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사람이 사람에게] 래군 선배에게

봄볕에 기대어 담배 한 개비를 물었더니 이제야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른바 ‘용산 수배자 3인’ 중 한 명이었던 선배가 명동성당 앞에서 환하게 웃으며 기자회견을 한 뒤 제 발로 경찰서에 간 게 벌써 50일 전입니다. ‘벌써’라는 말에 섭섭도 하겠지만 갇힌 사람에게는 더디 가는 시간도 형벌의 한 가지인 셈이지요. 게다가 담배 한 대도 못 피울 테니, 제가 대신 또 한 개비를 물었습니다.


지난해부터 제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금연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래, 얼마나 장수하나 두고 보자’는 못된 심보가 들기도 하지만, 한편 담배를 배운 후 한 번도 작심삼일을 넘기지 못했기에 그네들의 결단이 부럽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담배를 끊으면 독한 놈이라 했다지만 요새는 ‘아직까지도’ 담배를 피우는 게 독한 거라네요. 사실 사람이 독해서가 아니라 담배의 중독성이 심한 탓일 테지요.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중독으로 치자면 어디 담배뿐인가요. 아침에 일어나면 핸드폰 문자부터 확인하고, 사무실에 나가면 컴퓨터 앞에서 이메일부터 열고, 퇴근하면 TV를 켜면서 못 다 본 신문을 펼치고.


그렇게 신문을 뒤적이다가 선배가 들어간 지 며칠 되지 않아 서울 왕십리 뉴타운지구에서 겨울철 강제철거가 또 실행되었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지난해 12월 서울 마포구 용강동에서 60대 철거민이 목숨을 끊은 지 한 달 만에, 용산참사가 일어난 지 딱 1년 만에 다시 시작된 겨울철 철거였습니다. 서울 마포구 아현동, 북아현동과 염리동, 성동구 금호동과 왕십리, 동작구 상도동과 성북구의 장위동, 동대문구 휘경동과 답십리, 은평구 갈현동과 서대문구 가재울……. 서울만 해도 재개발 136곳, 뉴타운 재개발 113곳, 재개발 예정지역 77곳이라 하니 수도서울은 그야말로 지뢰밭입니다. 용산참사 이전에도 이후에도 한국사회에서의 재개발 병, 개발중독은 전혀 회복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아니 4대강 사업이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으니 지금까지는 그저 서막에 불과한 것인지 모릅니다.


어디 재개발 문제뿐인가요. 비정규직 문제가 큰일이라고 너나없이 말하지만 새해 선물로 정리해고 통지를 받아야 했던 한양대학교 미화원 여성노동자들은 설 연휴 전날도 눈발을 맞으며 집회를 열어야 했고, 설 연휴 방송사들이 앞 다투어 다문화 운운하는 동안 이주노동자들 40명은 영문도 모른 채 단속을 당해 그 중에 비자가 없는 사람은 수갑이 채워져 출입국관리소로 끌려가야 했습니다. 인권을 빙자하여, 북한 인민의 인권을 볼모삼은 북한인권법이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를 통과했고, 명분 없는 전쟁의 늪 가운데 하나인 아프가니스탄에 다시 파병을 하는 법안은 별 문제 없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아마도 선배가 밖에 있었다면 일일이 챙기고 관여했을 일들이지만 솔직히 선배가 나와 있다 한들 뭐가 달랐을까 싶습니다.


인권운동의 오랜 숙원인 사형제 폐지도 헌법재판소의 합헌 결정으로 물 건너가고, 헌법재판소의 집시법 야간집회 금지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은 밤 10시까지만 합법으로 하자는 어처구니없는 여당의 법안으로 뒤통수를 맞았습니다. 이 와중에 법무부는 차별금지법도 제 입맛대로 어떻게 만들어볼까 하는 모양이고, 오늘 인터넷에 들어가니 쌍용차 파업 이후 “사망 6명, 자살 기도 2명, 환자 70명”이란 기사가 떠 있습니다. 또 담배가 땅깁니다.


요즘에는 ‘이명박’과 ‘김연아’를 거론하지 않고 글을 써야겠다 싶습니다. 칭찬이 됐든 비판이 됐든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넘쳐나지만 끝도 없는 블랙홀 같으니 말이죠. 대신 ‘삼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지난해 말 출판계에 있는 후배에게서 삼성 X파일에 대해 양심선언을 했던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과 관련된 원고를 들고 출판사를 전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출판계에서는 책을 낼 경우 세무조사를 각오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파다했다고 합니다. 책이 나오고 그나마 양심적인 언론들도 책 광고를 거부했다는 이야기가 들리고 그것이 기사화되기도 했습니다. 경향신문에 이 책과 관련한 칼럼이 거부되어 논란이 됐고 그 와중에 김용철 변호사의 책은 인터넷 서점을 중심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언론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과정에서 삼성의 실질적인 압력은 없었을 것이라 저는 확신합니다. 예전 중앙정보부와 안기부와 보안사가 그랬듯이 절대 권력은 입김 없이 그저 눈빛만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이니까요. 이미 삼성은 그런 경지의, 신성불가침의, 알아서 자기검열이 작동되는 그런 존재가 아닐까요? 그래서 김용철 변호사의 책 제목처럼 삼성을 생각하는 일, 삼성에 대해 말하는 일은 대단한 용기와 각오와 결단을 요하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람』은 창간과 동시에 삼성 문제를 고민했죠. “대한민국과 삼성은 전쟁 중”이라며 특집으로 삼성 문제를 다루기도 했습니다. 2005년의 일이니 지난 5년 사이 삼성은 아마도 그 싸움에서 승리를 거둬 대한민국을 온전히 접수한 모양입니다. 삼성과 관련된 인권문제, 노동권 문제나 삼성반도체 백혈병 문제 등에 대해 『사람』은 물론 인권운동에서도 대응을 게을리 하거나 회피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삼성은 더 이상 하나의 기업, 거대 자본, 재벌이 아닌 그 무엇이 되어버렸습니다. 권력 이상의 권력, 국가보안법처럼 하나의 지배체제로 한국사회를 억압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삼성의 문제, 한국 속에서 삼성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과 삼성, 삼성 속의 한국의 문제를 어찌하면 좋을지, 선배가 나오면 머리를 맞대어봐야겠습니다.


안에서 박지원의 『열하일기』 완역본을 재미나게 읽고 있다지요. 잘은 모르지만 저는 박지원의 시대와 지금 시대가 많이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의 중심축이 바뀌는 격변기, 변방의 지식인으로서 비주류와 주변부에 주목하고 주체성을 고민하며, 거기서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의 가치를 찾아 나섰던 연암의 삶이 선배에게는 어떤 의미일까요? 압록강을 건너 산해관을 지나 북경을 돌아오는 봇짐 속에 선배는 무엇을 담아왔을지도 꼭 이야기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올해는 봄꽃이 일찍 필 거라고 합니다. 나오면 담배는 제가 한 갑 사드리지요.


강곤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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