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대학에 입학하면서 운동에 대한 고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보아온 학생운동이 ‘자족적’이라는 느낌, 학생운동을 넘어 사회운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1993년부터 민주시민운동협의회에 가입해서 활동하게 되었다. 한편에서는 전교조 해직선생님에 대한 부채의식이 학생운동을 넘어서는 사회적 활동을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소명의식으로 나를
내몰았던 것 같다.
민주시민운동협의회는 20대 학생부터 50대 장년층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민주시민운동협의회에서는 민주시민학교를 열어 1년에 두 차례 교육을 하기도 하고 회원을 중심으로 지역 활동을 하기도 했는데 나는 내부 풍물교실에 참여하는 등 꾸준히 활동을 하였다. 얼마 뒤 나이도 어리고 열심히 해서인지 자연스럽게 간사를 맡게 되었다. 당시 민주시민운동협의회에는 정치조직 활동가들도 다수가 참여를 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나는 자연스럽게 노동자정치조직이었던 민중정치연합(민정련) 회원들과 교류하면서 민정련 활동에도 참여하게 된다. 민정련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면서부터는 다양한 투쟁과 정치활동도 경험하게 되고, 조직 안과 밖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논쟁에도 참여하게 됐다. 그러던 중 1996년 민정련이 진정추(진보정당추진위)와 통합하면서 내부 논쟁이 격화됐고, 나는 그 통합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게 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통상적으로 학생운동을 하게 되면 선배가 누구냐에 따라 정치적 노선이 결정되는 경향이 대부분인데 그런 선배가 없었던 나는 스스로 운동을 찾아나서야 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나이에 비해 사회운동을 일찍 시작한 내가 겪은 경험이라는 것이 나의 선택의 결과였다기보다는 그 당시 사회적인 정세에 따라 운동진영의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단체가 해산하거나 통합하는 등 부침에 따른 것이었다. 자신의 운동을 스스로 만들어가기보다는 운동사회의 통합과 해산 과정에서 선택지로만 주어졌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었을 것이리라. 그것은 아직도 기억 한 켠에 가슴시린 서글픔으로 남아 있다.
노동운동, 신자유주의의 반대전선 확장을 고민하다
민정련이 통합에 대한 문제로 분열되면서 나는 정치운동과 다소 거리를 두고 있었던 대구지역 노동단체 ‘민주노동자의 집’을 새로운 활동공간으로 삼게 되었다. 이곳은 현장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는 단체로 내가 민정련 활동을 했다는 사실은 그곳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선입관을 주었다. 먹물이라는 생각, 현장은 모르고 정치운동이라는 거품만 있다는 이미지 때문에 현장노동자 회원들은 나에게 다소 경계의식을 가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깨 힘도 빼고 현장노동자 정서를 익히기 위해 회원 활동과 함께 현장에 내려가 활동을 하게 되었다. 찬물과 뜨거운 물을 오가며 나를 담금질하는 시기였다. 그 무렵 전국지하철협의회의 투쟁이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는데 나는 그 투쟁에 어떻게 해서든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불끈불끈 거렸지만 막상 현장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런 가운데 현장노동자들의 정서와 내가 어떤 위치에서 활동해야 하는가 하는 점에 대해 많은 배움을 얻은 시기였다.
그 후 1998년 민주노동자의 집은 ‘대구노동교육협회’라는 단체와 통합하여 ‘노동자의 미래를 열어가는 현장연대(현장연대)’가 되고 나는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에 집중했던 현장연대에서 비정규직사업을 맡아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2001년과 2002년에 있었던 한국통신계약직노동조합의 투쟁에 적극 결합하면서 구속되기도 하는 등 비정규노동자들의 517일 간의 보기 드문 장기투쟁 속에서 나는 대구와 서울을 오가는 활동을 하였다. 장기투쟁 가운데 주변의 여건과 생활고로 투쟁을 접어야 하는 노동자들의 뒷모습은 여전히 내게 잊히지 않는 상흔으로 남아 있다.
노동현장을 중심으로 한 지역노동단체로서의 현장연대에서는 2002년부터 조직위상과 전망에 대한 내부 논쟁이 불붙게 되었다. 현장연대는 노동자의 일상적 투쟁과 계급의식을 확장하고 노동운동의 개입을 통한 현장 장악력을 높이는 사업을 주요한 과제로 삼고 있었다. 그래서 대구지역 노동자들이 업종별로, 단위사업장별로 투쟁하는데 직접 결합하며 지역에서 정말 열심히 활동을 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국면 속에서 신자유주의 반대전선을 만들고 그것을 전면적으로 밀고나가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이 내부 논쟁 과정에서 드러나게 되었다. 노동자운동의 한 축으로서는 기능하지만 신자유주의가 총체적 사회문제로 드러나는데 있어서 자기 역할이라는 것이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 조건들, 총연맹이 산업별로 재편되면서 노동단체로서 가지는 자기위상이 애매할 수밖에 없는 조건들이 있기도 하고 좌파운동단체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줄 세우기식 문화에 길들여져 있는 등 관성적인 모습들에 대한 반성과 고민이 많이 생겼다. 그러면서 현장연대가 현장연대 회원이나 상근자만의 사업을 넘어서서 지역 내에서 여성, 환경, 인권, 비정규직노동 등 다양한 영역의 반신자유주의 운동단체로서의 역할을 새롭게 정립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그런 논쟁이 내부적으로 1년 반 이상 지속되었다.
결국 어떻게 하면 지역운동을 강화할 것인가 하는 건강한 논쟁의 결과 현장연대는 해산을 하고 여러 활동가들은 새로운 활동을 위해 산개하게 되었다. 나의 경우는 비정규직 노동운동의 연장에서 대구지역 건설노조에 교육선전 담당자로 들어가게 되었다.
노동운동을 넘어 사회적 인권운동을 모색하다
당시의 건설현장은 그동안의 노동운동의 입장에서 본다면 매우 원시적인 곳이었다. 그리고 지역노동조합은 지역노동조합의 단점만 모아 놓은 것처럼 보였다. 파업이란 건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고 소속감도 별로 없으며 조합원 규모도 미미했다. 기본적인 임금체불도 상시적으로 벌어지는 상황에서 우선은 체불임금을 해결하는 것이 노동조합의 기본적인 활동이 될 수밖에 없었다. 조합원들을 만나고 참(간식) 시간에 선전물이나 포스터를 돌리고, 같이 밥도 먹고 그런 활동이었는데 그때 대구지역에 건설현장이 50군데나 되었고 하루에 많이 다녀봐야 4~5군데를 갈 수 있을 뿐이다 보니 정말 활동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더구나 조합원이 늘어나기만 할 뿐이지 확대되는 조직에 비해 반여성주의적인 군대문화와 같은 내부의 조직문화 자체는 여전히 전근대적인 모습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을 확인하게 되면서 노동조합운동을 넘어서는 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노동조합운동을 넘어서는 지역운동이 필요하다는 생각,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전망과 문제의식을 자유롭게 제기하는 사회적 운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건설노조 활동을 그만두고 지역에서 새로운 운동을 고민하던 나는 사회권운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2004년 3월 공감 대구인권모임(준)을 구성해 지역 인권활동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운동을 벌이기 위한 준비과정 속에서 주변에 이러한 문제의식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설득하는 과정을 거치며 비로소 2005년 대구인권운동연대(빈곤과 차별에 저항하는 인권운동연대)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사회권을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라고 하지만 인권운동에서 사회권이라는 것이 좀 추상적이다. 또한 ‘내가 무엇을 가지고 대중들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속에서 다른 인권단체들과 연대하고, 그 단체들에 직접 가보기도 하면서 들었던 고민은 ‘이 사람들이 정말 열심히들 하는데 피케팅이나 기자회견 이런 것에 익숙해져 있고, 대중들하고 만나는 걸 못 봤다’는 문제의식도 생겼다. 어떤 인권단체 활동가는 “인권운동은 어쩔 수 없이 대중과 만나기는 힘든 것 아니냐? 새로운 형식의 운동이기 때문에 깃발을 들어야 하고, 문제의식의 확장을 위해서는 의제 중심으로 할 수밖에 없으며 그러다보면 대중과 만나기는 쉽지 않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했을 때 ‘인권운동의 발전과 전망이 무엇일까?’ 하는 질문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답답함으로 남는다.
사회적 인권운동의 이름으로 대중을 만나다
그즈음 나는 금융채무자(신용불량자) 문제에 주목하게 됐다. 2003~2004년 신용카드 대란이 터지면서 금융채무 문제가 사회적인 문제로 전면화 되었다. 당시 금융채무자가 300~400만 명이나 되어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의 10명 중 2~3명은 금융채무자로 살아가는데 이런 사람들에 대한 권리운동을 하는 단체는 전무하였다. 대중을 만날 수 있는 유력한 매개로서 준비만 제대로 하면 대중이 찾아 올 것이며 그 속에서 대중들과 소통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신자유주의 속에서 금융채무 문제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양산될 수밖에 없는 문제라고 판단했다.
단 하루라도 빚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금융채무로 고통을 받고 있는 이들의 가슴 저 밑바닥 깊은 곳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너무나도 절절한 외침일 것이다. 사회적으로 여전히 일반화되고 있는 ‘신용불량자’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금융채무자의 삶을 그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또한 원치 않게 ‘신용불량자’의 딱지를 붙이고 숯검댕이가 된 가슴으로 살아온 금융채무자의 처절한 분노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제도금융권으로부터 원천적으로 배제된 까닭에 신용카드를 비롯한 고금리 대부업에 의지했다가 몇 십만 원의 사채로 집이 경매에 넘어가는가 하면 채권자들의 협박과 폭행에 견디지 못해 정신병에 걸리거나 야반도주를 하거나 심지어 자살에 이르는 등 이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누구도 짐작하기 어렵다. 이 같은 바닥을 알 수 없는 절망 가운데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신용불량자’라는 주홍글씨만은 끝까지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뼛속까지 파먹을 것 같은 고리대금이자에, 실업과 비정규직을 쳇바퀴 돌듯이 살아가야 하는 이놈의 살림살이는 빚의 굴레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이 죽음과도 같은 채무에서 벗어나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으로 금융채무자들은 파산이라는 마지막 지푸라기를 부여잡고 인권운동연대를 찾아온다.
이러저러한 준비과정을 거쳐 드디어 대구인권운동연대는 2005년 8월부터 파산학교를 시작했다. 파산학교를 하면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자 이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만나기 위한 ‘금융피해자인권모임 좋은모임회’를 만들고, ‘금융채무 사회책임을 위한 연석회의’라는 이름으로 전국적 네트워크도 만들어 갔다. 정부기관이나 금융자본가에 대응하려면 전국적인 움직임이 필요했기 때문에 전국네트워크와 그리고 각 지역별 당사자 모임이 동시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금융채무자 문제를 중심사업으로 진행하면서도 우리는 대구지역의 사회권과 관련된 여러 사안에도 결합하였다.
아직껏 운동사회에서조차 금융채무 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생소했고 잘 모르기도 했지만 나는 사회적 인권의 문제로서 접근하였다. 또한 대구지역의 여러 가지 사회적 권리운동에 적극적으로 함께 하며 주거권, 건강권, 노동권 문제로 그 영역을 확장하고자 노력하는 중이다.
2005년 8월부터 현재까지 매주 실시하고 있는 파산학교는 200회가 넘게 진행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700명 넘는 이들이 파산면책을 신청을 하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들을 금융채무 당사자의 주체로 만들어낼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파산학교는 상담 중심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는 구조인데 지금 회원들이 200명 정도 됐지만 고정적으로 모이는 인원은 40~50명이다. 상담과 서류준비 후 파산되었던 사람들이 더 이상 오지 않기도 하고 나중에 다시 오기도 하는 과정이 반복된다.
이 사람들이 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아니고 그야말로 정말 대중인데 우리는 대중들한테 문제의식을 환기하고, 문제의식을 부여해주려고 할 따름이지 ‘다섯 명 중 한 명, 열 명 중 한 명이라도 이런 것을 자기문제화 해서 할 수 있으면 정말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대중, 스스로의 권리를 이야기하기 고대하며
그래서 주요하게 고민되는 것이 두 가지다. 하나는 좋은모임회를 상조회 성격의 모임으로 조직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상조회가 토대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 이 성격을 건너뛰어 인권증진을 고민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관념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부분이 불가피하지만 이 성격이 올곧게 자리매김 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금융채무 문제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이야기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가족과 형제들한테 못했던 얘기들도 이런 자리에서는 편하게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자칫 잘못하면, 면책 받고 나서 뒤도 돌아보기 싫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될 수 있는 것이고 달리 생각하면 ‘내가 채무를 벗어나 새 출발을 하는데 있어서 이처럼 편한 공간이 없다’는 애정이 생길 수도 있다.
또 하나는 자기과제가 명확하게 제출되어져야 한다. 그런 점에 있어서는 면책 이후의 사회적 차별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대부분 파산은 면책될 건데, ‘면책되고 나서 어떠한 사회적 차별이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인식교육을 하는 것이다. 또한 면책을 받는다 하더라도 빈곤층에 머물 수밖에 없는 사회경제적 환경에서 사회복지권리의식을 끊임없이 제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런 사회적 차별에 대해서 중장기적으로 자기과제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인권운동의 영역은 매우 넓다. 그러다보니 소수의 상근 활동가들이 여기저기 쫓아다니며 헌신적으로 활동을 하지만 자칫 백화점식으로 나열되는 사업이 될 수도 있다. 인권운동 자체가 고유한 자기 성격을 제대로 잡지 못하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상근자 조직으로 가면 정책사업, 피케팅, 기자회견 중심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며 그런 것이 지역의 수많은 요구와 맞물리게 되면 더욱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때문에 금융피해자 인권운동이 중요한 사업이기도 하지만, 이것이 사회권 운동과 맞물렸을 때 비로소 그 중요성이 드러나게 되는데 아직도 여전히 부족하다. 다만 인권운동 영역으로서 새롭게 제기된 이 문제를 대중을 만나는 과정에서 여전히 모색하고 있다. 하나의 정형화된 인권운동으로, 조직화된 모습으로 드러나지 못하는 현실적 부족함이 있지만 이를 뛰어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다.
인권운동, 너를 통해서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
20여 년 활동의 기간 속에서 내가 하고 있는 인권운동연대의 활동은 예전의 운동과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좌파운동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활동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과거의 활동과 지금의 활동은 계급과 운동의 방식이라는 측면에서 방점이 다른 것이 사실이다. 구좌파 입장에서 봤을 때는 인권운동연대가 거시기하게 보일 거라고 생각한다. 현장의 문제에 천착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여전히 인권운동 하는 사람 입장으로 봤을 때 인권운동이라는 것이 사건이 터지면 그때 달려가는 소위 말하는 뒤치다꺼리 운동을 넘어서기가 쉽지 않다.
대중을 인권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직접 조직하는 것, 인권운동이 어떻게 한국사회를 재해석하고 정치화시킬 것인지에 대한 계획은 여전히 부족하다. 이런 점을 인권운동은 계속 고민해야 하고 고민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권운동이 이런 문제에 그동안 둔감했고 이제는 한국사회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책임 있는 발언을 해야 한다. 또한 인권운동이 계급운동과 직접 관계가 있으므로 반신자유주의 반자본주의 운동 속에서 인권운동의 질에 걸 맞는 사회적 역할을 어떻게 할 것이냐의 문제도 고민해야 한다. 환경이나 여성이나 인권 모두 계급적 좌파운동과 소통이 부족했다. 이에 대해서는 소위 말하는 ‘계급적 좌파’운동하는 사람들도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당위적인 수사로만 그쳤던 점을 어떻게 자기과제로 만들 것인가에 대해 양자가 반성해야 하는 측면이 있을 것이다.
1990년대 초, 운동을 본격적으로 고민하면서 읽었던 책 중에서 한 글귀를 음미하며 운동의 태도와 자세를 가다듬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싸움꾼의 자세와 구도자의 자세-당시 20대 초반,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을 바꾸려는 싸움꾼의 자세만큼이나 자신을 벼려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세상을 이해하는 만큼 구도자의 자세가 필요하며 이 구도자의 자세가 다시 싸움꾼의 자세로서 동인이 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어렴풋한 생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런 점에서 인권운동은 세상과 부단히 싸움을 거는 활동 가운데 자칫 소홀해지기 쉬운 구도자의 자세를 일깨워주며 끝끝내 놓치지 말아야할 사람에 대한 이해, 세상에 대한 사랑을 곧추세운다. 20여 년 운동의 시간은 학생운동, 시민운동, 정치운동, 노동운동의 길을 돌아 이제 사회적 인권운동의 언어로서 세상과 소통을 하고 싶다.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