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에 대한 필사적인 책임 전가
보통 연쇄살인은 불특정을 대상으로 하는 동기 없는 살인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사회 시스템의 위기를 나타내주는 충격적인 징후로 받아들여지며, 따라서 연쇄살인이 일어나면 언론, 경찰 등은 제도의 유능함을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진다. 우리 모두가 서로를 적이라고 생각하고, 언제든지 죽임을 당하거나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사회가 완전히 무너지고 있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찰과 미디어, 그리고 대중들은 연쇄살인범을 정신 나간 사이코로 몰아붙이거나, 혹은 범행동기에 천착함으로써 원인을 찾고자 한다. 하지만 <추격자>에서 지영민은 결코 살인의 동기에 대해 진술하지 않는다. 진술서에 살해동기가 적혀 있지 않은 것을 본 경찰의 고위간부는 보고서로 현장 형사의 머리를 내리치며 다시 조사해오라고 말한다. 그 뒤 범죄심리학자가 등장하고, 살인범 지영민은 발기부전에 시달리는 성불구자라는 것이 암시된다. 그리고 그가 처음 만난 출장마사지사 여성이 그의 사랑을 거부했다는 내용이 뒤를 잇는다. 아마 이후 그의 범행동기를 적는 빈칸은 여자에 대한 분노와 좌절된 성욕이라고 채워졌을 것이다.
이런 식은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정확하게 동일했다. 유영철은 범행동기를 묻는 기자들에게 “여성들은 함부로 몸을 굴리는 일이 없고, 부유층은 각성했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다. 이렇게 그는 자신이 저지른 살인에 대해 피해자를 비난함으로써 정당화하고 싶어 했다.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그가 여자와 노인을 죽인 것은, 그리고 그 중에서도 성매매 여성들을 많이 죽인 것은 그녀들이 쉬운 표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론은 충실하게 이런 그의 말을 받아 적었을 뿐만 아니라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언론에서는 유영철이 “아담한 미인”만을 골라 죽였으며, 그의 전처가 아담한 미인이었다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도했다. 그리고 그의 범행동기는 전처의 이기적인 선택에 상처받는 남편이라는 스토리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실제 유영철은 뚱뚱하거나 키 큰 여자는 무겁고 운반이 어려워서 기피했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그의 사건일지를 보면 최초 3~4건의 살인은 경비가 상대적으로 허술한 단독주택에 침입해서 노인을 죽이는 것으로 시작했다가 이후 여자들을 표적으로 하기 시작하고, 출장마사지사 여성들이 무엇보다 쉬운 표적이라는 것을 발견한 다음부터 출장마사지사 여성들만을 죽였고 이때부터는 살해간격이 짧아지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유영철은 “붙잡히지만 않았다면 올해 안에 1백 명쯤은 거뜬히 죽였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언론과 경찰은 연쇄살인범의 범행동기를 여자로부터 버림받은 것으로 필사적으로 포장하면서, 그 역시 우리 사회가 낳은 인간 중 하나이며 그가 사회안전망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성매매 여성들의 상황을 이용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얼마나 범행을 저지르기가 손쉬웠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시작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살해당하는 여성들은 또한 살해동기를 제공한 여성들이므로, 문제는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몸을 함부로 굴리”거나, “남편에게 헌신적이지 않은” 여성들에게로 돌려지게 된 것이다.
가해자 분리와 피해자 삭제의 패러다임
이렇듯 성범죄자에 대한 사회의 태도는 보통 그를 정신병자로 몰거나, 혹은 사회 전체의 광기와 연결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유영철을 둘러싼 보도태도는 피해자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졌는데, ‘동정과 연민’은 그가 성매매 여성들을 죽였다고 할 때 발휘되었으며, 그에 대한 ‘분노와 공포’는 그가 죽인 사람 중 결혼을 앞둔 예비신부와 월미도에서 발견된 황학동 노점상도 있었다는 것이 알려질 때였다. 그렇다면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가장 쉬운 설명 중 하나는 그가 사이코패스였다는 것이다. 사이코패스란 지적인 측면에서는 문제가 없지만, 도덕적·윤리적인 측면이 미숙한 이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연쇄살인범 파일』의 저자 해럴드 세터는 사이코패스인 사람의 특성으로 감정이입을 전혀 하지 못하고, 사랑을 하거나 남을 보살피지 못하고, 미안한 감정도 가지지 않으며,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도 가지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그들에게 타인은 자신의 욕망이나 이익을 얻기 위해 이용할 대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사이코패스의 특성은 소름끼치게도 남성들이 성판매 여성을 대하는 태도와 매우 유사하다. 대부분 남성 성구매자들은 성구매 행위에 대해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과 유사한 태도를 보인다. 이들은 성매매 여성들을 사랑하거나 보살펴주거나 미안해하지 않고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지만, 자신의 아내 혹은 가족들에게는 죄책감을 느낀다고 답한다. 그리고 오히려 성매매 여성들을 사랑하고 보살펴주려는 남자들은 지나치게 낭만적이거나 소년처럼 미숙하다고 평가되기까지 한다.
문제는 누군가 인간이 아닌 존재로 치워지기 시작하면, 다른 누군가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데 있다. 나치가 유태인, 집시, 폴란드인, 동성애자 등 점차 범주를 확대해가며 학살한 전례를 볼 수 있듯이, 인간 중 누군가가 인간이 아닌 예외 상태가 되기 시작하는 그 순간 모두의 인간성은 위기에 처하게 된다. 또한 그 예외 상태의 출발이 되는 것은 예외 없이 성매매 여성들이었다. 성매매 여성은 쉬운 표적이 되기 때문에 피해자가 되고, 이런 피해를 발생시키는 원인은 엄마의 불성실 혹은 아내의 부정 때문이라고 얘기되면서 모든 문제는 여성들에게로 다시 돌아간다. 그리고 누가 왜 이렇게 쉬운 표적이 되는지는 인권의 차원에서 제기되지 않고, 연쇄살인범에게도 인권이 있는가, 그를 사형시키는 것이 문제의 해결인가, 라는 논의로 옮겨진다. 그리고 이 논의는 다시 국가 폭력의 정당성에 대한 논란으로 이어진다. 여기에서 성매매 여성들이 사회안전망으로부터 완전히 예외상태였던 상황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새 사라져버린다.
피해자 인권논의의 새로운 단계를 위해
지금까지 한국사회 대부분의 인권운동과 담론은 국가권력으로부터 생존과 존엄의 자유를 쟁취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으로 전개되었다. 불행하게도 한국사회의 공권력은 한 번도 공동체의 질서 유지를 위해 제대로 작동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정 계층의 특권적 이해를 지키기 위해 공권력이 동원되었던 한국의 역사에서 인권운동이 가진 핵심 의제는 국가의 통제와 폭력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러나 국가주의차원에서 일어나는 폭력이 아니었을 때, 남성중심주의 혹은 단일민족중심주의, 지역주의, 학벌주의, 이성애중심주의 등 시민들의 각기 다른 층위와 위계로부터 폭력이 발생하게 될 때 국가는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통치권력을 발동시키고자 한다. 예를 들어 어린이 관련 흉악범죄가 발생하면 국가는 어린이를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유전자검사, 전자발찌, 신상공개 등 다양하고 강력한 가해자처벌수단을 발표하곤 한다. 인권운동은 이러한 피해자 인권문제를 국가가 자신의 통치 권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경계심을 가져왔다. 그러나 국가주의에 저항한다는 것이 곧 무정부주의를 지지한다는 말과 등가를 맺지는 않는다. 국가는 공동체를 성립가능하게 해주는 사회적 약속들의 총합으로서, 사람들 간에 발생하는 분쟁과 폭력에 대한 토론장으로서, 개방된 형식으로 국민-국가와 분리해서 사고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인권이 국가에 의해 침해되었을 때 그것은 모두의 문제가 되지만, 소위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시민들이 국가와 연합하여 ‘비정상’적이고 불법적인 비시민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문제는 종종 침묵되곤 해왔다.
여성에 대한 인권침해는 대부분 국가가 아니라 남성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여성에 대한 폭력을 금지하자고 요구하는 것은 여성들 자신에 의한 집단적 투쟁을 통해 20세기 말에야 비로소 가능해졌다. 여기에서 가해자에게‘도’ 인권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유영철을 통해 사형제도를 부활하고자 하는 움직임에 대한 경계심만큼, 유영철의 쉬운 표적이 된 출장마사지사 여성들의 인권에 대한 경각심이 작동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의미에서, 나는 ‘가해자’ 인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가해자라는 위치는 상대의 인권을 침해한 것으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에, 가해자는 처벌되거나, 사과하거나, 용서를 구해야 하는 위치이지 인권을 주장하는 위치가 될 수 없다. 물론 이는 재소자의 인권을 무시하자는 의미는 아니다. 유영철의 인권은 그가 공권력에 의해 검거된 이후, 감옥 안에 있을 때의 위치에서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것이 된다. 인권은 이렇게 권력관계로부터 생겨나는 맥락적 상황에서 도출되는 것으로 이야기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추상적 인권을 보편적으로 적용하려는 과정에서, 유영철의 인권은 어떤 상황에서나 의미 있는 것으로, 양도 불가능한 가치로서 숭고화된다. 반면, 유영철에게 죽음을 당한 여성들은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자기의 생존가능성을 정당화시켜주는 언어를 가지지 못한 채 정치적 인권의 장에서 탈락되어버린다. 강간당한 여성, 성매매된 여성, 가정폭력당한 여성은 피해를 이야기하는 그 순간부터 남성중심주의의 시선들 속에서 이미 인간성이 파괴된 존재로, 더 이상 사는 의미를 상실한 존재로 그려지기 시작한다.
그렇기 때문에 보편적 인권 담론이 이런 인간과 인간 간의 비대칭성을 삭제한 채, ‘모두에게 인권이 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듣기에는 좋으나 아무런 해결도 하지 못하는 꽃노래로 그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국가권력의 팽창을 우려하는 목소리에 묻혀 지금 여기 존재하는 사람들 간의 폭력을 어떻게 중재하거나 해결할 것인지에 대한 대답을 미루게 하는 지연의 계기로 작동하게 된다.
때문에, 더욱 강한 처벌기제와 병리적 구분을 통해 가해자를 인간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에 저항하기 위해서라도, 여성 등 오랫동안 차별받아왔던 특정 집단에 대한 인권이 반복적으로 침해되는 현실을 변혁하기 위한 목표는 더욱 분명해져야 한다. 실제로 유영철을 취조한 베테랑 형사 중 한 명은 유영철을 취조한 이후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또한 유영철이 죽인 피해자의 유족 중 한 명은 유영철이 살해현장을 재연하는 것을 보고 정신과 치료를 받다가 자살했다. 그가 저지른 범죄가 단순한 미친 ‘사악함’이 아니라, 그런 사악함이 인간 안에 있었다는 인식이 이들에게 상처를 입혔던 것이다. 유영철 사건에서 우리가 고통스러운 것은, 그도 사실 인간이며, 그런 인간을 만들어낸 사회의 공동 책임에서 피할 수 없다는 심정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해자 인권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는(어쩌면 유일한) 윤리적인 자리는 자기 자신이 바로 그 범죄와 맺고 있는 관계를 인정하고, 피해자의 고통을 함께 책임지겠다는 태도를 통해서만 가능해질 것이다.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