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써 무시하고 지나치려 해도 쉽지 않습니다. 텔레비전의 채널을 돌릴 때마다, 길을 걷거나 버스나 지하철을 탈 때도 그놈의 G20 타령은 거의 공해 수준입니다. 내용도 우리나라가 G20 의장국이니 레스토랑에서 큰 소리로 떠드는 것을 자제하자는 둥 외국인을 만나면 미소를 짓자는 둥 어이없습니다. KBS노조 발표에 따르면 KBS가 G20과 관련해서 이미 방송을 했거나 방송을 준비 중인 특집 프로그램만 60개, 55시간에 달한다고 합니다. 게다가 G20 성공기원 콘서트와 영화제, 릴레이 명사 강연 등등. 정작 G20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가고, 성공리에 치르면 국가 브랜드가 올라간다는데 어찌 올라가는지는 쏙 빠져있습니다. 이 무슨 “남자한테 참 좋은데 뭐라 설명할 방법이 없네.”만 되풀이하는 건강식품 광고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러다 엊그제 광화문에서 색다른 플래카드를 보았습니다. 문구를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지만 “세계 67개국이 참전해서 지킨 기적의 나라 대한민국이 G20정상회담 의장국이 되었으니 어려운 이웃나라를 대변해야 한다”는 요지였습니다. 그 밑에는 한국전쟁이 최대 참전국이 참가한 전쟁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도 되었다는 글귀도 적혀있었습니다. 별 걸 다 갖다 붙인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한편 G20이 세계에서 잘 사는 나라 스무 개 나라의 모임이고 영국, 미국, 캐나다 같은 이른바 서방 선진국이 아닌 나라에서 처음 열리는 행사이니 그럴듯한 주장이란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정작 한국이 어려운 이웃나라를 대변할 위치에 있는 것인지, 어려운 이웃나라들은 그걸 원하기나 하는지 살짝 의문이 생깁니다. UN과 같은 공식 국제기구도 아니고 그야말로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친목모임 수준인데 괜히 거들먹거리고 호들갑을 피우는 게 꼴사납지나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네 이웃은 누구인가.” 지난해 용산참사 현장에 걸려있던 수많은 플래카드 중 하나였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등장하는 에피소드의 한 구절이라고 합니다. 네가 길을 가다 강도를 만나 쓰러졌는데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사람들은 다 모른 척 지나가고 당시 유대 사회에서 핍박받던 사마리아인이 도와주었다. 그럼 네 이웃은 누구인가? 예수는 사마리아인이 바로 네 이웃이며 그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내렸다고 합니다. 좋은 이야기고 이 문구가 용산참사 현장에 걸린 취지도 이해는 가는데 워낙 심사가 삐뚤어진 탓인지 이웃이라고 하면 ‘불우이웃 돕기’가 떠올라 저는 그걸 보면 왠지 불편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개신교는 워낙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동네지만 지난 며칠 또 한 차례 개신교 때문에 사이버공간이 시끄러웠습니다. 이른바 ‘봉은사 땅 밟기’란 동영상이 인터넷상에 퍼졌는데 몇 명의 젊은 개신교 신자들이 늦은 밤 봉은사란 절에 들어가 찬송가를 부르고 불탑을 잡고 기독교식으로 기도를 올리며, 불교를 비하하고 절이 무너지라고 기원하는 내용이었죠. 동영상이 크게 문제가 되자 담임목사와 젊은 신자들은 봉은사를 방문해 사과하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여전히 개신교의 배타성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습니다. 저는 이 동영상을 보며 자연스레 차별금지법이 떠올랐습니다.
2007년 차별금지법이 만들어지려다 안 된 제일 큰 이유는 차별 사유에 ‘성적 지향’이 들어갈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였고 이를 반대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종교계, 특히 보수적 개신교 집단이었습니다. 올해 들어 법무부에서 다시 차별금지법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더니 아니나 다를까 SBS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를 빌미로 5월부터 호모포비아(동성애혐오)를 조장하는 신문광고가 실리기 시작하고, 며칠 전에는 “동성애차별금지법이 11월 중 처리될 것이며 이렇게 되면 성경을 가지고 동성애를 반대하는 설교만 해도 처벌된다”는 문자가 돌고 다음날 법무부 사이트가 마비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10월 29일 국회에서는 ‘동성애차별금지법 입법반대 포럼’이란 행사도 열렸습니다. 그만큼 차별금지법에 성적 지향이 들어가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 동성애를 계속 차별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2007년과는 다르게 매우 조직적이고 전략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지요. 게다가 일부에서는 동성애를 거부할 권리, 동성애를 죄라고 말할 표현의 자유를 말하기도 합니다. 타인의 권리를 빼앗을 권리,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할 자유 같은 건 애초부터 없다는 이야기를 그들에게 해주기 이전에 과연 종교란 무엇인가 스스로 되묻게 됩니다. 저는 종교에는 문외한입니다. 성경 몇 구절을 안다고, 불경을 좀 읽었다고 종교를 안다고 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핍박받는 이웃과 함께하지 않는 종교, 차별받는 이들과 이웃하지 않는 종교란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G20 행사에 비하면 아주 초라하지만 올해는 전태일 열사 40주기로 매우 다양한 행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사람》 이번호 기획도 ‘전태일 40주기, 다시 보는 근로기준법’입니다. 근로기준법이 그러했듯 차별금지법도, 그 어떤 법률도 세상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일 겁니다. 하지만 전태일이 그랬듯이 법률 하나가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떻게 읽히느냐에 따라서 역사적 사건이 생겨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아주 오랜만에 『전태일 평전』을 다시 꺼내 읽었습니다. 열여덟 그 시절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지금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을까요? 아마도 그렇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당시 학교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해 내신등급은 좀 오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올해는 또한 『전태일 평전』을 쓴 고 조영래 변호사의 20주기이기도 합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한국사회는 전태일에게 그리고 조영래에게 참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또한 전태일과 조영래의 만남은, 비록 때늦은 안타까운 만남이지만 참 아름답고 소중한 만남이었습니다. 좀 뜬금없지만 이번호에는 인권재단 사람에서 주최하는 문정현 신부님의 헌정공연을 즈음해 사진작가 노순택의 신부님에 대한 헌사를 실었습니다. 사진이 아닌 잔글씨로 노순택이 기록한 문정현 신부의 행적을 읽으며 문정현과 대추리, 문정현과 용산, 문정현과 노순택의 만남도 생각해봅니다. 《사람》도 이렇듯 소중하고 아름다운 만남의 자리가 되고 그 기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