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우리 사법부의 현실은 어떨까? 정말 인권보장의 최후의 보루로서 제 구실을 하고 있을까? 만약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고, 우리는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 근대 이후 한국 현대사를 돌아보는 것은 매우 유용한 방법이다. 법사학 연구에 따르면 일제시대나 해방 국면을 돌아볼 때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아래에서는 주로 1960~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시대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 시기는 인권보장기구로서의 사법부의 기능이 사실상 정지된 사법암흑의 시대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인권을 말하는 것조차 사치스러웠던 시대
1960년 군사쿠데타 직후 2년 6개월은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최고 권력기구로서 직접 통치했던 기간이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국가권력의 모든 것이었고, 이에 따라 사법부는 ‘혁명재판소’라는 이름의 산하기구로 전락했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거론하기 어려운 시대였지만 군부가 민주주의와 인권의 ‘형식적’ 틀을 마련하는 수고까지 마다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1962년 법무부 검찰국에는 인권옹호과가 설치되었고 인권침해사건 처리규정도 제정되었으며 그 외에도 크고 작은 인권옹호활동이 전개되었다. 심지어 지금의 국가인권위원회와 유사한 인권옹호위원회 설치가 검토되기도 했을 정도다. 하지만 형식과 실질이 일치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1963년 민정 이양 이후에도 박정희 정권의 군사 통치는 계속되었다.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계엄령과 위수령이 각각 3번씩 내려졌으니 그 동안 대한민국은 준 전시상태나 다름없었다. 민간인 복장을 하고 군사통치를 한 셈이다. 군사통치의 컨트롤타워는 중앙정보부였다. 1961년 만들어진 ‘중정’은 겉으로는 정보기관을 표방했지만 실상은 공작 정치를 일삼고, 국민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초헌법적 기구였다. 박정희 정권 시대의 수많은 조작사건과 고문 등의 악행은 대개 중정의 작품이었다.
1972년 유신체제에 돌입하자 형식적인 민주주의의 틀마저 해체되었다. 그 정점에는 긴급조치가 있었다. 유신헌법 제53조에 따라 대통령에게 긴급조치라는 사실상의 ‘법’을 만들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고 박정희는 그 권한을 9번에 걸쳐 사용했다. 특정 대학(고려대)을 휴교시킨다는 코미디 같은 긴급조치 7호도 있었지만 역시 압권은 긴급조치 1호다.
1.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2. 대한민국 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3.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4. 전 1,2,3호에서 금한 행위를 권유, 선동, 선전하거나, 방송, 보도, 출판 기타 방법으로 이를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언동을 금한다.
5.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며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이 경우에는 15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병과할 수 있다.
6.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
항의나 반대는커녕 사소한 ‘제안’조차도 불가능하도록, ‘금지’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도록 한 창의적인 입법기술이 놀라운 뿐이다. 하지만 그 솜씨를 감상하고 있기에는 결과가 너무 참혹했다. 9호까지 발동된 긴급조치는 총 1,000여명의 구속자를 양산했고, 수배, 연행, 징집 등으로 인한 피해자는 그 몇 배에 이를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잡혀가고, 갇히고, 다치고, 고문당해야 했고,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인권’을 말하는 것조차 사치스러운 시대였다.
군사통치의 종결자-사법부
주목할 것이 있다면, 당시 박정희의 군사통치에서 사법부가 담당한 역할이다. 세계 독재정권 중에는 사법질서를 깡그리 무시한 채 막가파식 철권통치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박정희 정권의 선택은 사법부를 ‘활용’하는 것이었다. 이 전략은 정권의 적나라한 통치를 순치시킴으로써 눈속임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교묘한 전략이다. 정치적 반대자들을 ‘법’없이 잡아 가두고, 고문하고, 학살하는 것보다는 검찰의 수사와 법원의 재판을 거쳐 ‘합법적으로’ 연행하고, 구금하고, 사형시키는 것이 정당성을 획득하는데 훨씬 유리할 수 있다. 예컨대, 19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을 살해한 국가범죄는 일차적으로 비상군법회의의 ‘군인’들 작품이었지만 최종결정은 법복을 입은 대법관들에 의해서 내려졌다. 적어도 외양상 그것은 독재정권의 농간이 아니라 ‘법의 심판’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법부를 권력의 시녀로 만들기에는 당시 상황이 그리 녹녹치 않았다. 해방 후 식민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채 대한민국 사법부의 역사가 시작되었지만, 여러 가지 우연적인 요소 덕에 이승만 정권시절 사법부는 통치 권력과 나름대로의 긴장관계를 가질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4.19혁명을 통해 사법부의 독립과 민주화를 위한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다. 제2공화국 헌법이 도입한 ‘법관선거제’는 그 상징적인 제도 중 하나였다. 물론 이 모든 것은 5.16군사쿠데타로 인해 도루묵이 되었지만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근대국가에서 사법부는 묘한 속성이 있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면 스스로 독립을 확보하기 위한 자가발전을 시작한다. 사법은 정치에 종속되지 않아야 한다는 ‘신념’이 한편에 자리 잡게 되고, 다른 한편에는 그렇게 해야 사법부가 자기정체성을 갖고 존속할 수 있다는 ‘정치적 계산’이 똬리를 튼다. 이 신념과 계산이 사법부를 이끌어가는 동력이 되어 사법부와 통치권력 둘 사이에는 긴장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1960년대 박정희 정권과 사법부에도 이런 긴장이 있었다. 박정희는 사법부를 군대의 ‘법무감실’ 정도로 여겼다고 하지만 그 서슬 퍼런 시절에도 사법부가 박정희의 요구대로 판결해준 것은 아니었다. 1964년 인혁당 사건, 1966년 민비연 내란음모사건, 1967년 동백림 사건, 1970년 동양통신 필화사건, 1971년 <다리>지 필화사건 등 주요 정치적 사건에서 사법부는 나름대로 정치권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사법부가 박정희 정권의 독재정치에 작심하고 어깃장을 놓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구속영장을 기각하거나 형량을 조정하는 방식으로 소극적으로나 견제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사법부의 소극적인 저항조차 박정희 정권에게는 항상 눈엣가시였고, 그 불만이 표면화된 것이 바로 1971년 이른바 ‘사법파동’이다. 박정희 정권은 1971년 국가배상법 위헌판결을 빌미로 사법부를 노골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방법은 ‘문제’의 법관들을 미행하고, 사찰하고, 비위를 폭로하는 식의 치졸한 것이었고, 이에 분노하여 전국 판사 455명 중 150여명이 사표를 제출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1973년 사법파동에 관여했던 법관 50여명이 재임용에서 탈락하는 것으로 일단락됨으로써 사태는 찻잔 속 태풍에 그치게 된다. 그 이후부터 사법부는 권력의 입맛대로 척척 판결해주는 유신체제의 산하기구로 전락했고 급기야 1975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서 사형판결을 내리게 된다. 고문과 조작으로 얼룩진 사건에 최종적으로 서명하는 ‘종결자’ 역할을 맡은 것은 바로 대법원이었다. 말 그대로 사법 역사상 ‘암흑의 날’이었다. 이 시기 형사법정이 “법복을 걸친 테러 기구”라는 비판은 그리 심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의 대법원장조차도 그 시절을 “회환과 오욕”의 역사로 규정했다. 박정희 시대의 사법부는 그렇게 ‘인권보장의 최후 보루’ 역할을 스스로 포기하고 말았다.
사법부가 ‘최후의 보루’로 거듭나기 위한 과제들
박정희체제가 막을 내린지 30여년이 지났고 그 때의 유산들은 많은 부분 청산되었다. 정보기관이나 청와대에서 법관실을 제집 드나들듯 들락거리는 시대는 이제 종료되었다. 정권의 눈치를 살피며 판결하는 시대도 끝났다. 하지만 모든 과거가 말끔히 청산된 것은 아니다. 불과 2년 전 5차 사법파동으로 명명된 신영철 대법관 사건이 있었다. 그가 법원장이었던 서울중앙지법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들은 사법 독립성 침해가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교묘한 방식, 예컨대 사건배당이나 사건처리 독려 등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전국의 판사들이 또 한 번 목소리를 높이고 시민사회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지만 그는 무사히 대법관직에 안착했다. 그동안 전개되어온 사법개혁의 성과가 무엇인지를 의심케 하는 순간이었다. 그 과정을 통해 법관들의 독립성에 대한 신념과 의지를 엿볼 수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 사법의 관료화라는 문제가 아직도 견고하게 남아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아직 박정희 정권 시대의 그 ‘회환과 오욕의 역사’를 아직 청산하지 못한 셈이다. 무엇보다 사법부가 남긴 치욕스런 판결들이 아직 청산되지 않았다. 국가 차원의 다양한 과거청산 기구들이 나름의 활동을 벌였고, 국방부와 경찰청, 심지어 국가정보원까지 과거청산 기구를 설치했지만 유독 사법기관인 검찰과 법원만 이러한 흐름에 동참하지 않았다. 대법원장의 사과 표명과 몇 건의 재심판결이 힘겹게 진행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가운데 사법부의 반성과 거듭나려는 의지를 읽어내기는 어렵다. 우리는 아직 그때 그 시절 사법부와 통치 권력이 내통한 통치메커니즘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법관이 고문당했다고 호소하는 피고인의 주장을 못들은 척했던 사정은 무엇이었는지, 허접한 공소장을 받아 적어 판결한 이유가 무엇이고, 심지어 무고한 사람에게 사형을 내린 그 내밀한 사연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국정원 과거사위에 참여했던 한홍구 교수에 따르면, 중앙정보부와 안기부가 여당 실력자나 현역 국회의원까지 모진 고문을 해댔지만 현역 법관에게 노골적인 압력을 가한 경우는 찾아 볼 수 없었다며 이렇게 말한다. “차라리 중정-안기부가 법관들을 잡아다 협박하고 고문하고 해서 사법부가 저 지경이 되었다면 덜 슬펐을 것이다.” 사법부가 1차 사법파동 이후 권력에 굴종할 수밖에 없었던 그 사연과 내막을 사법부 스스로 밝히는 것이야 말로 사법부 거듭나기의 시작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에게는 사법개혁의 과제가 여전히 남아있다. 사법부가 그동안 권력으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에서 동시에 국민으로부터도 독립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다. 국민으로부터 독립하여 관료화된 사법기구가 인권보장의 최후의 보루로 기능할리 만무하다. 다섯 차례에 걸친 사법파동과 시민사회의 사법개혁운동을 통해 그 구체적인 개혁과제들은 이미 다 제시되어 있다. 법관 계급구조(승진, 전보제도)의 개혁, 재판에서의 시민참여 확대, 하급법원 강화, 대법원 구성의 다원화, 민주화, 법관 임용 및 인사제도의 개선 등 몰라서 못한 게 아니라 안 해서 안한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놀랍게도 이명박 정권 들어서는 논의조차 제대로 해보지 못한 과제들이다. 최근 사법개혁을 한답시고 국회에서 논의가 벌어지고 있지만 이 중요한 과제들을 외면된 채 여야, 검찰, 법원이 서로의 정치적 이해타산을 위해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을 뿐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 몇 년 동안 이명박 정권의 무리한 법집행을 사법부가 적절히 견제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박원순 변호사 사건, PD수첩 사건, 미네르바 사건, 전공노 시위 사건 등에서 법원의 반란(?)이 이어졌다. 하급심 결정이긴 하지만 사법부가 왜 인권보장의 최후보루인지를 유감없이 보여준 판결들이었다. 인권에 무지한 정부에 의해 역사의 시계가 거꾸로 가는 있을 때 사법부마저 그들과 한통속이었으면 정말 암울했을 것이다.
그런데 노동문제 등 사회권적 쟁점에 눈을 돌려보면 얘기가 다르다. 여전히 헌법재판소는 사회적 소수자들의 ‘헌법적’ 권리 보장에 소극적이다. 이미 국제사회에서 확고한 결정이 내려진 양심적 병역거부나 국가보안법에 대해 헌법재판소의 입장은 여전히 확고하다. 얼마 전에는 군형법 상 ‘계간’ 조항을 합헌이라고 결정하는 충격적인 일까지 벌어졌다. 노동문제에 대한 법원의 최근 판례 역시 심각한 우려를 낳는다. 법원은 이제 노동자의 단체행동을 형법과 손해배상으로 규제할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노동권이 심각하게 위축되고 있는 반면 경제범죄에 대한 법원의 태도는 지나치리만큼 관대하다. 이러한 흐름이 가속화된다면 앞으로의 정치 환경과 관계없이 심각한 사회정치적 문제로 대두될 가능성이 높다. 법조인 양성과정, 법관 최초 임용 방법, 대법원 구성 방법 등 다양한 쟁점을 놓고 거시적인 대안이 마련되어야 하는 부분이다.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