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교 시절 저는 학교에서는 튀지 않는 학생, 집안에서는 문제아로 통했습니다. 집에서는 엄격한 부모님 밑에서 반항심이 커서 자주 매를 맞고 자랐지만-어쩌면 매를 대는 부모님에게의 반항심이 제 인권의 발로였을지도 모르겠네요. 부모님에게는 죄송한 말씀이지만-학교에서 제 모습은 내성적인 성격 탓에 맨 뒷자리만 선호하고 숫기가 없어 조용하게 생활을 하는 것 외에 고민은 크게 없었습니다. 다만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을 돕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싹텄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때 특수교육학과 진학을 하고 싶었으나 집안 경제적 사정이나 부모님의 걱정 등으로 끝내 선택하지 못했으니까요.
새로운 나침반
알지도 못하고 선택한 학과가 집에서 가까운 모 대학 경영학과였습니다. 어린 마음에 그 과를 들어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어 좋은 일을 할 토대가 마련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발상이 매우 순진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또 경영학과는 제가 추구하던 가치 있는 삶과 거리가 먼 학문이었습니다.
대신 과 학회(소위 운동권 동아리)에 큰 흥미를 느꼈습니다. 선배들을 졸졸 쫓아다니며 집회에서 혹은 술자리에서 듣는 한마디 한마디에 고민하고 책을 읽고 심각해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주체적으로 움직이지는 못했습니다. 소위 말하는 운동권이 되는 것이 부담스럽고 선입견에 휩싸이는 것(당시에 보수적인 저의 고향에서 학생 운동권이라는 것은 ‘레드컴플렉스’로 인해 마치 사이비 종교처럼 취급되었으니까요.)도 싫고 집안과의 부딪힘 등 모든 게 쉽지 않았으니까요. 대학 1학년이던 1995년, 공소시효 만료 전에 전두환과 노태우를 광주민중학살의 주범으로 법정에 세우자고 과 학생회까지 비상총회가 소집되고 제 기억에는 처음으로 많은 학생들이 학교에서 대전역을 향해 거리로 나섰던 경험. 1996년 연세대학교에서 당한 탄압 이후로 학생운동에 대한 나름 진지한 고민, 그해 말 정리해고제 등 노동법 날치기 통과로 추운 겨울 거리로 쏟아져 나온 노동자들의 물결 등의 경험. 『일하며 배우는 정치경제학』이나 『철학의 기초이론』,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등의 학습 커리큘럼들은 제게 삶의 새로운 나침반을 제공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적어도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현재 지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자본주의라는 것, 그래서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 노동자에게 자본주의를 무너뜨릴 힘이 있다는 것 등등.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건데 그 당시는 노동과 노동자에 대한 이해가 여전히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노동자의 삶이라는 것을 잘 몰랐으니까요.
노동조합에 취업한 노무사
그렇게 과 학회 활동에 전념하다 1999년 졸업을 했습니다. 진로문제에 대해 남들보다는 고민이 늦었지만 대충 직장을 선택할 수는 없었습니다. 당장 돈을 벌지 않으면 굶어야하는 처지도 아니란 점이 나의 느긋한 선택에 한 몫을 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형편이 어려운 노동자들이 볼 때에는 배부른 선택이었던 것이죠.) 어쨌든 기왕이면 보람되게 일할 수 있는 직업을 찾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일단 졸업 이후 백화점 판매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수년 후 다시 이마트 계산원이 되었을 때에도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판매원이든 계산원이든 사회에서 바라보는 시선은 판사, 의사와는 매우 다릅니다. 쉽게 무시당한다는 느낌을 받으며 남의 비위를 맞춰야 하고 판매와 별 상관없는 복장을 강요당하고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걸 강요받으면서 나를 위한 의자 하나 없는 ‘서러운’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친구로부터 공인노무사 자격증 제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격증 적용분야와 수험과목이 적힌 종이에 회사 인사과, 개업 노무사, 노동조합 취업 등 노사관계 전문가라는 글귀, “노동조합에 취업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너무도 신기하고 흥미로웠습니다. 알바해서 번 돈으로 당시 거금을 들여 매우 두꺼운 노동법 책을 샀습니다. 그때 왠지 희망의 빛 같은 것을 본 느낌이었습니다. 목표가 생겨버렸습니다. 노무사 자격증을 따서 어려운 노동자들을 도와야겠다고. (그때까지만 하여도 노동운동을 해야겠다는 거창한 목표는 없었습니다.) 그 뒤 3년 동안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공부하다 2002년 자격증을 취득하고 집에서 긴 휴식을 취하고 있을 무렵, 즉 2002년 가을에 예전 수험생활 때 만났던 한 선배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민주노총 서울본부에서 노동상담 자원활동을 해보지 않겠냐고.
노동상담 자원활동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상담기술이 없어서 좌충우돌하였지만 그것보다 내가 공부하면서 접했던 노동법을 현실에 적용하는 것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법은 있으되 그림의 떡인 경우가 훨씬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노동자 한 개인이 회사에서 자기 권리를 주장한다는 건 해고의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는 것, 노동조합을 만들고 단체협약을 체결한 뒤 개별적인 근로계약보다 우위의 근로조건을 따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기까지 너무나 험난한 투쟁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 그러한 길을 걷는다 하더라도 결국 법적으로는 보장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는 것.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법이라는 것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법보다 힘의 논리가 훨씬 더 강력했습니다. 학교 다닐 적에 읽었던 마르크스주의 철학과 정치경제학이 훨씬 더 현실과 부합한 것이었죠.
그렇게 수개월째 노동상담의 한계 속에서 깨지고 또 깨지면서 노동조합에 취업해야겠다는 욕심은 더욱 간절해졌습니다. 2003년 2월 한 선배 노무사의 취업광고로 ‘민주노총 산하 경기지역일반노동조합’에 취업하였고, 최저임금을 겨우 받으면서 비정규직인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일반노조에서의 상근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60만 원밖에 안 되는 상근비를 받아 월세 25만 원을 내며 살면서도, 교통비, 식대 청구조차 되지 않아 내 돈 내가며 빚도 좀 졌지만 그 생활이 많이 좋았습니다. 오히려 노동조합을 하면서 만난 노동자들, <철의노동자>를 처음 부르면서 눈물 흘리던 아주머니, 팔에 문신이 가득한 노동자들이 수줍게 분임토론을 하는 모습, 자신의 얘기를 한 번도 남 앞에서 들려준 적이 없는 이들이 수련회에서 촛불 하나 켜놓고 처음으로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털어놓는 광경, 없이 살아도 옆을 돌아보며 웃을 수 있는 끈끈한 관계들, 노동조합에서 사회를 바라보고 자신감을 갖는 노동자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투쟁하는 것만으로도 저는 큰 가르침을 받는 것 같았고, 기뻤습니다.
이마트에서 만난 삼성
그러던 어느 날 제게 이마트 계산원 분들이 찾아오셨습니다. “우리도 노동조합이 필요해요. 점장의 횡포도 심하고 사람대접 받으면서 일하지 못합니다. 임금도 최저임금이에요.” 그렇게 이마트 용인 수지점에 근무했던 계산원(캐셔) 5~6명이 조합원으로 가입했고 노동조합을 만드는데 필요한 교육이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마트 분회장 언니가 조심스레 취업을 제안했습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생각해보니 나는 아르바이트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정식으로 현장 일을 해본 경험도 없고 노동조합을 하는데 노동의 경험이 필요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기도 하여 원서를 내보았습니다. 파트타임(단시간 노동자)이었으며 계산원으로 일하는데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닌지라 채용이 안 될 이유가 없었습니다. 면접까지 무난히 통과하고 나서 2004년 8월부터 4개월간 신나게 일을 했습니다.
한 명씩 두 명씩 조합원들이 늘어갔고, 캐셔 50여 명 중 절반 가까운 23명이 조직되었습니다. 그런데 2004년 12월 21일 경기지역일반노조 아래 신세계이마트 분회란 이름으로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분회장이 노동조합 위원장과 함께 이마트에 상견례를 하러 갔을 때부터 상황은 180도로 달라졌습니다. 탄압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날 새벽 1시까지 집에도 못가고 면담을 받는 조합원들이 간신히 탈출하듯 집에 귀가하게 되고, 이틀 뒤 점장은 잘렸고 수지점은 이미 수지점이 아니었습니다. 신세계 본사에서 직접 파견 나온 관리자들과 다른 타점포의 계산원들로 계산대는 채워지고 우리 캐셔들은 ‘노동조합 탈퇴서’를 작성할 때까지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저는 계산대에서 손님으로 가장한 수 십 명의 보안요원들에게 둘러싸여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본사에서 파견 나온 노조파괴 전담 관리자의 지시로 계산대에서 들려 나오면서 앞치마부터 속옷까지 뒤틀리고……. 암튼 그날의 악몽은 지금도 가끔 꿈속에 나올 정도입니다.
참으로 바보 같게도 분회 창립총회를 할 때만 해도 이마트가 삼성과 똑같은, 그렇게 악독한 곳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형식적으로 이마트는 삼성으로부터 독립된 법인이었으나 노무관리는 삼성과 닮은꼴이었고 삼성 이건희의 여동생 이명희가 운영하는 곳이어서 노조파괴 수법도 완전히 똑같았습니다. 삼성에 다니고 있는 남편을 둔 조합원은 남편이 직장상사에게 불려나가 구조조정 1순위에 들 수 있으니 부인을 탈퇴시키라고 했다며 울면서 탈퇴를 하고,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가정에 가택침입이 생기기도 하고, 나중에 안 이야기인데 당시 지방에서 공무원으로 재직 중이던 저희 아버지한테도 제 사진을 보여주면서 두 번이나 탈퇴 압력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탈퇴하고 몇 안 남은 우리 조합원들에게는 각 2억1천만 원씩 주겠으니 탈퇴하라는 압력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경찰은 철저하게 이마트 자본을 비호했습니다. 저는 일주일 만에 징계해고를 당했고 남은 세 명의 조합원들은 정직과 해고를 반복당하다가 끝내 비정규직 계약만료로 해고를 당했습니다. 그렇게 끈질긴 탄압과 회유와 협박 속에서 이마트 계산원 조합원들은 3년을 넘게 법적 대응과 투쟁을 멈추지 않았으나 결국 고등법원에서 비정규직 계약만료에 대한 부당해고 싸움은 조정으로 끝이 났습니다. 결국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이 투쟁을 이끈 ‘이마트 투쟁 3인방’ 언니들과 노동조합에 대해 존경과 사랑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유미는 죽지 않았을 거라고”
이마트 투쟁을 하면서 핸드폰으로 위치추적을 당한 삼성SDI 해고 노동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마트보다 훨씬 오래된 탄압과 투쟁의 역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알코올 없이는 살 수 없게 된 분도 있고, 어떤 노동자들은 너무 많이 당해서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겼고, 미행차량을 따돌리느라 역주행을 해본 노동자, 팔도강산과 일본으로까지 납치당한 노동자, 해외발령으로 쫓겨난 노동자까지…… 삼성의 노동탄압 문제를 직접 겪고 보면서 조지오웰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빅브라더가 소설 밖으로 튀어나온 느낌이었습니다. 노동자뉴스제작단에서 만든 다큐 <우리에겐 빅브라더가 있었다>는 삼성의 현주소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뒤로도 저는 민주노총 경기본부에서 삼성 노동자들의 여러 투쟁들을 접했습니다. 삼성SDI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정리해고 투쟁, 삼성에스원 영업직 노동자들의 집단해고에 맞선 투쟁, 삼성비정규직 하청 노동자 공동 투쟁단(2007), 삼성에버랜드 무용수 옥산나 씨의 디스크 산재인정과 노동조건 개선 투쟁 등 삼성의 도시라 불리던 수원에 있던 터라 피할 수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삼성(이마트)에게 당한 내가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기 싫었습니다.
2007년 3월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 황유미 씨의 아버님 황상기 님을 만난 건 그해 8월입니다. 다산인권센터 박진 활동가와 함께 서울 동부터미널 부근 찻집에서였습니다. 사실 아버님을 만나기 몇 달 전에 <민중의 소리> 기사로 삼성반도체 백혈병 산업재해 은폐 의혹을 알고 있었습니다. 기사에 실린 머리칼 없는 민머리에 뼈만 앙상한 모습의 황유미 씨 모습이 잘 지워지지 않아 아버님이 우리를 찾기 이전부터 왠지 먼저 연락해보아야 하는 건 아닌지 마음속으로 좀 앓기도 했습니다. 아버님은 이미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오신 분처럼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고3 때 삼성으로 취업나간 어린 딸은 반도체를 여러 화학물질로 세척하는 일을 했는데 입사한 지 3년도 안되어 백혈병에 걸리고 함께 일한 여성 노동자도 똑같은 급성 골수성 백혈병에 걸렸다고, 그렇게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백혈병에 걸린 노동자가 6명 정도 있다고, 삼성은 이 문제가 산재가 아니라고 발뺌하지만 집안 누구도 그러한 병에 걸린 사람이 없는데 삼성에 다니고 몇 년 뒤 이 병에 걸렸고, 함께 일한 동료들도 이 병에 걸렸으면 이는 산재이고 명백하게 진실을 가려야 한다고. 또 한 가지 강조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만약 삼성에 노동조합이 있었다면 노동조합에서 어떤 물질을 사용하는지 사전에 파악해서 안전성을 확인한 다음 노동자들이 사용하게 했을 것이고 그러면 우리 유미는 죽지 않았을 거라고. 노동조합만 있었다면 내 딸 유미는 죽지 않았을 거라고.
건강권은 노동3권의 문제
삼성, 반도체, 백혈병, 산업재해, 진상규명, 더 이상 죽지 않기 위한 싸움……. 참 많은 힘이 필요했습니다. 일단 다산인권센터와 민주노총 경기본부의 이름으로 여러 단체들에게 제안서를 돌렸습니다. 그래서 모인 건강한노동세상, 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등 19개 단체가 모여 두 달 간의 준비모임 끝에 2007년 11월 20일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규명과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대책위원회’를 발족했습니다. 이후 한시적 대책위원회의 성격에서 벗어나 좀 더 큰 투쟁을 위해 2008년 2월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아래 반올림)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다음의 세 가지 목표를 세웠습니다.
첫째, 산업재해 진상규명과 보상입니다. 백혈병 림프종(임파선암) 등 혈액암이나 재생불량성 빈혈뿐만 아니라, 다수의 뇌종양 피해자, 흑색종, 육아종, 유방암, 골육종, 난소암, 자궁경부암, 직장암, 폐암, 종격동암 등등 심각환 암 질환부터 다발성 경화증, 근위축성 측삭 경화증(루게릭), 다발성신경염증, 팔다리 저림 증상 등 신경과 근육에 이상이 생긴 병들, 생리불순, 유산, 불임, 무정자증, 무월경, 아이의 선천적 질환, 기형아 출산의 문제들, 여성의 완전 탈모와 가벼운 탈모, 빈혈, 피부병, 축농증, 비염 등 크고 작은 질병과 증상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이 모든 건강 피해들이 집단적인 노동조건과 환경에서 발병하는 직업병임을 알리고 산재보험을 통해 보상받고, 일터에서 유해요인을 찾아내고 없애야 하는 것은 우리 투쟁의 기본입니다. “더 이상 죽을 수 없다”는 외침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 삼성이 막대한 자본과 권력으로 진실을 은폐하려는 시도에 맞서 우리는 끊임없이 단 한 명의 피해제보자라도 더 찾아내고 더 알려내야 합니다.
둘째, 삼성노동자들의 노동3권, 건강권 등 노동기본권을 쟁취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말합니다. 금호타이어에는 자잘한 질병은 있어도 죽거나 쓰러지는 일은 거의 없지만 한국타이어에는 거꾸로 죽거나 쓰러지는 일이 많다고. 그 이유는 금호타이어에는 힘 있는 민주노조로 소문이 난 노조가 있고 한국타이어에는 회사 측이 관리하는 어용노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삼성은? 삼성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조건과 환경을 위해 자유롭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어떠한 창구도 없습니다. 삼성의 경영방침인 무노조 경영은 바로 이윤만을 위한 경영일 따름이고 여기에 ‘인간’은 없습니다. 삼성자본에게 인간은 이윤창출을 위해 투입되는 하나의 x이고 y일 뿐이죠. 하지만 인간은 이렇게 수량으로만 계산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에게는 빵도 필요하고 장미도 필요합니다. 바로 그것이 인권이라고 생각합니다.
삼성 노동자들의 상담 중에 제일 당황스러운 일은 화장실조차 마음 놓고 다녀올 수 없었다는 내용입니다. 화장실이 라인 안에 없어서 화장실에 한 번 다녀오려면 시간이 걸리는데 그러면 자기 키보다 높이 물량이 쌓여 힘들기에 식사시간에 물을 조금만 마신다고 합니다. 또 라인 내에서 나는 고약한 냄새 때문에 구역질이 나고 토사물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걸 삼키기도 하고 어쩔 땐 클린룸 안에 실수하기도 한답니다. 앞으로 삼성이 이렇게 빡센 노동 강도를 스스로 줄이고 유해환경을 알아서 없앨 수 있을까요. 무노조 신화가 존재하는 한 어림없는 소리입니다. 건강권은 노동3권과 직결됩니다.
셋째,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문제점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첨단 IT 전자산업이 먼저 성행했던 미국이나 영국에서 1980년대 환경오염과 에너지 고갈, 수많은 암 피해자와 직업병 피해 노동자들이 발생한 이후 그 산업들은 아시아로 넘어와 같은 역사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반올림의 활동은 국내의 전자산업 뿐 아니라 아시아의 전자산업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직업병 피해자, 환경오염 피해자들과 함께 연대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자본의 이윤창출과 아무런 규제도 받지 않는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발생하는 공통적인 문제이기에 국제적인 연대와 공동투쟁이 필요합니다. 삼성만의 문제, 국내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임을 함께 확인하고 힘을 모아 투쟁하려 합니다.
2010년 8월 현재 반올림에 제보를 한 피해자들은 이미 60명을 훌쩍 넘었습니다. 삼성의 대응도 보다 세련되고 치밀해졌습니다. 삼성은 건강연구소를 설립하고 국내외 저명한 의사들을 고용하여 산재가 직업병이 아님을 밝히기 위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또 피해자들을 거액의 돈으로 매수하기 위한 노력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근로복지공단은 맞장구를 쳐서 줄줄이 산재 불승인 행렬을 벌이고 있습니다. 최초로 불승인이 되었던 6명의 백혈병, 림프종 피해자들의 불승인 사건은 현재 행정소송 1심 진행 중에 있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 또 산재 행정소송이 끝난다고 그것의 법적 승패가 이 싸움의 끝은 아닐 것입니다. 자본 중심의 비열한 세상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끊임없이 세워가는 투쟁, 돈으로 모든 걸 덮으려 하는 1등 자본 삼성에 맞선 인간성 회복 투쟁을 지속해 나가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고 진정한 승리입니다.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