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광주 수배자들과 함께
광주가 고향인 나로서는 아무래도 1980년 5월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겠다. 80년 5월, 나는 영문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이었다. 주로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D. H. 로렌스의 소설을 좋아하였다. 특히 로렌스가 꿈꾸었던 세상, 하늘 높이 오른 교회의 첨탑이 좀 더 땅으로 내려와 무지개처럼 아치를 이루는 세상, 제임스 조이스가 그렸던 숨 막히는 아일랜드 제도교회와 그곳에서의 도피, 버지니아 울프의 죽음에 대한 인식과 삶에 대한 열망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논문은 역사발전의 변증법적 모델로서의 3대에 걸친 여성들의 삶을 그려놓은 소설 『무지개』에 대해서였다. 이 작품에 표현된 로렌스의 역사의식에 관해서였는데 소제목은 ‘미지의 세계로의 모험’ ‘투쟁과 타협’ ‘사람 사는 세상의 가능성을 향하여’였다. 나는 지금도 가끔 영어로 쓴 나의 유일한 이 저작(?)의 소제목을 곱씹어보는데, 현재 인권단체에 몸담고 있는 나의 삶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어 보여서이다.
나의 첫 번째 미지의 세계로의 모험은 내 집에서 시작되었다. 부모님께서는 수녀원 기숙사에 머물던 큰 딸에 이어 막내아들까지 같은 대학에 들어가자 신림동 작은 아버지 집 앞에 조그마한 연립주택을 마련해 주셨는데, 제법 큰 안방이 내 침실 겸 공부방으로 주어졌다. 더 이상 부러울 게 없었다. 방 한가운데 책상을 놓고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시고 온갖 폼을 잡다가 밤새워 책을 읽고 새벽이 밝아오면 댈러웨이 부인처럼 생명력으로 가득차서 시장으로 달려가 꽃을 한 아름 사들고 조교실에 꽂아 놓곤 했다.
그렇게 해맑던 어느 날, 교사이신 엄마가 어떻게 시간을 내셨는지 밑반찬과 김치를 가지고 서울 집에 오셨다. 서울 집에 잘 도착했다고 광주에 전화를 하는데, 전남대에 다니던 여동생이 울며 전화를 받았다. 시내버스를 탔는데 갑자기 군인들이 버스를 세우더니 사람들을 패기 시작해 군인들에게 얻어맞고 집에 돌아왔으며 광주에 난리가 났다고 한다. 이미 TV 뉴스는 광주에서 폭도들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그 뉴스를 통해서인지 어느 순간 흉흉한 기운이 서울까지 감돌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전화가 불통되었다. 고통스러운 며칠이 흘러갔다. 마침 집에 쌀이 얼마 없는 것을 보고 왔던 엄마는 동생들이 난리 통에 밥까지 굶을까봐 집에 가야겠다고 발을 동동 굴렀다. 이미 광주 시내로 들어가는 도로는 모두 막혀 있었고 기차도 송정리까지만 다니는 형편이었다. 걸어서라도 가겠다는 엄마를 중간쯤인 대전역까지 모셔다드리고 대전역에서 송정리 행 기차를 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5월 광주는 나에게 왔다.
가을이 오자 서클활동을 통해 알고 지내던 광주 선후배들이 수배자가 되어 하나 둘 우리 집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위험한 일이었지만, 집안에 어른이 안 계시고 동생과 둘이만 지내고 있어서 공간이 비교적 자유로웠기 때문에 어린 마음에도 단안을 내렸던 것 같다. 겨울이 되자 소개를 받아 생전 모르던 사람들도 오기 시작했다. 부부가 아예 갓난아이를 데리고 함께 들어오기도 해서 어느덧 방 세 개가 가득차고 거실에도 기저귀가 널리기 시작하였다. 집에서 올라온 장조림이며 밑반찬들은 그날로 없어지고 돈이 떨어지면 난방도 못하고 옹기종기 전기장판에 앉아 버티는 날이 계속되었다. 80년 겨울은 정말 추웠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참 따뜻한 겨울이었다. 그게 바로 사람 사는 세상이었으므로-그들은 그렇게 폭도(?)였지만 어여뻤고 멋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 들어오면 이 얘기, 저 얘기 들으면서 도란도란 밤늦게까지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살면서 언제가 제일 행복했느냐 물으면 난 그때를 떠올리곤 한다. 모든 게 부족했지만 모든 게 금방 채워졌다. 어떤 날은 조금 여력이 되는 선배가 시장을 봐 와서 모두 배불리 먹을 상을 차리기도 하였다.
수배자들과의 생활도 그 이듬해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끝이 났다. 그 집을 처분해야 했기 때문이다. 내 청춘의 잔치도 끝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1년 후, 80년 그 추웠던 겨울을 감옥에서 견뎌낸 광주 남자와 결혼을 감행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집에 숨어있던 사람들의 거처를 대라고 계엄사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사람이었다. 문익환 목사님이 세우신 한빛교회에서 이해동 목사님이 주례를 서주셨다. 코딱지만 한 방에서 우리의 신산스런 삶이 시작되었다. 집을 옮길 때마다 정보과 형사가 따라와서 몰래 집주인과 인사를 하고 갔다. 남편이 복학을 하자 막 젖을 뗀 아이를 광주 시댁에 맡기고 직장을 얻어 생활을 담당해야 했다. 그 와중에 여동생은 수배를 당하고 막내 동생은 강제징집으로 군에 끌려갔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좋은 추억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둡고 긴 터널이었는데 난 또다시 대책 없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그 긴 터널의 중간쯤에 내려버렸다. 무언지는 모르지만 내 영혼이 썩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1986년 여름 무렵.
1987년 6월, 명동성당
그러던 가을, 힘들어하는 나에게 남편은 80년 우리 집에 수배자로 와있던 문국주 씨의 제의라며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아래 정평위) 국제연대 담당 활동가로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물어왔다. 당시에는 그 단체를 잘 알지 못하였기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양심수 법률구조와 광주학살 진상규명 활동에 열심인 조직이었다. 서울대교구 홍보국장이던 함세웅 신부님께 인사 겸 면접을 하러 갔는데, 그 자리에는 외국 유학을 떠나는 문규현 신부님이 인사차 와계셔서 그분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때 첫인상이 그렇게 좋았다. 곧이어 정평위 회의가 열려 교구청 회의실로 들어갔는데, 윤공희 주교, 김병상 신부, 유현석 변호사, 황인철 변호사, 메리놀회 로사 수녀 등이 앉아 있었다(이돈명 변호사는 그때 옥중에 계셨다). 지금도 그분들의 모습과 오고가던 말들을 잊을 수가 없다. 새 세상을 바라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회의를 지켜보면서 세상에 이런 세상도 있구나 하는 놀라움이 내게로 다가왔다. 말 그대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오고가는 진중한 말들과 그분들의 자애로운 태도에 매료되었다. 그들 모두가 미남, 미녀로 보였다. 내가 인권운동가들만 보면 눈에 콩깍지가 씌어 무조건 예쁘게 보이는 버릇은 그때부터 비롯된 것 같다.
이렇게 87년 1월, 나는 명동성당 들머리에 서 있었고 박종철 사건으로 그해는 시작되었다.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가 있었고 5.18 명동성당 미사에서 정의구현사제단의 박종철 사건에 대한 진상발표, 그리고 6월 항쟁이 시작되었다. 정평위 사무실은 명동 가톨릭회관 6층에 있었는데, 그곳은 늘 사람들로 북적였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주요 농성장이 되었다. 훗날 대통령, 국무총리, 국회의장이 된 사람들이 모두 그곳을 거쳐 갔다. 세계 각국의 기자들, 앰네스티 같은 국제인권단체 사람들, 각국의 정의평화 관련 단체와 관계자들이 찾아왔다. 나는 자연스레 그곳에서 통역을 하거나 번역을 하며 양심수 가족들을 만났으며, 영문소식지를 만들어 6월 항쟁을 세계에 알리는 일을 하게 되었다. 너무나 일이 많고 힘들었지만 신바람 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위원회 체제에서 그 누구도 내 일을 간섭하는 사람은 없었으며 자유와 자율로 일을 하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를 깨닫곤 한다.
4월 호헌조치에 항의해 광주 사제들이 단식에 들어갔을 때 함세웅 신부가 김수환 추기경께 간곡히 요청하여 사제들에게 격려의 편지를 쓰게 되었고 나는 전령이 되어 그 편지를 들고 광주 사제들을 방문했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 그 사건은 6월 항쟁으로 가는 길목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그 엄혹한 시절의 첫 저항이었으며 당시 단식 장소이던 광주 가톨릭센터 6층 아래에는 사제들을 끌어내기 위한 고가 사다리차가 깔리고 있던 시점이었다. 우리가 평화를 위한다면, 인권을 위한다면 때로는 윗분들을 간절히, 간절히 설득해야 될 때도 있고, 그 일이 큰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또 6월 항쟁 중 명동성당 들머리에는 민가협 어머니들이 해 오신 김치들이 항아리째 가득 실려 오고는 했는데, 어머니들의 힘과 용기에 놀라곤 했다. 임기란 어머니도 그때 처음 만나 뵈었다. 최루탄을 얼마나 쏘아대는지 최루탄과 돌멩이가 하늘에서 만나며 명동성당 하늘이 새까맣게 변한 날도 있었다.
1989년, 천주교인권위원회와의 만남
1989년 6월, 뉴욕 메리놀 신학교로 여성신학을 공부하러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이미 한국 천주교 여성 3명이 와 있었고 또 문규현 신부님이 통일신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세계 곳곳에서 모인 여성들과 대화하고 토론하며 여성의 언어로, 여성의 목소리로 우리의 경험을 나누고 여성 전례를 하며 큰 기쁨과 치유의 시간이 내게 찾아왔다. 그 시간은 나에게 여성으로서, 어머니로서의 긍지를 가져다 준 아름답고 복된 시간이었다. 파란 잔디밭 위에서 하얀 한복을 입고 춤을 추기도 하였다.
그 복된 시간에 분단을 극복하기 위한 역사의 물줄기는 그곳에서도 비켜가지 않았다. 전대협 대표로 임수경 학생이 평양에 도착하였다는 뉴스가 터져 나왔다. 우리는 임수경이 수산나라는 이름을 가진 천주교 신자라는데 주목하여 탄성을 터뜨렸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서울의 정의구현사제단은 미국에 있는 문규현 신부를 북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는데 그 학생이 남으로 내려와 당할 고통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이 모든 과정이 당연한 일이지만 비밀리에 소통되며 진행되었다. 한국에서 온 네 명의 여성은 그곳 뉴욕의 신자 몇 분과 기도모임을 만들어 문신부가 뉴욕을 출발하여 북에 도착할 때까지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기도를 바치고 미사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문규현 신부와의 인연이 시작되었고 나는 그 모든 과정의 증인이 되었다. 한국에 돌아오니 형님이신 문정현 신부님은 극도의 긴장 속에 아무 경황이 없어 보였다. 이미 여러 사제들이 구속되었고 여기저기서 몰려온 기자들로 사무실은 정신이 없었다. 이 사건에 즈음하여 주교회의 산하에 있던 정평위 위원들이 대폭 교체되었으며 이것이 천주교인권위원회 태동의 계기가 되었다. 좀 더 독립적이고 교계 제도에서 자유로운 인권단체로-김형태 변호사도 이 사제들의 재판에 참여하면서 처음 만나게 되었고, 몇 년 후 천주교인권위원회라는 이름으로 함께 하게 되었다.
문규현 신부는 민간인 최초로 군사분계선을 넘어와 임수경과 함께 구속되었고 3년 반을 감옥에 갇혔다. 미국에 함께 있었던 인연과 정평위에서 일한 인연으로 그분의 감옥 면회 담당이 되다시피 하였는데, 각계각층의 면회가 줄을 이었다. 그 와중에도 문 신부 가족 7남매의 우애는 남달라서 전주지역에서 거의 날마다 올라와 면회하고 격려하였다. 아침이면 서울구치소에서 그분들을 만나 컵라면을 후르륵후르륵 먹고 면회시간을 기다리면서 친해지게 되었다. 자연스레 문정현 신부와도 인권평화운동의 동지가 되어 그분이 하시는 일에 함께 하게 되었다.
2009년, 다시 명동성당 언덕을 오르며
지난해 5월 성령강림절 용산 미사에서 문정현 신부님은 “성령 강림이 무엇인가? 내가 내 명에 못 살겠구나, 연행되고 체포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권력 앞에 당당해지는 것 아닌가?” 하셨다. 이 말씀 중 성령강림을 인권운동으로 바꾸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인권운동이 무엇인가. 내가 내 명대로 살지 못하겠구나, 체포되고 연행되겠구나 생각하면서도 권력 앞에 당당해지는 것 아니겠는가.”
난 지난 세월 그런 각오로 인권운동을 해 온 분들 옆에 있었다. 난 그저 그분들의 옆에 머무는 게 좋았다. 참 행복하고 좋은 인연이라는 생각이 든다. 용산 참사가 일어난 지 1년이 되어간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지난 세월 나를 살아가게 했던 분들이 이 싸움에 함께 하고 있다. 한강 바람 매서운 남일당 어두운 뒷골목에서 화상당한 하느님을 부여잡고 함께 하고 있다. 용산을 오가며 그곳에서 싸워온 모든 사람들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다. 내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교회가 바로 거기에 있다. 교회란 무엇인가? 인권이 무엇인가? 의자 없이 다함께 둘러앉은 밥상 아닐까? 30여 년 전의 광주와 지금 여기 용산의 모습은 그 본질이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 세월 우리가 싸워왔던 혹은 살아왔던 그 삶을 생각해보면 여전히 같은 언저리를 맴돌고 있는 것 같아 슬프다. 하지만 그 좋은 사람들이 함께 하니 한편으론 이 길이 나에게 주어진 복된 길인 것도 같다. 오늘도 명동 성당 영안실을 숙소 삼아, 일터 삼아 살아내고 있는 용산의 수배자들, 내 벗들을 만나러 명동 들머리를 오른다.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