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人터뷰] 맛있는 공동체라디오

우리동네 우리방송, 마포FM 송덕호 본부장

지난 8월 8일, 마포FM 송덕호 방송본부장을 만나러 가는 날 KBS 이사회는 전격적으로 정현주 사장 해임제청안을 통과시켰고 우리가 만났을 즈음 공중파 방송3사는 일제히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을 생중계하고 있었다. 마포FM을 비롯한 전국 8개 소출력 공동체라디오 방송국들의 모임인 한국커뮤니티라디오방송협의회 사무국장이자 2003년부터 퍼블릭엑세스(대중이 주체로 참여하는 미디어)운동을 벌여온 미디어연대 사무처장이기도 한 송덕호 본부장에게 “대체 미디어란 뭔가?”라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미디어는 우리말로 하면 매체, 매개체잖아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집단, 집단과 집단의 의견을 소통하기 위한 도구인데 이게 스스로 힘을 갖기 시작하다보니 이걸 쟁취하기 위한 헤게모니 싸움이 벌어지는 거죠. 마치 매개체를 쟁취하고 나면 모든 게 달라질 거라고 여기고. 모든 게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실제로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맥루한(Herbert Marshall Mcluhan)의 말처럼 미디어의 내용과 함께 미디어라는 존재 자체가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죠. 그런 의미에서 미디어운동은 주류 미디어 공간을 민주적으로 만들고, 대안 미디어 공간을 확장하고, 공공서비스를 더욱 확대시키고, 뭐 이런 일들을 하는 거죠. 최근에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를 보면서 인터넷에서 보여주었던 것도 역시 미디어운동의 하나라 할 수 있는데 역시 미디어가 앞으로 가면 갈수록 더 중요해지겠다, 정말 미디어가 본래의 역할, 권력이 아닌 단순한 매개체로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일도 중요하다,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죠.”


뭔가 특별해 보이는 미디어운동, 왠지 쉽게 와 닿지 않는 ‘퍼블릭 엑세스’란 외래어, 그리고 아직도 약간은 생소한 공동체라디오 운동. 이런 것들이 십여 년 간 송덕호 본부장과 함께 했던 단어들이다. 그에게 운동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강경대 열사를 광주에 묻으면서 혼자 다짐했죠”


“고향은 원래 전남 벌교, 소설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지역인데 여섯 살인가 일곱 살 때 가족이 다 같이 서울로 올라왔죠. 워낙 살기 어려웠을 때니까. 다 같이 야간열차를 타고 올라왔는데 저도 기차가 처음이었고, 여동생이 참 신기해했던 게 지금도 기억나요. 서울공고 기계과에 들어갔는데 별로 좋지 않았던 집안 사정이 더 어려워지면서 학교 그만두고 공장에 들어가서 선반을 만졌어요. 그런데 공장을 다니다가 이렇게 살면 안 될 거 같더라구요. 평생 기계만 만질 거 같아서 공장 그만두고 검정고시를 봐서 대학에 들어갔죠. (입학시험이) 전기, 후기가 있을 때였는데 전기는 떨어지고 후기에 명지대학교 정치외교학과로. 졸업하고 뭐 해야겠다 이런 생각보다는 그냥 점수에 맞춰서 들어간 거죠. (웃음)
85년도에 입학을 했으니까 다른 학생들보다 한 2년 정도 늦은 거죠. 나이차이 때문에 잘 안 어울리게 되더라구요. 근데 주위 형들이 대학생활 그렇게 하면 남는 게 하나도 없다, 나이 잊어버리고 같이 어울려라, 그런 얘기도 있고 해서 서클에 들어갔어요. 이념서클이 있다는 거는 전혀 몰랐고 민요연구회라는 게 있더라구요. 아버님이 창을 좋아하셔서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들었거든요. 거기서 그래도 민요 몇 개는 가르쳐주더라고. (웃음) 한 서너 곡 배웠나. 그러더니 민요를 잘 부르기 위해서는 한국 근현대사를 잘 알아야 한다, 뭣 모르고 동기들하고 세미나를 시작하면서 사회를 보는 눈이 달라졌고 자연스럽게 시위에 참여하게 됐죠. 그런데 좀 지나서 운동권 돌아가는 걸 알게 됐어요. PD다 NL이다, 치열하게 싸우더라구요. 사상이 다르다고 같이 한 자리에 앉지도 않으려고 하고. 그런 모습에 회의를 느꼈다고 해야 하나… 군대 갔다 와서 복학하고도 운동권과는 좀 거리를 뒀죠. 정파로 갈려서 그렇게 싸우는 거에 대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고, 또 내가 어느 파에 들어가서 그쪽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았고. 그냥 과학생회 활동 정도 하다가 92년에 졸업했어요.”


졸업 후 첫 직장은 모 일간지 광고부였지만 그는 또 한 번 “평생 이 짓거리 하고 살게 될까봐” 신문사를 그만두고 충무로 영화판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얼마 뒤 민언련(민주화언론운동시민연합)에서의 활동도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미디어운동을 시작한 셈인데 그 계기는 좀 더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 4학년, 그때가 91년 4월쯤이었는데 졸업여행 어디로 갈까 한참 회의를 하고 나오니 교내 스피커에서 강경대라는 학생이 백골단에게 맞아서 죽었다는 거예요. 한 8월까지는 거의 시위를 하면서 보냈죠. 계속 분신이 이어졌고. 그때 어떤 면에서는 희망이 좀 보이기도 했어요. 거리를 뛰어다니면서 우리 사회가 변할 수 있겠구나 하는. 그런데 정원식 국무총리가 외대에 가서 밀가루를 뒤집어쓰는 사건이 터졌죠. 모든 언론이 일시에 대학생들을 패륜아 취급하고 사회분위기가 싹 바뀌었어요. 강경대 열사를 광주에 묻으면서 우리나라 언론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겠다 다짐했어요. 뭐, 누구한테 이야기한 거도 아니고 내 속으로만. 그 뒤로 민언련 언론학교도 다니고 그랬죠. 또 92년이었나? 동구권 사회주의가 붕괴됐고, 대통령 선거 무렵에 초원복집 사건이 터졌잖아요. 부산에서 김영삼 당선시키려고 기관장들이 모여서 회의한 게 공개됐는데, 그게 오히려 경상도 몰표로 작용을 해서 김대중이 지고. 그때도 언론이 큰 역할을 했죠. 녹음이 불법이니 뭐니 하면서 몰고 갔으니까. 민언련 부정선거감시 활동을 했는데 나뿐만 아니라 다들 패배주의에 휩싸였던 거 같아요.
그즈음 회사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해야겠다, 그 당시가 케이블TV가 막 만들어지던 시기여서 영상제작 배우는 학원을 다녔어요. 그런데 TV보다 영화 쪽이 더 매력적이더라고. 바로 충무로로 들어가서 연출부 생활을 한 7, 8년 했죠. <편지> 조연출이 마지막이었을 거예요. 생활이요? 그때나 지금이나 충무로 생활이란 게 연봉 2, 300 받으면서 사는 건데, 대개 영화를 찍는 기간에는 일이 너무 많으니까 거의 밤새고, 새벽에 들어가서 자고, 다시 나오고, 이렇게 반복되니까 돈 쓸 일이 없죠. 열악한 노동자일수록 철야가 많잖아요. 박봉으로 견딜 수 있는 이유가 돈 쓸 여유, 시간이 없으니까 그나마 버티는 거죠. 영화 쉬는 동안 2, 300 받은 돈 쓰면서 부족하면 노가다나 아르바이트로 영상물 만들어주면서. 지금도 미련이 없다고 할 수는 없죠. 몇 년 더 했으면 감독도 됐을 텐데. 하지만 크게 후회하지는 않아요. 충무로 경험이 이후 활동에 도움이 됐어요. 영상과 관련된 산업 구조라든지, 미디어와 관련된 생리랄까, 구조뿐만 아니라 영상의 제작원리, 흐름, 문법 다 충무로에서 배웠으니까요.



“권리로서 미디어, 우리가 미디어다”


민언련 회원이었으니까 영화 작업이 없으면 가서 도와주기도 하고 놀기도 하고 그랬는데, 97년인가 98년쯤이었을 거예요. 퍼블릭 엑세스나 VJ(비디오자키)라는 게 한참 알려지기 시작할 때였는데 영상제작 교육이 필요하다는 말만 있었지 잘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일이 진척이 안되더라구요. VJ가 뭔가 공부를 시작하게 됐죠. 퍼블릭 엑세스, 시민 저널리즘, 비디오 저널리즘, 이런 공부를 하면서 쉬는 동안만 강사 섭외해주고, 장비 세팅해주고, 그 정도만 하려고 했는데 발목을 잡혀서 1기, 2기 강의를 진행하게 되고, 프로그램을 아예 내가 맡게 된 거죠. 근데 이 활동이 영화보다 더 쉽게,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겠다 싶은 거예요. 그렇게 민언련에 대안TV라고 하는 인터넷 방송을 만들게 됐죠. 그때만 해도 디지털 방송이 몇 개 없었어요, 저희하고 민중의소리 정도. 실제로 우리처럼 열심히 했던 곳도 아마 없었을 거예요. 저를 포함해서 네 명이 있었는데, 시민사회진영에서 하는 기자회견이나 시위 현장을 촬영해갖고 뉴스 형식으로 기사에 멘트까지 작성해서 올렸죠. 한 2년 정도 활동하다가 민언련 내부에서 조직의 비전이랄까 생각이 엇갈려서 내가 나오게 되었고, 그러면서 대안TV는 해산됐어요.”


민언련에서 독립적인 활동을 보장받았던 대안TV가 민언련 사무국으로 흡수 통합되는 방향으로 논의가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그는 RTV(시민방송) 출범에 결합하면서 초창기 방송준비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거기서 또한 “내부의 어지러운 일”에 휘말려 그만두게 되고 결국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우리가 미디어다’라는 기치를 들고 2003년 미디어연대를 만들게 된다.


“시민방송 내부구조가 좀 복잡했거든요. 방송허가권을 얻었던 재단법인 시민방송이란 게 있었고, 돈을 갖고 있었던 주식회사 시민방송이 있었는데 그 관계가 틀어지면서…. 또 언론운동을 하던 사람과 문인, 문화계 명망가들과의 힘겨루기도 있었고. 그 사이에서 어느 누구도 일하던 사람들을 책임지려 하지 않았죠. 어떻게 해서든 내부에서 해결하려고 운영회의 할 때 피케팅 정도만 했는데, 그 당시에 시민방송 운영위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다 시민단체 지도자들이었는데 누구 하나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서지 않았고…. 참 실망을 많이 했어요. 결국 내가 이 조직에 있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 시민방송이 좌초되더라도 이 문제를 그냥 넘어갈 수 없다던 친구들까지 다 설득해서 같이 나왔죠.
그 사람들 중 몇몇과 모임을 가져오다가 새로운 미디어운동, 퍼블릭엑세스운동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단체가 필요하다, 그래서 미디어연대가 만들어졌죠. 준비하면서 논의가 많았어요. 기성언론에 대한 비판이나 감시활동은 민언련이 잘 해오고 있으니까 우리는 시민참여 미디어운동, 퍼블릭엑세스운동이나 인터넷 미디어 같은 걸 해보자. 사실 그때만 해도 민언련을 중심으로 한 시민언론운동은 영상이나 인터넷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했거든요. 견제와 감시도 중요하지만 대안언론이 많이 만들어지는 것이 주류 언론들을 변화시키는 데도 중요하다는 판단도 했죠. 또 KBS 열린채널과 같은 시청자참여프로그램이 있지만 퍼블릭엑세스운동도 거의 정체되어 있었고. 미디어연대는 미디어를 단순히 언론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도구이자 인권의 한 연장선, 권리로서 미디어를 바라보고 미디어를 확장시켜나가자는 생각이 있었어요. 결국 ‘우리가 미디어다’라는 미디어연대의 슬로건은 시민들 스스로 미디어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 가운데 뉴스가 만들어지고 사회 의제가 나오고 새로운 미디어와 미디어운동이 이뤄질 수 있다, 그렇게 되기 위한 제도랄까 환경을 만들기 위한 활동이 미디어연대의 주된 활동이었죠. 미디어연대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지역에 미디어운동이 필요하다는 고민을 했고 지역 풀뿌리 시민단체 중심으로 워크숍도 몇 차례 했는데 성과가 안 생겨요. 왜 그런가 보니까 지역 단체에게 미디어운동은 한 참 먼 이야기인 거죠. 겨우 상근자 한두 명이 생활정치나 지방자치, 지역복지, 이런 걸 다 맡아서 하고 있는데 미디어운동 중요하니까 해보자 해봤자 현실성이 없는 거죠.”


지역의 미디어운동에 대한 모범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던 중 송 본부장은 성미산 지키기 운동을 만났다. 성미산 지키기 운동은 2001년부터 2003년까지 마포지역 주민들의 쉼터인 성미산을 개발하려는 서울시 방침에 맞섰던 운동으로 이 과정에서 두레생협, 주민문화센터 꿈터, 12년제 대안학교인 성미산학교, 생활정치 시민단체인 마포연대 등이 마포에 만들어지면서 서울의 풀뿌리 공동체 운동의 큰 성과로 자리 잡았다.


“제가 마침 마포에 살고 있고 성미산 운동 영상작업을 하면서 이 지역이 참 공동체 운동이 활발하다, 주변에 큰 대학이 네 개나 있고. 여기서 터를 잡고 미디어운동을 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러던 중에 소출력 라디오 사업에 대한 소식을 듣고 지역에 제안했어요. 생협, 성미산 학교, 마포연대, 홍대 앞 문화협동조합, 여기에 미디어연대까지 해서 추진위원회를 만들었고 그 추진위원회가 다시 지역 20여개 단체에 제안한 다음에 서강대랑 마포구청이랑 컨소시엄을 형성해서 만들어진 게 마포FM이죠.
첫 방송이 2005년 9월 26일 나갔어요. 지역에 단체들이 많아서 준비과정에서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정작 방송이 시작되고 나서 단체들이 방송 제작에 뛰어든 경우는 거의 없어요. 여기 단체들도 소규모니까 여력이 없죠. 실제로 방송국 설립 준비에서부터 운영까지 거의 시민들, 자원활동가들을 모집해서 같이 한 거예요. 마포FM이란 이름도 자원활동가들의 토론에서 나왔어요. 기억나는 이름이 코앞FM, 개인적으로 이 이름이 마음이 들었는데. 마포나루가 유명하니까 나루FM. FM마포, 마포공동체FM, 이런 후보들이 있었죠. ‘우리동네 우리방송’이란 캐치프레이즈도 역시 그렇게 만들어졌고. 방송 프로그램 하나하나가 자원활동가들이 마포에 여러 가지 것들을 조사하면서 제안된 프로그램들이죠.



“왜 해적방송, 공동체라디오 운동이 없었을까?”


햇수로 3년이 채 안 됐는데 아직 안착되지는 못한 거 같아요. 지난 1, 2년차는 헤매기 바빴던 시기랄까, 이런저런 시행착오, 실험으로 좌충우돌했죠. 마포FM이 장애인 당사자가 하는 ‘함께 쓰는 희망노트’, 성소수자들의 방송인 ‘L양장점’ 등으로 언론에 주목도 많이 받았죠. 주변에서 너무 소수자 중심 편성이 아니냐는 지적도 없는 건 아니지만, 공동체라디오가 사회적 소수자에게 발언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데 대체적인 의견일치를 보고 있어요. 운영과정에서 매끄럽지 못한 부분도 있었는데 작년에 내부에서 논란도 좀 있었죠. 공동체라디오에서의 방송도 사전심의가 있어요. 공동체라디오도 방송법 적용을 받으니까요. 물론 사전심의가 공동체라디오 정신에 맞지 않을뿐더러 자원활동가 중심인 공동체라디오에서는 사전심의 자체가 불가능한 인적구조죠. 명목상으로만 사전심의하고 있다고 공문 처리만 해왔는데 작년에 ‘L양장점’ 방송이 방송심의위원회 심의에 걸렸다고 연락이 왔어요. 방송심의위원회에서 방송국 당 한 명씩 아르바이트를 써서 심의를 하는데 걸리면 주의나 경고, 심하면 프로그램 폐지나 과태료가 나오기도 하죠. 어쨌든 이것을 계기로 사전심의에 대한 논쟁이 붙었는데, 방송국 입장에서는 법에 나와 있는 부분이어서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명목상이라도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었고 그쪽(L양장점)에서는 공동체라디오가 사전심의를 하려고 한다면서 서로 감정이 격해졌죠. 지금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는 과정에 있지만. 심의는 방송국이나 방송을 만드는 자원활동가나 모두 신경 쓰이는 일이죠. 누가 우리 방송 듣고 이래라 저래라 한다는 건 상당히 기분 안 좋은 일이잖아요. 검열이기도 하고. 외국은 공동체 방송이나 퍼블릭 엑세스에 대한 사전심의가 없는데 우리나라는 다른 언론과 동일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게 제일 큰 문제에요. 또 지난해에 방송위원회에서 공동체라디오 지원금을 줄이면서 광고수익으로 운영하라는 결정을 내렸는데 방송위원, 언론운동하다 들어간 방송위원들조차도 왜 SBS나 CBS도 안 주는데 공동체라디오는 지원이 필요하냐? 이러는 거예요. 공동체라디오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건지, 방송위원회만 들어가면 생각이 바뀌는 건지. 방송위원회에서 사람 생각을 바꾸는 기계가 있나보다, 그런 이야기도 했죠. (웃음)”


올해 들어서 시사프로그램이 생기면서 마포FM은 점차 지역에서 영향력을 갖춰나가고 있다. 방송 중 오는 문자메시지나 홈페이지에 달리는 댓글을 봐도 긍정적 반응이 늘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출력 증강, 공적 지원의 확대 문제와 함께 지역주민들의 참여를 높여 지역에서 방송이 뿌리내리는 것이 송 본부장이 생각하는 마포FM의 당면 과제다. 미디어운동의 한 갈래, 풀뿌리 운동의 한 실험 정도로만 생각했던 공동체라디오 운동은 실은 1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러시아 혁명 이후 트로츠키가 벌써 라디오란 매체에 주목했고 1930년대 브레히트는 이미 “민중들이 라디오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라디오가 민중들을 기다리고 있다.”라며 라디오는 “단지 수신하는 것만이 아니라 송신도 하며, 청취자가 그저 듣고만 앉아있는 게 아니라 발언도 할 수 있고, 따라서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연결되어 있는 시스템”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그의 말마따나 알제리 혁명을 중심으로 한 아프리카에서, 라틴아메리카에서, 68혁명 당시 유럽에서 공동체라디오 운동은 활짝 꽃을 피웠다.


“거의 전 세계에서 라디오는 민주화운동의 도구로 사용이 됐는데 우리는 왜 그러지 못했을까? 우리나라는 해적방송이라는 게 없었어요. 우스갯소리로 당시에 라디오 하면 무장공비나 간첩을 떠올려서 아닐까? (웃음) 남미에서는 미디어운동으로 시작된 공동체라디오 방송이 성장해서 공영방송을 능가하는 방송국이 된 경우도 있어요. 시작할 때는 미디어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완전하지 않았고 나중에 통제하기에는 너무 커져버린 거죠.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지역화라고 하는 담론들, 필요성들이 더 강해질 수밖에 없고, 민주주의가 진전될수록 지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수밖에 없죠. 주민들의 의식이 발전할수록 자신의 생활 터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지역에서 이를 담을 매체는 공동체라디오뿐이라고 봐요. 지역신문은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거의 지역토착세력과 유착되었잖아요. 공동체라디오는 또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죠. 영역을 확장하면서 지역에서의 미디어 활동, 영상 활동과 결합할 수 있고. 또 미디어가 이야기하는 것과 시민단체가 이야기하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죠. 하지만 공동체라디오가 절대 쉬운 활동은 아니에요. 우선 노무현 정부 때 도입만 했지 아무런 정책도 없이 나쁜 것만 잔뜩 만들어놨으니까. 그래서 이명박 정부에서 더 나빠질 것도 없지만 또 좋아질 것도 없으니까. 기본적으로 물리적 공간이 필요하고 지역의 지원이나 협조가 필수적이죠. 게다가 방송은 상당히 전문적인 영역이어서 방송을 하는 것 자체만도 만만치 않은데 더불어 지역과의 관계도 만들어나가야 하니까 시민운동보다 훨씬 폭넓은 활동을 요구해요.
무엇보다 일반 시민들, 지역주민들과의 관계가 중요해요. 공동체라디오를 이끌어가는 힘은 그들에게서 나온다는 의식이 필요해요. 저도 지역차원의 구체적 운동은 처음이었죠. 성미산 운동을 촬영하면서 생활과 밀접하게 결합된 운동이 너무나 새로웠어요. 이런 게 진짜 시민운동이구나. 바로 아랫집, 윗집 사람들과 함께 하는, 아주머니들이 아이들 손잡고 나오고, 집에서 해온 음식을 서로 나눠 먹으면서 하는 운동. 지역 운동의 맛을 알게 된 거죠. 반성도 했어요. 내가 했던 운동은 뿌리가 없는 운동 아니었나 하는. 또 지역의 힘이랄까, 고공전도 필요하지만 역시 생활과 밀착해서 펼치는 운동, 삶의 뿌리를 둔 운동이 필요하다. 그게 바로 공동체라디오이기도 하죠.”



인터뷰 강곤 편집기자
사진 박김형준 객원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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