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사회에서 진보정당을 대표하는 민주노동당이 분당의 위기에 휩싸여있다. 오는 2월의 전당대회가 최종적인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민주노동당은 차분한 대선 평가도 갖지 못한 채 지도부의 사퇴와 그 뒤를 이어서 비대위 체제를 맞았고, 분당세력들은 딴 살림을 차릴 준비를 하고 있다. 2월 전당대회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한다면, 민주노동당의 분당 사태는 필연적인 과정이 될 듯하다.
이런 민주노동당의 내홍사태와는 달리 진보정당을 추진하는 흐름들이 또 존재한다. 초록당 창당준비위원회와 한국사회당, 그리고 새로운 진보정당 추진 그룹들은 몇 차례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진보정당에 대한 상을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또 이와는 달리 좌파로 분류되는 노동자계급정당을 추진하는 그룹들도 개별적으로 움직이면서 전국 순회토론을 조직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의 진보정당 독점 시대가 끝나고, 바야흐로 경쟁시대가 도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현실을 마주하는 심정은 참으로 불편하고 괴롭다. 전체 진보운동의 역량이 매우 협소하고 그 역량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처럼 진보정당운동의 역량이 사분오열되는 것이 맞는가. 그렇잖아도 인수위 과정을 통해서 확인하듯이 쓰나미처럼 이명박 정권의 탄압이 밀려올 것인데, 이에 대해 없는 힘까지 모아서 대응하기에도 벅찬 상황이 아닌가. 당장 다가올 총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저러한 걱정이 앞서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여러 갈래의 진보정당운동이 그간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올바른 평가에 기초해서 보다 발전적으로 귀결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인권운동과 진보정당의 거리
그렇지만 이런 상황을 지켜보는 인권운동은 사실 갈래를 잘 잡지도 못하거나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인권활동가 중에서 닥쳐온 위기에 대응해 진보정당운동에 뛰어들겠다거나 뛰어들었다는 이들은 아직 없다. 무관심하기까지 한 인권운동 진영 내의 반응도 좋을 수만은 없다. 인권운동은 과연 진보정당과 무관할 수 있는가. 인권운동이 정당으로부터, 진보정당운동으로부터 초연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지난 의회에서 민주노동당을 뻔질나게 접촉해왔다는 점만 확인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진출한 다음에 인권운동은 이전과는 달리 조금은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있었다. 인권과 인권운동을 둘러싼 정치지형이 변화했고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먼저 민주노동당이 원내 의석을 처음에는 10석, 그리고 나중에는 9석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입법발의를 하는 경우 우선 이들을 기본으로 깔고 다른 당의 의원들을 확보하는 식의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민주노동당 의원들에게는 별도의 설명도 필요 없이 의기투합할 수 있지 않았는가. 그러다보니 어떤 입법안의 경우는 민주노동당이 먼저 나서면 다른 정당 의원들이 뒤로 빼게 되므로 민주노동당 의원들과는 미리 입을 맞춘 다음에 다른 정당 의원들을 확보하고 붙이는 방안도 생각하게 되었다. 국회 입법 활동에서 전술을 고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국회에 대한 접근이 그만큼 수월해졌다는 점도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에 덕을 본 점이다. 민주노동당은 국회의 구태를 깨는 파격을 연출했다. 국회 본관 앞 계단에서의 집회, 기자실에서 단체 대표들이 대거 참석하는 기자회견, 방청, 자료요구, 국정감사에 대한 요구 등에서도 다른 정당들보다 운동진영의 요구를 대폭 수용하였으므로 국회는 훨씬 더 열린 공간이 되었다.
사진 | 박김형준 |
물론 인권운동을 하는 입장에서 민주노동당의 활동이 모두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우선 당 인권위원회가 인권운동과 연결되지 못한 채 당내 법률가들의 친목모임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하였거나 심지어 한때는 그나마 있던 인권위원회조차 없앴던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당에 장애인위원회나 성소수자위원회와 같은 다른 당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소수자들의 위원회가 생겨 활동하는 것은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었다. 이를 통해 인권운동과는 또 다른 정당의 힘, 정당정치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18대 총선에서 원내에 진출하는 진보정당을 우리는 볼 수 없을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예전처럼 보수정당의 의원들 중에 그래도 우리와 말이 통할 의원을 물색하느라 고민해야 할지 모른다. 의견과 입장을 조율하다가 결국은 포기하는 답답한 상황도 수도 없이 맞게 될지 모른다. 인권운동에서 입법 활동을 비롯한 대국회 활동은 상당히 위축될 것이다. 그럴 때 원내에 진출한 진보정당의 존재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게 될지 모른다.
인권운동의 진지로서 진보정당을 고민해야
아무튼 진보정당의 흐름이 어떻게 대세로 정리되어 나타날지 모르지만, 인권운동도 진보정당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무엇보다 남들이 애써서 만들어놓은 진보정당을 입법 활동 차원에서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하는 수단적인 사고를 넘어서야 한다. 인권운동의 진보적 재구성을 고민할 때, 진보정당과 함께 풀어갈 수 있는 무엇인가를 넘어서 진보정당을 인권운동의 정치적 진지로 만들기 위한 고민으로 발전시켜야 할 때다. 진보정당운동이 인권의 진보적 가치를 수용하도록 하고, 인권운동도 다양하게 분화하게 가는 진보정당운동의 가치들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상호침투 속에서 사회의 진보를 위한 큰 그림을 같이 그려 나가야 한다. 진보정당으로부터 수혈만 받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피를 수혈할 수 있게 하기 위한 방안이 고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지금의 복잡한 진보정당운동의 갈래들 중 어느 한편을 지지하느냐, 반대하느냐 또는 전술적으로 사고하느냐, 전략적으로 사고하느냐 하는 입장은 당장은 불필요할 것이라고 본다. 분화해가는 진보정당운동들의 논의들을 쫓아가면서 인권운동의 입장을 정리하고, 이런 운동에 어떤 시점에서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들을 해가야 할 때다.
‘인권’만큼 정치세력들이 활용하기 좋은 가치, 그리고 부정할 수 없는 당위로 존재하는 가치들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세력들은 모두 인권을 존중한다는 전제 하에서 정책을 제시한다. 이에 대해 우리와 입장을 같이 하는 정치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인권운동의 영향력을 높이는 것이 되고, 그를 통해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점에서 적극적으로 진보정당을 사고해야 할 것이다.
아직은 인권운동진영에서는 진보정당에 대한 고민이 본격화되려면 많은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특집은 부족한대로 진보정당운동을 고민할 수 있는 꼭지들로 구성했다. 이번 특집이 인권운동진영 내에서 진보정당에 대한 토론으로 이어지는 계기로 작용하기를 바란다.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