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人터뷰] 스무 살 세현의 꿈 그리고 긍정의 힘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중학교 2학년 초까지 운동선수를 했었어요. 필드하키선수. 그랬는데…. 어렸을 때부터 아빠의 가정폭력이 되게 심했어요. 엄마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그런 환경에서 자라왔고, 초등학교 때부터 나도 아빠한테 내가 원하지 않는 학습을 받은 거잖아요. 폭력에 대한 학습. 그대로 친구들한테 막 하고. 나는 활동하는 거 좋아하고 몸으로 하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필드하키라는 게 몸싸움도 하고 여자들 하기에는 격한 운동이에요. 하키를 하다 부상을 당했어요. 그때 다치고 나서 학교 선수부는 해체가 됐고, 해체되면서 집안 분란이 더 크게 일어났죠.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아빠의 행동들은 더욱 심해지고 게다가 엄마까지 병에 걸려서 앓아누웠고. 아빠가 너 운동한다고 처들인 돈이 얼만데 그만 뒀냐면서, 아무리 해체됐다고 말해도…. 그날도 어김없이 아빠한테 엄청나게 맞고 아빠가 학교에 가서 담임하고 교장 멱살 잡고 몸싸움을 했나 봐요. 그 뒤로 학교 그만두고 집을 나와서 숙식 제공해주는 아르바이트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그룹홈이란 곳을 알게 되었고, 그룹홈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었고, 다만 한 달에 얼마라도 엄마한테 보내주게 되었고.”


인터뷰가 시작되자 세현은 지난 시간을 이렇게 요약했다. 이제 스무 살. 그야말로 파릇파릇한 청춘이 지난 20년을 이렇게 정리하기까지 얼마나 자신의 과거를 곱씹고 곱씹었을까.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청소년 중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이들을 찾다가 만난 이가 세현이였다. 이 요약발언을 듣고 촛불집회와 청소년 알바, 이 두 가지 이야기 못지않게 나는 세현의 이야기를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간단히 말고 복잡하게, 요약하지 말고 풀어서 이야기를 해달라고 부탁하자 “저는 기억력이 너무 좋아서 세살 때부터 기억이 다 나요. 아빠가 엄마에게 어떻게 했는지 그때 내가 뭘 했는지. 사람들이 그것도 병이래요.”라며 세현은 아무렇지 않게 “하하하” 웃는다.



“합숙을 하면 아빠한테 맞지 않겠구나”


“초등학교 졸업할 때 되면 중학교 운동선수들이 내려와서 체육점수 높은 애들한테 우리학교에 이런 운동부가 있는데 올래? 물어보고 그러거든요. 너, 들어오면 학교생활 편해진다, 그러고. 그런 것도 있었고 무엇보다 진짜 끌렸던 게 뭐였냐 하면 선수들은 합숙을 한단 말이에요. 합숙을 하면 아빠한테 내가 그렇게 맞으면서 있지 않아도 되겠구나. 그래서 간 거예요. 합숙하면 집으로부터 이제 해방이다 생각이 들어서. 6학년 겨울 방학 때부터 합숙을 해서 신입생 훈련을 받았고, 중학교 올라가서도 계속 합숙을 하고, 방학 때만 집에 오고. 그러면서 되게 행복했죠.
운동하면 선배들이나 코치 선생들이 마구잡이로 때리는 게 아니라, 욕설 퍼부으면서 때리는 게 아니라, 너희 군기가 많이 빠졌다 그러면서 정해놓고, 엎드려놓고 빳다로 때리잖아요. 맞는 게 좋은 게 아니라 아빠한테 너무 맞아가지고 맷집이 너무 세잖아요. 운동하면서 맞는 거는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선수 생활을 한 게 꿈을 키워서 유명해져야겠다, 그런 거보다는 아빠한테 벗어날 수 있겠다 그래서죠, 솔직히.
신입 때는 되게 잘 해줘요. 때릴 것도 말로 하고. 근데 신입 딱지 끊고 나서는 엄청나게 맞는 거예요. 진짜에요. 근데 제가 운동하면서도 굉장히 견딜 수 없었던 거는 한 선배가 저를 굉장히 미워했어요. 그래서 아빠랑 맞았던 거 해방 돼서 진짜 잘 살고, 평화롭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선배로 인해서 문득 아빠 생각이 다시 나는 거예요. 빳다를 치는 게 아니라 싸대기를 막 때리고, 코치만 없으면 저를 그렇게 괴롭히는 거예요. TV 보다 괜히 너 자지 말고 엎드려 있어, 그러면 졸려 죽겠어도 참아야 되는 거잖아요. 2년 선배, 중학교 3학년이었죠.
솔직히 그런 운동이 있는 지도 몰랐어요. 그러니까 더 신기하잖아요? 축구, 농구, 배구는 많이 보고 해봤어도, 이상한 장비 입고 아이스하키 하는 건 봤어도. 자랑은 아닌데 소질이 없던 건 아니었어요. 그리고 훈련받는 거, 검게 그을리는 것도 다 좋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는 다른 집도 다 우리 집처럼 이러나보다,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지금 드는 생각이, 그 어린 나이에 얼마나 고통을 겪었으면 다른 애들 다 힘들다고 하는 것도 나는 즐길 만 했을까….
그런데 중학교 2학년 초에 하키부가 해체된 거예요. 선수들이 없어서요. 누가 하고 싶다 그래도 저희가 뜯어말리죠. ‘야, 하지 마! 하지 마!’ 코치가 운동하고 싶다는 애들 꼬셔오라고 협박조로 얘기해요. 그러겠다고 하고 막상 만나서는 ‘니네, 하키부에 들어가고 싶어?’ 진짜 멋있다 어쩌구 그러면 ‘야, 환상을 깨.’ 너, 맨날 맞고 싶냐? 저번에 궁댕이 아파서 교실에 방석 이만큼 깔고 앉고 있는 거 못 봤냐? 그러죠. 그리고 체육대회 할 때 달리기 빠른 애들, 끼가 있어 보이는 애들 몇날 며칠 감독이 가서 꼬시기도 해요. 근데도 안 먹히니 해체된 거죠.
또 교장선생님이 학교 운동부에 대한 지원을 안 해줬어요. 운동부는 운동으로 대학가야 되는데 교장선생님이 수업 일수도 모자라는데 운동한다고 뭐라 그러고, 또 운동부 애들 되게 깔봤어요. 고등학교 가려면 겨울방학 때부터 애들을 고등학교로 올려서 훈련을 시켜야 하는데, 고등학교에서 빨리 중3 선수들 올려 보내라고 그러는데 안 올려 보내고. 그러니까 고등학교가 니네 학교 애들 안 받는다. 이미 다른 학교 선수들 다 받아버리니까 우리학교는 갈 데가 없는 거죠.”


학교체육의 정상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다. 솔직히 세현의 이야기만을 듣고 교장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는 없다. 어쨌건 청소년들은 그저 교육대상과 투자상품 사이를 왔다갔다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곧 베이징에서 인류의 축제라는 올림픽이 열릴 것이고, 우리가 금은동에 열광하는 동안 열두세 살의 아이들은 국민적 성원과 환호를 기대하며 얼마나 많은 폭력을 견디어야 할 것인가.


“부상당한 거는 1학년 말이에요. 그날은 일본 애들이랑 시합을 붙었는데 원래 1학년은 대기 선수예요. 하키도 열 한 명이 뛰어요. 골키퍼까지. 2, 3학년이 시합을 뛰고 부상이나 교체가 있으면 1학년 중에서 제일 잘 하는 애가 들어가는데 저희는 선수가 없으니까 몽땅 다 들어간 거예요. 대가리 수만 채워갖고. 한국 애들은 드리블을 잘 해요. 빨리빨리 약 올리면서 공을 치고 다니는데 일본 애들은 그냥 막 후려요. 무조건 태클을 넣는 거예요. 하키 채에 무릎을 맞고 쓰러졌다가 일어났어요. 일어나서 뛰려고 했는데 그냥 주저앉았어요. 저희 팀은 패배하고, 다친 데다가 졌다고 엄청 맞고. 시합에서 지면 엄청 맞거든요. 다친 데는 그냥 파스 뿌렸죠.
게임에 지고 있는 상황에서 감독과 코치 신경은 온통 뛰고 있는 데 가 있는데 저를 챙겨주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거예요. 한 일주일 지나니까 붓기도 가라앉고 괜찮았어요. 심하게 뛰지만 않으면. 그래서 내가 그렇게 크게 다친 줄 몰랐어요. 그리고 그 전에 다쳤던 게 이렇게 된 건지, 그때 다친 게 이런 건지도.
너무 아파서 갔던 게 열다섯 살이었을 거예요. 그때 가서 알았어요. 십자인대 파열 됐다고. 운동하는 도중에 한 번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인대가 늘어났다고 얘기를 들었고, 그 다음에 갔을 때 MRI를 찍어보자 그래서 엄마가 엄마 친구한테 돈을 빌려서 찍어보니까 십자인대가 파열되고 연골 손상도 됐다고. 그때는 아직 성장 중이어서 수술이 안 되니까 나중에 하자, 그러다 수술 시기를 놓쳤어요.
그 뒤로 살이 엄청 찌고, 다리병신이라고 좌절도 엄청 했고. (운동을 그만두면) 활동량이 줄어서 당연히 살이 찌지만, 운동할 때 몸무게가 52정도였는데 그만두고 한 40킬로가 찐 거예요. 10킬로만 더 쪘으면 두 배가 되는 거잖아요. 내가 다리병신이라는 거. 아빠가 때려도 도망도 못 가요. 뛰면 엄청 아파요.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도망가려고 하면 엎어져서 질질 끌려가서 또 맞고. 좌절에 좌절을 하는 거죠. 너무 답답했을 때 운동장 막 달리는 게 내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었는데… 느린 걸음 때문에 살이 더 찌는 거 같고, 불어난 살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는 거 같고, 돼지라고 놀리는 거 같고, 스스로 방탕해지고.”
많은 방황을 했다고 한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시고 담배피우고. 뭐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누구나 사춘기에 해봄직한 일일수도 있다. 하지만 세현에게는 가정과 학교라는, 세상은 울타리라 하지만 그에게는 아무런 기능도 못하고 오히려 역기능만 했던 곳과의 결별의 시간이기도 했다.



“가식적인 눈물 흘리지 말아요”


“초등학교 때 흔히 말하는 일진이었어요. 그러면서 술도 배웠고 담배 피는 것도 배웠고. 친구들 많이 때리고, 학교끼리 패싸움하면서 어떤 애들 팔도 분질러보고. 그래도 화가 안 풀리는 거예요. 나는 내가 왜 그러는지를 몰랐어요. 돌아보면 그 애가 나한테 특별히 뭘 그렇게 잘못한 것도 아닌데 쟤를 왜 저렇게 쌍코피가 날 정도로 때렸을까? 크면서 알았어요. 내가 모르는 사이에 아빠한테서 받은 화를…. 나는 내 또래 애들보다 정신적으로 높다고 생각했어요. 이런저런 경험을 하면서 자만이 아니라 솔직히 머리가 많이 컸죠. 살아남으려면, 아빠한테 어떻게 해서든지 맞지 않으려면 잔머리를 잘 굴려야 하는데 애들이 하는 짓 보면 유치하고. 그래서 또래 애들 많이 무시했던 거 같아요. 성장도 빨랐죠. 게다가 언니들을 되게 좋아해요. 어렸을 때부터 언니를 갖고 싶었거든요. 언니들과 놀다보면 나도 그만큼 생각이 크지, 친구들은 다 언니, 오빠들이지.
초등학교 때 선생님들은 모두 저를 포기했었어요. 1학년 때 선생님은 제가 친구를 하도 괴롭히니까 제 머리를 손바닥으로 내려치면서 그랬어요. 너 어디서 그런 못된 버릇 배웠니? 2학년 때는 할머니 선생님이었는데 제가 구구단을 못 외운다고 애들 앞에서 저를 무시하고 막 때렸어요. 그래가지고 학교에서 도망쳐 나온 적도 있어요. 아빠가 밥상 뒤집어엎는 거 보고 같은 동네 친구 집에 가서 아빠가 했던 짓 똑같이 따라했죠. 밥상 뒤집어 엎고. 남자 애를 목 조른 적도 있어요. 그러면 니네 엄마가 그렇게 가르쳤니? 난 선생님을 막 째려보고. 극기 훈련에 가서 선생님이 애들 엎드려뻗쳐 해놓고 때리는 것처럼 애들 엎드리게 해놓고 궁둥이도 때려주고. 5학년 때부터 언니들과 어울리기 시작하고 더 심해졌죠. 선생님 앞에서 친구들한테 물병 집어던지고, 책상 뒤집어엎고.
1학년 때부터 5학년 때까지 선생님이 다 저를 무시했고 생활기록부에 이 학생은 문제가 있음, 이런 거만 썼는데 초등하교 6학년 때 전근 오신 여자 선생님이 있었어요. 그 선생님이 제 생활기록부를 보고 저를 특별하게 봤던 거 같아요. 그 선생님만은 저를 색안경을 끼고 본 게 아니라 색안경을 벗고 봐주셨어요. 저를 많이 사랑해주셨는데 저는 관심 받고 사랑받고 싶었지만 익숙하지 않았던 거 같아요. ‘아, 뭐예요? 꺼져요!’ 하면서. 그래도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제 얘기를 먼저 들어줬고, 그 선생님에게 처음으로 얘기했어요. 우리 아빠 이러이러한 사람이에요. 비아냥하듯이. 그러니까 선생님이 울더라구요. 가식적인 눈물 흘리지 말라고 그러고 그냥 집에 갔어요. 처음 집을 나갔을 때 그 선생님이 저를 엄청나게 때렸어요. 그때 이후로 선생님이랑 말 한마디 안 했고, 이름 불러도 대답 안 하고 쳐다만 보고, 수업 받다가도 그냥 집에 가고. 어디 가냐고 하면 TV 보러 가요. 왜 늦게 왔냐고 그러면 딩동댕 유치원 보고 왔어요. 말도 안 되게 반항을 한 거죠.
그동안 어쩌면 선생님이 저에게 지쳤을지도 몰라요. 언니들이 어떤 애를 학교 앞 구름다리로 데려와라 그래서 걔를 데려고 왔어요. 그런데 구름다리에 있는 철창 하나가 부러진 게 있어서 그걸 갖고 노는데 선생님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거예요. 제가 아니라고, 아니라고 그랬는데 선생님은 철창으로 쟤 때리려고 그런 거지? 저는 그 선생님에게 너무 실망을 했고, 억울했고. 선생님만큼은 나를 색안경을 벗고 보는 줄 알았는데 다른 선생님이랑 똑같구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졸업할 때 쯤 선생님이 저를 부르더니, 너 많이 화난 거 안다, 근데 너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고 그러는 거예요. 너, 너희 아빠가 너한테 이렇게 저렇게 행동하고, 집부시고, 엄마 때리고, 그러는 거 싫지? 너 괴롭다고 했지? 네가 여태까지 친구들 괴롭히고 때리고 그런 모습이 니가 싫다고 했던 아빠의 모습과 같은 거 아니? 엄청 충격에 휩싸였어요.”


그리고 중학교에 들어와 하키부 생활에 전념하던 세진은 아버지가 학교에 찾아간 그날 이후 더 이상 학교를 나가지 않았다. “쟤네 아빠가 학교 뒤집어엎었다, 아빠가 조폭이라더라, 쟤네 아빠가 새 아빠다, 별 시답지 않은 소문들이 막 들리더라구요.” 그때가 열네 살. 그리고 몇 달 뒤 세현은 집을 나와 전단지 돌리기, 핸드폰 고리 만드는 공장 등을 전전하며 생활했다.


“집 나와서 거의 거지 수준이 됐을 때 한 목사님을 만났어요. 시골 조그만 교회 목사님이었는데 옆에 쉼터 비슷한 게 있어서 거기서 교회 일 도와주면서 살았죠. 그나마 학교 다닐 때 배웠던 걸로 지역 아동센터 공부방에서 아이들 가르치면서 한 달에 30만 원 정도 받고. 그런데 같이 살던 지도 할머니가 있었어요. 나 말고도 애들이 몇 명 있었고 사회복지사 선생님도 있었는데 선생님들이 일주일을 못 버티고 도망을 갔어요. 새벽 네 시에 애들 깨워서 교회 가야 한다고 그러고, 라면을 끓여서 주는데 어디 후원 받아서 온 건데 날짜도 지난 거를. 여름에 상한 호박볶음 먹고 배 아프다고 그러면 교회를 안 가서 마귀가 생겨서 그런 거라고 교회 가라고 그러고. 라면 국물 먹고 남은 거를 채에 걸려서 부침개를 해주고 안 먹으면 하나님한테 벌 받는다고 억지로 먹어라 그러고. 저희가 해먹는다고 하면 남은 음식 다 먹고 먹으라고 냉장고 문을 잠그고. 사회복지사 선생님도 그 할머니 때문에 그만뒀죠.
거기 있다가 1318(한국청소년상담원)을 알게 되어서 지금 있는 그룹홈까지 오게 됐죠. 제가 그룹홈으로 오고 나서부터 집안이 좀 바뀌었어요. 엄마는 저에 대한 짐을 던 거잖아요. 자식이 둘인데 하나는 덜었기 때문에 아빠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고. 엄마가 제가 집 나오고부터 일을 시작하고 아빠 몰래 돈을 모았대요. 제가 늘 그랬거든요. 나 다 컸으니까 엄마 도망가. 그 전에도 시도는 있었는데 항상 아빠한테 붙잡혀왔어요. 엄마 일하는 식당에서 깨부순 거울, 물품 물어주면서 엄마는 월급도 못 받고. 그런데 제가 그룹홈에 올 무렵 엄마도 도망갈 자금을 마련해서 아빠 몰래 나온 거죠. 그리고 아빠랑 연락이 끊겨서 강제이혼을 했죠. 엄마가 맞고 그랬던 거 진단서도 없고 그래서 내가 법원에 가서 증언도 하고. 그래서 제 양육권도 엄마가 갖고. 두 살 위인 오빠 하나가 있는데 그 사람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그 사람을 별로 안 좋아해요. 아빠보다 더한 고통을 우리 엄마한테 줬고, 저한테도 엄청난 상처를 준 사람이어서….
지금 있는 곳은 ‘들꽃 피는 청소년 세상’이라고. 대안학교도 있고 쉼터도 있고 그룹홈도 있고, 공부방도 하고. 지금 같이 사는 목사님과 사모님이 공동대표예요. 열일곱 살 때 들꽃에 들어와서 쉼터에 있으면서 대안학교에서 중학교 검정고시를 봤고, 그룹홈 들어와서 방통고에 들어갔어요. 그룹홈에는 저랑 동갑짜리 두 명, 열아홉 살 짜리 한 명이랑, 막내랑. 막내가 저랑 같이 방을 써요.
지금 목사님이나 사모님은 교회가라고 강요하지도 않고, 저희 집 옥상이 흡연실이에요. 저희가 옥탑방이랑 옥상을 같이 쓰거든요. 옥상에서 애들이 안 보이게 재떨이 만들고 그러는 거는 뭐라고 안 그러셔요. 목사님이 옥상에 올라오시면 끄죠. 그건 예의니까. 오늘 기분이 너무 안 좋아서 술 한 잔 하고 들어갈게요, 그러면 너무 많이 마시지 마라, 그러시고. 여기 들어와서 무릎 수술도 했어요. 인대 이식수술을 세 번. 제가 기초수급권자여서 의료보험이 됐지만 그래도 몇 백은 들었을 거예요.”


열네 살 무렵 시작된 아르바이트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룹홈이 안산에서 신림으로 이사를 오면서 구청의 지원도 받게 되었지만 넉넉한 생활일 리가 없다. 게다가 이제 곧 닥치게 될 자립을 준비해야 한다.



“그대로의 나를 인정받고 싶었어요”


“전단지가 태어나서 처음 해본 알바였어요. 친구들하고. 그리고 주유소, 식당, 공장, 편의점, 뭐 여러 가지를 했죠. 해왔던 알바 중에 좋았던 거는 없었어요. 그나마 가장 일하면서 좋았던 거는 알바가 아니라 노동부에서 하는 직장체험 프로그램이었어요. 하루 네 시간씩 일주일에 20시간, 한 달에 80시간 채우면 30만원씩 주는 거였는데 1인당 6개월밖에 못해요. 그거 하면서 가장 좋았던 거 같아요. 안산시 장애인복지관에서 장애인 보조교사. 그거 했을 때 돈은 제때 안 나오고 맨날 밀려서 늦게 나왔지만 가서 애들, 장애아동이니까 초등학교 저학년 애들인데 활동하는 거 하나부터 열까지 다 도와줘야 하고, 간식 챙겨 먹여야 하고, 어른들 눈치도 많이 봐야 하고 그랬지만 제가 장애아동을 만나면서 제 자신 스스로를 되게 많이 느꼈죠. 심리적인 거에 대해서 완전이요. 육체는 힘들었는데 정신적으로 내가 그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면서 내가 치유되고 내 마음이 좋아지고.
제일 착취가 심했던 거는 주유소. 공장이나 편의점이나 어차피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일을 시작했지만 다들 너무 했다 싶고, 지금 일하는 편의점에서는 점장님이 너무 편하게 잘 해주시지만 최저임금을 지키지 않은 게 아쉬운 부분이죠.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아무리 누가 그룹홈에 사는 걸 편견을 가지고 바라봐도 이 가족들이 피는 안 섞였지만 자매로서 나를 따라주는 동생들이 있고, 피를 나눈 가족보다 더 좋고 진짜 가족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어디 가서 그룹홈, 청소년 보호시설에서 산다고 이야기 안 해요. 저는 아빠가 폭력이 심해서 그냥 양부모랑 살아요, 이래요. 그룹홈을 사람들이 잘 모르니까. 사람들이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왜 그런데서 살아? 엄마 집에 가서 살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청소년 보호시설에 살아요, 그러면 너무 불쌍하게 보는 것도 너무 싫었어요. 그냥, 양부모랑 살아요, 입양된 거니? 그러면 그런 셈이에요, 하고 말죠.
예전에는 진짜 언니 같지 않은 행동을 많이 했어요. 요 근래 성격이 많이 밝아지고 바뀐 거예요. 내가 힘들다는 이유로 애들 앞에서 자해하는 모습도 보이고, 때리기도 하고, 소리도 지르고, 집착도 되게 심했고. 자해는 그게 원인은 저한테 있는 게 아니라 아빠로부터라고 목사님도 말씀하셨지만. 기분이 갑자기 안 좋아졌다가, 다시 좋아졌다가 그러고. 누군가로부터 막 공격을 받는 거 같고. 심리적 고통보다 차라리 한 번 긋고 마는 거예요. 그래서 자해를 되게 많이 했어요. 허벅지, 팔 이런 데는 내가 자해한 거예요. 등 쪽은 아빠랑 살았을 때 아빠가 칼을 많이 들고 그래서 아빠한테 당한 상처에요. 그래서 제가 목욕탕을 못가요. 창피해서. 신경정신과 가서 약도 먹고 그러면서 좋아졌죠. 지금은 동생들이 더 편하게 대해줘요. 예전에는 나이가 많아서, 생일이 빨라서 언니였지 정신적인 거는…. 이제는 언니 대접도 받는 거 같고, 언니로서 책임도 있는 거 같고.
방통고 다니면서, 방통고는 다 아줌마들이에요. 거의 대부분. 그러니까 어렸을 때 학교 다니고 싶었는데 못 다녔던 아줌마들이 저를 막내라고 너무 예뻐하고, 저도 붙임성 있는 편이고. 제가 또 학교 임원, 오락부장이에요. 망가질 때 잘 망가지고, 잘 놀아요. 아줌마들이 내가 필요로 했던 거를 준 거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받고 싶었고, 많은 관심을 받고 싶었고 무한한 사랑을 받고 싶었는데 방통고 아줌마들은 나를 무한히 지지해줬고 오락부장으로서 나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너, 레크리에이션 강사 해봐라, 사회복지사 소질 있다, 끼가 넘친다, 그러면 내 마음이 너무 따뜻해지는 거예요. 예전에는 누가 사랑을 줘도 마음에 구멍이 나서 받을 수 없었는데 방통고 다니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서 구멍이 메워진 거죠. 그리고 차곡차곡 사랑이 쌓여서 지금 새싹 하나가 딱 났어요. 그 싹 하나를 떼어서 다른 사람 주기로 했어요. 그게 지금 막내 동생. 쌍떡잎이니까 그 중 하나를 주면 마음의 나무를 키우자. 그럼 너도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고 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고. 지금은 아주 작은 새싹이지만. 이런 생각 하는 거 되게 좋아해요. 말 같지도 않은 시도 쓰고 (웃음)
꿈이요? 많아요. 한 가지 확정된 거는, 웃음치료사랑 레크리에이션 강사를 겸비한 2급 사회복지사. 1급은 바라지도 않구요. 그리고 어떤 가게든 내 스타일대로 내 개성에 맞춰서 10대 애들을 끌어 모을 수 있는 작은 가게 사장. 찻집이나 노래방이나 퓨전음식점이라든지 내 개성대로 정말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사장. 이 두 가지가 꿈이에요. 2년 뒤에 (방통고) 졸업이에요. 또래 애들보다 저는 2년 늦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는 거죠. 스물여섯, 스물일곱쯤에 대학을 졸업하게 되겠죠. 어휴, 너무 늙었네. (웃음)”


꿈을 위해서, 그리고 자립생활을 위해서 요즘에는 속기학원도 등록해 수강중이다. 시간이 나면 홍대와 이대 아이쇼핑을 하러 가고 일기를 모아 책을 만들기 위해 작은 ‘디카’(디지털카메라)도 갖고 싶다. 한때 목공예도 배웠고, 미용도 배웠으며 나중에는 일렉트릭 기타도 배우고 싶다. 어디 하고 싶은 게 이뿐일까. 마지막으로 세현의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다시 꺼냈다. 우선 만만한 첫사랑부터.



“엄마는 자주 찾아가지 않아요. 내가 힘들어서”


“첫사랑은 열여섯 때. (웃음) 내게 사랑이 뭔지 가르쳐준 사람이에요. 사랑이란 거는 이런 감정이고 이런 느낌이고 이런 설렘, 두근거림이다. 그런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하고는 지금도 친구처럼 잘 지내요. 아직도 감정이 남아서 그런지, 미련이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 친구 앞에서는 노래를 못해요. 너무 긴장이 되어서. 밥 먹을 때도 그 친구랑 먹으면 불편해요. 그런 게 아직도 쫌 있어요. 나이가 두 살이 많은데 그 친구는 아는 거 같기도 하고 모르는 거 같기도 하고. 저의 정신적 지주였는데 며칠 전에 조금 실망을 했었고 그래서 지금은 거의 동급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좀 편하고 자유로워진 거 같아요.
초등학교 때 그 선생님은 연락은 한 번 했었는데 제가 부끄러워서 아직 못 만났어요. 아직 떳떳한 자리에 서 있는 내가 아니라서. 선생님 애기를 듣고 이만큼 자랐습니다, 얘기하고 싶고 당당하게 나타나고 싶은데 아직은 준비단계고 더 많은 시련과 노력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두 달에 한 번씩 어머니를 만나요. 가끔 보러 가요. 어버이날이나 생일이나 뭐 그런 날. 그런데 자꾸 내가 엮일 거 같아서 비겁하게 피해버리는 때가 있어요. 엄마는 몸이 많이 아프신데, 보고 있으면 가슴 아프고 견디기 힘들죠. 자궁암인데 오빠가 정신을 못 차려요. 계속 월세로 전전하고, 엄마 병원비도 없으면서, 나는 이런 곳에 살게 내버려두면서 오빠 뒤치다꺼리 해주느라고. 나도 엄마 품에서 막내로 어리광 부리면서 살고 싶은데. 오빠한테 정말 화가 나는 게 오빠가 쓰는 비용을 조금만 절약하면 우리 세 식구가 먹고 살 수 있는데, 지금 엄마가 버는 돈으로 둘이서 생활하면 딱 맞는데.
나한테 돈을 요구하는데 엄마도 어떨 수 없어서 그런 거겠지만 그런 엄마가 이해 안 되고 밉기도 그래요. 나도 자립금 모으기가 힘들어요. 자립하면 내 돈으로 대학 가야하고, 월세도 내가 내야하고, 나중에 일하려면 기본 자금도 있어야 하고. 그래도 아파도 약도 못 먹을까봐 친구들한테 빈대 붙어서 줄이고 줄여서 엄마한테 5만원 10만원 다달이 붙여주는 건데. 항상 돈 없으면 제일 먼저 저한테 연락이 와요. 그것도 돈이 없다, 돈 좀 줄 수 있어? 이러는 것도 아니고. 엄마 힘드네, 오빠 벌금 내고 뭐하고 하니까 생활비가 하나도 없어. 이런 엄마가 더 얄미운 거예요. 한번은 울면서 그랬어요. 그 새끼가 사고 쳐서 벌금 나오는 거 그 새끼가 알아서 하라 그래! 엄마는 아프면서 일하고 그 새끼는 하루 종일 집에서 놀면서. 엄마가 그래요. 어떻게 하니, 품안에 자식인데. 나는 엄마 자식 아니야? 그러면 나한테는 할 말이 없다고 미안하다고.
엄마가 아빠한테 맞아서 정말 죽을 뻔 한 적이 있었는데, 오빠가 어렸을 때인데, 엄마를 끌어안더래요. 그래서 오빠가 대신 맞고 기절해가지고 병원에 간 적이 있었다고. 그게 엄마 가슴에 남았나봐요. 또 자궁암이라서 1차 수술은 하고 2차를 돈이 없어서 못하고 있는데, 새벽에 일하고 까무라치게 힘들어서 소리도 못 지르고 있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오빠가 들쳐 업고 문 닫힌 병원 응급실 두드려가면서, 맨발로, 유리에 찔려 피까지 나면서 병원까지 업어다주고 그런 게 고마워서 아무 말을 못하는 거 같아요. 지금은 저도 그래요. 엄마를 따로 분리시켜서 살라고 할까도 생각했는데 제가 크고 사회 나갈 준비를 하는 동안, 내가 챙겨주지 못하면 그 망나니 새끼라도 엄마를 챙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자주 찾아가지 않아요. 내가 보기가 힘들어서.
제가 아빠를 많이 닮았대요. 외모뿐만 아니라 식성이라든가 성격이. 내가 살면서 아, 내가 이렇게 기분이 나빴을 때 아빠도 그래서 그랬겠구나. 아빠가 그때 이런 심정이었구나. 그랬을 때 엄마가 조금이라도 배려를 해줬다면. 약간 그런 심정이 이해가 가고 그런 게 있어요. 아빠도 자기 자신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알았다면 고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도 들고.
용서했냐구요? 마음에 담아두지 않은지 오래됐어요. 이거는 용서를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피는 못 속인다는 게 아주 가끔 밥은 잘 먹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보고 싶기도 하고 한번 털썩 안겨보고 싶기도 해요. 태어나서 한 번도 안겨보거나 손을 잡았던 적이 없어요. 살갑게 ‘아빠, 밥 먹었어?’이렇게 얘기 해본 적도 없어요. 항상 아빠 앞에서는 기죽어 지냈고 항상 거리가 이만큼 있었어요. 아빠도 늙어서 나이가 많이 들었을 텐데. 마지막으로 아빠 기억에 나는 모습이 해골처럼 홀쭉해져 있는 모습. 등치 있고 건장했는데. 아빠가 했던 행동들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만 안타깝기도 하죠. 아빠도 할아버지한테 그렇게 당해서 했던 행동인데. 그래도 내가 아빠였다면 그렇게 안 했을 거 같아요. 내 대에서 끊었을 거예요. 아빠를 용서할까, 하지말까 이런 자체를 생각해보지 않았던 거 같아요. 예전에는 증오의 대상이었다가 지금은 보고 싶다 이런 마음이고, 아빠가 했던 행동을 다시 되짚어보면, 정말 나쁜 사람이다, 또 한편으로는 아빠의 상처를 극복 못해서 그랬을 텐데.
지금 보자고 연락이 오면… 더 그리워지면 보자고 그럴 거 같아요. 보고는 싶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서 어떻게 봐야 할지 망설여지는 거. 옛날에 아빠 눈빛을 보면서 되게 많이 겁을 먹었던 것처럼 지금 다시 아빠의 눈을 보면 겁이 나지 않을까. 더 준비가 되면 보자고 할 거 같아요. 근데 이런 식으로 피하다가 영영 안 볼지도 모르죠.
만나면 그걸 확인하려고 할 걸요. 아빠는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그동안 내 생각은 안 했는지, 걱정은 안했는지, 후회는 안 했는지 반성이 했는지, 안 했는지, 내가 보고 싶어서 눈물을 흘렸는지 안 흘렸는지. 가슴이 아릴 정도로 내가 보고 싶었는지.”


스무 살. 꽃 같은 시절이고 아름다울 때라고 말하는 것은 다 겪을 만큼 겪고 한참 지나온 사람들이나 하는 말일게다. 또 얼마나 많은 시련이 세현 앞에 기다리고 있을까. “마음이 건강해지니까 세상이 좀 다르게 보이고 내가 건강하지 못했을 때 만났던 사람하고 지금 만나는 사람하고 똑같은 사람인데도 느낌이 달라요. 그게 행복해요. 내가 바뀌어서 행복한 게 아니라 바뀌려고 노력하는 내가 행복해요.” 그러나 세현은 긍정의 힘을 믿고 있다.


인터뷰 강곤 | 편집기자
사진 박김형준 | 객원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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