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혐오라는 사회적 질병

“적은 불순하거나 오염되었다. 전형적으로 적은 이 오염을 확산시키려고 한다.”



혐오감(嫌惡感)에 대한 국어사전의 정의는 “병적으로 싫어하고 미워하는 감정”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쾌(긍정적 감정)를 추구하고 불쾌(부정적 감정)를 피하려 하므로, 불쾌감을 주는 대상을 싫어하거나 미워하게 된다. 예를 들면 뱀은 원초적인 불쾌감을 야기하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뱀을 싫어하고 나아가 미워하는 감정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불쾌감을 주는 대상이 싫어하고 미워하는 감정을 유발한다는 사실은 쉽게 이해가 되지만, 그런 대상을 굳이 ‘병적으로’까지 싫어하거나 미워하게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병적인’ 혹은 ‘극대화된’ 감정 상태야말로 혐오감을 이해하는 열쇠라고도 할 수 있는데, 아무튼 분명한 것은 혐오감이 불안이나 초조감 같은 여타의 부정적인 감정들보다도 훨씬 강한 강도를 가진 격렬한 감정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격렬한 감정의 원인으로는 두 가지 정도를 들 수 있다.


첫째, 불쾌감을 주는 어떤 대상이 더 큰 피해 혹은 재앙을 유발할 거라는 불길한 예측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적 경험으로 볼 때 전염병의 시작은 단지 한 명만 병에 걸리는 데에 그치지 않고 곧바로 많은 이들의 떼죽음이라는 큰 재앙으로 확대되고는 했다. 따라서 인류는 그런 전염병에 대해서는 다른 불쾌한 대상을 대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격렬한 부정적 감정을 체험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의미에서 더 큰 재앙의 전조가 될 수 있는 대상들은 대체로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만큼의 격한 감정상태의 원인이 된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둘째, 자기 내면의 두려움이 투사될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어떤 외적 대상이 유발하는 합당한 수준의 불쾌감을 넘어서는 극단적 불쾌감은 일반적으로 자기 문제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상한 음식에 대해 병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그런 무의식적 공포감을 현실의 어떤 소수집단에게 투사한다면, 그 집단은 극단적 감정인 혐오감의 대상이 될 것이다. ‘병적’이라는 표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혐오감은 이렇게 적정한 불쾌감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게끔 만드는 주체의 내적인 심리상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을 수 있다. 혐오감을 유발하는 대상을 올바로 알려고 하기보다는, 무조건 회피하려는 경향 역시 이와 관련이 있다. 어떤 대상을 잘 알게 되면 될수록 애매모호함이나 거리감 등이 사라지므로 자기 내면의 감정을 투사하기란 더 어려워지고 따라서 혐오감을 느끼기도 더 힘들어진다. 결국 심한 혐오감의 대상은 한편으로는 그 대상 자체가 유발하는 부정적인 감정에 의해 자동적인 회피반응을 만들어내며, 다른 편으로는 그런 대상을 계속 필요로 하는 주체의 병적인 심리로 인해 그 회피반응이 계속 유지된다고 할 수 있다. 혐오감이 내면의 두려움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마음이 병들고 약한 사람일수록 혐오의 대상이 많으며 그 감정의 강도 역시 극히 격렬하다는 사실을 통해서 쉽게 알 수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해보면 무엇보다도 장차 더 큰 피해나 재앙을 가져올 우려가 있는 대상 그리고 자신의 병적인 마음을 투사하기에 적합한 대상이 혐오감을 유발할 거라고 추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



혐오의 대상


특정 사회에서의 혐오대상은 우선 그 사회구성원들의 공통의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공동체의 유지·발전에 이익이 되는 대상에는 친근감이나 호감을 느끼지만 공동체에 피해를 주는 대상에는 혐오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공동체를 위태롭게 할 우려가 있는 강력 범죄, 사회규범이나 가치관의 파괴, 부도덕, 특정 질병 등에 사람들이 강한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다음으로 사회구성원 모두가 공통적으로 느끼는 보편적인 혐오대상 외에도 각각의 사회집단에 따라 달라지는 혐오대상도 있다. 지금까지의 인류사회는 그 내부에 여러 사회집단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노예-노예주, 농민-지주, 노동자-자본가 사이의 계급적인 대립과 갈등이다. 이 외에도 계급계층, 인종, 남녀, 지역, 세대, 각종 이익집단 같은 사회집단들 사이의 이해관계 충돌도 있다. 당연한 귀결이겠지만 서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사회집단은 상대 집단 그리고 그 집단을 상징하는 대상들에 대한 혐오감을 가질 개연성이 커진다. 예를 들면 노동자계급은 자본가계급과 그 계급의 상징으로 간주되는 언어나 관습, 재물이나 문화 등에 대해서 혐오감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전체 공동체에 뚜렷한 해악을 끼치지도 않고,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집단과의 이해관계 충돌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혐오대상이 되는 사회집단이나 개인들이 있다. 동성애자, 장애인, 특정 인종 그리고 개똥녀, 된장녀 따위의 별명으로 통칭되는 특정한 유형의 사람들에 대한 혐오가 그것이다. 이런 대상을 혐오하는 이들은 물론 제 나름대로는, 자기의 혐오감을 그럴듯하게 합리화할 수 있는 논리나 고정관념, 편견 등을 가지고 있다. 동성애자는 에이즈를 퍼뜨리므로 궁극적으로 지구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저주받은 인간들이라는 따위의 근거 없는 논리처럼. 하지만 서구 중세시대의 마녀사냥이 그랬듯이, 이런 혐오감은 그럴만한 합당한 근거가 없거나 주체의 마음의 병이 창조해낸 자기 문제에 불과하므로 비정상적이고 심각한 병적 감정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병적인 혐오감이야말로 죄 없는 타인들에게 부당한 고통과 피해를 주며, 결과적으로는 사회의 통합과 발전을 방해하는 악역을 하기 때문에 심각한 사회적 병리현상의 중요한 원인이 되는 것이다.


혐오감에 개인차가 있다는 것은 상식이지만, 그 개인차의 범위나 정도에는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이는 차량 경적소리에 혐오감을 느끼는 반면, 다른 이는 쇠가 긁히는 소리에 혐오감을 느끼는 식으로 개인차가 있기는 하겠지만, 악기 연주소리에 혐오감을 느끼는 이는 매우 적은 반면 악다구니를 쓰며 고함을 지르는 소리를 좋아하는 이는 거의 없는 식으로 개인차의 정도에도 한계는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사람에게는 누구나 소망이나 취향 같은 개인차가 있기에 혐오감의 대상 역시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어떤 이는 개를 혐오하지만 다른 이는 고양이를 혐오할 수 있고, 어떤 이는 뚱뚱한 사람을 혐오하지만 다른 이는 호리호리한 사람을 혐오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혐오대상의 개인적 차이는 일반적으로 독특한 개인사와 유전적 자질 등에서 유래하는 것이므로, 비록 어렵기는 해도 그 원인을 상당부분 추적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 글의 관심사는 사회심리학적 차원에서의 혐오이므로, 혐오대상의 개인차 문제는 생략하기로 한다.



병적인 혐오감의 확대재생산



“이제 선전의 역사로 눈을 돌려보자. 선전은 집단 내에서 혐오감과 증오심을 유발할 때 사용하는 기본적인 수단이다.”



원칙적으로 혐오감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거나 줄 위험이 있는 대상을 자동적으로 피하게 해주는 적응적이고 정상적인 감정이다. 이런 정상적인 감정으로서의 혐오감은 거의 문제가 되지 않으나 병적인 감정으로서의 혐오감은 그 감정을 느끼는 개인들만이 아니라 사회에도 아주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이런 병적인 혐오감은 왜 사회적으로 유행하는 걸까?


첫째, 특정 사회집단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병적인 혐오감을 이용해서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히틀러는 자신이 대변하는 독일 독점자본가계급의 사회계급적인 이익을 위해 유대인에 대한 혐오감을 부추겼고 결국엔 끔찍한 대량학살을 자행했다. 이런 식으로 한 사회에서 권력과 부를 장악한 지배집단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희생양을 조작해내고 그 집단에 대한 혐오감을 확대재생산하는 정치수단을 적극 활용해왔다. 제국주의자들의 분할통치 방식 역시 저들의 식민지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혐오감을 효과적으로 확대재생산하고 적극적으로 이용했던 전형적인 사례이다. 아프리카의 르완다를 지배했던 프랑스가 후투족과 투치족을 차별대우해 두 부족이 서로 싸우게 만들었던 것, 동북아시아 지역을 점령했던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인은 이등국민이고 중국인은 삼등국민이라고 하면서 두 민족을 이간질했던 것,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전라도에 대한 차별정책을 통해 지역감정과 호남인에 대한 왕따문화를 조장했던 것 등이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 대체로 병적인 혐오감을 확대재생산하는 사회집단은 대중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두려움에 어필하기 위해 혐오감의 대상이 되는 집단을‘악의 화신’ 혹은‘세상을 오염시키는 병원체’ 등으로 매도한다.


둘째, 병든 사회는 병적인 혐오감을 자연발생적으로 확대재생산하기 때문이다. 건강한 사회와 병든 사회를 가르는 기준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자세히 논하자면 끝이 없겠지만, 그것의 핵심을 간단명료하게 정의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들에게 커다란 좌절을 강요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그리고 이 명제 하나만으로도 현재의 주제를 충분히 다룰 수 있다. 절대다수의 사회구성원들이 생존위협에 시달리는 사회, 빈부격차가 심각함에도 그것이 개선될 전망을 보이지 않는 사회, 정신건강을 피폐하게 만드는 부패타락한 문화가 지배하는 사회 등에 사는 사람들의 심리는 좌절, 무력, 자기혐오, 분노, 불안 등으로 얼룩져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짓누르는 고통스러운 감정들을 밖으로 쏟아낼 수 있는 기회를 간절히 원하며 찾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마음이 병든 사회구성원들이 자기 내면의 찌꺼기를 마음껏 투사할 수 있게 해주는 대상은 병적인 혐오감의 대상이 되며, 그런 혐오감은 사회적 차원에서 확대재생산된다. 한 마디로 병적인 사회일수록 극단적이고 만성적인 혐오감, 혐오범죄가 극성을 부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앞에서도 강조했듯이 병적인 혐오감의 주요한 원인은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혐오의 주체들에게 있다. 그러므로 이런 병적인 혐오감은 사회가 전체적으로 건강해지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지배집단은 한편으로는 사회를 부정의가 춤을 추는 난장판으로 만들어 사회구성원들의 마음을 병들게 하고, 다른 편으로는 저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혐오감을 확대재생산함으로써 병적인 혐오감을 사회에 만연시키는 역할을 하는 경향이 있다.



내집단과 외집단: 이중기준


자신이 소속되었거나 소속감을 느끼는 사회집단을 ‘내집단’, 그 외의 사회집단을 ‘외집단’이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사회집단을 이 두 가지로 구분한다. 예를 들어 김 모 씨의 경우 그가 태어나서 자란 지역의 주민들, 출신학교의 동창생들, 같은 직장의 동료들은 내집단이 되는 반면 그 외의 집단들은 외집단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들이 내집단과 외집단을 그저 구별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그 각각에 대해 이중기준을 적용한다는데 있다.


이중기준이란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팔이 안으로 굽는’ 원리라고 할 수 있다. 한나라당 당원들에게 한나라당은 내집단이지만 나머지 당은 외집단이 된다. 참여정부 시절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은 지금은 고인이 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외집단으로 간주되는) 누군가를 공직에 임명하려 할 때마다 그에게 약간의 부도덕성이나 흠집만 있어도 난리법석을 피워 기어이 낙마를 시키곤 했다. 하지만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고 나서는 비리 백화점을 방불케 하는 (내집단의) 부도덕한 인물들을 공직에 임명하려는 대통령에게 야당과 시민단체들이 항의하자, “그런 가벼운 흠 가지고 웬 트집이냐”, “그 정도의 결함도 없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냐?”고 하면서 무한대로 너그럽게 굴었다. 내집단에 속하는 자기편과 외집단에 속하는 상대편에 대해 너무나도 다른 이중기준을 적용해 차별대우를 한 셈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서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혐오대상은 외집단 중에서도 정서적으로 가장 거리가 먼 외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외집단 중의 외집단인 혐오대상에게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할 도덕적 기준과 가치가 적용되지 않는다. 좀 속되게 비유하자면, 내집단 사람이 방귀를 끼면 웃어넘기지만 혐오집단의 누군가가 같은 행위를 하면 독가스 살포죄로 처벌하는 식으로 전혀 다른 이중기준을 적용하는 것이다.


사회에서 일단 혐오의 대상으로 공인되면 모든 사람에게 통용되는 보편적인 권리도 누릴 수 없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도덕적 기준도 적용되지 않는 등 극심한 불이익과 불공정한 차별을 겪어야만 한다. 도저히 제거할 수 없는 미운털이 박혀 무슨 일을 하더라도 매를 맞아야만 하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는 것이다.



한국의 근현대사와 레드 혐오


먼 옛날까지 뒤적거리지 않더라도, 한국의 근현대사는 지배세력에 의한 혐오감의 확대재생산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일제식민지시대에 일본제국주의와 친일파들은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혐오감을 대대적으로 부추겼는데, 그들을 ‘테러리스트’나 ‘비적(匪賊)’ 등으로 지칭한 것만 보더라도 이를 잘 알 수 있다. 해방 이후 정권을 잡은 친미-친일파 연합세력은 자기들의 몸보신과 부귀영화를 위해 좌파에 대한 광기어린 혐오감을 유발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사실상 미국이 강력히 지지해주었던 반공노선에 편승하지 않고서는, 그들은 자기들의 반민중적 권력을 유지할 명분도 실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부터 최근까지도 한국의 지배세력은 자기들에게 도전하는 사람이나 집단을 모조리 빨갱이로 몰아서 죽여 버리거나 사회적으로 매장해왔다. 좀비 영화 같은 헐리웃 공포영화들이 담고 있는 집단심리가 미국 지배층에게 전형적인‘레드 콤플렉스’였음은 익히 알려져 있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성공한 이후, 사회주의가 급격하게 팽창하자 이에 심각한 공포와 위협을 느끼던 미국의 지배층에게 사회주의자는 마치 좀비와도 같은 존재였다. 왜냐하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꺼이 박봉을 받으면서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말을 잘 듣던 노동자, 농민들이 사회주의자를 만나고 나면 조합 같은 걸 만들고 머리에 띠를 두른 채 투쟁에 나서곤 했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의 지배층에게, 좀비에 물린 착하고 평범한 이웃들이 모두 좀비로 변해 결국 세상이 좀비 천국이 되고 마는 끔찍한 광경에 다름 아니었다. 아마 해방 이후 한국의 지배층도 이런 심리를 동일하게, 아니 더욱 극심하게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한편 한국의 민초들은 지배층에 저항했다가는 빨갱이로 몰려서 삼족이 거덜난다는 처절한 피의 체험을 해야만 했다. 따라서 한국인들에게 빨갱이 혹은 좌파란 마치 전염병처럼 퍼져나가며 종국에는 무서운 피바람을 불러오는 치명적인 전조 혹은 바이러스와 동일시되었고 그 결과 자동적이고 병적인 혐오감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인들의 레드 콤플렉스가 비이성적인 광기의 빛깔을 띠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한국사회와 병적인 혐오의 확대재생산


불의한 역사를 제자리로 돌려세우는데 성공하지 못한 탓에 21세기에 들어선 한국사회는 점점 더 심각한 병리현상들을 드러내게 되었다. 한국은 비록 물질적으로는 과거에 비해 훨씬 더 풍요로워졌으나 OECD국가 중 저임노동자 비율, 비정규직 비율, 근로시간, 노동유연성(해고의 용이성), 산재사망자, 사교육비 비중, 이혼율, 자살률이 1위이며 출산율은 꼴찌인 불행공화국이다. 나는 『불안증폭사회』에서 이기심, 고독, 무력감, 의존심, 억압, 자기혐오, 쾌락, 도피, 분노를 한국인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9가지 병적인 심리코드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 심리가 한국인들의 불안을 끊임없이 증폭시키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를 ‘혐오’라는 주제와 연관시켜보면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결론을 유추해낼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한국인들은 마음이 나날이 병들어가고 있으므로, 고통스러운 내면을 투사하고 분출할 수 있는 혐오 대상을 절실히 원하고 있다.”



승자독식의 무한경쟁 원리가 전 사회에 심어놓은 패배자, 루저에 대한 잔혹한 무시와 경멸풍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한국인이 얼마나 될까? 경쟁에서의 패배자, 실패자에 대한 혐오감 조장은 곧바로 사회적 약자나 능력 부족자 등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어린아이들조차 학교에서 친구를 왕따 하는 험악한 세상이 될 수밖에. 원래 강자한테 당당하지 못하고 굽실거리는 비겁한 사람일수록 약자 앞에서는 자기과시와 힘자랑을 하는 법이다. 즉 사회적 약자에 대한 천박한 우월감이나 병적인 혐오감은 스스로의 사회적 처지, 삶이 매우 비참하다는 강한 반증일 뿐이다.


만일 한국인들이 지금처럼 ‘사회적 시체’나 다름없는 비참한 신세에 머물러 있으면서 마음속 상처가 악화되는 것을 방치한다면, 그들에게서 가련하고 힘없는 사회적 소수집단이나 개인들에 대한 관용이나 너그러움을 기대하기란 힘들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병적인 혐오감의 확대재생산을 막을 수 있는 핵심 열쇠 역시 한국사회의 개혁과 직결되어 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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