자유”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는다. 하지만, 이 자유는 종래와 같이 국가나 정치권력으로부터의 해방에 한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억압과 질곡으로부터의 해방으로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그것은 노동자의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입법자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파업을 빌미로 조합원인 노동자들에게 수십억 원의 손해배상책임을 부과하는, 사유화된 권력으로부터의 자유 또한 그 핵심요소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아울러 자유의 관념은 동태적이고 적극적으로 규정될 필요가 있다. 자유가 구속과 제약을 받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한다면, 삶과 인격의 자유로운 발현을 제약하는 모든 물적·경제적 제약 또한 자유의 적이 된다. 오늘날 시간과 공간을 이동하면서 계속적으로 재현되는 인간의 욕망이 중심적인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면, 바로 이런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들을 구현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인권요청에 해당하게 된다. 그 자체가 인간의 자기정체성 내지는 인격의 발현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자유는 인권과 동격이 된다.
인권정치를 위한 가장 굳건한 전선과 가장 단호한 진지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사진은 지난해 열린 사회운동포럼. 사진 | 사회운동포럼 |
기든스는 이런 자유의 변형을 두고, 선택과 창조 또는 변형으로서의 생활과정을 통하여 자아를 실현하는 가능성을 확보하는 정치공간을 구축한다는 말로 요약한다. 하지만 그 생활정치의 공간을 채워 넣는 것은 “탈시장적 인권”일 수밖에 없다. 원자화된 인간의 고립된 자유에만 초점을 맞추고 협소한 시민적·정치적 권리에만 한정된 삶의 공간이 아니라, 재산권과 교환가치로 표준화된 시장적 자유가 아니라, 총체적인 삶의 수행자로서의 인간이 그 삶의 공간에서 ‘자율적’으로 생활해 나갈 수 있는 상태 혹은 가능성으로서의 자유를 구상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권과 민주주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요컨대, 진보적 관심의 대상이 되는 자유는 생활자원, 환경, 평화, 연대 등 삶을 구성하는 제반의 조건을 충족하는 자유이다. 이는 다시 생활관계 속에서 나타나기 마련인 실체적 차이성이나, 정체성확립의 기반으로서의 상황의 상이함 등을 그대로 존중하고 그 실현을 위하여 배려하는 관계의 자유로 재구성된다. 삶의 조건은 국가뿐 아니라 경제와 시민사회, 혹은 생활공동체 등 다양하고도 다층적인 수준에서 충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자유의 관념 그 자체가 실체적 연대의 계기로서 규정될 수 있게 된다. 개별적인 삶의 방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관용), 그 삶의 실천을 배려하며(책임), 그 삶을 상호 공유하는(연대) 과정 그 자체가 자유 혹은 인권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여기서 인권과 민주주의는 서로 상통하게 된다. 헬드는 “정치적 권위와 강제력의 자의적 행사”로부터의 보호가 민주주의의 지향목표중의 하나라고 하지만, 인권과 민주주의의 관계는 이런 목표-수단의 연관을 넘어선다. 민주주의를 다수결에 따라 통일된 결정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결정의 과정들을 통하여 “시민으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보다 효과적으로 형성·조직할 수 있도록 전환될 수 있는” 기제를 의미한다고 본다면 그것은 곧장 인간의 자기실현 즉 인권의 요청과 결합될 수밖에 없다. 환언하자면, 민주주의는 인권의 외적 구현형태를 이룬다. 그것은 인간의 자율성을 바탕으로 여타의 인간들과의 일정한 교류양식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고 하는 우리 헌법상의 담론체계가 균열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보수적 혹은 자본제적 헌법관은 이 개념에 사유재산제를 바탕으로 하는 자본제적 시장경제질서를 산입함으로써 개인을 그의 생활관계들로부터 소외시키는 결과를 야기하고 만다. 오늘날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시장효율성에 모든 생활을 압류당한 노동자들에게 그 항변의 기회조차도 박탈해 버리는 논거가 바로 여기서 성립하게 된다. 혹은 정치적으로 각성되어 능동적으로 국정에 참여하여야 할 시민들을 작은 정부라는 명분하에 국가행정‘서비스’에 대한 소비자로 전락시켜 버리는 양상도 여기서 설명가능하게 된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인권의 외적 발현태로 규정하게 되면 이런 질곡은 발붙일 곳이 없어진다. 인권으로서의 자유와 그 표상으로서의 민주주의를 결합함으로써 인권은 조화로운 공동체적 삶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이자 조건이 되고 민주주의는 인권의 실현에 필요한 삶의 조건들을 창출하여야 할 공동체적 책무를 이행하는 과정이 된다. 인권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연대와 공화를 추구하는 시민사회의 공동체적 작동원리로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구성될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조효제는 “청색 권리로서 인권 민주주의와 개인·집단의 자율성을 옹호하고, 적색 권리로서 복지국가와 노동자 권리를 지지하며, 녹색권리로서 평화와 한반도 문제 해결, 젠더와 생태적 가치를 모색하고, 갈색 권리로서 제3세계를 지원하고 이주노동자를 돕는 것”이 우리의 지향점이 되는 인권적 사회공동체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네 가지 색깔의 권리는 앞서 말한 삶의 조건을 창출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이 된다. 욕심을 하나 더 낸다면 아시아(혹은 동아시아만이라도) 지역을 아우르는 인권기구를 만들어 내는 백색권리를 추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의 실현을 위해서는 정치적 해방으로부터 과거사청산, 빈곤과 식민억압으로부터의 해방, 남북분단현실의 극복과 지역패권주의의 극복 등 지난한 과정들을 밟아 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 각각의 과제들에는 그만큼 지난한 의지와 행동과 운동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이루어내어야 할 일은 우리도 남들처럼 ‘버젓한’ 인권선언 하나 가지는 것이다. 근대의 경험이 없고, 시민혁명의 성취가 없는 역사적 특수성 때문인지, 우리 사회는 인권의 내용과 그 가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명문화된 바가 전혀 없다. 법원이나 헌법재판소의 판결문이랄지 국가인권위원회의 결정문과 같은 공문서는 존재할지언정 시민사회의 합의로부터 그 권위와 타당성을 부여받는 성문의 선언은 언제나 부재중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인권의 담론들은 시민사회의 주도에 의하기보다는 국가와 법학의 손아귀에서 좌지우지되어 버리고 만다. 인권 자체가 편협한 국가주의·법률주의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이다.
실제 인권선언이 우리에게 주는 이점은 적지 않다. 그것은 중구난방인 인권논의들을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하나의 가치체계 속에서 취합할 수 있도록 해 준다. 또한 그것은 모든 인민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이 그 자체 국가의 존재목적이 됨을 일깨우게 만든다. 나아가 그것은 인권은 권리이자 의무이며 이익이자 책임임을 모든 이에게 알려준다. 우리 공동체의 존재기반에 인권이 놓여 있음을 자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울러 이런 인권선언의 합의과정을 통해 우리는 해방의 관심과 생활의 관심을 아우르는, 새로운 사회운동의 기회를 모색해 볼 수 있게 된다. 오늘날 인권의 내연과 외연이 공히 크게 확장되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그에 대한 합의의 도출과정은 그 자체 강한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가장 유효한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흔히 말하듯 인권은 오늘날 가장 인기 있는 정치적 상징이다. 하지만 그것은 새로 출범하는 정부가 추구하는 실용과 선진화 전략 앞에서 하찮은 걸림돌 정도로 치환될 수 있을 만큼 취약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권은 여전히 피와 땀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 점이 인권선언이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이점이다: 그것은 인권정치를 위한 가장 굳건한 전선과 가장 단호한 진지를 구축할 수 있게 한다.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