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참사가 일어난 용산 남일당 건물. 사진 | 빈곤사회연대 |
장사꾼 집 자식으로 태어나 별다른 꿈도 장래희망도 없이 자라났다는 그는 평생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하고 세상을 등진 아버지를 지켜보면서, 자신의 가정을 꾸리게 되면서부터 꿈과 희망이란 것을 품었다.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살고자 했던 희망. 가족이 오순도순 함께 살아가기 위한 집 한 칸의 꿈. 2009년 1월 20일 그는 철거된 꿈과 희망을 되찾기 위해 한 사람의 철거민으로 용산 4지구 남일당 건물에 올라갔다.
그리고 이 나라 공권력은 그를 죽음의 문턱까지 밀어붙였고 기적처럼 살아 돌아온 그에게 다시‘특수공무집행 치사 또는 치상’이라는 무시무시한 혐의의 체포영장을 발부해놓았다. 아마도 이 나라는 그를 기소하고 재판을 열어 죄를 물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저지른 유일한 잘못은 이 땅에서 가진 것도 없으면서 터무니없는 꿈을 품고 희망을 끝내 포기하지 않은 것뿐이다.
올라가서 보니까, 이게 장난이 아니구나
"건물에 올라 간 건 19일 새벽쯤, 한 서너 시쯤 됐을 거예요. 저 같은 경우는 짐을 다 올려주고 나서 (건물에서) 빠지는 입장이었는데 우리가 올라가자마자 용역들이 따라 올라와서 1층하고 2층을 다 차지했고 밖에는 패트롤카(경찰 순찰차)가 몇 대 서있었는데 갑자기 많아지더라고요. 곧 전경들이 배치되고 해가 뜬 뒤에는 도로까지 병력이 증강되면서 이게, 장난이 아니구나 싶었죠.
원래 망루가 세워지는 게 한 4시간이면 다 완성이 돼요. 그런데 반대편 건물에서 19일 아침부터 용역들이 망루 짓는 쪽으로 집중해서 물대포를 쏘니까 작업이 잘 진행이 안 됐죠. 망루가 2층에서 3층 올라갈 시점에는 발전기도 문제가 생기고. 우리가 주 발전기 하나랑 예비 발전기 하나, 이렇게 두 대를 가지고 올라갔는데 주 발전기에 문제가 생겨서 작동이 안 되고 예비 발전기로만 돌리니까, 그것도 열이 받아서 작업이 늦어졌어요. 오후 세 시인가 네 시쯤 되어서야 어느 정도 망루가 다 지어졌는데 한 70% 정도만 완성 된 거죠. 그때쯤부터 경찰에서 “자진 해산하지 않으면 강제 진압하겠다!”는 방송을 한 거 같아요.
제가 맡은 일은 아까도 말했듯이 망루 짓는 게 아니라 망루 짓는데 필요한 자재나 공구, 그리고 농성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일이었어요. 망루는 5층 건물인 남일당 건물 옥상에 세워야 하는데 거기까지 자재를 한꺼번에 올릴 수 없으니까 건물 1층에서 2층, 2층에서 3층, 층마다 사람들이 배치가 되어서 받아치기 식으로 올리는 거죠. 농성하면서 먹을 식량이랑 이불, 장판, 만약 대치상황이 될 경우 싸울 수 있는 골프공, 빈병….
물품 다 올리는 데 한 시간 반 정도 걸렸어요. 최대한 신속하게 작업을 한 거죠. 물건을 올리면서 한 편에서는 용역들이 밑에서 올라오니까 2층에서 3층 올라오는 계단에 아시바(공사장에서 쓰는 비계)로 시건장치를 했어요. 그런데 너무 급하게 하다보니까 엉성하게 대충 용접을 해서 용역들이 뜯고 올라왔죠. 그래서 3층에서 4층 올라오는 계단에 시건장치를 또 한 거야. 이번에는 완벽하게 했죠. 용역들은 결국 3층까지밖에 못 올라오고 거기서 폐타이어 같은 걸로 계속 불을 피워댔어요. 우리가 네 번인가 다섯 번인가 소방서에 신고를 했을 거예요. 그런데도 소방관들은 출동해서 불만 끄고 용역들 잡아가지도 않더라고요. 경찰도 그렇고, 늘 그런 식이지. 물대포도 경찰이랑 용역이 같이 쏘고, 건물 주변에서도 같이 이야기하면서 돌아다니고.
물품을 다 올리고 나서는 올린 물품들을 구분했어요. 망루 2층은 생활방으로 만들었으니까 생필품이나 살림용품들 넣고, 3, 4층은 투쟁공간이니까 투쟁물품 넣고, 1층은 시멘트 바닥이니까 자재 위주로 쌓아놓고. 그러고 나서 좀 여유가 생기니까 밥 먹을 사람들 밥 먹고 쉴 사람들 쉬고 그랬죠. 옥상에 서서 밖에 연대 온 동지들한테 손 흔들고, 반가워서 같이 구호도 외치고. 19일에는 망루 짓는데 물대포 쏘는 거 말고는 크게 별일이 없었어요. 경찰은 자꾸 우리가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화염병을 던졌다고 그러는데 우리가 왜 시민들에게 그걸 던지겠어요? 우리는 경찰이나 용역이 접근하면 “물러가라, 물러가지 않으면 우리가 공격한다!” 경고를 하고 공격했죠. 시민들이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우리가 그러겠어요."
그날 거기는 지옥이었어요
그때만 해도 어느 누구하나 살인적인 진압과 이후 벌어질 참사를 예상하지 못했다. 밤이 깊어지자 하나 둘 새우잠을 자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이대로 2~3일이면 내려갈 수 있으리라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규찰을 돌고 계속 건물 주변의 동태를 살폈다. 끊은 지 1년이 넘은 담배를 다시 피울 만큼 긴장된 시간이었다. 그리고 20일 새벽 1시 무렵 그는 크레인과 컨테이너 박스가 실려 오고 경찰특공대가 배치되는 것을 지켜봤다.
"야, 진짜 들어오는구나, 했죠. 이제 붙는구나. 처음 경찰특공대 실은 컨테이너가 올라올 때 제 머리 위로 지나는 걸 봤죠. 망루 바깥에 있다가 컨테이너가 머리 위로 오니까 “야, 떴다” 그러면서 컨테이너 내려와서 자리 잡기 전에 망루 안으로 들어갔죠.
두 번째 컨테이너가 들어올 때는 망루 4층에 있었는데 컨테이너가 올라 온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 하면 특공대가 컨테이너에 탄 채로 쇠파이프로 망루를 막 찌르고 때리더라고요. ‘아니, 애들이 어디서 망루를 이렇게 치나’ 싶어서 망루 창문으로 내다봤더니 컨테이너가 건물 옥상 바닥에 내리지 않고 망루 옆 공중에서 물호스를 쏘면서 있더라고요. 그러다가 갑자기 불이 퍽 하면서 아래부터 불길이 올라오고 순식간에 검은 연기가 망루 안에 가득 차는 거예요. 그때 문득 ‘다 죽었다’ 그런 생각이 들고, ‘어, 이거 어떻게 뛰어내리지?’ 하는 생각도 들고. 우선 숨을 못 쉬니까 나도 그렇고 다들 망루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는데 거기서 아래를 보니까 아래에서 봤을 때랑 다르게 또 무지 높은 거야. ‘여기서 어떻게 뛰어내리지?’ 그랬는데 어떤 사람 하나가 먼저 옥상 바닥으로 뛰어내리는 게 보였죠. 한 사람이 먼저 뛰어내리니까 그 다음 사람, 다음 사람, 우르르 뛰어내렸죠. 돌아가신 윤용헌 씨가 먼저 뛰어내리고 내가 뛰어 내리고, 내 위로 또 돌아가신 이성수 씨가 떨어지고. 저는 그때 두 다리가 부러졌어요.
불붙은 용산 남일당 건물 옥상 난간에 매달려 있는 지석준 씨. 사진 | 빈곤사회연대 |
다리가 부러져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아프더라고요. 그렇게 바닥에 누워있는데 윤용헌 씨가 “승우야, 빨리 일어나. 거기 있으면 죽는다.” 그러는 거예요. 승우는 제 아이 이름이에요. 이성수 씨였나 누구였나, 저를 부축해서 옥상 난간에 기대놓았고 윤용헌 씨는 어디론가 뛰어가는 거 같았고. 나는 난간에 기대고 있다가 불길이 점점 거세지고 망루가 제가 있는 쪽으로 넘어오는 거 같더라고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오로지 내가 여기서 살 수 있는 방법은 옥상 난간에 매달려 있다가 소방차가 와서 구해주는 것밖에 없을 거 같아서 난간에 매달렸는데 팔 힘이 점점 빠지면서 손을 딱 놨는데 ‘이젠 끝이다, 죽었다.’ 이런 게 죽음인가 보다 싶고 갑자기 허무해지더라고요. 우리 아버지, 돌아가셨는데 나도 아버지 옆으로 이렇게 가는구나. 손을 딱 놓으니까 놀이기구 타는 것처럼 붕 뜬 기분이 한편 황홀하기도 하면서 슬라이드처럼 우리 집사람 얼굴, 아들 얼굴이 탁탁탁 눈에 들어오고. 그리고 탕 떨어지니까 가슴이 콱 막히면서 입에서 뭐가 퍽 나오는데, 저는 그게 피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침이었더라고요. 다리는 이미 부러졌고 또 떨어지면서 허리가 부러지고, 가슴까지 부서질 듯이 아픈 게 너무 아파서 눈물도 안 나오고.
아내는 살아있어 줘서 고맙다고
그때 만약 땅바닥으로 떨어졌으면 죽었을 거예요. 건물 옆에 샌드위치 판넬(패널)로 만든 조립식 가건물이 있었는데 거기 지붕으로 떨어져서 살았죠. 지붕에 떨어지니까 소방관들이 올라와서 나를 끄집어 내렸죠. 그렇게 내려오니까 이번에는 또 너무 춥더라고요. 너무 춥다고, 춥다고 그 말만 하니까 소방관들이 용역 컨테이너 사무실에 가서 이불을 가져와서 덮어줬어요. 그리고 있다가 구급차가 와서 거기 실렸죠. 구급차를 타니까 그때부터는 막 졸리기 시작하는데 옆에 구급대원이 막 꼬집어요. 정신 잃으면 안 된다고. 여기(순천향대학교병원) 응급실에 오니까 집사람 연락처, 이름, 주민번호 대라고 해서 말해주고, 그때까지도 정신을 안 잃었어요.
입원해서 수술을 받으러 가면 전신마취를 해주니까 좋더라고요. 시간도 훌쩍 가고. 그런데 밤이 되면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수면제 먹어도 잠은 안 오고, 진통제는 처방이 있어야 더 준다고 하고. 지금까지 하루에 한 두 시간밖에 못 자요. 잠들면 떨어지는 꿈을 계속 꾸는 거예요. 떨어지면 눈앞이 하예요. 그리고 나도 모르게 두 다리에 힘이 빡 가니까 아파서 비명 지르면서 깨고. 땀은 또 줄줄 흐르고. 매일 그래요. 옆에 있는 분들한테 미안해서 며칠 전부터는 복도에 나가서 자기도 하는데….
허리하고 다리뼈가 바스러졌대요. 살을 찢어서 뼈를 다시 맞추고 꿰맸는데, 왼쪽 다리는 복숭아 뼈 있는 데 뼈가 살 밖으로 튀어나와서 골수염 걸릴 위험이 있다고, 그러면 다리를 잘라야 한다고 해서 지금 고름을 빼내는 중이고 한 번 더 수술을 해야 돼요. 허리 한 번, 다리 한 번, 두 번 수술 했는데 지금 병원비가 840만 원 나왔어요. 의사들이야 안 죽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으로 알라고. 앞으로 제대로 걸을 수 있을 지도 두고 봐야 한다고 그러네요.
집사람은 제가 거기 갔을 줄 짐작은 했다고 그래요. 병원에서 연락이 왔는데 크게 안 다쳤다고 그랬대요. 그런데 와보니 완전히 반신불수가 되어 있어서 많이 놀랐죠. 아들은 다섯 살인데 한 번 오더니 무서운지 다시 안 오려 한대요. 어린이 집 선생님이 집사람한테 걱정이 돼서 전화를 한 모양인데 승우가 “우리 아빠가 불이 나서 옥상에서 뛰어내렸다”고 선생님한테 그랬다나. (웃음) 집사람은 살아있어 줘서 고맙다고 그러죠, 뭐. 저도 죽는 줄 알았는데. 만약 다리 안 다쳤다면 나도 이 자리에 있지 않고 아래 영정사진에 끼어있지 않았을까…."
그는 고 윤용헌 순화철대위원장과 같은 지역으로 철대위에서 총무를 맡고 있다. 순화동은 서울 중구 경찰본청 바로 맞은편으로 2004년 도시환경정비사업 지역으로 지정되고 2005년 12월 재개발 사업승인이 난 뒤 2007년 11월 철거가 마무리 되었으나 현재 조합원과 비조합원 사이의 법적 분쟁으로 개발은 중단된 상태다.
"(순화동에서) 제가 본격적으로 장사를 한 거는 2001년에 어머니랑 민물장어 집을 하면서였죠. 그러면서 상인번영회에 가입을 했는데 동네에서 오래 살았고 나이도 제일 젊어서 총무를 맡게 되었어요.
가게가 자리를 잡아가는데 느닷없이 2005년에 재개발 이야기가 들리는 거예요. 상인들이 모여서 도대체 무슨 재개발인가 알아나 보자고 조합에 찾아갔어요. 거기서 하는 이야기가 “세입자들에게 인간적으로는 많이 해주고 싶지만 현행법상 여러분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감정평가사에게 평가를 받아서 그 금액을 보상금으로 받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니 협조를 해주시는 게 여러분에게 득이 되는 길입니다.” 또 조합장인가 하는 사람이 뭐라 그러느냐 하면 “나는 세입자가 되어 본 적이 없어서 세입자 심정 모른다.” 그래요. 그 앞에서 무슨 이야기를 더 하겠어요. 바로 상인번영회가 철거대책위원회로 바뀌었죠."
나한테 줄 돈으로 용역이나 더 사라, 나는 계속 싸울란다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여기저기 알아보니까 전국철거민연합(전철연)이란 단체가 있더라고요. 이 단체가 참 깨끗한 단체인가보다 싶은데 그래도 바로 가입은 안 했죠. 사실 의심스럽죠. 돈도 안 받아, 대신 연대집회는 꼭 가야 돼. 그 사람들 월급도 안 받고 일하더라고요. 합의 과정에서 돈을 받는 단체인가 했더니 그것도 아니고. 나도 그랬고 다른 사람들도 다 이상한 단체도 다 있다, 그랬죠. 그런데 몇 번 같이 다녀보니까 전철연은 정말 순수하게 개발 지역 철거민들이 모여서 자기희생 하면서 만든 단체더라고요.
전철연에 가입해 활동하던 중에 2007년 9월 5일 철거가 시작됐어요. 제가 제일 앞장을 섰다고 첫 빳다로 저희 가게가 철거됐죠. 그날은 날짜도 안 까먹을 거 같아요. 장어가 여름 장사인데 장사가 잘 돼서 전날 들어온 물건도 다 팔았는데. 우리 동네에 규찰조가 있었어요. 동네가 워낙 조그만 지역이니까 용역들이 상주를 안 했어요. 그래서 다른 데처럼 용역들이 그렇게 심하게 행패 부리고 그런 건 없었지만 빈집들이 있으니까 노숙자들이 들어와서 불 피우다가 본의 아니게 불이 나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규찰을 돌았는데 이상하게 저쪽에 경찰차가 몇 대 서있다는 거예요. 가서 보니까 다른 편에 용역들 300명이 바글바글 모여 있더라고요. 덩치가 이만한 용역들이. ‘아, 치는구나.’ 그날 목표가 우리 가게하고 <영덕물회>라는 가게였어요. 우리를 분산시키려고 두 곳을 동시에 친 거죠. 그럴 경우 우리는 한 곳에 모이자, 사전에 약속이 되어 있어서 우리 가게 옥상으로 올라가서 생선 썩은 물도 준비하고 그랬는데, 어디 그게 되나요. 300명이 몰려와서 순식간에 끝났죠. 건물 반파되고. 다시 장사 못하게 가게 물건들도 싹 실어가고, 들어가서 살지도 못하게 유리도 박살내고 샷시도 떼갔어요.
서울 중구 순화동 재개발 현장. 가운데 반파된 건물이 지석준 씨의 가게다. 사진 | 박김형준 |
그날 털리고 나니까 너무 억울하더라고요. 남에게 손 안 벌리고 아쉬운 소리 안 하고 살아보려고 아등바등 했는데. 새벽같이 일어나서 시장 갔다가 하나라도 더 팔려고 밤 12시까지 장사를 했는데 재개발이란 게 뭔지…. 걔네들이 생각하기에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조그만 가게라고 생각할지는 몰라도 나한테는 그게 꿈이고 희망이었거든요. 가게 얻고 나서도 공사비 줄이려고 내가 데모도(조수) 하면서 타일 한 장 한 장 다 내 손으로 붙이고. 으리으리하지는 않았지만 일일이 손 안 간 데 없을 정도로 내 정성과 땀이 묻어 있는 내 꿈이었는데. 좀 더 낫게 살겠다고 가게를 한 거였는데 하루아침에 빈 거지가 되어버렸으니까….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이를 악물고 연대 나갔죠. 우리 의장님, 윤용헌 씨가 사람이 당하고 나면 생각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면 행동이 달라진다고 그랬는데 정말 맞는 말이에요. 그때부터 연대가서 제가 제일 앞에 서고 그렇게 되더라고요.
당시에 전철연에 가입한 가게들은 감정평가 자체를 거부했어요. 전철연에서 이야기하기로 “재개발 지역 보상은 틀이 딱 정해져 있다. 흡족한 대로 준다면 누가 투쟁을 하겠냐?” 그 말 듣고 감정평가를 거부했는데, 우리 가게 뒤편에 일식집이 있었어요. 지하 1층하고 지상 1, 2층. 3층짜리 식당이었는데 권리금만 몇 억에 인테리어 한 1억 들어갔는데 평가금액이 4천만 원 나왔더라고요. 저희 가게는 권리금 4천만 원에 보증금 3천만 원 정도 되는, 테이블 열한 개짜리 식당이니까 거기서 나오는 보상금으로 어디 가서 뭘 하겠어요? 나중에 조합에서 임의로 평가한 금액이 1300만 원이라고 하더라고요. 조합에 가서 그랬어요. “그 돈 가지고 차라리 1300만 원 어치 용역을 사라, 나는 투쟁이나 할란다.” 그리고 그해 11월에 순화동에 있는 나머지 가게들도 다 철거가 됐죠."
그의 요구는 간단했다. 다시 이 자리에서 월세를 내면서 장사를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 그의 말마따나 “어디 다른 데 가봤자 또 철거민 되고, 또 철거민 되는 수밖에 없는” 이 사회에서 순화동은 물러설 수 없는 벼랑 끝이 아니었을까. 2층 가정집을 개조해 테이블 열한 개를 놓고 손님을 맞던 그의 조그만 식당이 철거되는데 불과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날 철거된 것은 구석구석 그의 땀과 정성이 깃든 식당만이 아니었다. 한 식구의 일상과 생계 또한 철거되고 이제 그에게는 “참으로 징글맞은” 순화동에서의 기억만 남았다.
평생 집 한 칸 못 가진 아버지 보면서 한이 됐나 봐요
"아버지는 여수, 어머니는 순천 분이세요. 젊어서 서울에 올라오셔서 지금 삼성 본관 있는 태평로 쪽에서 아버지가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셨죠. 그러다가 내가 초등학교 때 종업원 생활 그만두고 식당을 하게 됐고, 이러저러 하다가 순화동까지 오게 된 거죠. 처음 시작한 건 테이블 몇 개 놓고 고등어조림, 백반 같은 거 하는 조그만 식당이었어요. 사람 쓰지도 않고 아버지랑 어머니 두 분이서 하는. 가게가 바쁘면 제가 가서 도와 드리기도 하고.
그때까지 살림집은 홍제동이었는데 처음으로 집을, 주택을 얻어서 살림집이랑 가게랑 합친 게 바로 순화동이었죠. 그게 89년도였나. 그때도 월세를 내면서 장사를 했지만 그때는 장사가 잘 됐어요. 손님은 많았는데 순화동에 음식점이 별로 없어 가지고. 그런데 제가 군대를 갔다 오니까 식당이 많이 생겼더라고요. 너도나도 가정집 개조해서 식당을 하니까 영업이 좀 부진해졌죠. 그래도 그때가 좋을 때였던 거 같아요.
저는 그냥 평범하게 자랐어요. 사춘기 때도 뭐 그냥 그랬고. 여동생이랑은 네 살 차이 나는데 우리 식구는 화목해서 별 문제도 없었죠. 학창시절에 공부에는 별로 흥미를 못 느껴서 친구들이랑 놀러 다니고 가게 바쁘면 가게일 도와 드리고. 딱히 장래희망, 그런 것도 없었던 거 같아요. 어릴 때 태권도랑 합기도를 배웠는데 소질이 있다고 그랬지만. 가정형편 때문에 중단하지만 않았으면 체육관이나 했을라나.
91년도에 군대 갔다 와서 현대자동차 취직을 했다가 한 4~5년 근무하다가 그만두고 식당을 하게 됐어요. 아버지가 중풍으로 누우셨는데 어머니가 저랑 같이 가게를 한번 해보자 그러셔서. 원래는 순화동 안쪽에 식당을 했었는데 아무래도 대로변이 장사가 잘 되지 않을까 싶어서 어머니가 욕심을 부렸죠. 이곳저곳 빚을 내서 식당을 시작했는데 가게 계약할 때 주인이랑 한 게 아니라 관리인이랑 계약을 했거든요. 그런데 그게 잘못되어가지고, 그 주인이 효성그룹인데 땅을 관리인에게 줄 때 관리만 하라고 준 것이지 임대업을 하라고 준 게 아니었더라고요. 그런데 관리인이 그걸 임대해서 임대수익을 챙긴 거죠.
사진 | 박김형준 |
다행이 운이 좋았어요. 국민고충처리위원회 통해서 형사(재판)를 했는데 그 사람이 사기라고 인정이 되어서 법정 구속이 되고, 또 누가 그 사람 재산을 발견했다고 알려줘서 가압류 들어가고. 1심에서 이기고 2심 가니까 그 사람이 합의하자고, 그래서 들어간 돈 다 받고 합의해서 끝냈죠. 그리고 순화동을 떴어야 했는데….
그러는 4~5년 동안에 아버지 약값도 있고 먹고 살아야 하니까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일 다니시고 저는 아는 분 소개로 건축석재 일을 했고. 그때 집사람 만나서 결혼하고 불광동에 신혼집을 차렸죠. 부모님이 돈이 없으니까 집사람은 출판사에 다녔는데 집사람이 모아둔 돈이랑 나한테 조금 있는 거랑 합쳐서 5천만 원짜리 전셋집. 그리고 맞벌이 하면서 살다가 어머니가 일 다니시던 가게가 마침 장어집이었는데 보니까 괜찮겠다 싶으셨나 봐요. 가게를 한 번 더 해보자 그러셔서 장어집을 시작했죠. <고창 민물장어 나루>가 식당 이름이었어요. 그게 2001년이죠. 아버지는 그 다음해에 돌아가셨어요. 평생 자기 집 한 칸 못 가지시고. 그걸 보면서 한이 됐나 봐요. 꼭 내 집을 갖겠다. 악착같이 벌었죠. 그런데 세상살이가 또 내 맘대로 안 되더라고요. 돈 벌기가 쉽지 않고, 겨우 힘든 거 벗어나니까 또 철거가 들어오고.
2002년에 월드컵이 있었잖아요. 장어는 여름 한철 장사인데 누가 장어 먹으러 오나요. 가뜩이나 순화동은 시청하고 가까워서 호프집만 성황이고. 월드컵 끝나니까 곧 겨울이고. 또 다음해에는 중국산 장어파동이 났어요. 그때 아주 작살났죠. 거의 손가락 빨다시피 지냈어요. 그래도 그 다음해부터는 자리가 좀 잡히고 숨통이 트이더라고요.
처음에 주방에 아줌마를 썼는데 그 아줌마 하는 방식이 지금 생각해보면 좀 구라야. 곁눈질로 보니까. 장어는 데리(데리야끼 소스)를 잘 뽑아야 하는데 매스컴에서 나오는 것처럼 한약재 넣고, 뭐도 넣고, 뭐도 넣고 그랬는데 맛이 안 나더라고요. 아줌마 내보내고 내가 직접 하다가 상인번영회 사람 소개로 어떤 분을 만났어요. 그런데 그분이 저를 굉장히 잘 봤나 봐요. 그분은 조선호텔에서 장어 데리 뽑는 걸 배웠대요. 소스를 저한테 주고 직접 해보라고 그러면서 전수를 해주신 거죠. 조금씩 제 스타일도 만들고, 장어도 미리 안 잡고 손님 오면 그때그때 잡아서 주니까 좀 늦게 나오더라도 싱싱하니까 손님들도 좋아하고. 그래서 날로 장사가 잘 됐어요. 거짓 없이 하니까 손님들도 인정 하고, 주변에서도 젊은 사람 둘이서 열심히 하니까 좋게 봐주셨죠.
가게는 작은 2층짜리 집인데 1층에 테이블 여섯 개, 2층에 다섯 개 있었죠. 2층은 방이 세 개인데 큰 방은 테이블 다섯 개 놓고 단체 손님 받고, 방 하나는 우리 자는 방, 하나는 창고로 쓰고, 어머니는 아래층에서 테이블 치우고 주무시고. 집사람이 고생 많이 했죠. 계단 오르락내리락 하느라고. 둘째를 가졌으면 싶은데 애를 낳으려고 해도 철거민이 되어서, 형편이 안 되니까 가질 수가 있나요. 가게가 철거 된 다음부터 집사람이 파출부를 다녀요. 파출부 다니다보니까 어떻게 순화동 맞은편에 가게 되었는데 그 집이 우리 가게 단골이었나 봐요. 집사람을 알아보고 “어이구, 사장님. 가게는 어떻게 해결됐나요?” 그러더래요. 그 이야기 듣는데 참 마음이 짠하더라고요. 우리 가게가 철거를 당하게 되면 이렇게 분담을 하자, 집사람이랑 얘기를 했죠. 둘 다 일을 할 수는 없고 한 사람은 투쟁을 하고 한 사람은 생계를 해야 하는데, 처음부터 내가 나갔고 나는 당신이 용역한테 폭행당하고 욕먹고 그러는 거 싫다, 그러니 당신이 생계를 맡아다오.
어머니는 거의 가게에서 우리랑 같이 지냈는데 가게가 없어지고 불광동 우리 집은 너무 머니까 동생네 들어가시고, 불광동도 재개발이다 뭐다 그래서 처형이 사는 연신내로 이사해서 집사람하고 아이는 거기 있고, 저는 순화동에서 아직 철거 안 된 집들 전전하고. 완전히 재개발 때문에 이산가족이 된 거죠.
경찰청 맞은편이어서 경찰 간부들도 단골이 많았는데 경찰도 우리보고 투쟁하라고 그랬다니까요. “사장님, 말도 안 되네. 투쟁하세요.” 경찰 본청, 서대문 경찰서… 그 때만 해도 경찰에 대해 호의적이었고 이미지가 좋았죠. 그런데 투쟁조끼 입자마자, 입고 나서부터는 ‘아, 내가 알던 경찰이 아니구나’ ‘저런 게 무슨 민중의 지팡이냐?’ 지금은 보기만 해도 치가 떨리죠. "
그는 자신과 같은 처지에 가정불화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고 아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려 애쓴다고 한다. 나름대로 한다고 했지만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오니 식구들에게 못해준 것들만 떠오르더라는 그. 아직도 밤마다 그날의 악몽에 시달리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윤용헌 씨와의 일을 물었다.
분향소에 내려갈 용기가 안 나더라고요
"대책위 꾸리면서 알게 되었죠. 그냥 옆집 아저씨로 알고 지내다 통성명하니까 딱 저랑 10년 차이가 나더라고요. 60년생 쥐띠인데, 사람 하나 믿으면 자기 간이라도 빼줄 사람이죠. 형수도 사람이 너무 좋고. 또 이 분이 술과 가무를 좋아해서 술을 한 번 먹기 시작하면 새벽까지 먹고 집에 들어가면 형수님한테 뒈지게 혼나고. 그분 가게 상호는 <미락정>이었어요. 대구뽈찜이랑 김치찜, 오겹살 같은 거 파는.
같은 지역이고 하니까 둘이 많이 다녔죠. 진짜 무진장 돌아다녔어요. 일요일도 없이 연대투쟁 다니고. 또 안 해본 거 없이 갖은 노력을 다 했죠. 흑석동, 남가좌동, 용인에 있는 가구공단까지 안 가본 데가 없어요. 그렇게 같이 다니다보니까 식구 같아지는 거죠. 또 윤용현 씨가 다른 사람하고 잘 어울려요. 전철연 다른 지역에서 순화동하면 다 좋아했어요. 윤용현 씨는 아이도 둘 있는데 나름대로 투쟁하랴 집안 돌보랴 나보다 더 바빴어요.
19일 날 올라가서 같이 움직였지만 그 분은 위원장이니까 여러 가지 다른 일도 하고 그래서 항상 같이 있지는 않았죠. 그런데 순화동은 두 명뿐이니까 서로 챙겼죠. 밥은 먹었냐? 뭐 필요한 거 없냐? 안 보이면 서로 전화하고. 싸우기도 많이 싸웠어요. 의견차이로. 회의 하면서 투쟁방법이나 어떻게 나아가야 하나 이야기하다가. 저는 강경파여서 무조건 돌파하자, 그랬고 우리 위원장은 유들유들한 스타일이었으니까. 이렇게 조직 안에서 티격태격 하니까 발전이 있는 거지,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면 뭐 발전이 뭐 있겠어요. 지역에서는 위원장이 너무 순하다고 말도 있고 그랬지만 제가 제일 믿었던 분이에요.
병실에 있으면서도 아래(순천향병원에 마련된 용산참사 희생자 분향소) 한 번 내려가 봐야지 하면서도 도저히 못 내려가겠더라고요. 그런데 어제 형수가 올라왔어요. 처음에는 얼굴을 제대로 못 보겠더라고요. 너무 죄스러워가지고. 같이 있었는데… 내가 다치지 않았으면 죽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형수는 “네가 살아줘서 고맙다” 그러고. 형수가 또 그러더라고요. 형은 갔는데, 갔어도 순화동 투쟁이 남았으니까. 자기도 이제 투쟁할 거라고, 한을 풀어줄 거라고. 바보같이 울지 말고 밥 열심히 먹고 빨리 나아서 같이 투쟁하자고. 자꾸 옛날 생각 나가지고. 사람이 죽으면 참 이렇게 허무해요. 산 사람은 살지만… 아휴, 참….
사상자가 그렇게 크게 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는데. 20일 새벽에, 경찰특공대가 들어오기 전에 시간이 좀 있었어요. 빠져나갈 시간이 있었고 밧줄도 어디 있었던 모양이더라고요. 그런데 위원장 눈을 딱 보니까 ‘우리도 갈까?’하는 표정이었던 것도 같고 ‘우린 남자!’ 그러는 거 같기도 하고. 그런데 어떻게 우리만 싹 빠져나가요. 다 빠져나가면 용산 식구들만 남을 텐데. 투쟁하면서 다 가족처럼 지내던 사람들인데. 빠져 나간 사람들, 그 사람들이 비겁하다는 게 아니라, 개인 사정이 다 있었겠죠. 하여튼 우리는 그렇게 남았죠. 밧줄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고, 마음만 약해지니까 차라리 모르는 게 낫다 싶었고. 위원장이랑 눈빛 마주치면서 한 번 해보자, 그런 다짐을 하게 되었던 거 같아요.
후회는 안 해요, 평생 두 발로 못 걷는다고 해도. 이렇게 사람이 많이 죽을 줄 알았으면 그 때 빠져나가는 게 현명한 걸 수도 있겠지만…. 우리나라 정부가 누구 하나 죽어야만 귀를 기울이지, 이렇게 해서라도 법을 뜯어 고쳐야지, 계속 이렇게 없는 사람들만 착취하고, 없는 사람 것 뺏어다가 잘 사는 사람 도와주는 게 무슨 나라에요? 내가 살던 데서 살고, 장사 하던 데서 계속 장사하겠다는 게 그렇게 잘못된 거고 터무니없는 요구인가요? 내가 공부를 많이 한 학자도 아니고 애국지사도 아니지만 나도 엄연히 내 가정이 있고 잘잘못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인데 누가 봐도 잘못된 거라면, 국민들이 잘못되었다고 아우성치고 떠들면 거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귓등으로도 안 듣고 국민을 무슨 자기 직원 부리듯이 하고. 결국 없는 사람들이 뭉칠 수밖에 없는 거죠. 오죽하면 거기 올라갔겠어요. 얼마나 절박했으면. 연대 다니면서 우리 지역도 빨리 승리해서 전철연 행사 때나 초대받아서 인사나 하고 그랬으면 좋겠다 싶죠. 승리했다고 아예 전철연 일에서 손을 떼지는 못할 거 같아요.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언제든 도와야죠. 며칠 전에 우리 철대위 초대 위원장을 하셨던 분이 병문안을 오셨는데, 나이가 일흔이 넘으신 분인데 한정식 식당을 오래 하셨던 분이에요. 나중에 같이 식당하자고 그러시더라고요. 투쟁 끝나면. 말씀만 들어도 고맙죠. 꼭 이기고 전문적으로 식당일도 배워서 순화동에서 자리 잡아야죠."
인터뷰 강곤
사진 박김형준 | 객원사진기자/빈곤사회연대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