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소수자와 세계인권선언

오는 12월 10일은 세계인권선언이 선포된 지 60년째를 맞는 날이다. 오래된 역사만큼 선언은 세계 곳곳의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이 멀다. 헌법마저 하루하루 일상에서는 남 얘기처럼 들리는 마당에 하물며 ‘세계’인권선언이야. 구멍도 많다. 가장 큰 한계는 선언이 발표된 지 60년이 흘렀다는 점이다. 새롭게 드러나는 문제를 담지 못하는 가운데 선언은 더욱 우리의 현실과 멀어진다. 특히 보편성을 강조한 선언을 소수자의 시각으로 보면 그 구멍은 수십, 수백 군데로 늘어난다. 그러나 세계인권선언을 ‘비현실적인 옛날 문서’로 보기에는 여전히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부정하기 힘들다. 세계 모든 이의 보편적 권리를 천명한 권위 있는 문서라는 점에서 구멍이 났다고 버릴 게 아니라 의미와 한계를 곱씹고 메워야 할 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


장애인, 청소년, 이주노동자, 노숙인, 비정규직 노동자, 성소수자. 한국 사회에서 흔히 ‘소수자’로 불리는 이들은 세계인권선언을 어떻게 읽고 있을까? 한국 사회의 현실 속에서 선언을 긴밀하게 재구성해서 땅에 뿌리를 내리게 할 수는 없을까?


지난 10월 13일 서울 서대문 민주노총 서울본부에서 그 여섯 소수자를 대신한 활동가들이 세계인권선언을 뜯어보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모였다. 한채윤(성소수자, 한국성소수자문화센터), 김광이(장애, 장애여성공감), 정영섭(이주노동자, 이주노조), 한지혜(청소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이동연(빈곤, 노숙인복지와인권을실천하는사람들), 문설희(비정규직, 불안정노동철폐연대)가 그들이다.



1. 상차리기


저녁시간이 제법 지나 시작된 모임은 ‘인권 밥상 차리기’와 함께 시작됐다. 사회를 맡은 인권운동사랑방 미류 활동가는 “각자 활동할 때 인권은 무엇이라고 느꼈는지를 음식으로 표현해보라”고 제안했다. 금세 밥과 국과 반찬이 오른 밥 한 상이 차려졌다.



김광이 인권은 미역국 같다. 때로는 조개를 넣기도 하고, 쇠고기를 볶기도 하고, 양파를 넣는 사람도 있고. 들어가는 재료에 따라서 맛이 달라진다. 미역이 목구멍에 들어갈 때의 미끈거림은 인간관계의 끈끈함이 아닐까 생각된다. 먹고 나면 개운하고 따뜻한 느낌! 이런 것이 우리의 인권이 아닐까.
문설희 인권은 기본적인 것이니까 밥 같다. 더 중요한 것은, 밥만 먹으면 심심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반찬이 있어야 하듯 인권으로 취합할 수 없는 관계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밥은 기본이다.
한채윤 인권은 물 아닐까. 모든 음식을 만들 때 들어가야 하고, 편하지만 없으면 안 되고, 옆에 있는데도 그걸 느끼지 못하는 존재. 또 공공재라고 얘기는 하지만 사유화됐을 때는 무서운 일이 일어날 수도 있어서 닮았다고 생각한다.
이동현 다른 반찬은 없어도 김치가 없으면 먹기 힘들더라. 인권은 김치처럼 내 생명을 지켜주는 든든한 음식 같다.
한지혜 저는 포도가 생각났다. 포도는 매우 알이 많다. 하나씩 먹을 때마다 느낌과 맛이 다르다. 인권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정영섭 이주노동자에게 인권은 그림의 떡이다. 맛있지만 실제로는 못 먹으니까….


2. 인권선언 구절판


“이제 서로의 영역에서 중요하고 절실하다고 생각하는 권리가 어디에서 만나는지 살펴보자. 그래야 우리 입에 달라붙는 인권의 구조가 재구성되지 않을까. 각 영역에서 생각하는 중요한 권리를 종이 구절판에 채워 달라.”


한 상 차리기가 끝난 다음 두 번째 순서는 ‘구절판’ 만들기였다. 동그란 종이 위에 나눠진 8개의 칸마다 권리의 이름을 채우는 활동가들의 손길이 바빠졌다. 색도 저마다 다른 구절판 여섯 그릇이 10분 만에 탄생했다. 그중 일부를 소개한다.



김광이 장애인들에게는 ‘발전할 권리’가 핵심이 된다고 본다. 그동안 이동권 같은 접근권은 많이 얘기돼 왔지만 정작 장애인이 또래집단과 더불어 살지 못하면서 발전이 지체된 것은 개인의 모자람으로 치부됐다. 결국 발전할 기회가 없어지면서 다양한 차별적 양태가 나타나게 됐다. 그 다음에 필요한 건 다양한 정보에 대한 ‘정보 입수권’이라고 생각했다. 정보 접근이라고 하면 시각·청각 장애인에게만 한정해 상상하지만 지체장애인이라든가 모든 장애 유형을 갖고 있는 이들이 정보에 다양하고 동등하게 접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다. 예전에 한 안내원이 1층에서 내게 4층의 사무실에 가서 알아보면 된다고 했을 때 느낀 답답함은 곧 정보의 단절이었다.
문설희 비정규직이라든지 불안정노동의 경우 노동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부분이 가장 크다. 또 주기적으로 해고당하지 않을 권리가 중요하다고 본다. 최저생계비 실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마음 아픈 답변을 봤다. 1년 동안 실직이나 해고로 인해 마음의 불안을 느낀 적이 있냐는 질문에 1년 12번을 느꼈다고 하더라. 주거와 이주도 하나의 권리로 보장되어야 할 것 같다. 건설노동자 같은 경우 일이 있는 곳에 가서 살아야 한다. 사람들이 노가다는 막장 인생이어서 쓰는 데 급급하다고 하지만 그렇게 옮겨 살면서 피폐해지고 결국 소비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 있다.
한지혜 스스로 결정하는 게 가장 핵심적인 게 될 것 같아서, 자기 결정권이 제일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청소년이라고 얘기하면, 당연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우선순위에서는 또 뒤로 빠진다. 제일 먼저 생각난 건 반말을 듣지 않을 권리다. 한국 사회에서는 일단 어려보이면 아무렇지도 않게 반말을 쓴다. 그런데 반말을 쓰는 것은 서로 예의를 갖춰야 하는 사이인데도 청소년은 나이가 어려서 무시해도 된다는 게 무의식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일방적으로 존중을 강요하면서 위계가 생긴다. 정치적 권리의 경우, 지난 촛불 집회에서 보면 항상 10대 청소년이 나섰다고 치켜세우면서도 나중에는 10시가 되니까 집에 들어가라고 한다든지 하는 말을 많이 들었다. 교육감 선거에서도 청소년은 빠져있다. 또 가출할 권리는 청소년 하면 여전히 학교를 다니는 경우를 떠나 사회, 가정에서도 억압을 받는 약자의 존재인데, 이에 대해 맞설 수 있는 권리라는 점에서 중요할 것 같다.
이동연 일단 안전할 권리를 먼저 썼다. 노숙인들의 경우 한뎃잠을 자기 때문에 춥고 배고프기도 하지만 지나가는 사람에게 폭행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또 문화생활을 누릴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노숙인에게 취미가 있냐고 물어보면 10명 중 2명이 있다고 하는데, 뭐하냐는 물음에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극도로 가난하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문화라는 건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구성원 간의 동질성을 확인하는 것인데, 누리지 못하다 보니까 결국 소주를 마시면서 현실을 망각하는 식으로 밖에 풀지 못하는 것 같다. 그리고 안전한 먹거리를 먹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촛불 집회 때 한 노숙인이 정부나 노숙인쉼터에 공문이라도 보내달라며 우리 홈페이지에 글을 썼다. 분명히 미국산 쇠고기가 수입되면 노숙인상담센터에 올 텐데, 먹기 싫다고. 예산이 없기도 하지만 특히 거리 급식의 경우 정부에서 지원하는 게 없다. 주로 종교기관에서 했는데, 정체불명의 음식이 많이 나온다.
정영섭 첫 번째는 단속과 추방되지 않을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미등록노동자들에게 주요하게 해당되지만 합법노동자도 얼마든지 그럴 가능성이 있다. 이주노동자는 존재 자체를 범죄시하기 때문에 큰 고통을 받고 있다. 산업 안전의 문제의 경우에도, 다쳐도 제대로 치료가 안 되기 때문에 보장이 시급하다. 또 의료보장체계가 없으니까 다치거나 아플 때 값싸게 병원에 갈 수 있는 권리가 없다. 평등권과 교육권은 말할 것도 없다. 한국은 이주민 자녀가 많지 않다. 현재 공식통계로는 1만3000명이 합법 체류자의 자녀들이고, 미등록 이주자 자녀는 몇 천 명 정도 된다. 이들의 입학은 학교장 재량에 따라 하게 되어 있어서 제대로 교육이 보장되고 있지 않다. 제일 심각한 문제는 이주노동자 사이에서 낳은 아기는 국적이 없다는 것이다.
한채윤 성적소수자는 대표적인 사회적 약자인데 권리를 쓰는 것 자체가 힘들다고 느꼈다. 또 단어 선택이 어렵다. 젠더와 섹슈얼리티와 관해서는 이론이 많아서 어떤 단어를 선택하느냐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동성애자도 결혼할 권리가 있다고 얘기한다. 정확히 말하면 ‘법적, 경제적, 사회적 동반자’를 자신의 대리인이나 상속자로 지정할 권리가 된다. 그런데 너무 열거할 게 많다. 입양, 인공수정, 보호자의 권리, 임신, 출산, 양육을 할 권리로 열거를 해야 한다. 성별 표현의 권리라고 얘기하는 것은 예를 들어 내 몸은 남성의 몸이지만 화장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즉 어떤 옷, 헤어스타일, 구두를 신을 것인지는 내가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점이다. 부모님이 주민번호를 만들긴 했지만 내가 나의 성별이 잘못 적혀진 것이라고 하면서 공보에 기재되어 있는 성별을 변경할 권리가 있다고 얘기할 수 있다. 포괄적으로 얘기하면 사회적 편견을 수정하고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고 보고, 더 포괄적으로 얘기하면 인권선언을 이성애주의로 읽어버리면 동성애자는 다 빠지는 것이고, 넓게 보면 동성애의 모든 권리가 다 보장된다고 볼 수 있다.



3. 구절판 오리기+세계인권선언 뜯어보기


각자의 구절판 설명이 끝난 후 구절판은 곧 산산조각 났다. 본격적으로 세계인권선언을 해부할 시간이었다. 수십 개의 ‘권리’ 조각들은 세계인권선언이 지지하는 권리, 아예 선언문에 들어있지 못한 권리, 혹은 선언에 의해 오히려 억압된다고 볼 수 있는 권리 등 네 개의 칸 속에 다시 담겼다.
권리 조각이 흩어진 네 개의 칸 가운데 가장 먼저 눈에 띤 점은 노숙인의 권리들이 대개 ‘세계인권선언이 지지하는 권리’에 가 있다는 점이었다.



미류 이미 60년 전 선언에서 모두 얘기했는데 현실에서 아직도 보장되지 못한다는 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거꾸로 뭔가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이동연 선언이 세부적인 사항을 고민하지 못한 것 같다. 사실 선언에서 인정하는 투표할 권리를 보면, 노숙인은 돈이 없어서 못하는 것이지, 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니까. 프라이버시권의 경우에도 누가 폭력적으로 빼앗는 것은 아니지만 환경 자체가 경제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권리가 침해되는 것이다.
문설희 비정규직들이 현실 속에서 절박하다고 생각하는 권리들도 대개 선언 안에 다 들어가 있다.



참석자들에게 입을 모아 지탄을 받은 조항은 16조였다. ‘성년이 된 남녀는 인종, 국적, 종교의 제한을 받지 않고 결혼할 수 있으며, 가정을 이룰 권리가 있다. 결혼에 관한 모든 문제에 있어서 남녀는 똑같은 권리를 갖는다’고 명시한 이 조항에 대해 참석자들은 소수자의 권리가 담겨있지 않거나 오히려 억압하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문설희 ‘성년의 남녀’가 혼인을 해서 자녀를 이룰 권리라고 나와 있다. 마치 남녀가 성년이 되면 가정을 이루는 게 당연하다는 뉘앙스다. 특히 3항(가정은 사회의 자연적이며 기초적인 구성 단위이며, 사회와 국가의 보호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에 보면 가정을 구성하는 것 이외의 임신, 출산, 육아를 인정하지 않는다.
한채윤 성소수자 권리를 많이 ‘선언에 담기지 못한 권리’ 쪽에 놓았는데, 이것들이 억압된다고 하면 지나치게 좁게 해석하는 것 같고 오히려 확대될 여지를 만드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입양을 통해 가족을 구성할 권리가 억압받는다고 생각했던 건 아예 이런 권리가 선언 속에 없기 때문이다.
한지혜 가출할 권리가 ‘억압되는 권리’라고 생각했다. 가정은 사회의 자연적이며 기초적인 구성단위라고 하면서 이 안에 같이 있어야 한다고 얘기하기 때문이다.
한채윤 선언이 전반적으로 이성애 중심적으로 해석할 여지를 많이 깔아놓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상상의 여지를 주지 않고 있다. 25조 2항(모든 어린이는 부모의 혼인 여부에 관계없이 동등한 사회적 보호를 향유한다)의 경우 혼인 여부만이 문제인 것처럼 서술한 부분을 보면 결혼하지 않은 동성애자도 인정해준다고 해석할 수 없는 것이다. 혼인 여부라는 표현보다 다른 것을 찾아야 되지 않을까.
김광이 일반적인 인권선언으로 보장되지 않는 부분으로 장애인에 대한 편의제공이 있다. 헌법이나 인권선언은 비장애인 중심의 해석을 주로 하기 때문에 장애인의 의사소통과 다양한 정보를 입수하고 접근권이 보장되어야 하는 부분은 언급되지 않는 한 인식되지 않는다. 또 보장구 개발을 통해 장애를 인정받을 권리는 장애인에게 있어서는 특별한 인권이다.
미류 세계인권선언의 구조가 문장이 모두 ‘모든 사람은…’이라고 하며 시작한다. 그래서 장애인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지 않으면서 은폐해 버렸던 한계를 갖고 있다. 한편으로는 세계인권선언이 우리에게 힘 또는 지향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 내용이 보편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새로 만들어져야 하는 권리가 있다면 다시 한 번 ‘모든 사람’의 이름으로 만들어져야 할까?
김광이 어차피 선언은 포괄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특성은 있지만, 2조 같은 경우 인종, 피부색, 성, 언어, 그 밖의 정치적 견해 등이라는 규정이 있다. 그런데 60년 전의 예시에서 장애, 성적 지향, 이주 등의 내용이 좀 더 열거에 들어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중반부로 이어진 토론을 뜨겁게 만든 주제는 청소년이었다. 이는 세계인권선언 어디에도 청소년이 명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롯됐다. 미류 활동가는 “청소년은 부모에 대해서는 자식, 성인에 대해서는 어리고 보호받아야 할 존재 등 상대적인 위치를 통해서만 드러났지 보편적인 인간의 한 사람으로서 충분히 담기진 못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한지혜 청소년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되고,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주체가 되어서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청소년의 노동 같은 문제에서는 부모의 동의서를 받아와야 하는 등의 문제가 있다. 또 우리가 스스로 해야 한다고만 말할 수 없는 게, 청소년이 노동하기 좋지 않고, 착취당하는 환경이 있다. 그래서 많이 고민되기는 하지만 일단 청소년이 자유롭게 정당한 보수를 받으면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미류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은 생계를 목적으로 누군가에게 고용되는 것을 인정한 바탕에서 이 권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청소년도 일할 권리가 있다고 할 때 말해지는, 사회에서 적극적으로 자기를 실현하고, 관계를 맺는 의미로서의 노동의 의미는 선언에서 부족하다.
정영섭 선언에서는 정치 참여 활동은 기본적으로 자국의 정치참여로 한정돼 서술돼 있다.
미류 이주노동이 본격화된 시기는 선언이 선포된 뒤 좀 더 지났을 때다. 또 이주노동자에게 인권은 그림의 떡이라는 말을 했는데, 실제로 인권보장 체계는 매우 국가중심적이다.
정영섭 체류의 권리라는 개념 자체가 선언에 별로 없는 것 같다. 국적을 가질 권리가 있다(15조1항), 이 말이 국적을 안 가질 수도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두 번째는 국적이 실제로는 대부분 부인되고 있다. 국적을 표현할 수 없는 미등록체류자도 많은데, 단순히 국적 문제로 생각하기 보다는 기본 공동체, 국가가 됐건 지역 단위가 됐건 그런데서 어떻게 소속을 부여해줄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자유롭게 변경할 수 있게 해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4. 나가며


두 시간 넘게 이어진 인권선언 분석 작업이 끝난 뒤, 참가자들은 현재 세계인권선언에 부족한 점이 많지만, 그래도 현실에서는 아직 요원한 권리들이 선언 속에 담겨 있다는 사실을 한목소리로 지적했다. 이날 자리에서 참가자들이 발견한 공동의 성과 중 또 하나는 권리 개념의 확장이었다. 즉 한 부문에서 강조하는 권리는 다른 부문의 권리로도 연결되고, 결국 보편적 권리의 의미를 풍부하게 해준다는 점에 모두 공감을 표시했다.



문설희 토론을 하고나서 보니까 밥은 저기에 있어도 우리가 못 먹는 것 같다. 인권선언만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 다른 무언가가 필요한 게 아닐까. 인권을 그림의 떡으로 내버려둘 게 아니라 먹을 수 있는 밥으로 만드는 행동이 필요하다는 게 확인된 것 같다.
정영섭 소수자에서 다수자의 세계인권선언으로 나갔으면 한다. 지배자가 말하는 것은 허구적 다수이고, 우리가 소수라고 얘기하는 것은 권력의 면에서 소수이지 숫자에서 소수는 아니니까.
김광이 누군가의 권리가 또 다른 누군가의 권리로 확장되는 점에 많이 공감된다.
이동연 노숙인들과 함께 인권선언을 읽어보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궁금하다. 다들 알 것 같지만, 오히려 자기 상황을 비웃게 될 것 같다. 인권이 우리 상황을 더 나아지게 하는 역할을 하기 보다는 우리의 상황을 개선시켜나가는 활동 하나하나가 인권을 인권답게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채윤 모든 사람이라는 부분을 우리가 적극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한지혜 다른 권리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못했구나하는 고민이 됐다. 다양한 사람이 모여서 이런 얘기를 많이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미류 소수자의 권리들이 세밀해질수록 보편적 권리가 풍부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서로 연결된 것이 있고, 청소년의 입장에서 반말을 듣지 않을 권리를 얘기했는데 장애인이나 이주노동자의 경우에도 흔하다. 또 사람이 구분될 수 없는 것처럼 사람답게 살 권리도 구분될 수 없는데 선언에 어떤 것은 지지되고 억압된다는 게 문제라는 건 분명하다. 그런 작업을 좀 더 이론적으로 하려는 시도가 이번 기획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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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현 | 프레시안 기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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