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 이명박 정부 하의 인권운동에서 정보인권 분야만 힘들겠는가. 그러나 나를 때때로 질리게 하는 것은 이 운동에서 ‘울림’이 거의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울림이 없는 운동이란 것이 애초에 가능한가.
정보인권이 정보주체에게 외면 받고 있다. 지역주민이 CCTV를 적극 환영하는데 외부에서 그것을 감시라고 외치는 것이 의미 있는가. 패킷 감청이 사생활을 몰살시킬 것이라고 규탄할 때, 정보주체가 맞춤 광고를 위해 선뜻 감청에 ‘동의’하는 것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우리의 주장들은 갈수록 허무한 외침이 되어가는 것 아닌가.
감시이론은 많은 부분 푸코에게 신세를 져 왔다. 푸코는 파놉티콘(원형감옥)이 권력의 규율 장치라는 것을 고찰하였고, 주체는 감시의 시선을 통해 훈육된다고 보았다. 죄수는 자신이 감시 하에 있다는 것을 알고 간수의 규율을 내면화한다. 이것이 전통적인 빅브라더(big brother)론이다.
그렇지만 실제 현대 감시사회에서 CCTV와 데이터베이스는 너무나도 은밀하게 작동하여 대부분의 시민들은 자신이 감시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아니, 알고 있다 하더라도 크게 염두에 두지 않는다. 아무도 감시를 개의치 않는 사회에서 누가 어떻게 훈육된다는 것인가.
내가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을 때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이 책을 추천하였다.
전자감시 장치로 작동하는 신자유주의 경찰국가는 과거의 경찰국가와 다르다. 디지털 매체는 은밀하기도 하지만 객관성으로 철저히 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의 감시 기법과 다르다. 그러나 가장 다른 점은 그것이 추구하는 목표가 ‘훈육’이 아니라 ‘배제’라는 점에 있다.
과거에도 감옥과 정신병원은 격리의 공간이었지만, 격리된 ‘비정상’은 ‘정상’으로 복귀하기 위한 임시적 상태였다. 산업사회에서는 범죄자나 노숙인 역시 산업 예비군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유행처럼 쓰이고 있는 ‘잉여’라는 개념은 ‘정상’으로의 회복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사실 잉여는 산업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쓰레기이다. 우리는 보통 공장으로부터 나오는 생산품의 트럭에 주목해 왔지만, 공장에서는 날마다 두 종류의 트럭이 떠난다. 하나는 창고와 백화점으로, 다른 하나는 쓰레기장으로(p57). 산업 폐기물의 문제도 물론 심각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삶조차도 생산품과 쓰레기로 가른다.
전자감시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람들로 하여금 정직하게 살게 하려는 데 있지 않다. CCTV의 실질적 기능은 ‘생산적인’ 보통의 시민들과 그들의 재산을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지키는 데 있다. 감시원들이 CCTV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이유는 ‘쓰레기’들을 구분하고, 정의하고, 그리고 마침내 이 공간에서 쫓아내기 위해서이다.
오늘날의 감옥은 수용자를 훈육함으로써 공동체로 재통합할 수 있다는 교정의 이상을 더 이상 꿈꾸지 않는다. 오로지 사회적 불량품을 사회로부터 물리적으로 격려하는 ‘창고’일 뿐이다(p152). 그렇기 때문에 소년범부터 DNA를 채취하여 평생 국가가 철두철미하게 관리하는 것이 용납되고, 보통 시민들은 안도하는 심정으로 DNA 데이터베이스의 도입을 찬성하는 것이다.
"그렇게 감옥을 꽉꽉 채우는 형벌 국가가 강화되고 있다. 반면 국가의 보호 기능은 점차 그 대상을 축소하고 시장의 게임에 참여할 수 없는 무능력이 범죄로 취급하는 경향은 갈수록 확대된다(p101)."
옛날의 빅브라더는 사람들을 규율에 ‘포함’시키기 위해 통제하였다. 새로운 빅브라더의 관심은 ‘배제’이다. 쓰레기들은 쓰레기장에만 모여 있어야 하는 것이다. 더욱 나쁜 소식은 오늘날 오래된 빅브라더와 새로운 빅브라더가 함께 앉아 있다는 것이다(p241). 옛날 빅브라더는 사회 감옥을 통제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을 이전 어느 때보다 더 크게 갖추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새로운 빅브라더는 감옥을 위한 담장을 치고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공고화하는 데 철두철미하다. 불안하기만 한 시대에 시민들은 담장에서 위안을 얻기 때문에, 빅브라더를 반긴다.
"어디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진부하지만, 역시 희망은 연대에서 찾아야 한다. 인류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이 두 빅브라더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뿐인가, 포함/배제의 게임이 인간 생활을 영위하는 유일한 방식인가 물어야 하는 것이다(p244)."
물론 쉽지 않다. 절망은 우리 상황이 연대의 틀을 짜기 점점 더 어렵다는 데 있다. 인간적 신뢰가 외부인에 대한 의심으로 대체되어 가고 있다(p169). 민족적 자부심이 촛불을 들수록 이주민에 대한 혐오가 비례해서 커져가는 것은 아닌가.
그래도 나는 계속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다. 아직은 어둡고 막막할지라도 드문드문 잡고 있는 손들의 온기에 의지하며. 이 책이 당신에게도 그런 절망과 희망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