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엄벌주의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

2008년 3월 초등학생 2명을 납치 살해한 용의자가 검거된 후, 그가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를 착용한 상태로 현장검증에 임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은 모자와 마스크를 벗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온라인 공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웃집 아저씨에게 납치되어 무참히 살해당한 두 아이와 부모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자 한 시민들은 ‘어린이를 상대로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무슨 인권이냐’며 피해자의 고통을 헤아리고 피해자의 인권을 위하여 범죄자의 얼굴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범죄자를 엄벌에 처할 것을 주문하였다.


이에 화답하듯, 정부와 정치권은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보호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여(2008.6.13. 개정) 아동성폭력범죄에 대한 형량을 대폭 높여 엄벌에 처하도록 하였다. 13세 미만의 아동을 강간한 경우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고, 유사성교행위를 한 경우는 ‘5년 이상의 징역’으로 강화하였다. 특히 13세 미만의 아동을 상대로 강간, 유사성교행위나 강제추행의 범죄를 범하고 피해자를 사망에 이르게 한 경우에는 ‘사형, 무기징역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하여 기존에 없던 ‘사형’을 새로이 추가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특정성폭력범죄자에 대한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여 소위 ‘전자팔찌’의 시행을 2008년 9월로 앞당기고, 부착기간도 ‘형집행 종료 후 5년 이내’에서 ‘10년 이내’로 확대하였다. ‘치료감호법’의 개정도 있었다. 소아성기호증이나 성적 가학증 등의 정신적 질환이 있는 자가 성폭력범죄를 저지른 경우에 치료감호를 부과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주요내용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피해자’는 늘 정책담론의 중심에 있었다. 모두가 ‘피해자의 보호’ 내지 ‘피해자의 인권’을 이야기하지만, 찬찬이 들여다보면 여기에서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차원의 의미가 혼재되어 있다. 하나는 실제로 범죄피해를 당한 피해자의 인권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잠재적인 피해자의 인권 문제이다. 둘은 상호 중첩되지만 구별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국가의 엄벌정책을 ‘피해자 보호’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자 한다면 이 때 피해자는 잠재적 피해자를 말하는 것이다. 잠재적 피해자, 즉 범죄피해를 당할 위험이 있는 피해자란 곧 모든 시민을 지칭하는 것이다. 시민의 안전에 대한 욕구가 ‘피해자 보호’라는 명제로 전화되어 국가의 강력한 형벌진압정책을 주문하는 것이 오늘의 형국이다. 어린 아이를 상대로 하여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철저하게 응징함으로써, 그리고 그러한 모습을 지켜봄으로써 사람들은 피해자와 같은 심정에서 감성적 카타르시스와 안전감의 회복을 느낄 수도 있다. 범죄자의 얼굴과 신상정보를 언론과 인터넷에 공개하여 똑똑히 보아두자는 시민들의 주장은 단순히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른 자에게 공개적인 망신을 주자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나 자신과 가족에게 언제 닥칠지 모르는 범죄피해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하는 기대가 반영되어 나타난 요구이다.


이처럼 잠재적 피해자인 시민들의 요구는 잠재적 피해자의 보호를 위하여 그 담론의 대척점으로 범죄자의 인권을 문제 삼는 구도로 전개되기 쉽다. 하지만 잠재적 피해자의 보호를 위하여 사형도 불사할 정도의 강력한 진압적 형벌정책을 용인하고 그 과정에서 범죄자의 인권이 침해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담론은 매우 위험하다. 위험한 범죄자로부터 잠재적인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가해자의 인권을 무참히 짓밟아도 된다는 생각은 지극히 우려스러운 파시즘적 발상이다.



응징으로 구축되는 안전망(?)


사회의 안전과 질서유지가 국가 형벌권의 정당화 근거라고 본다면, ‘범죄예방’과 ‘(잠재적) 피해자 보호’는 같은 것을 명명하는 이름들이다. 그러나 어떠한 관점을 취하는가에 따라 국가 형벌정책의 구체적인 모습은 전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먼저 국가의 형벌정책을 바라보는 시선에 ‘피해자의 관점’이 시민들 사이에서 설득력 있게 등장하고 있는 현상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덴마크의 유명한 범죄학자인 Boutellier는 오늘날 범죄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코드는 ‘피해자’ 혹은 ‘피해’에 있다고 말한다. 응보사법 속에서 범죄현상은 법규범의 위반으로 인식되고, 복지와 교정주의에 기반을 둔 시대의 범죄관념은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사회적 조건의 산물로 이해되었다면, 오늘날 범죄현상은 주로 도덕적인 차원에서 이해되는 경향이 강하다고 한다. 도덕적인 문제로서 범죄현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범죄문제가 ‘선(good)과 악(evil 혹은 bad)’의 대비 속에서 해석된다는 것을 뜻한다. 현대사회에서 ‘선’에 대하여 보편적으로 합의할 만한 윤리적 가치는 사라졌으며, 소위 ‘좋은 삶’에 대한 사람들의 가치기준은 개별화되고 상대화된다. 반면에 상대적으로 현대 사회의 도덕적 이해는 ‘악한 것’ 내지는 ‘피해’에 포커스를 맞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리차드 로티(Rorty)가 현대사회의 도덕적 유대를 분석하면서 “당신은 고통스러우십니까?(Are you suffering?)”라는 화두를 던졌음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산업사회에서 시민사회의 유대는 지역이나 신분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면, 현대 사회에서 시민사회 내지 공동체의 유대는 개인이 경험할 수 있는 피해와 고통을 통제하고 거부하는데 초점이 있다. 이는 사람의 행동을 해석하는 방식, 특히 범죄현상을 해석하는 방식이 ‘피해중심으로’ 코드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시민사회의 유대는 개인의 프라이버시의 이익과 밀접하게 결합하는 방식으로 구조화되고 있다. 범죄현상을 중심으로 보면, 현대 사회의 문화 속에서 범죄는 더 이상 규범위반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어떠한 범죄행위에 대하여 사회 구성원들이 강력한 개입과 통제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은 그 범죄행위가 시민들의 안전에 얼마나 위험을 주는 것인가에 달려 있다.


최근 우리 사회의 아동성폭력에 대한 시민들의 폭발적인 관심과 엄벌정책의 주장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위험한 범죄자에 대한 감시정책을 강화하려는 현상도 피해자코드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청소년 대상 성범죄자의 사진을 인터넷에 공개하고, 전자감시를 강화하고, 15년에 이르는 치료감호제를 실시하는 정책, 그리고 아직 입법된 것은 아니지만 강력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의 유전자정보를 채취하고자 하는 정책 등이 용인될 수 있는 현상은 ‘선’에 대한 적극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악’에 대한 응징적 가치를 중심으로 접근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잠재적 피해자의 보호를 말할 때 ‘피해’는 ‘위험’과 쌍둥이와 같은 개념이다. 그것은 시민들이 느끼는 ‘안전감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다.



강성 형벌정책은 입증된 미신


사실 위험은 확률이지만, 시민들이 위험을 크게 느끼는 것은 위험에 대한 통제가능성과 관련이 있다. 범죄피해의 위험을 스스로 혹은 국가에 의하여 통제할 수 없다고 느낄수록 위험을 보다 크게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아동성폭력범죄에서 범죄자를 엄벌에 처하여 사회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자는 요구와 범죄자의 얼굴을 공개하라는 등의 요구는 시민들이 범죄피해의 위험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자 하는 기대가 반영된 산물이다. 형벌정책의 허구성은 바로 이 지점에 존재한다.


정부는 아동성폭력범죄에서 과실로 피해자가 사망에 이르게 된 경우에 ‘사형’을 추가하였다. 더 나아가서 현 정부는 사형을 폐지하기는커녕 지난 10년 동안 집행하지 않았던 사형을 기회를 보아 집행하려는 의향을 드러내고 있다.


이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국가의 형벌권이 무디어서, 혹은 형량이 너무 낮아서 흉악한 범죄가 일어나고 시민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강력한 엄벌정책이 범죄예방에 기여하고 범죄율을 감소시킨다는 명제는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전혀 증명되지 않은 허구적인 명제에 불과하다. 강력한 형벌의 예고와 집행을 통하여 잠재적 범죄자의 의지를 꺾을 수 있다는 식의 고전적 일반예방사상은 실효성이 입증되지 않는다. 오히려 지나치게 가혹한 형벌정책은 범죄자로 하여금 체포 등을 회피하기 위하여 피해자를 살해하는 등 더욱 흉포한 범죄로 나아가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우리사회는 지난 10년 동안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다. 최근 잇따른 살해사건이 언론에 부각되기는 했지만 통계상으로 보면 지난 10년간 살인범죄가 눈에 띄게 증가하지는 않았다. 1998년 966건이었던 살인범죄 건수는 2000년대에 들어 대략 1,000 ~ 1,100건 정도로 소폭의 증감을 반복하고 있다. 증가율로 보면 사형이 엄격하게 집행되었던 과거 70년대와 80년대에 살인범죄의 증가율이 최근보다 더 높았다. 지난 10년간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어도 살인 범죄가 과거에 비해 크게 늘어난 것은 아니다. 이는 사형을 폐지한 외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형제를 통해 살인 등 강력범죄를 예방할 수 있다는 주장은 그 효과가 전혀 입증되지 않은 셈이다.


사형 등 강성 형벌정책이 흉악한 범죄로부터 시민의 안전을 지켜 줄 것이라는 생각은 분명 환상이다. 범죄자 개개인에 대한 강력한 형벌정책을 통하여 시민들이 안전감이 증대된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권력과 언론이 만들어낸 위험통제정책의 허구적 이미지에 불과하다.


그래도 잠재적 피해자의 보호를 위해서는 재범의 위험성이 강한 범죄자에 대해서는 특단의 강력한 응징정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전자팔찌, 치료감호제, 유전자정보의 등록 등이 그러한 기대를 배경으로 하여 등장한 제도들이다.


최근에 도입된 위와 같은 정책을 보면 단순한 처벌강화를 의도하는 것이 아니라 ‘위험’에 대한 국가의 감시권력을 강화한다는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위험한 범죄자’로부터 시민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는 점이 국가의 감시권력을 본격적으로 강화하는 정책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형국이다.


이러한 위험통제시스템은 일단 범죄를 저지른 자가 재범을 할 ‘위험’이 있다고 인정되면 이를 근거로 하여 형벌 외의 추가적인 감시체계가 작동하는 시스템이다. 이러한 감시시스템은 범죄자의 프라이버시에 관한 수많은 정보를 국가가 축적함으로써 전방위의 감시사회가 다가옴을 예고하고 있다.



‘정상인’과 ‘위험한 자’라는 위험한 이분법


국가의 감시는 시민에 대한 복종과 강제의 전술이다. 감시받는다는 느낌만으로도 보통의 사람들은 행동거지를 조심하게 마련이지만, 감시는 그 이상의 사회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감시를 통하여 축적된 정보는 누군가에 의하여 분석되고 분류·체계화될 것이다. 그렇게 축적된 정보를 이용하여 사람들의 행동을 분석하고 이를 통해 소위 ‘인물’의 유형이 만들어지고 그 인물의 선호도와 위험도가 측정되며, 위험한 인물에 해당하는 사람에 대한 감시는 더욱 강화될 것이다.


“현금자동인출기 앞에서는 모자를 푹 눌러쓰거나 짙은 선글라스를 끼지 마라.”
“남의 아파트단지 엘리베이터 앞에서 서성거리지 마라.”


이런 말이 우리 사회의 도덕규범이 되어가는 시대이다. 그런 행동을 보이면 위험한 인물로 찍혀 순식간에 감시의 눈초리가 강화될 것이고 어느덧 경찰관의 불심검문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감시권력의 속성이다. 이렇게 볼 때, 국가가 개인의 유전자정보를 축적한다는 것은 어떤 유전자형을 가진 사람들이 포악한 성격을 지녔다거나, 강력범죄를 많이 저지르는 유전자형은 무엇이라는 식의 논의로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감시권력의 속성은 분류를 통한 통제에 있다. 분류는 예측과 재단을 통하여 시민들 모두에 대한 통제, 그리고 분류에 기초한 차별적 통제를 정당화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위험통제정책은 필연적으로 모든 시민에 대한 감시권력을 강화시킨다. 시민들은 ‘잠재적 피해자’의 입장에서 안전이 증대되기를 바라고 범죄피해의 위험을 감소시킬 수 있는 정책을 원한다. 하지만 그 정책은 역설적으로 모든 시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이러한 위험통제정책은 대단히 위험한 인권침해적인 정책이다. 산업사회에서 사람들은 그가 속한 사회적·계급적 지위에 의하여 분류되고 통제되었다. 그러나 위험사회에서 시민들은 위험성의 정도에 따라 분류될 것이다. 이것은 ‘선과 악의 대비효과’로 나타난다. 성폭력범죄를 놓고 보면, ‘연약한 아동’과 ‘파렴치한 성인’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동성폭력범죄자를 소아성기호증 등 정신적 이상을 지닌 ‘정신질환자’로 취급함으로써 ‘정상인’과 ‘위험한 정신


장애자’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정책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아동성폭력에 관하여 시민들에게 잘못된 환상을 심어주게 된다. 대다수의 아동성폭력범죄가 아는 사람에 의하여 발생하고 있고 청소년 또래에 의한 아동성폭력이 매우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아동성폭력범죄자는 마치 ‘특별한 정신이상을 가진 낯선 성인’이라는 사회적 이미지를 구축한다. 이를 근거로 하여 그처럼 위험한 정신적 장애가 있고 파렴치한 범죄자를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시키는 강성 형벌정책을 펼치려 하고 있다. 이는 성폭력에 관한 잘못된 사회적 이미지와 담론을 형성하게 되며, 지극히 위험한 일부 몇몇 성폭력 범죄자만 제거하면 우리 아이들이 성폭력에서 안전한 세상에 살 것처럼 시민들을 호도하는 정책에 다르지 않다.


‘정상인’과 ‘위험한 자’의 이분법적 구도를 내포한 작금의 형벌정책은 결국에는 시민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권리와 자율적 삶의 공간을 축소하게 된다. 여성들에게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에게 위험한 인물의 선별법을 가르쳐야 하는 세상이 될 테니 말이다. 이는 궁극에는 시민사회의 민주주의적 연대를 붕괴시킬 위험을 안고 있다.


그렇다면 위험한 범죄자를 골라내어 강력한 처벌을 부과하는 정책이 과연 실제로 범죄의 감소에 기여하기는 하는 걸까? 이에 대하여 통계수치를 가지고 답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지적할 것이 있다. 어떤 범죄자를 위험하다고 낙인찍고 그를 사회적으로 배제하고자 하는 정책은 우리 사회에서 그러한 위험성이 구조적으로 배태되는 문제를 도외시해 버린다는 점이다.


사이코패스, 소아성기호증 같은 말이 유행하고 있다. 반사회적 인격장애로 인해 죄의식이나 피해자에 대한 동정심 따위는 전혀 없이 범죄를 즐기는 인물 내지 그 정신적 증상을 사이코패스라고 부른다. 소아성기호증이란 성적 만족의 대상으로 어린아이를 선호하는 성향으로 정신질환의 하나로 분류되고 있다. 사이코패스나 소아성기호증 같은 증상을 가진 사람은 교정과 치료가 잘 되지 않으며 재범의 위험이 매우 높다는 공통적인 특징을 보인다.


하지만 사이코패스나 소아성기호증 같은 진단을 받은 사람의 대부분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평범한 이웃사람이 왜 그렇게 변하였을까를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각박하고 치열한 생존경쟁만을 강조하고 사람들 사이의 정상적인 소통의 문화가 차단된 사회가 될 수록 경쟁에서 낙오한 사람들은 비참할 정도의 인격적 소외와 고통을 가지게 될 수 있다. 그것이 개인에 따라서는 사이코패스라는 증상으로 혹은 소아성기호증 같은 증상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생존경쟁에서 낙오한 사람을 그저 개인적 능력이 부족한 사람으로 취급하고 철저하게 우리 주변에서 소외시키지 않았던가. 몇몇 살인범죄자를 사형에 처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각박한 사회구조와 문화가 개선되지 않는 한 제2, 제3의 사이코패스 살인범은 계속 출현할 것이다.
범죄예방정책은 범죄자에 대한 가혹한 형벌을 통하여 단기간에 그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으로는 형벌권을 행사하는 국가권력의 민주적 정당성에 대한 신뢰가 뒷받침되어야 하며, 시민들 사이의 공동체적 유대를 강화하고 규범에 대한 신뢰를 유지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사회적 메커니즘(교육, 복지제도 등)이 형벌제도와 함께 원활하게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고 근본적인 대책이 되어야 한다.



피해자 보호와 지원 누락된 엄벌주의


잠재적 피해자의 인권, 즉 시민의 안전에 대한 욕구가 전면에 등장할수록 실제 범죄피해를 당한 피해자의 고통과 그 치유의 문제는 정책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는 경향이 있다. 피해자를 보호한답시고 법률명에 피해자의 이름을 따서 붙이는 식의 정책은 유치한 발상이다. 그것은 정부가 피해자를 그만큼 배려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는 상징적 제스처에 불과하다.


졸지에 범죄피해를 당한 피해자(내지 그 가족)는 사실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피해자들은 신체적, 물질적 피해를 입게 되지만 그것 못지않게 중요하게 인식해야 할 피해가 바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이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1980년대에 들어서서 비로소 의학적 병명으로 공식화되었는데, 범죄피해를 당한 피해자들은 크든 적든 간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다고 한다. 많은 피해자들이 대인공포증에 시달리기도 하며, 심한 경우에는 직장생활이나 사회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삶이 파괴되기도 한다.


그리고 피해자들이 경찰이나 검찰, 법원 등 형사사법기관과 접촉하면서 겪게 되는 소위 ‘2차적 피해’의 문제는 매우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이다. ‘2차적 피해’란 피해자가 형사절차에서 또다시 피해를 당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신고나 고소를 받은 경찰관의 무뚝뚝한 질문태도라든가 법정에서 증언하기 위하여 대기실도 없이 장시간 기다려야 하는 불편과 같이 사소해 보이는 것에서부터 범죄자로부터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하는 신문내용, 공개법정에서 사생활까지 증언해야 하는 부담 등에 이르기까지 피해자들이 형사사법기관과 접촉하면서 겪게 되는 고통과 부담은 매우 크고 또한 다양하다. 이는 다른 범죄보다도 특히 강간죄를 비롯한 성폭력범죄의 여성피해자들의 경우에 심각하게 문제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07년 8월 범죄피해자의 보호를 위한 권고를 내놓으면서 피해자들이 범죄피해의 고통을 치유하고 사회적인 삶에 복귀할 수 있도록 국가가 적절하게 지원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형사사법에서 피해자들이 2차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피해자의 형사절차상의 권리를 강화해야 한다는 점을 국가의 책무로 지적한 바 있다.


피해자의 고통 치유를 위한 사회적 지원을 강화하는 것은 국가의 인권보호 과제에 속하는 중요한 사항이다. 이러한 피해자 인권보호의 과제는 헌법적 원칙에 근거하여 설명할 수 있다. 헌법은 범죄피해자가 향유할 수 있는 권리로서 피해구조청구권(헌법 제30조)과 피해자의 진술권(헌법 제27조 제5항)을 규정하고 있다. 피해구조청구권은 피해자가 당한 고통과 피해를 치유하는데 있어서 국가의 사회복지적 지원의무를 규정한 것이며, 피해자의 진술권은 피해자에게 형사재판을 청구할 권리는 인정되지 않는 한편으로 검사의 공소제기로 진행되는 형사재판에서 자신의 의견을 반영할 기회를 부여한다는 점에 그 의미가 있다. 더 근본적으로는 국가의 피해자보호 의무는 헌법 제9조의 인간의 존엄성보장, 제10조의 국가의 기본권보장의무, 그리고 사회국가 원칙을 근거로 하여 도출된다.


특히 아동피해자, 가정폭력이나 성폭력 등의 여성폭력피해자, 장애인피해자, 학교폭력의 피해자 등은 특별한 보호가 필요한 피해자들이다. 이들이 겪는 범죄피해의 경험은 많은 경우에 권력적 착취의 속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다른 일반 피해자와 구별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피해가 일회적이지 않고 장기간에 걸쳐 피해자의 삶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국가가 이와 같은 피해자보호정책을 등한시하고 심각한 범죄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겉으로는 피해자의 인권을 이야기하면서도 결국 이를 빌미로 하여 엄벌주의 형벌정책만을 강화해 왔다는 점에 대해서는 냉정한 비판과 성찰이 있어야 한다. 이제 진정 피해자의 인권을 이야기하려면 피해의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피해자에게 그 고통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는 지원정책, 그리고 형사절차의 2차적 피해로부터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정책에 초점을 두는 방향으로 피해자보호정책을 강화할 필요가 매우 절실한 상황이다.



민간단체의 피해자 지원 절실


오늘날 피해자보호정책에 있어서는 시민사회 영역에서 성장한 민간단체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외국의 경우를 보면 대체로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주로 성폭력 등 여성폭력 피해자, 음주운전 피해자 등에 대한 보호를 위하여 민간의 피해자보호단체가 결성되어 피해자지원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하였다. 독일의 Weißer Ring이라든가, 영국의 National Association of Victim Support Schemes 등은 전국적인 조직을 갖춘 피해자지원단체이다.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한 피해자 지원은 주로 피해 초기단계의 위기개입, 경찰이나 법원출두 시 동행보조, 무료법률지원, 치료가 필요한 경우 치료기관 연계 등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나라에서 범죄피해자에 대한 지원을 주된 목적으로 한 민간단체는 주로 여성폭력피해자에 대한 지원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으며, 1990년대 들어 인권단체들은 주로 국가공권력범죄에 의하여 피해를 당한 피해자의 지원에 주력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2003년경부터 법무부의 지원 하에 각 검찰청에 대응하는 「범죄피해자지원센터」가 전국적으로 설립되어 활동 중인데, 그 설립을 법무부가 주도한 결과 피해자지원센터가 진정으로 피해자의 인권보호에 주력하기 보다는 검찰의 이해관계에 부응하여 활동하는 측면이 강하다는 점은 문제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아무튼 오늘날 민간의 피해자지원단체의 역할이 증대되고 전문화되면서 이에 대한 국가의 재정적 보조와 후견·감독의 역할이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 즉, 피해자지원제도의 전반적인 중점은 국가주도에서 사회공동체의 네트워크 속에 민간주도 혹은 민관합동의 피해자지원체계를 뿌리내리게 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국가의 역할은 이러한 사회적 네트워크에 재정을 지원하고 후견하는 일이 중심이 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피해자의 보호와 지원에 보다 전문적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는 국가와 시민사회 영역의 관계 내지 역할분담의 문제이다. 영국의 경우 초기 피해자지원단체들은 국가의 형사사법체계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고 대립적인 관계로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여성폭력에 대한 피해자지원단체들, 그리고 인권단체들이 주도하고 있는 공권력에 의한 피해자에 대한 지원 등은 국가의 형사사법시스템에 대하여 비판적인 경향과 대안적인 법제도 개혁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민간의 피해자 지원활동에 대하여 국가의 재정적 보조와 후견·감독의 역할이 강조되면 될수록 피해자지원단체들의 비판적, 개혁적 역할이 감퇴하는 결과로 나타날 위험이 있음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피해자지원정책에 있어서 피해자에 대한 직접적 금전적 보상보다는 피해자의 사회적 삶의 회복을 위한 지속가능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데에 보다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점이다. 피해구조제도와 같은 금전적 보상제도는 피해자보호에 기여하는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금전적 보상 위주의 정책은 ‘보호대상으로서의 나약하고 억울한 피해자상’을 전제로 하는 정책이라면, 비금전적 지원 위주의 정책은 ‘자율적 삶의 주체로서 그리고 자율적 갈등해결의 힘을 지니는 피해자상’을 상정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는 피해자보호정책의 방향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폭력·가정폭력·아동학대 등의 피해자, 고문 등 국가권력의 남용으로 인한 피해자 등에 대해서는 지속적이고 총체적인 지원시스템을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상담 등을 통한 피해의 트라우마 극복뿐만 아니라 의료지원, 법률지원, 피난처제공, 자녀교육에 대한 서비스, 취업지원서비스 등이 다양하게 연계된 피해자 지원 체계를 마련하는 문제가 시급히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피해자 인권보호란 갈등의 당사자인 피해자가 갈등해결의 주체로서 대우받아야 한다는 점, 그리고 피해자가 피해의 고통을 치유하고 극복함으로써 자기 삶의 자율적 주체성을 회복하고 다시금 사회적 연대에 합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임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많은 복지정책이 그렇듯이 그저 ‘피해자보상’이라는 이름하에 돈 몇 푼 지원해 주는 것이 피해자 보호정책의 전부일 수는 없다.


범죄사건을 접하면서 흔히 피해자 인권을 말하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차원의 문제가 얽혀 있다. 첫 번째 차원으로 잠재적 피해자의 인권보호, 이것은 시민의 안전을 확보하는 일이며 효율적인 범죄예방정책의 문제이기도 하다. 최근 사형의 집행도 불사하려는 정부의 엄벌주의 형벌정책이 과연 범죄예방에 기여하고 시민의 안전을 담보해 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보다 진지하고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범죄자의 신상공개라든가 전자팔찌, 사형 등의 엄중한 응징정책은 범죄자에 대한 최소한도의 인권보호를 저버릴 것을 요구하지만, 막상 그러한 강성 형벌정책을 통하여 흉포한 범죄로부터 시민의 안전이 확보될 것이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강성 형벌정책의 선구자이면서 백화점이라고 볼 수 있는 미국에서 흉악한 강력범죄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곰곰이 되짚어보아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범죄예방정책에 대한 우리 사회의 담론지형은 ‘잠재적 피해자의 인권’과 ‘범죄자의 인권’을 서로 대척점에 두는 담론구조에서 하루 빨리 탈피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실제 범죄피해를 당한 피해자에 대한 보호의 과제는 매우 중요한 반면에 국가의 정책이 이를 너무 소홀히 취급해 왔다는 점에 대해서 비판적 성찰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피해자의 인권보호정책은 범죄피해를 당한 피해자가 자신의 삶에 대한 주체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실질적인 피해자지원정책이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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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중 | 서강대 법대 교수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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