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위에서 없앤다는데 너도 잘리는 거니?”
지난 1월 4일,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대변인 브리핑 이후 지인들이 많이 묻는 말이다. 필자는 엄연히 시민·사회단체 상근자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같은 다양한 국가기관 이름과 “올바른과거청산을위한범국민위원회(약칭 과거청산범국민위)”라는 단체 이름이 잘 구분되지 않는다. 그 이름만이 아니라 역할 또한 헷갈리는 것은 당연지사. ‘과거청산’, 혹은 ‘과거사청산’, 그도 아니면 ‘과거사정리’와 같은 단어들은 상당히 많이 사용되지만 정작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알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국민과 함께하는 과거청산운동을 위해 노력하는 과거청산범국민위라 소개하지만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하며 반성중이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 각종 과거사 관련 국가위원회들이 본격적으로 출범하였고, 한창 그 역할을 수행중이다.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본 글의 목적과 맞지 않으므로 다루지 않기로 한다.
올바른 과거청산을 위한 범국민위원회는 1월 25일 기자회견을 갖고 과거사 관련 위원회 폐지방침 철회를 요구했다. 사진 | 올바른과거청산을위한범국민위원회 |
지난 1월 4일, 인수위 대변인 브리핑을 통해 각종 위원회 통폐합 및 폐지 이야기가 솔솔 새어나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청산 관련 국가기구가 몇 개나 되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잘 모르는 상황을 감안했는지 인수위에서는 친절하게도 그 숫자가 열 네 개라고 알려주며 통합 내지는 폐지시킬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행정자치부에서 그렇게 보고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이 밝혀지지 않았기에 과거청산범국민위를 포함한 여타 단체들은 공식적인 반응을 자제했다.
그런데 1월 16일, 인수위는 ‘정부 기능과 조직 개편(안)’을 발표했고 개편안에 따르면, ‘존치기한이 명시된 5개 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08년 7월),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08년 11월),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09년 1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10년 4월),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10년 7월)-는 기한 도래와 함께 폐지’한다고 한다. 여러 위원회들에 대한 정비 필요성에 대해선 ‘정부 내에 각종 위원회가 난립, 의사결정 속도를 떨어뜨리고 책임행정을 저해’한다는 것이 그 이유다. 하지만 개편안 33, 34쪽을 제외한 어디에도 과거청산 관련 위원회들을 적시한 설명이 더 없는 것으로 봐서는 이 위원회들에 대한 이명박 당선자와 인수위의 정확한 입장을 파악하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그렇다면 공식적이고 구체적인 계획이 제출될 때까지 마냥 기다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이 문제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대강 짐작이라도 해봐야할 것 아닌가. 인수위의 의중을 대충이나마 상상해보자.
세 가지 경우의 수
첫째, 인수위는 과거청산 작업에 대한 고민 자체가 별로 없다. 실제로 선거기간에 과거사와 관련한 이야기들이 거의 나오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관심 자체가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많은 의원들에게는 얼마나 민감한 문제이던가.
둘째, 과거청산 작업에 대한 고민은 있지만 아직 구체적으로 언급하거나 행동할 필요가 없다. 실제로 한나라당이 만든 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래서 우리가 ‘누더기 과거사법’이라고 부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2005년 5월 3일 국회통과. 재적 299, 재석 250, 찬성 159명, 반대 73명, 기권 18명. 이중 한나라당 의원들은 92명이 찬성, 9명이 반대, 6명이 기권했다. 반면에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59명만 찬성했고, 51명이 반대했다.)’은 이미 입법과정에서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정하는 세력에 의한 사건 조사”와 같은 한나라당의 요구가 이미 전적으로 수용되었다. 따라서 중간 중간에 다양한 경로를 통해 그들이 불만을 토로하고 비판을 토해냈다고 하더라도 굳이 없애겠다고 난리법석을 떨거나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을 것이다.
셋째, 과거청산 작업에 대한 불만과 생각은 많지만 어차피 곧 문 닫을 조직들을 굳이 없애려 애쓸 이유가 없다. 위에 적시한대로, 그리고 그 법률이 규정한대로, 2010년 상반기까지 모두 문을 닫는 위원회들을 없애기 위해서 굳이 국회에서 힘들게 입법 과정을 거쳐 폐지 법안을 만들어봐야 실질적인 기간 단축은 얼마 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겪을 정치적 부담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다.
이명박 정권 출범은 이 사회가 전반적으로 보수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자연스레 인권, 분배, 평등, 정의 등의 개념보단 경제, 실용성, 효율성 등의 개념이 우월적 지위를 획득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더 이상 무언가를 기억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한국전쟁 전후에 약 백만에 달하는 민간인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도, 군사독재 정권 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납치와 불법감금, 고문과 죽음으로 고통 받은 사실도 잊어야만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위원회 예산 및 권한 축소, 위원장 및 위원들에 대한 자의적 인사권 행사 등과 같은 압박이 시작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있다. 그나마 사법부가 떨떠름히 받아들이던 재심신청이 다시 어려워질 가능성도 있다.
안팎으로 어려움에 부닥쳤지만
어려움은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간 힘들게 진행되어 온 과거청산 작업은 애초 많은 이들의 기대와 예상과 달리 개별 사건 및 피해자 중심의 진실규명, 배·보상 문제 중심으로 진행되면서 과거청산운동을 사회적 의제로 만드는데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다. 각종 법제정 투쟁 이후 급격한 동력 상실과 피해자 및 단체들 간의 입장이 달라지면서 운동의 구심점을 형성하는 것조차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역사는 기억과의 투쟁이라는 명제를 되새기며, 진실의 힘을 믿으며, 다시 과거청산운동의 전선을 재확립할 때다. 과거청산운동의 가치를 더욱 널리 알려야한다. 과거청산운동을 폭넓은 사회역사투쟁으로, 민주주의와 평화실현, 인권신장을 위한 주요한 실천과제로 인식시키고 더 많은 참여를 조직해야할 것이다. 심층적인 분석과 연구 작업 또한 게을리 할 수 없다. 보다 구체적인 실천이 가능한 지점들을 찾아내서 망각의 늪으로 빠져들지 않도록 끊임없이 상처를 덧내고 피가 흐르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글을 쓰는 동안 며칠째 눈이 내리고 있다. 사무실 창밖으로 내리는 하얀 눈송이들이 무척 반갑고 예쁘다.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일기예보를 듣는다. “향후 과거청산운동 일기예보입니다. 짙은 안개가 자주 끼겠으며, 때론 우박을 동반한 천둥, 번개가 예상되오니 각별히 주의하셔야겠습니다.”
물론 기상청 예보는 종종 빗나가고, 사람들은 혼란스러워 할 것이다.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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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과거청산을 위한 범국민위원회(ktruth.org)’는 2004년 8월, 수백만에 달하는 각종 국가폭력 피해자와 유족들, 그리고 전국적으로 약 1,000여 개에 달하는 제 시민·사회·노동·인권운동 단체들이 모여 결성한 단체로, 각종 과거청산 법률 제정과 위원회가 출범한 이후에도 국민과 함께하는 과거청산운동을 위해 계속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