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어느 날 촛불 가두시위 중이었다. 한 시민이 경찰에 물려 손가락 일부가 잘린 날로 기억된다. 경찰은 서대문 방향에서 물대포를 쏘며 시위대를 밀어붙이더니 광화문 사거리에서 난데없이 전경들을 시위대 한 가운데로 투입해 일대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물대포를 맞으며 저항하던 시위대는 갑자기 쏟아져 들어와 방패로 찍어대는 전경들에 의해 쓰러지고 부상을 당했다. 한편 일부 시위대는 그중 유독 극성스럽게 폭력을 행사하는 전경 몇 명을 인도로 끌고 나와 헬멧을 벗기고 방패를 빼앗는 등 무장해제를 시도했다. 나도 그들과 함께 끌려 나와서조차 난동을 부리는 전경을 제압하면서 헬멧을 벗기고 방패를 내려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때다. 일부 시위대들이 “비폭력” “놓아줘”를 외치며 무장해제하려는 시위대를 막았다. 전경 한두 명 무장해제하는 건 실질적으로 별 이득이 없다는 것과, 돌아가 상관에게 혼이 날 것을 염려하는 심정, 심지어 조중동에게 빌미 잡히지 말자는 논리까지. 어떤 시위대는 “헬멧 보신 분, 방패 보신 분”하며 동분서주했다. 나는 이미 헬멧 하나를 동화면세점 화단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겼고, 끝내 얘기하지 않았다.
힘 없는 정의
촛불 안에서 ‘비폭력’ 구호는 시시때때로 등장했고 시위대가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하나의 기호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힘’을 드러낼 필요가 있고 그런 조건이 성숙했을 때조차 ‘비폭력’ 구호가 등장해서 시위대의 힘을 분산시키기는 것을 어렵지 않게 경험할 수 있었다. 촛불시위는 국민적 주권을 확인하고, 되찾아오는 운동으로 평가되고 있다. 주권이란 법과 제도를 만들고,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권능을 기본적 전제로 한다. 유엔의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은 이를 ‘인민의 자결권’이라 한다. 자결권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당사자 스스로 권리를 ‘자력화’ 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당사자들이 ‘힘’을 집합하고 표출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며 또 정당하다. 이를 보장하는 것이 ‘인권과 민주주의에 의한 법치’이다. 국가로부터 준법을 강요당하는 것이 아니라 법을 만들고 스스로 통치 주체가 되는 것이 주권이다. 그런데 오히려 주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종종 잘못된 법에 순치되는 현상이 발생하기도 했다. 인도에서 경찰의 통행제한에 대해 항의하는 인권침해감시단에게조차 비폭력을 외치기도 했다. 또한 지난 7월 5일 등장한 ‘비폭력 평화행동단’은 직접행동의 무력함을 드러내며 시위대 내부의 불만과 불일치를 드러내는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차벽으로 가로막혀 있는 시청일대에서 보여준 그들의 직접행동은 시위대가 차벽을 넘으려는 또 다른 직접행동을 막는 것이었다. 평화행동단에 참가했던 한 교사는 너무 무기력하고 힘들어서 비폭력 평화행동단이라고 적힌 조끼를 빨리 벗어 버리고 싶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차라리 비폭력 평화행동단과 같은 직접행동이 필요한 때는 인간사냥마저 서슴지 않는, 경찰폭력이 극에 달한 요즘이 아닐까 싶다.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경우 촛불시위에 등장한 비폭력은 자력화를 위한 힘의 결집에 걸림돌로 작용했다.
진중권 교수는 그의 글에서 정의의 이름으로 힘을 무시하는 것이 무력한 패배주의로 빠질 수 있다고 분석한 적이 있다. 물론 그는 힘을 내세워 정의를 부정하는 것에 대해서도 우려를 나타냈다. 그게 곧 파시즘이라고. 이는 후술하겠다. 언급한 이야기는 정의의 이름으로 힘이 무시되는 예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시민적 질서와 규범을 엄격히 준수하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부르주아적인 시민적 질서이며 규범이다. 부르주아 규범의식은 국가권력에 의해 구성된 법과 질서에 도전하지 않거나, 그러하더라도 법과 질서의 오차 범위 밖으로 벗어나지 않으려는 것을 전제한다. 때문에 ‘불법폭력집회’라는 낙인에서 서둘러 벗어나 준법이라는 구심력으로 쉽게 빨려든다. 이때 저항의 정당성은 민주주의와 인권의 실현이 아니라, 실정법을 위반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위반하더라도 그것이 위헌이냐 합헌이냐로 축소되는 것이다. 불법폭력집회라는 낙인을 두려워하지 않고 정치적 파란을 서슴지 않는 직접행동은 기대할 수 없게 된다. ‘강요된 준법’에 순응하는 규범의식 속에 내포되어 있는 위반과 불법에 대한 두려움은 국가권력의 손쉬운 먹잇감이 된다. 간디와 마찬가지로 비폭력 직접행동을 실천한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촛불 현장에 있었다면 아마 손사래를 쳤을 것이다. 그에 의하면 비폭력 직접행동은 “파란을 일으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버밍햄 감옥으로부터의 편지」에서 흑인에게 의사표현의 자유조차 주지 않는 미국사회를 향해 위기감과 긴장을 만들어낼 것을 촉구하고 있다. 교섭이나 대화가 직접행동의 최종목표이지만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적대성을 드러내고, 파란을 일으키고 위기와 긴장을 고조시키는 것은 “건설적인 비폭력적 긴장”이라고 주장한다.
시장권력의 에일리언
이명박 정권은 시장권력과 정치권력이 동일한 얼굴이라는 ‘신자유주의의 진실’을 각인시킨다. 그들이 잃어버렸다는 지난 10년은 IMF 구제금융 체제였다. 이로 인해 한국사회는 20대 80의 사회로 빠르게 재편되었다. 현 정부는 IMF 구제금융체제를 숙주 삼아 흉측하게 성장한 ‘시장과 정치권력’의 에일리언이다. 잃어버린 10년이 아니라 오히려 시장과 정치가 한 몸이 되어 민중에 대한 지배를 강화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힘을 키워온 10년이었다. 이들이 공권력을 쥐자마자 거침없이 지배자의 폭력을 자행하고 있다. 물론 경찰폭력은 민주화 이후에도 적잖이 있어왔다. 전용철, 홍덕표 씨 등 국가폭력과 자본폭력에 죽어간 열사들의 이름이 길게 도열해 있다. 과거에 대하여 ‘민주’라는 명예를 수여하면서 현재의 반민주를 철저히 봉인했던 기만의 시대. 어쨌든 IMF 구제금융체제는 한편으로 법의 지배, 형식적 법치가 시도되었던 때로 평가받는데 그마저도 잿더미가 되고 있다. 집회시위에 대한 탄압뿐 아니라 언론, 인터넷 등 경찰과 검찰 그리고 사법부까지 합세해 점령군의 군화 자국을 선명히 남겨 놓고 있다. 독재정권이 부활했다는 비난에도 정부는 주저하지 않는다. 자신의 지지 세력만 흩어지지 않는다면 문제없기 때문이다. 양극화의 오른쪽 끝이 이 정권의 손을 단단히 잡고 있는 한 질주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경찰국가가 도래한 것이다.
물리력의 사용은 특정한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법과 질서에는 예외가 없고, 어려움이 있어도 그것을 지키겠다”는 대통령의 말은 최고 권력자로서 법치에 대한 다짐이 아니라 시장권력의 이해를 신속하게 정책에 반영하기 위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겠다는 민중에 대한 선전포고다. 법인세법, 공정거래법, 지방세법, 종합부동산세법, 신문법의 개정은 모두 시장의 자유에 성능 좋은 엔진을 달아주는 것이며, 집시법, 비영리민간단체지원법, 정보통신망법의 제·개정은 시장의 자유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감옥에 집어넣겠다는 전략이다. 거대집권여당인 한나라당은 시장과 정부의 명령에 충실한 마름에 불과하다. 문학평론가 이명원 씨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처할 수밖에 없는 궁극적인 정치 환경으로서의 시장권력을 포함한 지배계급 연합의 집단적 이익 구현의 매개로써 국가가 활용될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1) 시장권력과 정치권력이 한 몸으로 기능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대의제 민주주의란 결손을 메우고 개혁할 대상이 아니라 저항하고 극복해야 할 정치체제가 된다.
다윗의 돌팔매처럼 예리한 직접행동
이러한 정치 환경 아래에서 인권운동의 전략으로서 비폭력 직접행동은 도전적 상황에 직면해 있다. 촛불시위만 하더라도 경찰폭력을 감시하고 사후적으로 문제제기 하는 등의 전통적인 인권운동의 방식이 현실에서 의미 있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물론 많은 인권활동가들이 그 돌파지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실제로 경찰은 촛불집회 초기 이른바 그들의 언술인 ‘합법적 집회’에 대해서 광장과 거리를 어느 정도 허용했었다. 하지만 정치권력이 정책 드라이브의 자신감을 회복하고 난 후 백골단과 다름없는 기동대를 창설하고 마구잡이로 색소를 쏘아 불법 연행을 감행하는 등 물리력 사용은 가파르게 치솟고 있다. 그동안 인권운동이 숱하게 반복해 온 모니터, 기자회견, 보고대회, 국가인권위원회 진정, 고소고발이라는 방식이 시장과 국가권력의 폭력에 어떤 타격을 가하고 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피해자 조사와 분석, 증언을 통한 여론조성과 인권교육이라는 전통적 방식의 인권운동이 쓸모없는 것은 아니지만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국가폭력과 자본의 공세에 대항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 또한 사실이다.
“사람들이 폭정과 억압에 대항하는 마지막 수단으로서 반란에 호소하도록 강요받지 않으려면, 인권이 법에 의한 지배에 의하여 보호되어야 함은 필수적”이라고 세계인권선언 전문은 말한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기본적인 전제가 인권’이라는 단순한 문장이 인류의 기본가치로 받아들여지기 위해 수많은 민중들의 사투가 있었고 그것이 세계인권선언으로 성문화 된 것은 결코 적지 않은 진보의 걸음이었다. 하지만 세계인권선언과 국제인권법은 인류가 반드시 지켜야 할 ‘약속’일 뿐 ‘완전한 실현을 확인’하는 문서가 결코 아니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 새삼 의미심장하다. 그런 점에서 비폭력 직접행동은 생동하는 그 무엇이 되어야 한다. 이명원 씨는 시장권력과 정치권력 그리고 그것에 포섭된 지식인을 디스토피아적 트로이카라고 이름 붙였다. 지식인마저 제 역할에서 일탈해 있는 한국사회의 암울한 현실은 “마지막 수단으로서 반란에 호소하도록 강요”받는 사회가 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800만 비정규직 그리고 절망의 잿더미에 앉아 있는 수많은 농민들은 이미 반란의 가속페달에 발을 옮기고 있다. 이러한 때 인권운동은 시장과 국가권력의 급소를 향해 다윗의 돌팔매처럼 예리한 직접행동에 나서야 한다. 비폭력적 방식을 고수하더라도 인권운동의 상상력은 여러 가지 기획으로 확장될 수 있다. 경찰폭력뿐 아니라 구조적 폭력에 저항하는 억제, 재산적 손괴와 파괴 그리고 다중의 힘을 위력적으로 과시하는 위협과 강압은 이미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사례가 있다. 문제는 전술에 대한 학습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한국사회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비폭력 직접행동이 지나치게 부르주아 시민적 가치와 질서를 내면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재산적 손괴나 파괴는 차치하고 선동이나 정치적 파란을 일으키는 것조차 자제해야 하는 것이 비폭력 직접행동이라면 민중적 재앙의 현 상황에 대한 돌파구를 찾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 아닐까.
인권운동에서 비폭력 직접행동을 기획할 때 흔히 ‘목적과 수단의 일치’라는 원칙을 말한다. 목적이 인권의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하며 그것을 성취하는 수단도 다를 수 없다는 지당한 말씀이다. 폭력적 수단은 인권운동의 직접행동에서 선택할 수 없다. 폭력까지 저항수단으로 허용하는 순간 테러나 살해와 같은 극단적 잔혹함 그리고 파시즘의 준동까지 정당성을 얻게 된다. 인권운동이 인간해방과 지향점을 같이 한다는 점에서 ‘목적과 수단의 일치’에 대한 재해석과 재구성이 필요하다. 피해자의 구제나 보호, 권력 감시를 넘어서서 당사자 스스로 자력화 하는 더 많은, 더 강한 민주주의로 향해 가야 하는 것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시대적 요청이다. 시장권력과 정치권력이 공동의 이익을 목적으로 무소불위의 지배력을 드러내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억압과 지배의 적대성을 드러내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힘을 모으고, 표출하는 인권운동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폭력 투쟁의 이미지로 깊이 각인되어 있는 멜컴 엑스나 블랙팬더당과 같은 활동은 물론이고, 제국주의의 폭력적 수탈을 통해 병들어 있는 식민지 민중이 폭력을 통해 새로 태어날 수 있다고 역설한 프란츠 파농까지도 인권운동은 진지한 텍스트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경찰폭력으로부터 흑인공동체를 방어하기 위한 역순찰 활동으로 시작된 블랙팬더당은 흑인지역의 자기결정권 획득, 완전고용, 무상의료, 무상교육 등 거의 모든 인권 의제를 망라하고 있다. 국가에 대한 청구권을 넘어서 흑인공동체의 자력화를 위해 스스로 무장한 이들에게서 인권운동이 배워야 할 ‘힘’은 결코 적지 않다. 멜컴 엑스가 여전히 유용한 이유는 “목적(대의)과 수단(폭력)이라는 편협한 도식으로 축약되기 이전에 현실에는 행위뿐만 아니라 언어나 이미지를 포함한 복잡한 힘의 영역이 존재”2)한다는 점이다. 일상적인 폭력에 대한 인내는 오히려 증오를 내향화해서 흑인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저항의 동력을 짓누르기만 한다는 것이다. 폭력과 비폭력의 양자택일이 아닌 분노가 응집해 만들어내는 힘에서 해방의 행동미학을 발견했다. 파농의 어려운 이론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과거의 ‘전능’했던 주인과 결별해야 하며, 현재 압도적인 힘으로 우리 앞에 버티고 있는 ‘주인’도 우리들의 힘으로 돌파할 수 있는 존재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폭력행사 전에 적을 확인하고 어디에 균열이 생겼는지 정확하게 인식하여 전투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써 비로소 뿌리 깊은 의존 콤플렉스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합리적인 사고를 통해 수단과 목적의 도식을 설정하고 정당한 목적을 위해선 수단도 정당해야 한다는 식의 이성적 판단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효과이다.3)
직접행동의 원칙인 목적과 수단의 일치가 인권운동에서 도그마적 해악으로 작용하지 않기 위해서는 해방 운동의 다양한 사례와 이론에서 재발견해 는 힘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정의 없는 힘
앞서 언급한 ‘정의 없는 힘’에 대해서는 짧은 에피소드로 대신한다. 6월 28일 역시 촛불집회였다. 자정 무렵 전경들이 야수처럼 덤벼들어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던 그날 밤 전경들이 방패를 휘두르며 위협하고 있을 때 시위대 중 남성 일부가 맨몸으로 전경에게 달려갈 참이었다. 내가 그 사이에 뛰어들어 조금 뒤로 물러나자고 하자 그 남성들은 “××년 너 뭐야?”라는 욕설과 함께 밀치면서 위협을 서슴지 않았다. 옆에 있는 남성활동가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시위대에서 쫓겨날 순간이었다. 갑자기 시작된 경찰폭력에 당황한 남성들의 공포와 흥분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러한 때 시위대 내부에서조차 힘의 서열에 의해 (언어) 폭력이 가해지는 것은 ‘정의 없는 힘’에 대한 경각심이 일상적으로 요청된다는 것을 확인하게 해준다. 지배와 종속은 미세한 권력에서도 작동하며 이에 대한 긴장과 대항이 없다면 파시즘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 될 것이다.
에필로그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70일 가까이 단식투쟁 중 병원치료를 받던 기륭노동자가 다시 현장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녀가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 비정규직 투쟁의 깃발을 들어야 한다는 건 마치 70일을 굶어 뼈만 앙상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처럼 끔찍한 일이다. KTX, 이랜드, 기륭 모두 비정규직 투쟁으로 이름을 얻은 사업장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운동이 개별 투쟁으로서 ‘고유명사’는 획득했지만 비정규직 철폐운동이라는 ‘보통명사’로 확장되지는 않았다.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이 지상최대의 과제인 한국사회에서 해고의 자유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간단히 제압하고 있고, 파업 한 번 제대로 못해보고 출근투쟁부터 시작해야 하는 상황은 국제인권기준은 고사하고 헌법마저도 박물관의 유품으로 만들고 있다. ‘반란’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저벅저벅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은 여전히 휴머니즘이나 인도주의적 호소에 머물고 있다. 노동자들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신분화, 서열화하는 이 노골적인 자본의 지배는 결코 휴머니즘이나 인도주의적 동참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지배 구조의 단단함을 보여준다. 인권운동의 직접행동은 ‘힘’의 창출을 위한 그 무엇이 되어야 한다.
지난 6월 72시간 공동행동으로 시청광장이 시끌벅적할 때 인권단체는 공동으로 시청 정문 앞에 천막을 치고 저항의 장터를 벌였다. 그때 그런 생각을 했다. 시청으로 들어가자. 시청을 점거(squat)하자. 기자회견 말미에 흔히 하는 상징의식이 아니라 시장과 국가권력에 대한 대항적 ‘힘’을 보여주는 위력으로써 시청을 점거하자. 놀랍게도 서울시는 ‘시민’이 아니라 ‘고객’이라는 호칭을 쓰고 있다. 서울시청은 시장과 정치가 한 몸을 이루어 존재하는 실재 공간이다.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대의제에 더 이상 연장전을 허용하지 말고 ‘힘’으로 자력화하는 ‘정치’의 직접행동으로써 시청을 점거하자.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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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명원, 『시장권력과 인문정신』, 로크미디어, 2008. p24 2) 사카이 다카시, 김은주 옮김, 『폭력과 비폭력』, 산눈, p53 3) 위의 책 p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