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이나 뒤쳐진 한국의 노동법
한국의 근로기준법 제정은 그런 서양의 근대적 경험에 의한 역사적 소산이었지만 그것을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나라의 근로기준법을 비롯한 노동법은 1953년 제정되었다. 그것은 1948년 제정된 헌법에 따라, 자본과 노동의 자유에 근거하되 자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근로자의 근로조건을 기본적으로 보호하고, 근로자의 근로조건을 더욱 높은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노동단체권을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노동단체권은 노동조합의 결성과 단체교섭 및 단체행동을 그 내용으로 하는 것으로서 단체교섭의 결과 체결되는 단체협약을 통하여 근로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고, 나아가 노조가 미처 결성되지 못한 경우 등에 대비하여 취업규칙 등에 의한 근로관계의 결정에 있어서도 노조 또는 근로자대표의 의견을 존중하도록 규정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근로조건을 보호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자치규범인 취업규칙의 작성은 사용자의 전횡에 맡겨졌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또 하나의 자치규범인 단체협약 작성을 목표로 하는 노동단체권은 현저히 제한되었다. 특히 단체협약 체결을 위한 노동조합의 유일한 수단인 단체행동권의 행사는 헌법상 인권 보장의 효과로써 당연히 민·형사책임을 면제받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반대로 범죄(업무방해죄 등)이자 불법행위로서 민·형사책임을 부과받았다. 대신 유명무실한 노사협의라고 하는 것이 취업규칙이나 단체협약과는 아무런 관련 없이 군사 정부에 의해 강요되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따라서 노사의 자치적인 공동결정이라고 하는 노동법의 본래 정신은 철저히 배반되었다고 할 수 있다.
노동법의 근본이념인 노사 공동결정 원칙은 근로자-노동조합과 사용자의 평등을 전제로 하는 것이나, 현실적인 불평등은 차치하고라도 법적인 불평등 구조에 의해 근원적으로 파괴되기도 했다. 즉 노동조합은 정부와 사용자가 원하는 기업별 단일 조직으로만 형성되었고(복수노조의 금지), 제3자와의 연대가 철저히 금지되었으며(제3자 개입 금지), 그 정치적 활동까지 금지되었고, 특히 공무원의 노동단체권은 기본적으로 부정되었다. 최근에 와서 그 일부가 완화되었으나, 여전히 불평등 구조의 가부장적 토대는 변하지 않고 있다. 이런 법적 제약의 조건 속에서 근로자의 집단의식이 생성되고 노동운동이 발전되기란 참으로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노동운동의 약화는 바로 이러한 국가 중심의 가부장적 법 구조에도 그 원인이 있다. 이는 19세기 근대 시민법의 차원과 유사한 것으로서,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있는 지금도 한국의 노동법은 19세기의 그것과 변함이 없다. 따라서 우리의 노동법은 다른 나라에 비해 2세기 이상 뒤쳐져 있다.
한국의 노동법은 외국의 노동법과는 달리 철저히 정치적으로 변화하였다. 외국 노동법은 경제발전과 산업계의 요구에 따라 변모되었으나, 한국의 그것은 정치적 변동 때마다 조령모개 식으로 변화되어 왔다. 그 특징은 고용법 및 근로조건법의 개선과 노동단체법의 개악이다. 곧 비스마르크 이후 후발 반공자본주의가 그렇듯이 고용법과 근로조건법은 ‘엿’으로, 노동단체법은 ‘매’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서구의 경우 19세기에 이미 끝난 이야기인데도 한국에서는 21세기가 된 지금도 그대로라고 하는 점에서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이하 근로기준법의 변천사를 시대별로 개관한다.
근로기준법의 제정
제1공화국 헌법은 제17조에서 근로의 권리와 의무, 근로조건의 법정기준, 여자와 소년의 근로에 관한 보호를 규정했고, 제18조는 법률유보에 의한 노동단체권의 보장과 사기업에서의 이익분배 균점권을, 그리고 제19조는 노동능력의 상실로 인하여 생활유지의 능력이 없는 자는 법률에 의해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고 규정했다. 이러한 노동기본권의 규정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정부수립과 함께 헌법에 따른 노동법 제정이 논의되기 시작했으나, 정부의 태도는 소극적이었고 그나마 한국전쟁에 의해 중단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종료되기도 전에 이승만의 재선을 위한 개헌이 성취된 뒤인 1953년 대통령직접선거에서 근로자 표를 모으고자 하는 수단의 하나로 노동법령이 피난지인 부산에서 급격히 제정됐다. 따라서 근로관계법이 먼저 제정되는 외국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노동쟁의조정법, 노동조합법, 노동위원회법이 1953년 3월 8일 제정되었고, 같은 해 5월 10일 근로기준법이 제정되었다.
근로기준법은 1953년의 제정 이래 수차례 개정되었으나 그 골격은 그대로다. 따라서 노동조합법과 노동쟁의조정법 및 노동위원회법이 1963년에 전면 개정된 것에 비하여 근로기준법은 상대적으로 제정 이래 동일성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1953년 제정 이래 근로기준법에 관한 한, 정권의 이해관계가 그렇게 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 근로기준법의 특징적인 측면만을 검토하면 다음과 같다.
1953년에 제정된 한국의 근로기준법은 1947년 일본에서 제정된 노동기준법을 모델로 한 것이었다. 일본의 노동조합법(1945년 제정)이나 노동관계조정법(1946년 제정)이 당시 미점령군에 의해 주도된 것에 반해 노동기준법은 일본 정부에 의해 주도된 것이었다. 일본 노동기준법의 제안 이유는 생존권의 이념, 근대적 노동관계의 확립(노사대등의 결정원칙 등) 및 근로조건의 국제적 수준화(8시간 근로제 등)로 설명되었다. 한국의 근로기준법도 일본의 노동기준법이 지닌 이념을 그대로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근로조건법의 단일법이었던 근로기준법은 1960년대 이후 근로조건에 관한 기본법으로 기능하고, 그것에서 비롯되는 여러 특별법을 낳게 되었다. 곧 근로기준법 상 규정의 단독 입법화와 그것에 따른 근로기준법의 분해 및 확산화가 광범하게 전개되었다. 그 결과 근로조건에 관한 포괄적 통일법전으로서 근로기준법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이는 1차로는 1960년대의 선원법(1962)과 산업재해보상보험법(1963)의 제정, 2차로는 1980년대의 산업안전보건법(1981)과 최저임금법(1986) 및 고용평등법(1987) 등의 제정으로 전개되었다. 이처럼 근로기준법을 비롯한 근로조건법은 끊임없이 개정되었다. 외국의 경우에는 보기 어려운 잦은 개정은 산업 및 취업구조의 변화보다는 정치적인 권력구조의 변화에 따른 것이 대부분이어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근로기준법의 기본구조
1953년의 근로기준법은 1947년 국제노동기준을 참조한 일본 노동기준법을 모방한 점에서 당시의 국제노동기준을 하나의 기준으로 삼은 것이라고 평가될 수도 있으나, 실제로는 많은 예외의 인정에 의해 형식적인 참조에 그쳤다고 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1일 8시간·1주 48시간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국제노동기준이 된 것은 공업부문의 경우 1919년(ILO 제1호 조약), 상업 및 사무부분의 경우 1930년(ILO 제30호 조약)이었다.
그러나 ILO(국제노동기구)는 1935년에 이미 1주 40시간제를 채택했다(제47호 조약). 따라서 적어도 근로시간의 경우 1953년 당시에 국제노동기준에 따랐다고 볼 수는 없다. 게다가 그것조차도 적용제외, 특례의 인정, 변형근로시간제, 당사자의 합의 등에 의한 시간외근로의 인정 등에 의해 원칙이 예외가 되는 사태를 초래했다. 이러한 예외는 ILO 제1호 조약이 인정한 범위를 훨씬 벗어난 것이었다. 곧 ILO의 그것은 권한 있는 기관의 허가나 노사협정에 의해 1주 48시간 범위 내에서 1일 1시간의 연장에 그치고 있다. 한국의 1주 48시간제는 1989년에 1주 44시간제로 단축되었고 2003년에 1주 40시간제로 단축됐으나, 연장근로는 여전히 1주 12시간으로 인정되고 있다. 근로시간 이외에도 이러한 국제적 후진성은 근로관계법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그밖에 중요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최저임금제는 1953년 근로기준법에서 규정했으나 1986년에 와서야 실시됐고, 그나마 그 수준은 기아선상에 그치고 있다. 둘째, 1980년 변형근로시간제가 도입되었다가 노동 측의 반대로 1987년 삭제된 후 1997년 다시 도입되었다. 셋째, 휴가는 1953년에 월 1일의 월차유급휴가와 1년 8일의 연차유급휴가가 인정됐으나 이는 1989년에 각각 10일, 8일로 개정되었고 2003년 월차휴가와 연차휴가를 통합해 15~25일로 됐다. 이는 기업의 관리를 위한 포상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점과 일수가 짧다는 점에서 국제적으로 보아 여전히 후진적이다. 넷째, 연소자연령은 1953년 13세 미만자의 근로사용을 금지했다. 이는 1997년에 와서야 15세 미만자로 상향되었다. 과거의 그것은 국제적으로 보아 가장 낮은 최저연령이었다. 다섯째, 1953년 근로기준법은 여성이 청구하는 경우 월 1일의 생리휴가를 인정했다. 이는 1989년 개정 시에 청구가 아니라 의무적으로 지급해야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 제도는 일본법과 한국법에 특유한 것이다. 여섯째, 1953년 근로기준법은 임신 중의 여자에 대하여 산전·후 60일간의 휴가를 인정했다. 이는 1961년 개정 시에 산후 30일을 확보하는 것으로 보완되고 2001년 90일로 확대됐다. 일곱째, 1953년 해고시의 퇴직금지급을 규정했는데 이는 국가가 지급해야 할 사회보장을 근로자의 희생을 기반으로 하여 기업에 책임을 전가한 것이었다. 그나마도 1997년 개정 시에 중간정산제 내지 연금보험제도가 도입되어 퇴직금의 지급보장에 문제가 생기고 있다. 여덟째, 1953년 여자와 18세 미만자는 도덕적 및 보건상 유해 위험한 작업에 고용하지 못하게 했다. 아홉째, 업무상 부상 또는 질병의 경우 사용자는 요양보상, 휴업보상, 장해보상을 하도록 했다. 열째, 1953년 근로기준법은 사용자가 일방적으로 제정하는 취업규칙에 대하여 규범적 효력을 부여했는데 이는 현재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당시의 근로기준법을 구미 선진제국의 그것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고 그때 현실에 비추어 벅찰 정도로 높은 수준이라고 하는 평가가 있으나 1953년 당시의 선진국 노동법령에 비하여 그 수준은 결코 높은 것이 아니었고, 국제노동법의 수준과 비교하여도 도리어 격차가 컸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예컨대 근로조건법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퇴직금과 같은 국가의 사회보장 의무를 기업에 일임한 것, 근로시간과 휴식을 근로자의 권리로 인식하지 못하고 기업 관리의 측면에서 규정한 점 등은 문제점이었다.
근로기준법의 개정
1960년 4월 19일의 학생혁명 이후 성립된 2공화국 하에서는 노동법령의 변화는 없었으나 1961년 5월 16일의 군사쿠데타 이후 1960~1980년대 군사정권은 근로기준법 등 노동법령을 일부 개정했다. 군사정권의 노동법령 개정의 전개과정에서 뚜렷이 나타나는 벌칙강화의 현상은 일반적인 형벌강화의 경향과 함께 전체주의 국가의 정책 부재 현상의 발로였다.
그러나 부정적인 변천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5공화국이 제정한 노동법령 중 유일하게 돋보이는 업적은 오랜 숙원이었던 최저임금법의 제정이었다. 또 6공화국에 의해 유일하게 새로이 제정된 노동법령인 남녀고용평등법은 고용차별을 금지했다.
김영삼 정권은 6공화국의 노동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경쟁력 강화라고 하는 차원에서 노동법 개정을 도모하다가 1998년 고용조정의 요건을 완화하여 즉각 실시하는 내용으로 근로기준법을 개정하고, 근로자파견을 인정하는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였다.
김대중 정권에서 이루어진 근로기준법의 변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1주 40시간제의 채택이다. 산전·후 휴가를 90일로 늘인 것은 개선이었으나 생리휴가를 무급으로 하는 등 개악적 개정도 있었다.
노무현 정권에서 이루어진 근로기준법의 변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비정규직 보호 법률이다. 이는 비정규직의 남용에 의한 차별의 방지를 막기 위해서 제정됐으나 그 취지와는 달리 비정규직을 더욱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현행 근로기준법은 아직도 국제적 기준에 미흡하다. 가령 근로기준법은 근로시간의 탄력화를 이유로 여러 가지의 변형시간제를 새로이 인정하고 있다. 이는 본래 1935년부터의 국제적인 1주 40시간제 조약채택과 그 보급을 배경으로 하여 생겨난 원칙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예외조항을 두어 근로시간 연장을 인정함으로써 그 원칙이 유명무실화되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한국은 세계 최장 근로시간 국가로 꼽히고 있다. 마찬가지 이유로 채택된 단시간근로제도 선진국에서는 실업문제의 해결을 위해 기업에 사회보장의 특혜를 주고자 인정된 것으로서 그 대우를 통상근로자보다 못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나, 우리의 경우 그 대우를 불리하게 하는 것으로만 입법되었다.
개별 근로조건의 부여도 여전히 국제기준에 미달하는 부분이 많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한국의 근로기준법은 1953년에 형식적으로 성립된 이후 현재까지 계속 악화되어 오다가 약간의 진보를 보여 왔다. 그러나 현실은 법령 이상으로 악화되어 왔다는 점이 더욱 심각한 문제다.
법과 현실의 괴리
최근 고용형태의 특징 중 무엇보다도 가장 현저한 점은 비정규 근로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1997년 이후 구제금융사태를 맞으면서 고용조정 해고가 일반화되어 실업률이 급증되는 등 고용의 불안정이 한층 심화되고 있다. 우리는 21세기 전반에 걸친 고용 형태 변화의 추이를 정확하게 예상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피고용이 여전히 중심이기는 하되 상용직은 그 반에 이르고 실업은 항상적 상태로 존재할 것이라고 하는, 가부장적인 고용 구조가 상당 기간 계속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최근 급격히 늘고 있는 비정규 근로자의 근로조건은 유기계약에 의해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고, 정규 근로자에 비해 임금 등이 매우 열악하여 정규 근로의 경우와는 달리 임금 격차의 시정 등 여러 가지 입법 정책의 실시가 강력히 요구되고 있다. 비정규 근로자의 대다수는 정규 근로자가 되는 정규 채용 및 승진 등의 과정에서 탈락된 자이거나 가정을 책임지는 탓으로 시간제를 선택한 여성 근로자 등이 압도적이나, 최근에는 정보화시대의 도래에 따른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노동 형태로서 비정규 근로자가 등장하고도 있다. 그들은 종래의 종업원 형인 경우도 있으나, 그것보다 더욱 자유로운 도급이나 위임의 계약과 같은 자영업 형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자영업 형 전문직은 앞으로 더욱 확대될 가능성이 있고, 이에 대한 법적 정비만이 아니라 노동법 전반에서 정규와 비정규라는 근로자의 구별 자체가 재검토될 가능성이 있다.
한국에서 여성 노동은 전통적으로 보조적인 저기능 노동력으로서 남성 노동을 보완하는 가부장적 구조의 것이었다. 최근에 와서 서비스 경제가 증대되고 업무 자동화나 감량 경영화 등에 의해 여성 노동력의 수요가 늘고 있다. 가사부담의 경감, 고학력화, 남편의 임금상승률 둔화, 가계비 증가 등과 같은 노동력의 공급을 촉진하는 사정이 생겨 여성 노동이 증가하고 있으나, 남성 중심 노동을 보완한다는 가부장적 구조는 변하지 않고 있다.
현재 근로기준법의 특별법으로 남녀고용평등법이 제정되어 있으나 채용과 근로조건 일반에서 남녀의 차별적 실태는 법적으로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앞서 본 비정규 근로에 대한 법적 규제와 함께 그 중요한 부분을 이루는 여성 노동에 대한 더욱 적극적인 입법이 필요하다.
또한 직장생활 전반의 검토가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직장 생활이 상명하복의 수직적 계급 구조를 기본으로 하여 움직여지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가부장적 구조는 직장생활의 규범을 사용자가 일방적으로 결정한 취업규칙에 일임하는 현행 근로기준법의 기본 구조와, 인사권은 사용자의 고유권이라고 하는 판례와 학설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그 결과 근로조건은 세계적인 장시간 근로와 산재발생률에서 보듯이 전반적으로 열악하다. 또한 근로자의 근로조건은 전통적으로 양극화 현상을 보여 왔고, 그 정도는 최근 상당히 줄었으나 여전히 현저한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
그 밖에도 성별, 학력별 차이도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한편 근로시간은 대기업에서는 지속적으로 감소했으나 중소기업에서는 오히려 증가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산업안전이나 산업재해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법과 괴리를 보이고 있는 현실의 해결을 위해 법은 더욱 진보적으로 개정돼야 하고 아울러 적극적인 정책을 실천해야 한다.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