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그를 만나다
“신랑은 제 친구 신랑 후배였어요. 우연히 자리를 같이했는데 그 다음부터 쫓아 다니더라고요. 처음엔 남자로 안 느껴졌어요. 저는 본래 체구작고 어려보이는 사람 별로인데 우리 신랑이 그랬거든요. 근데 6개월 정도 지켜보니 마음도 예쁜데다 자상하고 성실한 게 이 사람 참 괜찮다 싶었죠.”
이충연(38) 씨의 열렬한 구애 끝에 둘은 연애를 시작했다. 당시 이 씨는 강변역에서 노점을 하고 있었다. 테이프, 시디, 이어폰 등 없는 게 없었는데, 노점이라고는 하나 보기 좋고 쓰기 좋게 잘 정돈돼 있었다. 마침 친구랑 하던 스파게티 집을 접고 새 사업을 구상하던 정 씨는 이 씨의 권유로 액세서리 노점을 열었다. “길가에 오고 가는 사람들이 핀 하나만 사도 금방 부자가 될 것 같은” 마음에 시작한 장사였지만 젊은 여자 혼자 노점을 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거리에서 매일 두 끼를 해결하고 아무나 붙잡고 핀을 사라고 외치는 건 ‘얼굴에 철판을 깔자’는 매일의 다짐과는 달리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었다. 종일 굶고 장사도 공치기 일쑤였다. 그런 초자 노점상 정 씨를 이 씨는 살뜰히 챙겼다.
“아빠가 그때 좀 아프셨어요. 얼굴에 검버섯 같은 게 피더니 살이 빠지는 거예요. 동네의원부터 대학종합병원까지 다 다녀봤죠. 온갖 검사를 해봐도 다 괜찮은 거예요. 의사는 검버섯 종류의 일환이라고, 보기 싫으면 박피를 하라고 하고. 근데 혀에도 검은 점 같은 게 생기는 거예요. 고민하던 차에 신랑한테 사정 얘길 했죠. 그랬더니 이 사람이 병원이란 병원은 다 수소문하더니 병원에 예약했다고 가자는 거예요. 검사를 해보니 에디슨 병이래요. 부신피질호르몬의 분비가 줄어들면서 생기는 병인데, 입맛이 없어지고 기력이 쇠하면서 죽게 되는 희귀병이라고 전문가를 소개시켜주더라고요. 신랑이 또 다 예약하고 수속 밟고 병원비까지 내고. 거기서 수술이 잘 돼서 아버지는 많이 좋아지셨어요. 퇴원한 뒤에도 몸에 좋은 게 있다고 하면 신랑이 전국 방방곡곡을 돌면서 구해 와서 아버지를 챙겼어요. 정말 그때 우리 신랑이 자기 부모 일처럼 알아봐주고 챙기지 않았더라면 아버지는 영문도 모르고 돌아가셨을 거예요.”
그렇게 이 씨는 정 씨 가족의 은인이 됐고, 정 씨는 이 씨를 평생 함께 할 반려자로 받아들였다.
둘 다 서른 살이 넘어 만났으니 결혼을 서두를 만도 한데 둘에게 급한 건 따로 있었다. 갈빗집을 호프집으로 개조하면서 옥탑으로 밀려난 이 씨 부모님이 편히 사실 집을 장만하는 거였다.
“신랑 어머니(전재숙 씨)네 가게에 밥을 먹으러 갔어요. 자리는 너무 너무 좋은데 장사가 안 되는 거예요. 25년이나 된 집이다보니 낡은데다 신발 벗고 앉아서 먹어야하는 식당인데 요즘 사람들은 그런 걸 싫어하잖아요. 주변에 대형 갈빗집도 생기고, 그러다보니 장사는 더 안 되고. 때마침 저희도 노점을 접고 새로운 걸 시작하려던 참이어서 갈빗집을 접고 호프집을 열기로 했죠. 본래 1층은 장사를 하고 2층은 살림집으로 썼는데 수리를 하면서 1, 2층을 가게로 만들고 부모님은 옥탑으로 올라가시게 됐어요. 처음에는 따로 집을 얻어드리려 했는데 가게를 수리하다보니까 너무 낡은 건물이라 진짜 뼈대만 남기고 다 뜯어내야 했어요. 빚도 많이 얻었죠. 부모님은 어렵게 시작했는데 집까지 따로 얻으면 너무 부담이 크다고 당분간은 옥탑에 살겠다고 하셨죠. 그래서 부모님 집도 얻어드리고, 빚도 좀 갚고 난 뒤에 결혼할 계획이었죠.”
인건비를 아끼려고 온 집안 식구들이 팔을 걷어 붙이고 호프집 인테리어에 매달렸다. 2006년 10월 그렇게 ‘한강갈비’는 ‘레아호프’로 다시 태어났다. 장사도 잘 됐고 단골도 생겼다. 꿈은 멀지 않은 듯 보였고 그 길목에서 그들은 백년가약을 맺었다.
레아, 망루에 오르다
2008년 5월. 15년 넘게 말만 무성하던 재개발(재건축) 사업승인이 떨어졌다. 용역들이 용산에 하나둘씩 모여들면서 그들의 삶도 뒤틀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신랑이 철거투쟁하고 전철연 활동하는 거 정말 많이 반대했어요. 우리 신랑이 데모 같은 걸 할 사람이라고 생각 안했거든요. 특히 옆에, 용산 5가 사람들이 천막치고 철거투쟁 하는 걸 오가면서 봤는데 이해가 안됐어요. 내가 그런 걸 해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예요. 신랑한테 그랬죠. 여기서 3년 싸울 거면 나가서 3년 벌면 되는데, 왜 그렇게 욕먹고 멱살까지 잡히면서 힘들게 버티냐? 빨리 손 털고 나가서 장사나 하자. 5지구는 5년 했는데, 5년이면 레아에 들인 돈 다 벌 수 있다. 내가 어떻게 하든 벌 테니 나가자. 근데 안 된다는 거예요. 너하고 나만 사냐고. 어머니 아버지의 모든 재산이, 아니 인생이 이 레아에 다 들어가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나갈 수 있냐고. 동네 할머니들은 어떻게 하냐고. 그러다가 용역들이 우리 시부모님한테 욕하고 행패부리는 걸 제가 본 거죠. 그리고 저한테는 안 그럴 줄 알았는데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우리 집에서 술 먹던 사람들이 용역이라고 와서 행패부리고 집기 부수고 그러니까, 그렇지 않아도 억울하고 분하던 차에 ‘내가 이기나 네가 이기나 해보자’ 이렇게 된 거죠.”
태반이 할머니들이니 천막을 칠 수도, 길거리에서 한뎃잠을 자자고 할 수도 없었다. 고공으로 올라가면 용역들의 뭇매도, 할머니들의 무모한 투쟁도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싸움이란 걸 해본 적도, 철거민이 되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었기에 건물을 점거하고 망루를 짓고 화염병을 만드는 것이 죄가 되는지조차 몰랐다. 혹여 잘못되면 벌금이나 좀 내면 되겠지 했다. 하나뿐인 집과 가게에서 쫓겨나 엄동설한에 빈손으로 거리에 내앉을 생각을 하니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절실하고 다급했다. 무식한 사람이 용감하다고 무조건 저질렀다. 되돌릴 수만 있다면 되돌리고 싶은 시간이다. 미치도록 후회스러운 시간이다. 하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한들 무슨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남일당이 화염에 휩싸이고, 사람들이 죽어가던 그때. 그는 레아에 있었다.
“남일당에 신랑이랑 사람들이 올라간 지 한참 지났는데 전기도 안 들어오고 밥은 먹었는지 걱정도 되는 거예요. 신랑한테 전화를 했더니 무엇보다 물이 없데요. 기름이 둥둥 떠 있는 물을 먹는다고. 그길로 레아를 에워싼 경찰들을 밀치고 3층으로 올라갔죠. 가게에 있던 생수통들을 망루로 던졌는데, 그걸 보고 용역들이 저한테 돌을 던지는 거예요. 신랑이 놀라서 빨리 내려가라고 그러고. 그래도 안내려가고 있었어요. 저녁이 되니까 새까만 사람들이 스멀스멀 모여들더니 사방에 깔리는데 섬뜩하더라고요.”
주체할 수 없는 긴장 속에서 2009년 1월 20일 새벽을 맞았다. 동이 떠오르기 무섭게 화염병 대 물대포의 싸움이 재개되더니 일순간 망루에서 커다란 불길이 솟구쳤다. 사람들이 망루에서 떨어졌다. 레아를 뛰쳐나가 남일당 건너편에 있던 시어머니에게 달려갔다. 시어머니는 이미 넋이 반쯤 나간 채 아들이 죽은 것 같다고 절규하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어머니가 잘못 본 거라며 남일당으로 뛰어갔지만 경찰에 가로막혔다. 우리 신랑이 저 안에 있다고 찾아야한다고 소리쳤지만, 무릎을 꿇고 애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무도 신랑의 행방을 모른다고 했다. 사람들이 죽었다는 얘기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래도 우리 신랑은 살았을 거다, 어떻게든 탈출했을 거다,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누군가 신랑이 중앙대학교 병원으로 실려 갔다고 했다. 무슨 정신으로 병원까지 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병원이었고 누워있는 신랑이 보였다. 옷을 벗겼는데도 살이 새까맣게 타 있었다. 그 순간 죽었다고 생각했다. 숨이 붙어있다 해도 살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근데 신랑이 살아났다. 고마움에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시아버지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새까맣게 그을린 주검으로 가족들 곁으로 돌아왔다. 그것도 부검으로 난도질 되어진 채.
신원파악이 되지 않아 신속히 부검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경찰이 말했지만 지문이 남아있었다. 손가락에는 늘 끼시던 금반지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불에 타 죽었다는 사람의 몸에서 타지 않은 공문서가 발견됐다고 했다. 유품이 하나도 없다더니 이틀 뒤에는 시아버지의 지갑이 발견됐다고 했다. 물에 빠졌는지 타지 않았다며 안에 든 돈의 액수까지 확인해주더니 경찰서에서 본 지갑은 불에 타 오그라져 있었다. 돈은 불에 타 눌러 붙어 셀 수 없는 상태였다. 황망한 정신에 들어봐도 경찰의 설명과 증거 그 어느 것 하나 앞뒤가 맞는 게 없었다.
“정말 후회되는 게 뭔지 아세요?”
시신인계를 거부하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순천향병원에 주저앉았다. 사람이 하나도 아니고 여섯 명이나 죽었는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겠느냐며, 조금만 싸우면 진실이 밝혀질 거라 믿었다. 진상규명도 아니고 장례만 치르는데 꼬박 1년이 걸릴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한 달 한 달 넘어가는데 뭔가 잘못 되도 크게 잘못됐다 싶더라고요. 특히 4월 달 넘어갈 때는 너무 힘들었어요. 마음도 다 못 추슬렀는데 밖에 나가면 전경들한테 욕먹고 얻어맞고. 유가족이고 뭐고 없어요. 기자회견을 하러 가도 끄집어내고 패고, 엘리베이터에 한 시간씩 갇히고. 거기다 재판도 파행을 거듭하다보니 이게 정말 만만치가 않겠구나 싶었죠. 시간은 가고 해결된 건 없고. 결국 나중에는 시신을 메고 청와대에 가자고 했죠. 시신을 공개하자고도 했는데 다 못했어요. 정말 어떻게 할 지 몰라 미치는 줄 알았어요.”
신랑이 옆에 있었다면 좀 나았으련만 신랑은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가 되어 구속된 상태였다. 매일 아침 서울구치소로 출근했다. 오후에는 기자회견장으로 집회현장으로 종종 걸음을 쳤고, 저녁에는 추모제로 내달려야했다. 매일 매일이 부상과 퇴각으로 얼룩진 전투였다. 몸이, 마음이 부서져 내릴 듯 했다. 하지만 남편을 잃은 어머니들 앞에서, 아버지를 잃은 자식들 앞에서 힘들다는 말조차 할 수 없었다.
“2세들에 비하면 제 고통은 별거 아니죠. 한창 놀 나이에 졸지에 아버지를 잃었는데 그것도 모자라 엄마가 싸움꾼이 되어가는 걸 지켜봐야했죠. 매일 전경들을 뚫고 학교가고, 학교에선 테러리스트 자식이라고 왕따 당하고, 그렇게 학교 다녀오면 경찰들이랑 싸우고 욕하는 걸 봐야하고, 밤마다 엄마 파스 붙여주고.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를 잃었는데 엄마한테 응석은커녕 힘들다는 말도 못하고 이 모든 상황을 태연하게 받아들여야 했어요. 언론의 인터뷰 요청은 또 왜 그리 많은지. 애들이 잘 버텨주긴 했는데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팠죠.”
힘겨운 시간들이었다. 다들 잠든 시간에 분향소의 향을 바꾸며 울기도 참 많이 울었다. 맥주 한 캔 치마폭에 숨기고 옥상에도 참 많이 올랐다. 영안실 냉장고의 캔 맥주는 아마 그가 다 마셨으리라.
“정말 후회되는 게 뭔지 아세요? 장례를 치룬 거예요. 그때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고, 장례를 치루는 게 최선인 줄 알았어요. 시신이 1년 동안 냉동고에 있다 보니 시체에서도 진이 빠지더라고요. 부패도 심하고. 삶도 죽음도 고통이었는데 묻히지도 못하고 있다는 게 자식들한테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었어요. 더구나 어머니들이 싸움꾼으로 변해가는 걸 보면서 장례라도 치루면 마음의 무거움이 조금은 덜어지지 않을까 싶었죠. 정운찬 국무총리가 찾아와 유감을 표했고 정부 역시 나름의 잘못을 인정한 거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가신 분들이라도 좀 쉬시라고 장례를 치룬 것뿐인데 많은 사람들이 그걸 보고 용산은 끝났데요. 어떤 사람들은 보상금 받았으니 다 끝난 거래요. 언론에도 안 나오고, 재판으로 달라진 게 없으니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해는 되요. 하지만 우리는 너무 힘들어서 장례만 치룬 것뿐이에요. 아직도 사람들은 감옥에 있고, 어떠한 진실도 밝혀진 게 없어요. 아무 것도 해결된 것이 없는데, 여전히 싸움은 계속되고 있는데 사람들은 용산을 잊은 것 같아요. 용산은 이미 끝난 싸움이 된 것 같아요.”
함께 싸웠던 용산 4구역 사람들마저 하나 둘 떠나갔다.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다고들 했다. 사정은 알지만 그래도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누구를 탓하랴. 그저 좀 더 버티지 못한 우리를 탓할 수밖에. 좀 더 현명하지 못했던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탓할 수밖에.
1년 반을 끌어온 재판도 허무하게 끝이 났다. 검찰이 수사기록을 공개하지 않아 처음부터 공정한 판결 따위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재판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단 하나의 의혹이라도 밝히기 위해, 안에 있는 사람들의 형량을 단 하루라도 줄이기 위해. 그래서 변호사들이 재판을 거부하자고 했을 때도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한다”며 설득했다. 1심 결과를 접하며 ‘역시 안 되는구나’ 싶었지만 그래도 선고 날만 되면 기대란 걸 하게 됐다. 하지만 2010년 11월 1일 대법원은 철거민들의 항소를 기각하고 원심을 확정지었다.
“재판 결과를 듣는데 마음이 또 무너지더라고요. 제가 그랬는데 안에 있는 사람과 그 가족들은 오죽하겠어요. 4~5년을 복역해야하는데. 대법원에서 나오는데 누가 그러더라고요. 재심하면 된다고. 그죠. 분명히 재심을 통해서든, 양심고백을 통해서든 진실은 밝혀질 거예요. 10년이 걸리든 20년이 걸리든 밝혀질 테죠. 근데 몇 십 년 후에 진실이 밝혀진들 지금 우리가 당하는 고통은 누가 기억하겠어요? 그 세월동안 고통은 고통대로, 상처는 상처대로 받고 살아야할 텐데,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는데 그런 다음에 밝혀지는 진실이라는 게 우리가 사는 데 도움이 될까요? 상처가 아물 수는 있을까요? 그냥 지금은 진실을 밝히기도 해야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아이들은 빨리 잊어버렸으면 좋겠다 싶어요. 억울해서 파헤치고 부여잡는 건 어른들의 몫으로 두고, 아이들은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옛날로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왕따 당하고 살인자 자식이라 손가락질 받으며 사는 아이들을 보면 왜 우리가 망루에 올랐을까, 나가라고 하면 그냥 나갈 걸, 왜 투쟁이란 걸해서 아이들까지 저렇게 큰 고통을 받게 했냐 싶기도 해요. 크게 보면 재개발 정책을 고치고 우리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가 발 벗고 해야 되는 건 맞지만 사람인지라 그냥 숨죽여 살 걸 그랬나 싶기도 해요.”
별반 달라진 것 없는 철거 현장도 그를 한숨짓게 한다. 용산참사로 철거민들의 이야기가 많이 알려지고 그들의 고통이 주목을 받았지만 재개발법은 바뀌지 않았고, 철거현장의 상황은 더욱 열악해졌다.
“우리가 싸울 때만해도 한겨울에 전기는 안 끊었는데, 물을 끊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집은 부셔도 그런 건 마지막까지 남겨뒀던 것 같은데 올해는 어디를 가 봐도 물, 전기 안 끊은 곳이 없어요. 얼마 전 철거민 한 분이 차 밑에 들어가서 5시간을 시위를 했는데, 그 추위에 사람이 그러고 있는데 누구 하나 나와 보지를 않더라고요. 건설사도, 공무원도, 경찰도. 왜 나아지지 않을까요? 벌써 용산참사가 나고 2년이나 지났는데 왜 철거현장은 바뀐 게 없을까요?”
사람을 잃고 사람을 얻다
용산참사로 그는 갖고 있던 전부를 잃었다. 자상했던 시아버지와 이별했고, 연애를 시작한 이후 슈퍼에 갈 때조차 떨어져본 적 없는 남편을 감옥에 보냈다. 예쁜 아이를 낳고 싶다는 꿈도, 레아가 기반을 잡으면 자신은 패브릭이며 홈웨어 사업을 해보겠다던 포부도 아득히 멀어져갔다. 씩씩하고 믿음직스럽던 딸은 이젠 눈물바람 그칠 날 없는 박복한 딸로 변했고, 친구들에게 그는 한없이 가여운 사람이 되어버렸다. “용산으로 인해 인생전부가 날아갔다”는 그의 말은 과언이 아니다.
“친정엄마는 늦게, 고르고 고른 게, 뭣 하러 데모 같은 걸 해서 이 고생을 하냐고 우세요. 딸내미가 매일 상복입고 서울역에 가있고, 시청 가있고. 텔레비전 보면 경찰에게 내동댕이쳐지고. 그걸 보고 있자니 속이 상하는 거죠. 사위 보고 온 날은 하루 종일 우시는데 신랑 나올 때까지 부모님이랑 같이 살까 했는데 못하겠더라고요.
친구들과 후배들은 일체 안 만나요. 그냥 싫어요. 내가 달라져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싫고, 그들이 이해 못하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도 싫고. 처음에는 이런 일을 당한 저를 위로하겠지만 결국에는 본인들이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게 될 거예요. 진실이 밝혀지고 사건이 끝난 것도 아닌데, 우리는 진행형인데 그들에게는 이게 끝난 사건이잖아요. 그렇게 생각의 차이가 크다보니 만나는 게 싫은 거죠. 또 싸움을 하다 보니 말 톤도 달라지고 사회에 대한 적개심도 생기고. 그런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요. 그러다보니 오로지 만나는 게 전철연 사람들, 범대위 사람들. 어느샌가 고립된 사람이 돼버린 거죠.”
하지만 그는 안다. 지난 2년, 잃어버린 것보다 얻은 것이 더욱 많다는 것을.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고, 새로운 꿈을 꾸게 됐다.
“전철연 식구들을 보며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할지 배웠어요. 어떻게 보면 자기들도 하루아침에 동지들을 잃은 거고, 자기 집도 지금 철거될 판인데. 그래서 사람이라면 원망도 할 수 있고, 자기네도 급하다고, 산 사람부터 살아야한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1년을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순천향 병원이고 남일당이고 24시간 그 찬 바닥 잠을 자며 지켜주고, 장례도 다 치러주고. 그러면서도 저희한테 인상 한 번 쓰지 않고 오히려 저희 아픔이 크다고 위로해주시고 챙겨주시고. 그분들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버티지도 못했을 거예요. 솔직히 용산을 겪으면서 전철연 분들뿐만 아니라 생판 얼굴도 모르는 분들에게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죽을 때까지 갚아도 그 고마움은 다 못 갚을 거예요. 그래서 예전에는 내 가족을 위해 살고 싶었는데, 이제는 내 가족을 넘어 나를 지탱해준 사람들과 같이, 우리 같은 사람들이 또 만들어지지 않기 위해 살고 싶어요. 예전에 우리가 꿨던 꿈하고는 완전히 다르죠. 예전엔 ‘내 것’이었다면 지금은 ‘우리 것’을 꿈꾸니까. 후회는 안 해요. 그게 더 행복할 수도 있으니. 신랑이 면회 가면 가끔 그래요. 그동안 우리가 참 잘 못 살았다고. 우리가 조금 더 많은 곳에 시선을 두고 살았다면 이렇게까지 섣부른 판단도 하지 않았을 테고, 사람들 도우면서 나누면서 살았을 텐데, 그동안 우린 뭐하고 살았지, 그래요.”
그는 요즘 전철연 활동에 가장 열심이다. 얼마 전에는 전철연 방송차를 몰기 위해 자동차 면허까지 땄다. 한편 생각하면 시간이 화살처럼 지나 신랑 출소하면 아무도 모르는 데로 이사 가서 예쁜 아기도 낳고 알콩달콩 지난 시간 모두 잊고 살면 좋겠다 싶으면서도, 지금까지 함께해준 이들, 지금 싸우고 있는 이들이 눈에 밟힌다. 용산에 오지만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다. 나는 다 겪어봤는데 나마저 등을 돌리면 누가 함께 하겠냐 싶다. 최근 그는 가슴 아픈 얘기를 들었다. 용산 때 함께 싸운 한 동지의 소식이었다.
“용산 때 두 다리를 다 다쳐 계속 병원에 있었어요. 다행히 한쪽은 나았는데 한쪽은 내년 4월에 다시 수술을 해야 해서 잠시 집으로 왔나 봐요. 6살짜리 아들이 있는데 그간 생계는 부인이 근근이 이어왔죠. 병원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집에 오니 그간 가족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눈에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얼마 전에 그러더라고요. 그냥 나도 망루에서 죽을 걸. 그랬더라면 가족들 이렇게 고생시키진 않아도 될 텐데. 남은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아야하는데 차라리 내가 죽을 걸…….”
가슴을 쳤다. 우리가 좀 더 잘 싸웠어야했는데, 보란 듯이 진실을 밝히고 억울한 이 하나 없도록 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열심히 사는 것밖엔, 그들을 잊지 않고 착하게 사는 것밖엔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철거 현장에 선다.
“지금은 그래도 좀 편해졌는데 유가족들이나 혹은 전철연 사람들이랑 뒤풀이라도 하러 가면 괜히 눈치가 보이는 거예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편 잃고 자식 잃고 울고불고 하더니 지금은 술이나 마시러 다닌다고, 장례 치르고 나더니 저란다고,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고 알아보는 사람들이 그래요. 그런데 나도 사람인데 어떻게 매일 울고만 다녀요. 시아버지 죽고 신랑이 감옥에 갔다고 웃지도 못하나. 일 년 365일을 매일 슬퍼할 수만은 없는 거잖아요. 매일 울고만 다닐 수는 없는 거잖아요. 더 씩씩하게 살고 당당하게 살아야 하잖아요. 그래야 싸우고 그래야 세상이 달라지는 거잖아요. 시아버지가, 남편이 못한 거 내가 대신하며 살아야 하는데…….”
눈물대신 웃음으로 그는 인사를 건넸다. 사람들이 용산을 오랫동안 기억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함께. 지금 싸우고 있는 철거민들을 돌아봐달라는 부탁과 함께. 그의 웃음이 사무치게 고마웠던 건, 절망의 벼랑 속에서 길어 올린 것이기 때문이리라. 세상에 대한 허무와 염세가 아닌 희망이 배어있기 때문이리라. 그의 웃음이 혼탁한 세상에 희망을 만들기를. 해피 뉴이어.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