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승우 풀뿌리 자치연구소 이음 연구위원, 지행네트워크 연구활동가
사회 강곤 격월간 《사람》 편집인
날짜와 장소 2010년 12월 16일, 다산인권센터
《사람》 《사람》은 2011년 ‘풀뿌리운동과 인권운동의 만남’에 대한 연속기획을 진행한다. 그 첫 순서로 ‘풀뿌리운동과 인권운동은 왜 만나야 하며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만날 것인가?’라는 물음을 가지고 두 분을 모셨다. 하승우 님은 《사람》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인권운동이 풀뿌리운동과 만나야 한다”는 제안을 했고, 박진 님이 있는 다산인권센터 홈페이지에는 아예 ‘풀뿌리인권운동’이라는 배너가 달려있다. 두 분이 생각하는 풀뿌리운동, 혹은 ‘풀뿌리인권운동’이란 게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
박진 인권운동이 많이 하는 일중 하나가 사안별 대응활동인데, 그게 좀 허전한 구석이 많다. 어떤 사안을 해결해도 변하는 것은 없어 보이고, 사안 대응이 끝나면 함께 했던 사람들도 떠나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인권운동이 세상을 바꾸는데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건지 의문도 들더라.(물론 인권사안에 대한 대응활동은 여전히 필요하고 중요하다) 우리가 꿈꾸는 인권운동은 인권피해 당사자들이 피해자로 남는 게 아니라 스스로가 인권의 옹호자로 성장하는 그런 것 아닌가. 이런 고민을 적극적으로 해보려고 2007년 즈음부터 ‘풀뿌리인권운동’이란 말을 쓰게 된 거다.
풀뿌리운동이라고 하면 어느 마을로 들어가서 도서관도 만들고 동네사업도 하는 걸 주로 떠올린다. 다산인권센터도 처음 ‘풀뿌리인권운동’을 고민할 때 그렇게 생각했다. 사무실을 주택가로 옮기고 공부방, 도서관 같은 동네사업을 정말 고민했다. 근데 뒤돌아보니 이사올 때 동네에 떡 한번 돌린 후론 별반 동네사업이라고 한 게 없다.(웃음) 동네사업에 대한 고민은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풀뿌리운동을 그 틀로만 협소하게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인권의 당사자를 어떻게 인권운동의 주체로 만들 것인가’란 문제. 이 문제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이 인권운동에서의 풀뿌리운동이라고 생각한다. 다산인권센터는 대안세계화팀이 구체적인 주민운동 사례 찾기를 하면서 발표회를 하거나, 참여예산네트워크에서 함께 활동하면서 고민을 이어가고 있다.
풀뿌리운동은 어떤 운동인가
하승우 우리 사회에서 풀뿌리운동과 지역운동은 대부분 같은 의미로 쓰인다. 하지만, 나는 지역운동과 풀뿌리운동을 다르게 규정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지역에서 센터나 도서관 만들기 같은 사업을 하면 이게 다 풀뿌리운동이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거다. 물론 지역운동과 풀뿌리운동 모두 지역 사람들의 생활과 욕구를 바탕으로 운동을 하고자 하므로 비슷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운동의 과정을 통해 지역사람들이 그 운동의 주체가 되고 있는가?’, ‘운동의 과정이 해당 이슈를 관철시키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이슈의 관철도 중요하지만 이슈를 관철시키는 주체는 누구이어야 하는가?’이런 물음에 어떤 답을 내리느냐에 따라 풀뿌리운동과 지역운동이 갈라선다.
가령 ‘지역사회 도서관 만들기’만 보더라도, 도의원·시의원이 나서고 공무원이 밀어주면 효율적으로 일이 진행된다. 하지만 풀뿌리운동은 이런 효율성 보다 지역사람들 사이의 소통과 교감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다. 마을 사람들이 어떤 도서관을 필요로 하는지 이야기해야 하고, 이용자가 될 사람들이 어떤 모습의 도서관을 상상하는지 생각을 나눠야 한다. 도서관이 만들어지면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이며 무엇을 내놓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토론해야 한다. 모범적인 풀뿌리운동의 사례로 불리는 도서관들은 대개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다. 마을에 있는 사람들과 생각이 모이는 것이 기본이고, 여기에 외부의 자원이 결합했을 때, 비로소 도서관은 주민들에게 중요한 삶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삼성이 ‘희망의 작은 도서관 사업’을 하면서 멋있는 도서관을 ‘기적’처럼 만들 수 있을 진 몰라도, 그것은 주민들의 욕구나 삶과는 동떨어진 것일 수밖에 없다. 이런 도서관은 대개 전문가 위탁시스템으로 운영되는데, 전문가들이 도서관을 관리하고 전문가들 생각에 좋은 책들이 비치되는 식이다. 주민들을 객체로 만드는 도서관이다.
박진 밑으로부터 위를 변화시키는 것이 풀뿌리운동의 기본정신이고 그것이 모든 운동의 철학이 되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한다. 또 인권의 감수성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면 정말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 생각하기에 모든 운동은 인권운동이어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이 양자가 가치와 과정으로서 서로 만날 수 있다면 그게 최상이 아닐까. 그러나 문제는 이 양자를 결합하는 게 만만치 않다는 거다. 밑으로부터 위를 변화시킨다는 원칙엔 동의하지만, 사람들의 왜곡되어 있는 욕망같이 원칙을 현실화하기 힘든 현실적 조건이 있기 때문이다. 지역에서 ‘마을 만들기 운동’을 열심히 하는 분이 그러더라. “‘마을 만들기 운동’이랑 새마을 운동이랑 뭐가 다르냐”고. ‘마을 만들기 운동’에 주민들의 왜곡된 욕구가 반영되면서 새마을 운동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말이다. 인권의 가치와 풀뿌리적 방식의 만남에 쉽게 답을 찾기 힘든 건 이런 이유가 있어서이다.
하승우 사실 한국사회에선 뭔가 좀 괜찮다 싶으면 그 사업에 국가나 정부가 뛰어든다. ‘마을 만들기 운동’도 애초에는 새마을 운동이 아니라 일종의 ‘진지’를 만들어보자는 구상이 아니었나. 기존의 개발형 도시가 아니라 주민 참여형 마을을 만들자는 구상말이다. 그런데 몇 몇 주민 참여형 마을이 유명해지니까 노무현 정부 때 마을 만들기 사업에 돈을 확 뿌려버렸던 거다. 이런 물량공세에 원래의 문제의식이 묻혀 버리면서, ‘마을 만들기 운동’이 새마을 운동처럼 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우리가 한 마을에 살고 있구나’라는 걸 느끼게 하는 그런 운동의 과정은 없어지고, ‘좋은 마을’ 만드는 사업만 달랑 남는 식이다. 사람들의 왜곡되어 있는 욕망도 문제겠지만, 사람들의 왜곡된 욕망이 어떤 사회적 요인으로부터 기인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의 욕망을 왜곡시키는 가장 큰 힘은 국가·정부와 같은 공권력이다.
‘마을 만들기 운동’만 아니라 참여예산제도도 애초의 취지와는 다르게 가고 있다. 중앙정부에서 조례 만들라는 지침을 쫙 뿌려버리고, 상명하달로 지역조례가 만들어지다 보니 원래의 문제의식은 온데 간데 없이 ‘주민 참여 없는 참여예산조례’만 만들어지는 꼴이다. 이런 문제점을 지적하면, 정부는 ‘너희들이 원하는 것 우리가 했는데 뭐가 문제냐’ 이렇게 나서고, 지역에선 토호들이 득세해 참여예산을 장악해 버리고 있다. 원래 하고자 했던 뜻이 국가나 정부 같은 외부의 힘에 의해서 쭉 휘어지면서 좋지 않은 결과가 드러나는 것이다.
박진 풀뿌리운동이라는 말은 언제부터 생겨난 말인가?
하승우 서구에서 풀뿌리(grassroots)라는 단어는 68혁명을 전후로 많이 쓰였다. 중국 문화혁명의 영향(하방下放)을 받은 도시의 인텔리들이 대거 지역으로 가서 사람들을 조직하고 운동을 조직하게 된 거다. 남미에서도 비슷한 시기인 1960년대 말부터 풀뿌리적인 운동이 출현한다. 남미 여러 나라들에서 군사독재정권이 사회운동을 무력화시켰고, 이런 상황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풀뿌리적인 운동이 탄생하게 된 거다. 가톨릭을 기반으로 바닥공동체운동이 생겨났고, 이게 1970~80년대의 도시공동체운동·주거공동체운동으로 발전해나갔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 초반 크리스챤아카데미가 고민한 협동조합운동을 예로 들 수 있다.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19세기말 운동에서도 풀뿌리적인 흐름을 찾을 수 있다.(개인의 비공식 견해이지만) 유럽과 러시아의 아나키즘, 한국의 동학, 중국의 태평청국, 메이지유신 이전 일본의 ‘반란하는 농민무리들’이 그것인데, ‘어떻게 세상을 바꿀 것인가’라는 부분에서 풀뿌리운동과 유사한 경향을 보인다.
만남, 가치와 소통의 문제
《사람》 풀뿌리운동의 중요한 관점은 주민들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인권운동에서는 어쨌든 인권활동가라는 주체가 있다. ‘풀뿌리인권운동’으로 간다고 하면, 도대체 이 인권활동가라는 주체의 역할은 무엇이 되는 건가?
하승우 그 질문에 더불어 궁금한 게 있다. 인권운동에선 거주민이나 주민을 어떤 존재로 바라보고 있는가?
박진 인권운동에서는 주민 혹은 거주민이라는 언어를 그리 많이 쓰지는 않는 듯 하다. 물론 평택이나 부안처럼 지역적인 인권사안이 있었을 때, 지역 주민을 인권피해자로 호명하면서 활동해본 경험은 있다. 그런데 막상 그 운동의 경험을 되돌아보면, 주민들이 피해자를 넘어 운동의 주체로 서는 과정까지는 가지 못한 것 같다. 몇 몇 주민들이 투사로 남는 것 이외에는……. 평택만 하더라도 우리 운동의 목표를‘미군기지 확장 반대’뿐 만아니라 그 지역 주민들이 스스로 평화적 생존권을 일구어 나가는 주체가 되는 것, 그것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지 고민했다면, 좀 다른 운동을 하지 않았을까. 이런 고민은 당시 대추리로 들어간 ‘지킴이’들이 많이 했었는데, ‘지킴이’들 역시 어떤 벽을 넘어서지는 못한 것 같다. 오히려 주민들과 같은 피해자가 되어서 무언가 주저 않는 느낌이랄까. 평택에서의 경험이 상처가 된 나머지 그들은 지금까지도 힘들어하곤 한다.
그런데 최근의 청소년인권운동을 보면 달리 보이는 게 많다. 이들은 학교라는 거대한 감옥의 피해자들이다. 그래서 학교 밖으로 뛰쳐 나오기도 하지만, 많은 친구들은 학교 안에 남아 학교를 변화시키기 위해 굉장한 노력을 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중심의제인 청소년인권운동으로만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이랜드 문제나 쌍용자동차 문제 등 여러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자기 발언을 하고 있다.이 모습은 인권운동이 굉장히 유념해서 봐야 할 중요한 풀뿌리운동의 사례이다. 이건 굉장한 힘이고 건강한 흐름이다. 청소년인권운동을 하고 있는 흐름이 대세가 된다면, 앞으로 인권운동 전체에도 엄청난 변화가 있을 것이란 믿음이 생긴다.
다른 싸움을 보면서는 답답한 느낌을 많이 받는다. 예전에 뉴코아 비정규직 투쟁을 정리할 즈음 노동자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런데, 정말 죄송한 이야기지만, 그 분들의 사회의식이 눈꼽만큼도 성장하지 않았단 거다. 1년 동안 얼마나 많은 연대투쟁을 했으며, 노동운동에서 연대투쟁이란 품앗이 투쟁인데 여기서 하나도 배운 것이 없더라는 것이다. 나는 이게 그 분들 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분명 한국 노동운동의 탓이다. 그 분들이 투쟁의 결과로 인권운동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적어도 노동자 권리에 대해서는 의식이 향상되어 있어야 하는 건 아닌가. 복직이 됐을 때 당장은 노조활동을 못하겠지만, “미래를 기약하자” 이런 식으로 싸움을 접어야 하는 것인데, 그런 모습이 아쉬웠다. 이러면 이건 ‘진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 싸움에선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싸움에 지더라도 그 투쟁을 통해 사회를 보는 사람들의 눈이 달라졌다면 그것에도 충분히 큰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
조금 위험한(?) 이야기이지만, 요즘 노동운동에서 주최하는 집회나 기자회견에 가보면, 기륭과 동희오토의 승리를 거론하면서 우리도 이렇게 이길 수 있다는 말을 많이 듣게 된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정말 승리인지 솔직하게 잘 모르겠다. 사측으로부터 ‘언젠가 하겠다’라는 그 믿을 수 없는 약속 받아낸 게 과연 승리인지……. 심하게 말하는 이들은 “노조 깃발 꽂으면 저렇게 되는 구나. 앞으로 가산 디지털 단지에서 10년 안에 노조 못 만든다”는 말도 한다.
하승우 공감한다. 풀뿌리운동에서도 싸움의 승패보다는 ‘그 사안을 자기 삶의 과제로 가져갈 수 있는 사람이 운동 속에서 얼마나 만들어졌는가’를 중요하게 여긴다. 흔히 지역운동의 모범사례로 과천을 많이 거론하는데,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평가를 달리해볼 수도 있으리라. 과천은 시장이 명품도시를 지향하면서 여러 개발정책을 내놓고 있는데, 과천 시민들이 여기에 대부분 반대한다. 재건축이 자신의 주거권을 위협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천 시민들 기저에 흐르는 분위기를 보면 약간 위험할 수도 있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과연 과천 시민들이 일상을 살아갈 때 자신의 주거권 말고 여러 다른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진일보한 생각을 가지고 행동하는가? 이 분들이 생협운동하면서 안전한 먹거리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여기서 한 발 나아가 한국의 전체적인 삶의 구조나 농업·도시노동자 이런 사람들의 삶을 고민하면서 생협운동을 하고 있는가? 내 생각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은 듯 싶다. 명품도시를 반대하는 이 분들의 심리 바닥에는 ‘내가 밀려나지 않기 위한 자기보호심리’가 깔려있는 듯 하고, 안전한 먹거리를 추구하며 생협운동을 하는 심리의 바닥에는 ‘우리 가족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라는 정서도 깔려 있는 듯 하다. 시민들의 마음속에 여러 복잡한 욕망이 뒤섞여 있는데, 그 욕망의 구조는 자기보호적인 틀에서 전혀 나아가고 있지 못하단 얘기다. 결국 ‘ 사람들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거야말로 참 어려운 일이다.
예전에 한살림 조합원들께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한살림이 농업만 생각하면 안된다. 한살림 조합원들 가족을 보면 노동을 하는 사람도 있고 농업을 하는 사람도 있지 않느냐. 노동현장의 문제에 대해 모르쇠하면서 생협운동을 잘 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해선 안된다.” 그런데 이렇게 문제제기를 하니까 이야기를 듣던 한살림 조합원들의 낯빛이 바뀌는 거였다. 우리가 하는 운동은 밥상을 살리고 나아가 생명을 살리는 운동이고 게다가 우리는 사회문제에도 관심이 많은 생협조합원들인데 ‘도대체 그게 뭔 말이냐’는 표정이랄까.
다른 예로 울산에 계신 분들께 들은 이야기가 있다. 이곳에서도 지역사회운동에서의 노동조합의 역할에 대해 많은 고민과 논의가 이어지고 있는데, 이런 논의에 대한 반감도 상당하다는 것이다. “당장 우리 싸움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지역 주민들하고 그런 것까지 우리가 다해야 하나”는 이야기다. 이런 반감은 노동운동은 공장에서만 하는 운동이고 지역운동·생활운동은 공장과 무관한 운동이라는 정서가 작용한 결과다. 이 분들도 공장에서 퇴근하면 자기 주거지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생활해야 하시는 분들이고 그런 의미에서 일터와 삶터는 통합된 것인데, 자꾸 일터와 삶터를 나누는 사고틀을 아직 깨지 못한 것이다. 물론 이 분들 역시 노동현장과 더불어 지역과 생활이라는 현장이 함께 바뀌지 않으면 노동운동에도 한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신다. 하지만 그게 당면한 실질적인 문제라고 잘 인식하지는 못하신 것 같다. 생활운동 쪽에서 풀뿌리운동 하는 분들은 대부분 주부들인데, 활동을 왕성하게 하시는 분들도 6시가 되면 신데렐라처럼 집으로 간다. 한국사회에서 왜곡된 방식으로 분업화된 성역할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이야기다. 일터와 삶터의 구분이라는 구래의 사고틀이 생활운동에도 고스란히 투영되는 것이다. 이걸 넘어서야 하는데 그런 필요성엔 공감하지만 이걸 바꾸려는 노력은 아직 자리 잡고 있지 못하다.
박진 우리 단체 회원 중에 쌍용자동차노동조합의 조합원이었던 분이 계신다. 그 분이 했던 활동 중에‘끝전계’라는 것이 있었는데, 월급에서 100원 밑으로 떨어지는 푼돈을 모아 사회복지시설이나 장기투쟁사업장에 지원하는 활동이었다. 노조와는 관련 없이 이 분이 개인적으로 제안해서 추진했던 계모임이었는데, 이 사업이 자연스럽게 정규직 노조에도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이젠텍 노동자들이 투쟁하고 있을 때 ‘끝전계’가 이젠텍 노동자들에게 투쟁기금을 전달하니까, 그동안 이젠텍 노동자들 농성장에 전기선 하나 따주지 않던 정규직 노조가 농성장에 전기를 끌어주더란 거다. 많은 노조원들이 ‘끝전계’에 참여하고 있는 이상, 정규직 노조도 이들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끝전계’에 참여하는 사람들 규모가 조금씩 커져 나가자 이 분이 이런 구상을 밝히더라. ‘끝전계’를 기반으로 해서 여기에 노조나 평택시의 지원을 받아 수 십 억대의 사회적 기금을 마련한다면 어떻겠느냐, 이렇게 마련한 사회적 기금을 지역사회의 여러 일에 쓰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난 이런 구상이 노동자들을 자연스럽게 지역사회와 연결시킬 수 있는 훌륭한 구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런 구상이 ‘개량주의’ 혹은 ‘노동자 계급성과는 상관 없는 사업’, 이런 식의 취급을 받았다는 거다. 요즘도 ‘끝전계’와 비슷한 구상을 대공장 노조원들에게 제안해보는데 거의 똑같은 반응이다. “그런 거 우리가 왜 해야 하나”라는 식이다.
여러 운동들이 각자의 경계를 넘어 서로 연결되어 나갔으면 좋겠는데, 이게 잘 안 되는 게 아쉬운 거다. 예컨대, 민영화저지투쟁만 하더라도 노조가 먼저 제안을 하고, 여기에 시민단체들·주민들하고 함께 하면서 싸움이 아래로 퍼져 나가야 하는 것 아닌가. 서로 간의 담장을 넘어 싸움이 확산되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하고 있다. 지역운동포럼이라는 사업을 고민하게 된 배경에는 이런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는 절절한 바람이 있다. 서로 다른 현장에 있는 지역의 사람들이 경계 넘기를 시도할 수 있는 공간으로 지역운동포럼이 자리잡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데 역시나 이것도 쉽지 않더라. 지역운동포럼이 열리면 노동단체에서부터 시민단체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오고 간다. 그런데 막상 행사가 진행되는 양상을 살펴보면, 노동문제 토론회에는 노동운동하는 사람만 모이고 시정참여포럼에는 시민단체만 모여서 토론하는 꼴이다. 이런저런 행사에 사람들이 섞이면서 서로의 상황을 알아가고 교류했으면 하는데, 딱 자기 관심분야의 행사만 참여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3일 내내 행사에 참여해 놓고서도 서로 얼굴 한 번 제대로 못보고 인사 한 번 제대로 못하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진다.
하승우 사회운동과 풀뿌리운동이 서로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도 문제다. 예전에 사회운동포럼에서 주민단체들과 이야기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어떤 사회운동가가 “정부나 기업의 돈을 받아서 하는 게 무슨 운동이라고 할 수 있나”고 이야기를 하시더라. 나는 “기업 돈은 그렇다 해도 정부돈은 우리 돈이 아닌가. 안 쓰면 쓸모없는 곳에 쓰일 돈인데, 그걸 쓰는 것도 필요하지 않은가”라고 말했는데 큰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느낌이었다. ‘우리 회원과 동지의 자원으로 움직이는 게 진정한 사회운동’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겐, 외부의 돈을 받으면서 활동하는 단체들은 운동단체로 보이지 않는 거다. 좀 더 서로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는 일이 필요하지 않을까. 서로의 소식과 상황을 잘 모르면서 편견을 갖고 있는 것을 아닐까 생각했다.
운동의 영역마다 사용하는 언어 구조가 다른 것도 문제다. 서로 진지하게 상대방의 고민을 경청하기 위한 자리를 마련해도 이미 구조적으로 소통하기 힘든 언어가 자리 잡고 있어서 이게 힘들어지는 구석이 있다. 노동 쪽에서 ‘지역내 재생산 구조……’ 이러면 한살림에서 못 알아 듣고, 한살림에서 ‘모심과 살림’ 이러면 노동 쪽에서 못 알아 듣는 식이다. 이렇게 언어들조차 소통이 불가능하니 서로 관심을 갖더라도 실상은 잘 모를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인권운동의 경계 넘기
《사람》 풀뿌리운동과 인권운동이 만나야 된다는 주제로 대담을 기획했는데, “만나기 힘들다”는 이야기만 나오고 있다. (웃음)
하승우 그나마 풀뿌리운동과 인권운동은 비슷한 관점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 관점은 운동 속에서 여전히 소수의 관점이다. 인권운동의 관점도 운동전체에서 보면 소수의 관점이고 풀뿌리운동의 관점도 지역운동이나 시민운동 내에서 소수의 관점인 것이다. 소수의 관점이 확산되려면 여러 장벽을 넘어야 한다.
박진 여러 운동들이 서로의 담장을 허물고 경계 넘기를 시도할 수 있도록 인권운동이 매개자의 역할을 했으면 한다. 시민운동에게 노동운동을 보라고 이야기하고, 노동운동에게 시민운동을 보라고 이야기하는 것 말이다. 어떤 분야의 운동이건 궁지에 몰리다보면 늘 인권운동을 찾지 않느냐. 인권운동이 가진 것은 없지만, 이런 만남의 계기를 소중히 쓸 수 있지 않을까.
하승우 인권 사안에 대응할 때에도 풀뿌리적인 방식을 상상해 보았으면 한다. 예컨대 장애인 탈시설 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장애인들이 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서 자립적으로 생활하는 것이다. 자립생활을 위한 여러 과제가 있겠지만, 장애인들의 존재를 지역사회가 인식해야 하고 지역의 주민들이 장애인들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결국 하나의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서로의 위치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일종의 ‘공론장’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거다. 익명의 존재로 살아가는 소수자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이 ‘공론장’을 바탕으로 숙고해야 한다. 풀뿌리운동이 ‘착한 운동’이 되어 버리면 부담 가는 사업을 절대 꺼리기 마련이다. 부담 가지 않는 사업만 하다 보면 그것을 좋아할 수 있는 사람들만 남고 장애인, 성소수자는 다 털어버리게 된다. 결국 남는 사람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남는 사람들 대부분이 아이들을 두고 있는 부모들이고, 부모공동체, 아파트 단지모임으로 가게 된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모임은 자기들끼리 잘 사는 거지 운동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이렇게 끼리끼리 살아서는 결코 우리 사회에서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풀뿌리운동에 인권운동이 ‘논쟁적으로 개입하는’ 일은 이런 이유 때문에 절실하다.
박진 풀뿌리운동을 하시는 분들은 굉장히 선량한 분들인 것 같다. 그런데 선량하다는 것이 개인적으로나 공동체 안에서나 정말 좋은 것이지만 약간은 이기적으로 보일 때도 있다. 예를 들어 풀뿌리 환경운동 하시는 분들이 4대강 문제가 있기 전까지 정권과 세게 맞붙어 싸워본 적이 있었나. 성미산 공동체를 이루는 지역 주민들이 마포에서 촛불집회가 열리는데 이걸 모르고 계시기도 하고……. 내 생각엔 풀뿌리운동이 거대담론을 부정하거나 외면하는 방식은 아니어야 할 듯 싶다. 참 힘든 과제이지만, 다산인권센터의 고민은 풀뿌리적인 방식과 거대담론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풀뿌리인권운동’이 무엇인지 찾아보고 싶은 거다.
인권운동의 논쟁적 개입을 강조한 하승우 씨 의견에도 공감한다. 인권운동이 여러 사안에 논쟁적으로 개입하고 있기도 하고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인권활동가를 ‘까칠한 사람’으로 보는 경우도 있지만, 아직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예컨대 노동운동을 하는 분들 중엔 성소수자운동을 여전히 ‘부르주아 운동’, ‘성자유주의 운동’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인권운동이 이런 벽을 허물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할 텐데 아직은 부족한 모습이다. 달리 보면 대다수 사람들에게 인권문제는 자신에게 닥치기 전까지는 관심 없는 문제, 들어도 한 귀로 흘리는 그런 문제인 것 같다.
청소년인권에 대한 지역사회운동의 저조한 관심만 봐도 그렇다. 경기도에서 이상하리만치 청소년인권이라는 의제에는 지역의 단체들이 잘 결합하지 않는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관심도 전혀 없고 간담회엔 사람도 오지 않고 심지어 공대위도 꾸려지지 않았었다. 청소년인권이 무상급식보다 훨씬 더 커다란 인권의 ‘틀’일진데, 무상급식에는 경기지역 100개 단체가 참여하는 반면 청소년인권에는 아무도 붙지 않는 거다. 그런데, 김상곤 교육감이 당선된 후 갑자기 학생인권조례 이야기가 나오고 이게 운동진영에서 다급한 일이 되고 나니까 지역 단체들이 우리를 찾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것은 ‘행정의 힘’ 때문이지 운동의 성과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을 인권운동은 주체적으로 뛰어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논쟁적 개입’의 방법에 대해서도 한마디만 하자. 다산인권센터가 경험한 것인데, 우리는 몇 년 전부터 노조를 향해 인권교육하자고 제안했었다. 물론 처음엔 노조에서는 들은 척도 안했는데, 인권활동가들이 노동자투쟁에 인권침해 감시활동을 나가고 헌신적인 활동을 하니까 그들의 시각이 약간 바뀌는 거다. 그다음에 집회현장에 와서 “권리교육 해주세요” 이렇게 되고, 또 이게 괜찮으니까 “인권교육 한번 해봅시다” 이렇게 되면서 지금은 금속노조의 교안을 만드는 데까지 올 수 있었다. 난 이런 상황이 갑자기 온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난 몇 년 동안 인권활동가들이 현장에서 헌신하면서 존재를 보여주고, 존재 속에서 한걸음씩 걸어 나왔기 때문에 생긴 성과라고 생각한다. 인권활동가의 존재를 바탕으로 한 관계 맺기가 논쟁적 개입의 중요한 토대가 될 수 있다는 거다.
인권목록이 아닌 사람과 생활에 주목하는 운동
《사람》 인권운동이 지역운동에 대해 고민하게 된 여러 계기중 하나로 지방선거를 들 수 있다. 지방선거에서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면서, ‘학생인권조례를 포함해 여러 인권조례들이 앞으로 유행이 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인권운동의 준비정도가 부족한 상황에서 행정의 힘으로 여러 인권관련 조례들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는 것인데, 이렇게 인권운동의 의지나 시간표와 무관하게 조례제정이 앞서가는 상황이라면, 인권운동은 무엇을 해야 하는 건가?
박진 경기도에서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는 것을 보면서, 이게 참 엄청난 일이란 걸 실감한다. 지난 10년간 인권단체들이 청소년 인권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김상곤 교육감이 당선된 후 단 1년 만에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빠른 속도로 일이 진행되고 있다. 지역사회에서의 충실한 준비과정 없이 너무 빨리 만들어지는 것은 아닌지, 오히려 학생인권조례운동의 나쁜 표본을 만드는 게 아닌지 이런 부담감이 생길 정도다. 인권운동이 주장했던 사안이 제도로 실현되었을 때, 그다음에는 어떤 활동을 해야 할 것인지 그런 과제를 안고 있는 셈인데, 우선은 학생 인권에 대한 시민사회내의 공감대나 기반 같은 것이 없기 때문에 여러 단체를 만나서 이야기를 많이 하려고 한다. 학생인권조례가 올바르게 갈 수 있도록 교육청을 상대로 한 싸움(혹은 견인)도 열심히 하고자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서울의 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이 주민발의의 형식을 택한 것은 매우 좋은 선택이라고 본다. 지역의 충실한 준비과정을 바탕으로 학생인권을 보편화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보이기에 주목해서 보고 있다.
학생인권조례는 전국의 인권단체들이 지혜를 모아야 하는 중대한 사안이다. 학생인권조례가 만들어지면,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인권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는 상황이 올 수밖에 없다. 이를 테면 학교 숙제가 ‘인권 글짓기’, ‘인권만화 그리기’ 이렇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인데, 이게 상상이나 해본 일인가. 이런 흐름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버린다면, 왜곡된 인권(내 권리, 남의 권리를 구분하며 내 권리만 중요하게 생각하는)이 보편화될 수 있는 위험도 다분하기에 인권운동 공동의 지혜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승우 조례를 제정하는 것도 힘들지만, 조례를 원래의 취지대로 실현하고 주민들의 삶에 밀착시켜 나가는 것은 더더욱 힘든 일이다. 우리는 보통 제도화까지는 열심히 집중하고 그다음에는 다른 사업 하느라고 흩어지지 않나. 그러다 보니 조례는 만들었는데, 의미 있게 작동하지 않는 그런 상황이 오기도 한다. 조례가 주민들의 삶에 밀착되기 위해서는 지역사회의 분위기가 매우 중요한 것 같다. 지역사회의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익을수록 제정된 조례가 더 큰 빛을 발한다.
《사람》 풀뿌리 운동과 인권운동이 앞으로 어떻게 만나면 좋겠는가? 아니면 무엇부터 만나야 하는가?
하승우 풀뿌리운동은 ‘비어있는 중심의 운동’을 지향한다. 사람들이 중심에 들어와서 계속 자기 역할을 할 수 있게끔, 중심을 비워두고 와달라고 하는 태도다. 이곳으로 와서 함께 일하고, 내가 힘이 드니까 같이 더불어서 가치 있는 것들을 해보자는 자세다. “내가 잘 아는 사람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데 좀 힘들다고 하니까 도와줘야지, 그리고 이렇게 도와주다 보니까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으니까 같이 조금만 더해볼까?” 이런 식으로 개인의 영역이 확장되어가는 방식이 풀뿌리 운동이라는 것이다. 나는 풀뿌리운동이 지향하는 이런 태도를 인권운동에게서도 많이 발견한다.
인권운동이 하고자 하는 것들,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의제를 던지고, 여러 운동의 경계를 허물고, 사회의 인권감수성을 키우는 그 모든 것들은, 사실 사람과 생활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차원에서 풀뿌리운동이 가지고 있는 언어와 인권운동이 가지고 있는 언어를 결합시키는 것은 어떨까? 많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 수 있을 듯하다. 사실 세계인권선언 같은 인권목록을 보면 조금은 답답하다는 생각을 한다. 사회권, 주거권 등 여러 권리항목들이 있는데, 이게 그냥 ‘목록’이라는 거다. 그런데 ‘목록’은 사실 생활에선 쓰기 힘든 ‘리스트’가 아닌가. 이 목록을 생활에 쓸 수 있는 살아있는 것으로 만드는 작업, 이 목록을 지역사회 속에서 실현한다면 어떤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지 상상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걸 보면서 사람들이 자기의 언어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하고, 옆에서 그 일을 조금만 북돋아 주면 되지 않을까?
박진 얼마 전에 이기규 씨가 쓴 동화를 읽어봤는데, 이게 너무 재밌더라. 공부로 서열이 나뉘는 미래 사회를 판타지 형식으로 그린 동화인데, 사실 그 내용이 인권에 대한 것이었다. 그 책을 보면서 ‘사람’을 매개로 책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인권이 선언으로 목록화되어 있어서 어디에 가져다 써야 할지를 모른다는 것인데, 한 사람의 일생에 투영되는 인권을 구체적으로 그려낼 수 있다면 인권을 더욱 생생하게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예전에 『여기 사람이 있다』는 용산 투쟁에 대한 구술 인터뷰집을 본적이 있다. 거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평수를 넓히고 싶은 사람의 마음 속에 폭력의 야만이 있다.” 정말 선명하게 개발주의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식으로 인권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은 거다.
하승우 인권운동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인권운동이 도대체 누구를 대상으로 발언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국가와 자본이 강요하는 차별과 배제에 대해 저항하는 것이 인권운동일 텐데, 그 저항의 방법으로 “그래 너희가 그렇게 나오면 우리는 이런 식으로 살겠어.”라는 식의 사고도 필요하지 않을까. 국가와 자본이 강요하는 힘 혹은 질서와는 다른 층위에서 독자적으로 우리가 운용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는 상상이 필요하다는 거다. 그것에 굳이 ‘공동체’라는 표현을 쓰고 싶지는 않고, 이렇게 아래로부터 나오는 힘이 밑바탕이 됐을 때 운동의 미래도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