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나의 정체를 알려 주마

국가보안법이 세계인권선언에게

자네1), 오랜만이네. 내가 하대를 해서 좀 기분이 나쁜가. 60년 전 같은 해 같은 달2)에 태어났지만, 그래도 내가 자네보다 9일이나 세상에 빨리 태어났으니 내가 형뻘이네. 그러니 하대 좀 한다고 해서 기분이 언짢을 것까지는 없잖나.


자네 요즘 잘 나가대. 여기저기서 자네를 불러대더군. 국가인권위원회는 “인류의 가장 아름다운 약속”이라며 홍보하고, 인권단체들도 자네가 태어난 것을 기념해서 새롭게 인권선언운동을 한다고 하고 말이지. 국내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자네를 칭송하고 있는 것 같아. 물론 늙었다는 핀잔을 듣기는 하지만 자네를 싫어하는 이들도 대놓고 욕하지는 못하대.


그럴 때는 참 부럽기도 해. 나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명확하게 갈려. 나를 열렬히 좋아하거나 극렬하게 반대하거나 극단으로 나뉜단 말이야. 특히 반대하는 놈들은 아예 내 목숨을 끊으려고도 하지. 아주 여러 번 위기가 있었어. 자네는 태어나서부터 여기저기 인용되고, 각종 인권조약들로 분신들이 생겨나고는 했지. 인권과는 담 쌓은 것들도 자네 눈치를 보는 걸 보면 자네는 참 대단해. 독재자들도 자네를 기념하잖아. 박정희라는 독재자도 인권이란 말을 입에 오르내렸으니 가관이 아니지.


하지만 애초부터 자네와 난 운명이 달랐어. 누구는 세상에 태어나지 말아야 할 법이라고 하지만, 나를 간절히 원했던 사람들이 온갖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를 세상에 내놓았어. 히틀러의 법이니, 후대에 죄를 짓는 것이니 하면서 난리들을 쳤잖아. 그러다가 타협을 했지. 형법이 만들어지면 나를 폐지하자는 걸로. 난 겨우 몇 년짜리 운명을 타고 태어났던 법이지. 물론 그렇다고 내 역할을 잊지는 않았어. 태어나자마자 내 손에 피를 묻히기 시작했거든. 1949년, 그 해에만도 내 손으로 잡아들인 빨갱이들이 11만 명이 넘었어. 좌익단체와 정당들도 싹 쓸어버렸잖아. 전쟁 시기에는 수십만 명이 내 이름 앞에서 죽어갔어. 내가 세상에 나오는 걸 반대했던 그 작자들! 국회 프락치 사건이라는 걸로 감방에 집어넣고 일부는 아예 숨통을 끊었지. 그게 나야. 내게는 늘 피 냄새가 나. 언제나 피에 굶주렸던 것 같아. 그래서인지 법정에서 판사들이 제대로 판결도 못했어. 앞 줄 사형, 뒷줄 무기, 이런 식이었는데 뭘. 법정까지 갈 것도 없이 즉결처형을 해도 상관없던 때가 있었지.


애초에 형법이 만들어지면 자동적으로 내가 사라지는 것이었잖아. 그런데도 살아남았단 말씀이야. 1953년에 형법 제정할 때, 당시 대법원장이었던 김병로가 이제 형법이 만들어졌으니 국가보안법은 폐지하자고 했지. 국가보안법은 여순 폭동이라든가 아주 극단적인 혼란 상황에서 한시적으로 적용했던 법이고, 형법에 간첩죄도 있고, 반국가단체 같은 것도 처벌할 수 있는 거라고. 나 때문에 이중 처벌이 생기니 불필요하다고 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이나 우익들이 나를 얼마나 열광했는데, 없애도록 놔두었겠어? 천만에 어림없지. 전쟁도 치룬 뒤인데, 빨갱이로 뒤집어씌우면 정적들을 간단히 제거할 수 있는 나 같은 강력한 법이 필요했단 말이야.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누명을 씌워 장기수로 만들고 또 사형대로도 보냈지. 그 덕에 집권자와 그 세력의 총애를 누렸어. 그렇게 목숨의 끝에서 살아났던 나는 이제 본격적으로 내 역할을 해내게 될 거였어.


조봉암이라는 사람을 아나. 자네는 워낙 세계 곳곳의 인권문제에 신경을 써야 하니깐 자세히는 모를 거야. 그 사람은 일제 때 독립 운동하다가 복역도 했던 사람이지. 해방 후에 조선공산당과 결별했고, 이후에 농림부 장관, 국회 부의장도 지냈던 사람이지. 이 사람이 1956년 5월에 치러진 제3대 대통령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서 23% 넘는 지지를 받았어. 그때 선거가 부정선거였던 걸 감안하면 엄청난 거였어. 그해 11월에는 진보당이라는 정당을 만들어. “책임 있는 혁신정치, 수탈 없는 계획경제, 민주적 평화통일”의 3대 정강을 내걸고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만들었어. 당시에 진보당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컸어. 이승만이 독재를 좀 심하게 해서 말이야. 이승만이 나를 내세워 진보당을 작살을 냈지. 1958년 1월에 조봉암과 진보당 간부들을 검거해서 법정에 세운 거야. 결국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사형을 선고받았고, 1959년 7월 31일 서울 서대문 형무소3) 사형장에서 처형됐지. 내가 그런 존재야. 강력한 정치적 라이벌로 부상하는 조봉암과 같은 인물을 이승만은 나를 내세워 간단히 제거했다고. 2007년 9월에 진실화해위원회는 조봉암은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려 사형 당했다고 결정을 했더군. 50년 동안이나 나는 그 자를 간첩으로 붙잡아 둘 수 있었던 거지, 흐흐흐.


오랜만에 동갑내기와 마주해 60년 법 살이를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하는군. 젊을 때는 국가를 위해서라면 내 이름 하나 더럽혀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생각이 좀 달라졌어. ‘인권’은 나한테 안중에도 없었는데. 헛소리마라. 국가가 있고, 국가를 떠받치는 공안기구들이 있는데, 무슨 인권이냐. 그런데 이제 나도 목숨을 연장하려면 자네 같은 인권들 눈치를 안 볼 수가 없게 되었어. 그만큼 내가 밀리고 있는 거지. 하지만 본질은 변할 수 없어. 내 눈에 걸려들면 어떻게든 다시 피 바람이 일지. 넌 천사표로 태어났겠지만, 난 악마의 표식을 이마에 분명히 새기고 태어났어. 내 몸에는 악마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게 분명해. 그게 내 운명인 거야.


암튼 60년 법 살이 중에 가장 신났던 때가 있었지. 박정희와 전두환 시절 말이야. 그들은 정말 DNA 자체가 반인권일거야. 걔네들이 쿠데타로 대통령을 할 때 헌법도 내 발 밑이었어. 그러니 자네 같이 법도 아닌 선언쯤 간단히 뭉개버렸지. 참으로 호시절이었어. 내 앞에서는 기세가 아무리 등등하던 재벌입네, 정치인입네 하는 것들도 모두 벌벌 떨었으니까.


박정희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 반공을 국시로 삼은 다음 나만으로도 성이 안 찼는지 내 아우4)를 만들었던 거야. 참 내 형님5)은 1925년생이신데, 일제 때 대단한 활약을 했지. 독립 운동합네 하는 사람들, 사회주의 운동합네 하는 사람들을 우리 형님이 모두 작살냈지. 형님의 위력 앞에 그런 운동가들도 거개가 다 전향하면서 천황 만세를 불렀지 않았겠나. 우리 형제들이 그래. 전두환은 내 아우를 없애지 않고 나와 합체시켰어. 마치 합체 로봇이 된 것처럼 난 기운이 펄펄 났어. 이승만 때까지만 해도 법 형식적으로 폼이 덜 잡혔거든. 난 이제 무려 46개나 되는 죄목으로 위반한 사람들을 사형시킬 수 있었어. 그리고 일반 형사범은 구속 수사할 수 있는 기간이 30일밖에 안 되지만, 나한테 걸리면 50일을 밀실에서 구금, 수사할 수 있게 되었어. 그러니까 법적으로는 20일 동안을 대공분실이나 안기부 밀실에 가둬두고 수사를 할 수 있었단 얘기야. 밀실에서 그 시간을 견뎌 봐. 지옥이 따로 없지. 그러고도 또 30일 동안 검사가 잡아놓고 수사를 할 수 있단 말이지.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는 고객으로 찍은 사람들을 먼저 남산 안기부6)나 보안사 서빙고호텔7), 또는 남영동 대공분실8) 같은 곳으로 납치해 버리는 거야. 법적 절차? 웃겨! 간첩 잡는다는데, 무조건 잡아다가 족치고 보는 거지. 한 달, 두 달 심지어는 넉 달, 다섯 달을 밀실에서 고문을 하면 멀쩡한 사람들이 간첩이라고 불어. 수사관이 시키는 대로 개가 되어서 바닥에 흘린 오물을 혀로 핥아먹기까지 해야 하는 거였어. 수사관이 불러주는 대로 조서를 작성하고, 무인을 찍으면 그때서야 영장을 발부받는 거지. 구타, 통닭구이, 욕조에서 물고문, 칠성판에서 전기고문을 해대면 어느 장수가 배길 거냐고. 그렇게 해서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던 서울대 최종길 교수가 죽었지, 그러고도 중정 애들이 추락사했다고 우긴 거지. 왜 나중에 박종철 학생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해서 죽이고도 은폐하려고 했잖아.


그런데, 이근안은 참 대단한 사람이야.

덧붙이는 말

1) 이 글에서 자네는 ‘세계인권선언’을, 나는 ‘국가보안법’을 말한다. 2) 국가보안법은 1948년 12월 1일 생, 세계인권선언은 같은 해 12월 10일 생이다. 3) 서울 구치소의 전신. 서울 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1987년 이전하기까지 서울시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위치해 있었다. 일제 때는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수감되어 고문을 당했고, 사형되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정치범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현재는 독립공원으로 조성되어 감방과 사형장, 고문실 등이 남아 있다. 4) ‘반공법’을 말한다. 5) 일제가 1925년 제정·시행한 ‘치안유지법’을 말한다. 6) 전두환은 1980년 4월 중앙정보부를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로 개칭하였다. 안기부 건물이 서울 남산에 위치해 있어서 세간에는 ‘남산 안기부’로 불렸다. 2006년 2월부터 서울시가 운영하는 유스호스텔은 안기부가 1972년 세워 1996년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현재 국가정보원(국정원)으로 이전하기까지 본부로 활용하던 건물이다. 유스호스텔로 쓰는 건물 외에 별관이 있는데, 이곳이 정치범들을 수사하던 악명 높던 곳이다. 7) 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에 있던 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의 대공 분실을 일컫는다. 1972년 10월 유신 이후 야당 정치인, 재야인사, 운동권 대학생 등을 불법 연행하여 고문을 하던 곳으로 악명을 떨쳤다. 1991년 윤석양 이병이 보안사 정치사찰 파일을 폭로하였고, 이를 계기로 보안사령부는 정치사찰 중단을 선언하고 명칭도 기무사령부로 바꾸었다. 당시의 서빙고 분실은 폐쇄되었고, 현재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8) 서울시 용산구 남영동에 위치한 경찰청 인권보호센터 건물의 옛 이름. 1976년 치안본부는 이곳에 대공분실을 설치하여 간첩 대공수사 업무를 주로 처리하였다. 1987년 1월 고문치사로 죽은 박종철 씨는 이곳 509호실에 조사를 받다 숨졌다. 2005년 7월까지 경찰청 보안3과 보안분실로 사용되었다. 9) 敎化師. 교도소에서 수감자들을 교화시키는 역할을 담당한 공무원. 장기수들에게 교화사는 죽음의 사자와 같았다.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박래군 | 편집인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