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쪽에 앉으시면 돼요.”
그녀가 침대를 가리켰다. 그녀는 의자에 앉고 나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하루에 두 번, 밥벌이로 조간과 석간신문을 돌리는 그녀가 일을 마치는 시간은 저녁 7시 30분. 트랜스젠더로 어릴 적에 집에서 쫓겨난 후 실종신고가 되어 주민등록이 말소된 홍유정 씨. 그녀는 지금 주민등록을 살리고 성별정정을 준비 중이다. 8시를 조금 넘겨 부천에 있는 그녀의 방에서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 어릴 적에는 어디 사셨어요?
“태어나기는 경기도 가평 신천리인가 하는 곳에서 태어났다고 들었어요. 어린 시절을 보낸 건 할아버지 할머니랑 용산에서. 용산을 고향으로 알고 있었죠.
- 그럼,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서 크신 거네요. 왜 부모님이랑 같이 살지 않았나요?
“음, 어떻게 말씀 드려야 하나,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가 엄마 아빠 밑에서 자라고 키워지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명절날에나 찾아뵙는 게 일반적이죠. 그런데 저 같은 경우는 아버지가 사랑하시는 분을 만나서 결혼해서 제가 태어난 게 아니라 군대 가 계실 때 휴가를 나오셨다가 우리 엄마를 만나셨는데 불장난으로 제가 생겼어요. 원래 대학교 다니다 군대를 갔는데 학교에 좋아하시는 분이 계셨다고 해요. 제가 생겨서 그분과 결혼을 못했고 나름대로 책임을 지기 위해서 어머니랑 결혼을 하셨고. 그랬는데 조부모님은 결혼을 반대하셨고 고모님들도 많이 반대하셨다고 그래요.”
원치 않는 임신과 잦은 불화, 별거, 조부모에게로 떠넘겨진 아이. 그녀는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고모들과 함께 살았다. 밑으로 일곱 살과 아홉 살 차이가 나는 여동생들이 있다고 하니 몇 해가 지나자 유정 씨의 부모님은 그런대로 가정을 꾸렸던 모양이다.
“별거를 오래 하다가 다시 합치셨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근데 확실하지는 않아요. 보통 일반적인 가정에서는 이제 자식들이 장성하면 부모님들 연애시절 이야기를 해주고 그런데 저희는 그런 게 없었고 제가 밖에 너무 오래 나와 있었으니까 잘 모르죠.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어머니 아버지랑 같이 살게 된 건 아무래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연세도 있으시고 고모님들도 결혼을 하시고 이러다보니까 제가 할머니 할아버지 밑에서 산다는 건 좀 그렇잖아요. 애는 조금씩 크는데 부모님과는 정이 안 붙고 그러니까 그러셨던 것도 있을 테고. 할머니 할아버지는 결혼은 반대하셨지만 저는 굉장히 예뻐하셨어요. 아무래도 손자다보니까 그런 것도 있었을 테고 불쌍하고 딱하다고 생각하셨던 것도 있었을 거예요. 뭐, 조부모님 입장이나 부모님 입장도 이해는 해요. 어머니는 고학력자가 아니세요. 집안도 가난하시고, 시골 촌구석에, 엄마를 이렇게 이야기하기 뭐하지만 막말로 촌년이었던 거죠. 근데 할아버지 할머니는 두 분 모두 일본에서 동경대까지 나오셨으니까, 고모님들도 다 대학졸업하고, 으리으리한 부자는 아니어도 지식인층에 속하신 분들인데 그런 집에서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게 그랬으니까. 외가, 엄마 집안에서도 어디서 난데없이 나이도 어린 애가, 그때 미성년자였다고 해요. 그런데 어린 애가 난데없이 애를 만들어 왔으니까 시골에서도 난리죠. 어머니도 저 때문에 굉장히 미움을 받고 구박도 많이 받으신 걸로 알고 있어요. 본의 아니게 저는 뱃속에서 욕이란 욕은 잔뜩 얻어먹고, 원래 사랑 속에서 태어나야 하는데…….”
하늘 쳐다보고 빨리 나를 데려갔으면
유정 씨는 “원래 여자로 태어날 운명인데 여자로 태어났으면 구박을 심하게 받았을 테니까 남자로 태어난 거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보았다고 한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다가 부모님 집으로 왔던 초등학교 3학년 무렵부터 성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부쩍 늘어갔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엄마 태몽이 특이했더라고요. 옛날 집에 풍경이 있잖아요. 종이 달려있는데 하나는 소리가 나고 하나는 소리가 안 나는 종인데 어느 걸 고를까 그러다가 두 개를 다 따셨대요.
할아버지 할머니랑 살 때는 고종사촌이 남동생도 있고 여동생도 있었는데 남동생이랑 놀 때는 남자처럼 놀았고 여동생들하고는 소꿉장난하고 그랬죠. 근데 이제 엄마 아빠랑 살면서부터 조금 그런 걸 느끼기 시작했어요. 초등학교 3학년 그때는 책 읽는 거를 상당히 좋아했어요. 점심시간 때 남학생들은 점심 먹고 축구하고 노는데 저는 교실에서 도시락을 먹어가면서 옆에 책을 놓고 보던가 아니면 스킬자수, 스킬자수가 뭔지 아시죠? 십자수 말고 수를 놓고 나중에 그물망에 5센티 정도 되는 털들이 조금씩 올라오는 거, 그걸 너무 좋아했어요.”
- 같은 반의 친구들도 좀 이상한 눈으로 봤겠네요.
“네. 별로 친하지 않았어요. 남자친구들은 남자새끼가, 여자애들은 남자가 남자답지 못하다고 그러고. 그래서 학교에서도 항상 혼자였고 집에 돌아와서 논다고 해도 여동생들하고 같이 놀았으니까, 여동생 머리 빗겨준다던가. 그때는 바비 인형 같은 거는 부잣집이나 있었고 종이인형 아세요? 동생이 문방구 가면 종이인형 사달라고, 그거 오려주고, 실뜨기 놀이 같은 거 하고. 그때 동생하고 놀면서 행복했죠.
부모님은 할아버지 할머니 아래서 버르장머리 없이 컸다고 그랬는지 굉장히 엄하게 대하셨어요.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했어야 했는데 할아버지 할머니가 당근만 주셨다면 엄마아빠는 채찍만 주셨죠. 그러다보니까 제가 균형을 잃은 거죠. 솔직하게 엄마아빠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어요. 5학년 때부터 말 안 듣는 사춘기 고등학생들, 티브이나 영화에서처럼 고등학생 남학생들은 다 컸잖아요. 말도 되게 안 듣고. 술 담배 하고. 그런 고등학생 남자들처럼 맞았어요. 저는 어린애에 불과했고 크게 잘못한 것도 없었는데. 초등학생이 술을 마시겠어요? 담배를 피겠어요? 아주 사소한 잘못인데도 불구하고 과하게 매를 대셨고 주먹으로……. 가끔 매를 맞다 기절한 적도 있고 좀 창피한 이야기지만 목도 조르고 성에 안 차시면 부엌칼로 위협도 하시고 그랬으니까. 너 하나 죽이고 잠깐만 들어갔다가 나오면 돼, 어린 마음에 상처가 컸죠. 남도 아니고 부모니까 너 하나 죽여도 죗값이 크지 않다, 당당하게 그런 말을 하시고 그러니까. 옆에서 엄마도 말리시기는커녕 거드셨으니까. 엄마도 허리띠 같은 걸로 채찍질하시고, 거의 동물 수준이죠. 부모님에 대한 거는 솔직히 저도 마음이 많이 아파요.”
지금도 티브이에서 화목한 가정이 나오는 장면이 나오면 채널을 돌리게 된다고 한다. “엄마아빠라고 하면 뭉클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생겨야 하는데, 그게 정상인데 왜 난 두려움과 공포, 이런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유정 씨. 그녀는 일곱 살, 아홉 살 차이의 동생들과 함께 그 시절을 어떻게 견뎌왔던 것일까?
“동생들은 다 제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고 저를 정신병자라고 생각해요. 그 애들한테는 정말 저랑 다르게, 동생들은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고 그러더라고요. 정말 제가 정신병자인 건지. 저는 그러지 않아도 성정체성 때문에 많이 불안해 있었는데 남자는 필요 없다, 아들은 필요 없고 딸만 있으면 된다, 그런 말씀을 듣다보니까 그러지 않아도 제가 남자로 태어났다는 게 너무나 싫었는데 부모님까지 그러시니까 남자는 쓸데없는 존재구나, 왜 내가 남자로 태어났지, 빨리 죽었으면……. 그 당시 티브이 드라마에 시한부 인생 드라마가 많았잖아요? 일요일 아침에 하는 병원 프로를 보면 어린 애인데 시한부 사는 아이,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어린 아이일 때부터 죽음을 생각했던 거예요. 차라리 빨리 죽고, 어차피 태어난 성도 지금 잘못 되어 태어난 데다 그것도 억울해죽겠는데, 부모님들한테 사랑도 못 받고 억울한 누명은 다 뒤집어쓰고. 별로 삶에 대해 희망을 못 느꼈죠. 그 당시에는 가끔 시간나면 운동장 벤치에 누워서 하늘 쳐다보고 그게 유일한 낙이었어요. 하늘 쳐다보고 빨리 나를 데려갔으면 좋겠다.”
- 할머니 할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안 해봤나요?
“그런 생각도 했지만 힘들었고, 그런 이야기가 엄마아빠 귀에 들어가면 혼났으니까. 아빠 엄마가 저를 싫어했던 것 중에 하나도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정이 많이 들었으니까, 부모님이랑 같이 살았지만 토요일만 되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용산에 살다가 인천으로 가셨는데, 저는 토요일에 학교 파하면 곧바로 인천에 갔다가 거기서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 아침 학교로 바로 가고 그랬죠. 그나마 이틀이라도 할머니 할아버지랑 보내는 게 즐거웠으니까. 그런 생활을 하면서 그냥 단순하게 왔다갔다만 했어야 하는데 엄마아빠에게 섭섭했던 걸 고자질하다보니까 저 때문에 한소리 듣게 되고, 가뜩이나 미워 죽겠는데 그러니까 더 미웠겠죠. 입장 바꿔놓고 보면 부모님도 기분이 나빴을 거예요.
그 무렵부터 성정체성 문제가 심각해졌죠. 바지 입는 것도, 남자는 바지를 입으면 성기가 도드라지게 튀어나오잖아요. 그런 걸 감추기 위해 가랑이 사이로 밀어 넣고 그랬거든요. 바지를 입어도 성기가 밖으로 표시나지 않게, 그게 싫었어요. 아파도 그랬죠. 주위에 눈들이 있고 그러니까 소변 볼 때 어쩔 수 없이 서서 봤지만 아무도 없을 때는 변기에 앉아서 볼일보고.
그런데 집에서 쫓겨나게 된 거는 이런 문제 때문이 아니라 가정폭력 때문이었어요. 제가 여태까지 살면서 도둑질한 적 없거든요. 근데 어렸을 때, 그때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는데 아버지 호주머니에서 천 원을 손댄 적이 한 번 있어요. 그것 때문에 혼났고 그 뒤로는 돈 없어지면 무조건 저더라고요. 그때는 호기심에서 어린애였으니까. 그리고 딱 한 번, 중학교 들어서 엄마 지갑에 손댄 적이 있죠. 그건 중학생이 되니까, 제 성격이 남학생들하고 어울리지 못하고 왕따를 당했거든요. 또 왕따는 돈 뜯김 대상이잖아요. 싸움 좀 하는 애들한테 괜히 맞고 안 맞으려면 상납해야 하고, 그래서 본의 아니게 지갑에 손을 대게 된 거죠. 그 뒤로는 제가 신문배달해서 받은 돈으로 상납을 했어요. 근데 그것도 다시 채워 넣어서 부모님께 드려야 했으니까 신문배달 하면서 찌라시(광고전단) 돌리고 해서 상납한 걸 채워 넣었죠. 아마 그날도 뭔가 집에서 없어진 게 있는데 그것 때문이 아닐까? 이유를 말해주지도 않고 매부터 들었으니까 지금도 분명한 이유는 모르겠어요. 그리고 너 같은 거 필요 없다며 여행용 가방에 제 짐을 다 싸고는 나가래요. 다음날 아침 우리가 자고 일어날 때도 있으면 가만 안 놔둔다, 배 이상 맞을 줄 알아라. 나가라고 짐까지 싸주시니까 안 나갈 수 없는 상황이 된 거죠.”
그렇게 열네 살에 집에서 쫓겨난 그녀는 무려 이십 년을 밖에서 살다 지난 8년 전 다시 집을 찾았다. 아마도 꼭 물어봤을 질문, 그날 왜 그랬냐고? 하지만 어머니는 기억조차 못했다고 한다.
“공부를 잘 하던 못하던 누구나 사춘기 때 한 번씩 가출을 하잖아요. 옆에 누가 가출하고 하루 이틀만 지나면 부모님이 학교로 쫓아오세요. 그래서 담임선생님 만나 상담하고, 데리고 가고. 저도 그럴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학교 교실에서 몰래 숨어서 잤어요. 의자 놓고. 근데 안 찾아오시더라고요. 저는 진짜 섭섭했거든요. 두 달을 덜덜 떨면서 교실에서 잤고, 친구들한테 밥 얻어먹고, 너무 배고파서 밖에서 요리 먹고 내놓은 그릇에 붙은 찌꺼기 긁어서 먹은 적도 있고, 쓰레기통도 뒤져서 먹다 버린 빵 같은 거 먹어본 적도 있고, 그러면서 두 달을 버텼는데 안 오시더라고요.
학교에서 친구들이 너희 아버지 계부, 너희 어머니 계모라는 놀림도 많이 당했어요. 학교 선생님들조차도 친부모 맞느냐? 제가 맨날 등록금 때문에 서무실 불려 다녔는데 여동생들은 피아노 학원, 주산 학원 다녔으니까 친구들이 그걸 보고 놀리는 건 당연한 거예요. 어린 애들이니까. 신문배달도 자꾸 등록금이 밀리고 그래서 제 스스로 벌려고 신문배달을 시작했던 거예요. 그러면 그 돈으로 그걸 내주셔야 하는데 애들 학원비로 쓰셨어요. 한 달에 3만5천 원 받았어요. 근데 3개월마다 한번 내는 등록금 5만7천 원, 아직까지 기억해요. 그럼 내고도 남잖아요. 제가 그 돈을 월급을 타서 다 쓰는 것도 아니고 한 푼도 안 쓰고 부모님 갖다 드렸다고요. 그런데 등록금 안 내주시면 어떻게 하냐고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 근처를 한 번 서성인 적이 있어요, 야밤에. 도대체 저 사람들은 내 친부모님들 맞을까? 왜 학교도 한 번 안 찾아올까? 그래서 집 근처를 서성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순찰 도는 경찰관한테 잡혀서, 지금은 사회생활을 오래 했으니까 성격이 변했지만 그 당시에는 진짜 내성적이고 소극적이고 그래서 말도 못하고 우물쭈물하니까 파출소까지 갔죠. 가서 집나왔다고 하면 또 집에 가서 매를 맞을 거 같고, 그게 무서웠어요. 그냥 친구 만나기로 했다, 이런저런 거짓말을 둘러댔죠. 그랬더니 경찰관이, 요즘 근처에 자전거 도둑이 많은데 혹시 자전거 훔치려고 했던 거 아니냐는 거예요. 그러면서 미끼를 던지더라고요. 나이도 어리고 그러니까 했다고 그러면 풀어줄 테니까 그냥 했다고 해라. 진술서 비슷하게 쓰고 나와서 경찰관이 학교도 찾아올 것 같고 집에도 갈 것 같고 그래서 저도 먹고 살길을 찾아야 되겠다, 어쩔 수 없이 일거리를 구하러 다니게 되었던 거죠.
그 당시에는 마땅한 게 신문사 보급소 밖에 없었어요. 그때는 보급소에 기숙사가 있었거든요. 거기에 가서 멍청하게 이야기를 다 한 거예요, 집안 이야기를. 그러니까 생각해주는 척하면서 이제 여기서 신문배달 하면서 돈 벌어 검정고시 봐서 대학 간 사람도 있다, 그러니까 열심히 일만 해라. 잠도 재워주고 식사도 제공해주니까 일을 하게 된 거죠. 한 달 정도 됐을 때 임금이 나아와 하는데 안 나오는 거예요. 왜 안주냐고 했더니 어린애가 돈 있으면 먹고 싶은 거 사먹고 오락실에서 오락하고 다 쓸 거 아니냐? 모아서 나중에 주겠다. 기분은 나빴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옳다는 생각도 들어서 그러자고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기숙사 안에서 돈이 없어지는 사고가 생겼어요. 근데 가져갈 사람이 저밖에 없다고 몰아붙이더라고요. 제가 어차피 부모님과의 문제도 다 이야기했기 때문에 쟤는 몰아붙여도 보호자가 없는 고아나 마찬가지니까, 막 몰아붙이는 거예요. 점퍼 하나를 들고 이 안에다 월급 받은 거를 다 넣어두었는데 그게 다 없어졌다, 지문 조회를 해야 하니까 어쩌구 하며 빨간 인주로 내 열 손가락을 다 찍어서 경찰서 갔다 온다며 나갔다 오더니 제 지문이 거기 찍혀있다고 그래요. 그 뒤로 공식적으로 월급도 안 주고 착취가 시작된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 몇 달 안 있고 그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을 거 같은 먼 데로 일자리를 구하다가 제물포까지 가게 됐죠.”
신문배달, 중국집, 다시 공장으로
그녀가 제물포에서 구한 두 번째 일자리는 중국집이었다. 신문배달, 중국집, 그리고 공단. 열서너 살 아이가 사회에 나와서 그 밖에 할 일이 무엇이 있었을까. 요즘이라면 편의점이나 PC방, 아니면 피자집이나 치킨집으로 흘러들었을까. 중국집과 피자집, 어디가 더 나을까 하는 뜬금없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녀는 중국집에서도 오래 버티지 못했다.
“제물포를 돌아다니다가 중국집에서 배달원 구한다는 거 보고. 근데 거기 위치가 아주 안 좋은 데였어요. 제일제당 옆에 옐로우 하우스, 사창가였죠. 그것부터가 잘못 들어간 거 같아요. 또 거기 들어갈 때 사장한테 다 이야기했죠. 너무 어리다보니까 감춰야 될 이야기를 감추지 않고 다 이야기한 거죠. 그쪽에서는 나름대로 불쌍하고 딱하다고, 여기서 일해라, 기술 배우는 게 더 낫다, 배달 열심히 하면 주방에서 기술 가르쳐준다고. 월급이라기보다는 용돈으로 1~2만 원 주더라고요. 문제는 아무래도 사창가 근처다보니까, 성추행, 성폭행 그런 거를 당했어요.
중국집이 매주 쉬고 그러지는 않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쉬는 날이 있었는데 다른 직원들은 애인을 만나러 간다든가, 영화를 보러 간다든가, 부모님 만나러 가는데 저는 어디 갈 데가 없잖아요. 중국집에 있었는데 사장님이 쉬는 날이고 그러다보니까 다방에서 아가씨를 부른 거예요. 아가씨를 불러서 잠자리를 가지려고 어느 정도 옷도 벗은 상태에서 저를 부르시는 거예요. 방에 들어갔더니 상황이 그러니까 저도 민망스럽죠. 근데 저한테 난데없이 바지를 벗으라고. 좀 어이가 없었죠. 우물쭈물 거리니까 막 때리더라고요. 맞다보니까 어쩔 수 없이 바지를 벗었어요. 자위행위를 하라 그러더라고요. 안 하고 있으니까 하는 방법 모르느냐며 내가 가르쳐줄까? 내가 대신해줄까? 그런 식으로……. 휴~ 그런 일이 계속되다보니까 버틸 수가 없어서 공장으로 도망치게 된 거죠. 공장이 더 안전하다 싶어서. 시간이 날 때마다 구로공단에 가서 지리파악도 하고 직업소개소도 알아보고. 구로 직업소개소 통해서 공장을 들어가게 됐죠.
- 그럼 공장에서도 남자로 들어가서 생활한 것인가요?
“그렇죠. 그 공장은 가방 만드는 데였는데 200백 명 가까이 되는 큰 곳이었어요. 화곡동에 있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바로 맞은편에 교회가 있었는데 수정교회, 지금도 이름이 생각나요. 거기 지하에 가방공장이 있었는데 거기서 미싱 기술을 배웠죠. 생활은 기숙사에서 했는데 남자 기숙사니까 참 불편하더라고요. 군대하고 똑 같이 국방색에 다 일렬로, 냄새도 심하게 나고 그랬었는데 제가 첫 월급 타면서 인형이라든가 분홍색 이불, 파자마, 잠옷 이런 거를 사니까 뭐 저런 녀석이 다 있어, 그렇게 바라봤죠. 그러다가 처음에는 남자들 틈에서 잤었어요. 엄청 불편했는데 제가 좀 특이하게 노니까 벽 쪽으로, 한쪽 벽으로 밀어주더라고요. 이상하니까 너는 저쪽에서 자라, 그 당시 공장에서 남자 기숙사에 계집애 하나 있다는 식으로 소문이 쭉 나고 그랬죠.
그때부터 조금씩, 조금씩 그랬지만 아무래도 기숙사다보니까 조심해야 될 것도 많고 그래서 완벽하게 여자로 사는 거는 힘들었죠. 나름대로 요령껏 하고 그랬죠. 자취방 하나 갖는 게 꿈이었어요. 저만의 공간이 생기니까. 자취방을 갖고 나서부터 본격적으로 이제 여성이 되려고 노력했죠.
자취방을 정확하게 갖게 된 것은 이제 부천에 오고 나서부터이고 공장에 다니면서는 마지막에 기숙사였지만 혼자 썼죠. 가족적인 분위기의 공장을 가고 싶어서 옮겼는데 거기 기숙사가 생활이 불편하거든요. 일이 바쁠 때 불편한 점이 뭐냐 하면, 쉬는 날, 일요일 같은 날 사장님이 나와서 일하면 기숙사에서는 안 나갈 수가 없는 상황이거든요. 그게 불편하니까 기숙사에 사람들이 점점 안 들어오고,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개인 독립방, 제 자취방이 되어버린 거죠.”
마지막까지 다니던 공장을 따라 부천으로 온 뒤 곧 IMF가 터졌다. 공장이 문을 닫고 살기가 막막해졌다. 나이는 서른을 넘겼고 어린 시절 집을 나와 주민등록증도 없는 그이였기에, 게다가 자꾸 병무청에서 신체검사통지서가 나온다는 이유로 집에서는 실종신고를 해서 주민등록 자체가 말소된 상태였다. 어디 마땅한 일자리를 구해볼 엄두도 낼 수 없는 상황에서 결국 다시 찾은 일거리가 신문배달 일이었다.
“벌써 신문배달을 한 지 10년이 뭐예요, 15년이 넘어가네요. 근데 다른 일을 하기가 쉽지 않아요. 예전에는 취직하는 게 그렇게 까다롭지 않았어요. 주민등록번호랑 주소만 외우고 있으면 등본도 땔 수 있고 직업소개소에서 별 문제가 없었죠. 공장에 들어가서 어느 정도 기술을 익히고 크게 말썽만 부리지 않으면 다른 공장에 가서도 다 받아주거든요. 어느 공장에 있던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 사장님이 잠깐만 하고, 사무실 들어가서 이전 공장에 전화해서 우리 집에 이런 애가 와 있는데 얘 어떠냐? 기술은 그럭저럭, 성격은 괜찮고, 사고 안 치고 온순하고 착하다, 그러면 되는 거거든요. 예를 들어 걔는 술 먹고 자주 빠지고 그러면 통화하고 나서 우리는 인원이 다 찼다, 미안하다 그러고. 근데 회사 다니면서 제가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었으니까. 좀 튀기는 했죠. 남자인데도 남자답지 않고 여성스러운 면도 있던 데다가 취미생활도 독특했으니까. 보통 공장에서 생활하는 분들이 술 담배 좋아하고 나이트 클럽 가는 거 좋아하고. 근데 저는 거기 가는 거 싫어했거든요. 음악 듣는 것도 취향이 너무 틀렸으니까. 공장 사람들은 대부분 뽕짝, 댄스음악, 그런데 저는 클래식이나 뉴에이지 이런 음악 들으니까.
처음 이런 음악 들으니까 잘난 체한다고 그렇게 알더라고요. 그런데 시간이 해결해주더라고요. 아, 쟤는 저걸 진짜 좋아하는구나. 책보는 것도 소설책이나 야설 이런 거 보는 게 아니라 그 당시 제가 즐겨봤던 책이 철학책, 심리학, 정신분석학, 그리고 음악도서 같은 것도 보고.”
트랜스젠더를 만나다
- 그런 책을 읽으면서 트랜스젠더라는 말을 알게 된 건가요?
“심리학, 정신분석학 책을 많이 봤지만 그래도 트랜스젠더라는 말은 몰랐어요. 그냥 나는 왜 이럴까? 제 성격이 개방적인 성격 같았으면 고민도 안 했을 거예요. 종교라는 거에 눌리고 성격이 보수적이고 고지식한 사람인데 죄를 짓는 거 아닌가, 나는 변태 아닌가, 엄청 시달렸어요. 할아버지 할머니, 저희가 기독교 집안이거든요. 나는 나중에 천주교로 바꿨지만. 어쨌든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데, 나는 왜 이러지? 남자로 살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힘들더라고요.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왜 이런가, 그것을 알고 싶었어요. 그래서 본의 아니게 그런 책을 봤죠. 봐도 답은 안 나오더라고요. 그랬었는데 잡인가 스포츠신문인가에서 <버디>라는 잡지를 소개한 걸 우연치 않게 보게 됐어요. 레즈비언, 성소수자, 이게 뭐지? 여기 혹시 나랑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 구해서 읽게 되었고 그 후로 어느 정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죠. 그리고 그 무렵 하리수 씨가 티브이에 나왔고 ‘러시’라는 인터넷 사이트, 성소수자 단체, 카페 같은 걸 알게 됐고, 거기를 찾아가서 상담도 해보고 정보를 공유하기 시작했던 것이죠.
‘러시’는 상업적인 사이트에요, 트랜스젠더들이 정보 공유하고 그런 곳이지만. 러시를 통해서 한 번 가봤는데 뭐 그냥 평범한 술집이에요. 단지 성소수자가 운영하는 술집이라는 것, 거기서 ‘업’이라고 여장을 할 수 있는 그런 게 있다는 것이 좀 다르고. 그런데 나하고는 안 맞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한 번 갔다가 안 갔죠. 술 담배를 안 하니까. 그런데 러시 사이트에서 ○○씨라는 분을 알게 됐어요. ○○씨가 하리수 씨하고도 친하게 지내고 수술도 받았고 성별전환, 결혼까지 하신 분이에요. 그러다보니까 저는 ○○씨한테서 올바른 정보를 받을 수 있었죠.”
올바른 정보란 우선 정신과 진단을 받는 것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거기서 성주체성 장애라는 진단을 받은 뒤 산부인과에 가서 혈액검사와 호르몬 검사를 해야 한다. 호르몬 검사를 통해 선천성인지 후천성인지, 호르몬 수치에 따라 호르몬 투여량과 투여시기 등을 정한다. 그런데 자신의 성정체성이 ‘성주체성 장애’라는 이름으로 확진되었을 때 유정 씨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렇게 호르몬 투여를 시작한 게 10년 가까이 됐죠. 성주체성 장애, 그게 크게 기분 나쁘지는 않았어요. 그냥 뭐, 의학적 용어니까. 그리고 호르몬 검사를 했을 때 여성 호르몬이 더 많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기뻤죠. 내가 이상한 게 아니구나.
사실 성별정정법이란 게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단지 내가 여자인 게 맞으니까 집에도 이야기를 하고 솔직히 성전환수술에 도움도 받아보자고 해서 집에 들어가게 됐죠. 그게 8년 전이에요. 모든 정보를 다 알고 나서 수술도 가능하고, 수술하고 결혼하는 사람도 있다더라. 그런 걸 몰랐을 때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아세요? 그런 걸 전혀 몰랐을 때 나는 이런 몸으로 더 이상 살 수도 없고 너무 사람들한테 당하고 그러니까, 그런데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도 없고 부모님이 있어도 고아나 마찬가지고. 그런데다가 성정체성 때문에 많이 흔들렸고, 그래서 죽는 것밖에 해결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살을 시도해본 적이 있었거든요. 어릴 적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었고, 너무 힘들었고, 할아버지한테는 너무 큰 죄를 짓는 거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런 지경까지 갔었어요. 그런데 다 알게 되면서 목표가 바뀐 거죠. 수술을 다 하고 나서 태어날 때는 남자로 태어났지만 죽을 때만은 여자로 죽고 싶다는.
집을 찾는 건 어렵지는 않았어요. 찾으려고 하니까, 한 석 달 걸렸나 봐요. 그런데 찾으니까 많이 망설여지더라고요. 엄마아빠 문제, 두려움은 그때도 남아있었고. 그러다 용기내서 들어갔죠. 들어가서 할머니하고 고모, 고모부님도 만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다음에 커밍아웃을 했어요. 병원 진단서 뗀 것도 보여드리고. 할머니랑 고모들은 의외로 반대하시지 않고, 호응을 해주신 것도 아니었지만 본인 인생, 본인이 그렇게 살겠다고 하는데, 그렇게 원하는데 어쩔 수 없지, 그런데도 좀 아쉬워하는 정도. 왜냐하면 제가 아들로 살지 못하면 대가 끊기니까. 그래도 웬만하면 좋은 쪽으로, 신사적으로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근데 엄마나 외가에서는 거의 감정적으로 격하게, 심하게 나오셨던 거죠.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건 그때 집에 들어가서 처음 들었어요. 제가 어렸을 때 보던 그 모습으로 쭉 살아오셨더라고요. 병이 걸렸다는 걸 아셨으면서도 술도 안 끊으셨다고. 참 그래요. 저는, 어쨌든 아버지 자식이잖아요. 나와서 안 비뚤어지고 열심히 살았는데, 여자로 살던 남자로 살던 그 문제는 나중 문제죠. 본인도 돌아가시기 전에는 저를 찾으셨다고 그러더라고요. 미안하다고 그러셨다고. 젊은 시절 때 저한테 폭력을 행사하셨던 거 마음에 걸리셨나 봐요. 아들과 가진 시간이 하나도 없으니까, 산에 같이 올라가본 적도 없고, 단 한 번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고, 운동을 같이 해본 적도 없고.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하는 유대관계가 전혀 없었거든요. 제 눈에는 항상 술에 절어서 툭하면 매를 들고, 그 기억밖에 없어요.”
커밍아웃의 대가는 혹독했다. 유정 씨의 어머니는 “넌 이제부터 내 자식이 아니다.”라며 호적도 못 살려주니 앞으로 연락도 하지 말고 고아라고 생각하며 살라고 등을 떠밀었다고 한다. 20년 가까이를 주민등록증도 없이 주민등록도 말소된 채 유령처럼 살아왔지만, 그래서 운전면허 하나 딸 수 없었지만 이제 유정 씨는 그게 필요했다. 성별정정을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내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증명.
그녀는 이를 위해 지난 10월 한 방송사 프로그램에 출연을 결심했다. 과거에도 몇 차례 언론에 인터뷰도 하고 방송에 나가기도 했지만 각본대로 연출해야 했던 상황에 실망했던 일, 그리고 하리수처럼 유명인사도 아니면서 방송을 자주 탄다는 주변의 질시에 힘들었던 그녀였지만 다시 한 번 도움을 받기로 했고 방송을 찍으며 피디가 어머니를 찾아가 설득한 끝에 결국 그 증명을 살릴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가난한 여자는 남자로 살아라?
“출생신고를 한 사람이 부모님이기 때문에,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의 동의가 꼭 필요한 거예요. 주민등록을 살리려면, 근데 그걸 안 해주시겠다니까. 게다가 제가 열 손가락지문이 있다든가 주민등록증을 한 번이라도 받아봤다면 모르겠는데 그렇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어머니의 인후보증이 꼭 필요하다. 그때 SBS랑 연락이 되어서 방송에 출연하게 된 거죠. 그때 피디님이 참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피디님이랑 어머니를 찾아갔는데 저는 도저히 못 들어가겠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피디님이 몇 시간이나 어머니를 설득해서 사인을 받아오셨죠.”
- 방송이 나가고 나서 혹시 가족들에게 다시 연락이 오거나 그렇지는 않았나요?
“그런 거 없었어요. 인후보증 사인을 해주고, 그 방송을 보셨으면 참 난감했을 거예요. 사인만 하고 끝난 게 아니라 인감증명을 보내주셔야 하는데 그걸 안 보내주셔서 (법원에서) 보정 명령이 떨어졌어요. 어머니 인감증명이 필요한데 없으니까, 결국 고모랑 고모부 인후보증을 다시 받아서 냈죠. 그 방송이 나가고 나서 시청자 게시판에 엄마에 대한 안 좋은 글들이 많이 올라왔어요. 친엄마 맞냐? 너무한다. 어쩌면 동생이나 엄마가 그걸 보셨을 수도 있어요. 그것 때문에 기분이 언짢으셔서 인감증명을 안 보내주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아직까지는 법원에서 심사기간 중이에요. 요 며칠 전에는 (경찰청) 과학수사 팀에서 오라고 해서 갔다 왔어요. 가보니까 제 지문을 찍어서 범죄기록이랑 조회하더라고요. 솔직히 저 같은 경우는 나쁜 길로 빠지려고 하면 진짜 나쁜 길로 빠질 수 있는 케이스잖아요. 지문을 (동사무소에서) 찍은 적이 없으니까 영화에서처럼 청부살인도 할 수 있는. 그래서 이해는 해요. 또 그런 일은 손톱만큼이라도 잘못한 게 없으니까.”
- 그런데 살아나는 주민등록의 번호 앞자리가 1번이잖아요.
“그렇죠. 남자 신분증 나와서 덕 볼 거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신문배달하면서 늘 불안했던 게 오토바이 면허가 없는 거였는데 면허를 딸 수 있다는 거. 그런데 제가 이렇게 여자 모습인데 어떻게 남자 신분증 들고 면허를 따러 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거 말고는 마땅히 주민등록증이 생긴다고 해도 할 게 없죠. 직장에 취직해보려고 몇 군데 알아보기는 했지만 여자로 일하고 싶으면 수술하고 성별정정하고 오라고 하더라고요.”
2006년 대법원이 만든 ‘성전환자의 성별정정허가신청사건 등 사무 처리 지침’에 따르면 성별정정을 위해 필요한 서류는 호적등본과 주민등록등본, 정신과 전문의 두 명 이상의 진단서, 성전환시술 의사의 소견서, 성장환경에 대해 진술해줄 두 명 이상의 인후인 보증서, 부모의 동의서 등이다. 필요한 서류만 이렇다는 것이고 그 절차와 조건은 무척 까다롭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별정정을 하기 위해서 법원은 당사자에게 사실상 성전환수술을 요구하고 있다. 유정 씨 또한 일단 절차상으로는 남자 주민등록을 살리고 성전환수술을 하고 성별정정을 해야만 한다. 문제는 그것이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란 사실이다.
“저는 가족들에게 커밍아웃까지 한 상황이고 ‘병원24시’라는 방송 프로그램에 나가서 음성전환수술 받는 과정도 공개했어요. 그리고 성전환수술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생각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법원에서 성전환수술을 안 하면 성별정정이 안 되고 남자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일단 살라고 하는 거잖아요. 여태까지 부모님 때문에 인생을 망쳤는데 나머지 인생은 이런 식으로 망치겠다, 그러면 좀 어이가 없죠. 이제는 좀 제대로 된 삶을 살아야죠.
솔직하게 호르몬 치료를 오래 하다보니까 (신문배달) 일이 지치고 힘들다더라고요. 이미 여성으로 생활한 지도 오래됐고, 방송 나가신 걸 모르시는 분들은 다 여자로 알고 있고. 그런데 남자 신분증이 나오면 취직은 말할 것도 없고 병원 가는 것도 불편하고. 근데 경제적으로 여유만 된다면 솔직히 수술 다 받고 나서 떳떳하게 여성으로 성별 정정해주세요, 법원에 신청하고 싶어요. 그런데 들어보셨으니까 아시겠지만 사람들에게 사기 당하고 이렇게 살다보니까 돈을 모을 수가 없었어요. 한 번은 로또가 처음 나와서 2천 원 할 때 꽤 큰 금액이 당첨된 적이 있는데 반을 주겠다고 부탁한 사람이 그걸 챙겨서 달아났어요. 제가 바보 같이 사람을 너무 믿어요. 예전에 공장에서도 천만 원짜리 계를 몇 개 부어서 목돈을 만들었는데 아시는 분이 공장 차린다고 도와달라고 그래서 드렸다가 떼이기도 하고. 그래도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도 없잖아요.”
- 성전환수술 비용이 1500백만 원 정도 한다고 하던데요.
“수술 금액만 그런 거죠. 그렇지만 준비하는 과정, 건강진단서 떼는 것부터 해서 다 돈이 들어가죠. 그때 ‘병원24시’ 나와서 수술비만 지원을 받았고 수술 받고 나서 물리치료라던가 항생제 구입하는 것은 다 제 사비로 해야 했어요. 그런데 더 큰 수술인 성전환수술은 더군다나 더 많이 들어가겠죠. 치료가 다 끝날 때까지는 시간도 오래 걸리니까 생활비도 있어야 하고. ○○씨 같은 경우는 수술비 외에 비용이 더 들었다고 해요. 몸이 약해져서 보약도 먹고. 사람마다 다르지만 최소 3개월에서 최대 6개월까지는 일을 못하니까. 병원비에 집세, 치료받으러 다녀야 하니까 교통비, 그런 것까지 생각해야 하니까, 수술비만 어디서 구해서 수술 받을 수 있다면 솔직히 너무 편하죠.
법이 그러니까 법을 좀 따라서 그러면 저도 편하고 떳떳하고, 그러고 싶은데 지금 상황이 그렇지 못하고 제 나이도 있고, 그래서 법원에서 판사님의 선처를 바라고 있어요. 수술을 안 할 사람도 아니고 거저먹으려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또 한편으로는 좀 우리나라 경제 사정이 어렵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말로만 선진국 그러지 말고 성소수자들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행복권 차원에서 선진국화 될 때가 아닌가 싶어요. 어디 성소수자 홈페이지에서 본 건데 어느 나라에서는 정신과 진단에서 성소수자라고 확실하다고 나오고 본인이 수술을 원하면 국가에서 지원을 해주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진단이 나오고 수술을 원하는 사람이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하면 대출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나, 전세자금 대출처럼 그런 건 있어야하지 않나 하는 거죠. 그것조차도 안 해주고, 어렵고 힘들게 사는 사람은 평생 그렇게 살아라, 돈 없는 사람은 여자지만 그냥 남자로 살라는 말이랑 똑같거든요. 너에 대한 성은 우리가 무시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인정할 수 없다, 너는 도둑질을 하던 강도짓을 하던, 몸을 팔던 뭐하던 돈 벌어서 수술해서 와라, 그래야 우리가 변경을 시켜줄게. 이거랑 똑같은 거죠. 그래서 보통 술집에서, 제가 술집 가는 건 싫어하지만 거기서 일하는 애들한테 뭐라고 할 수 없는 거죠. 마땅하게 거기 말고는 돈을 벌 수 있는 데가 없고 수입도 괜찮으니까, 거기서 벌어서 수술하는 애들도 있다고. 그런데 저는 못하겠어요. 여자들도 성격이 다양하잖아요. 저는 뭐라 그럴까 기교도 없고 술 담배도 못하고 잘 놀 줄 모르는 성격이니까.
계속 학교를 다녔으면 음대에 가서 음악을 한다든가 공대생이 됐을 수도 있어요. 여자라고 그러면 백치미, 그런 거보다도 연구복 입고 전자공학이라든가 연구소에서 연구하는 모습들이 참 보기 좋거든요. 꼭 방송에서 트랜스젠더 그러면 여성보다 다소곳하고, 섹시함 그런 걸로 나가려고 하는데. 그런데 여자들도 전자공학 하고, 연구복 입고 연구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병원24시’ 거기서도 장래희망이 아트디렉터 그렇게 나갔지만 원래 꿈은 음악이고 아니면 전자공학, 공학도였는데. 공학도는 다 남잔가요? 아니잖아요.”
여자, 홍유정
맞다. 여자라서 남자라서가 아니라 사람이니까 사람마다 다 다르다. 원하지 않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집으로부터 버림받은 어린이, 열네 살 나이에 세상을 온몸으로 겪으며 성정체성으로 인해 힘들어야 했던 트랜스젠더로서 그녀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홍유정, 그녀가 이제야 궁금해진 것이 왠지 미안했다. 그녀는 어떤 사람일까?
“커피 좋아하고 책이나 영화, 클래식 좋아하고. 이력서 취미 란에 적는 거 말고 저는 실제로 그런 게 취미거든요. 저 다락에 보면 다 DVD이고 음반하고 천지에요. 예전에 영화 보러 종로3가에 가면 낙원상가에 많이 들렸어요. 낙원상가 가서 악기 구경하고, 신나라레코드점이라고 아주 큰 레코드 가게에 가서 음반 구입하고. 성당도 참 열심히 나갔죠. 저는 나가면서도 형제님들보다 수녀님들하고 친했어요. 그래서 금남의 집에도 많이 가고. 방송에 나가고 나서 성당에 계신 분들 다 알게 되면서 그 후로는 못 나갔죠.”
- 친한 친구를 사귀기도 힘들었을 텐데 많이 외롭지 않았나요?
“외로운 거에 너무 길들여져서요. 처음 객지 생활할 때는 진짜……. 집에서 쫓겨났을 당시의 저하고 지금 저하고 엄청나게 달라졌어요. 그때는 눈물도 많았고 기집애 같다는 소리도 진짜 많이 들었어요. 학교 다닐 때도 그랬어요. 좀 울면서 이야기하지 말라고 담임선생님이 그럴 정도로. 말하다 보면 울먹울먹하니까. 밖에 나가서 노는 것보다 음악 듣고 그런 것, 슬픈 음악을 많이 들었죠. 연주곡들, 클래식 같은 것들도 아다지오 같은 형식의 곡들. 현을 위한 아디지오, 알비노니 아시죠? 모르세요? 어머나! 리차드 클레이터만은? 피아노 연주자인데 ‘아드리안느를 위한 발라드’라고.
저는 진짜로 음악을 좋아했었어요. 꿈이 피아니스트였거든요. 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에 성당에서 성가대하며 지휘도 배우고 악보도 독학으로, 저는 악보를 볼 줄 몰랐어요. 저도 재능이 있는 줄 몰랐죠. 근데 제가 피아노 치는 거 보고 반주자 형제님이 악보 볼 줄 모르시죠? 그러는 거예요. 곡 다 외우시죠? 저는 보통 사람들 하고 반대로 악보를 보고 나서 치는 게 아니라 테이프로 음악을 들으면서 아, 이 음이 그 음이구나. 그러면서 곡을 연주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제 손 좀 보세요. 이 새끼손가락만 보면 화가 나요. 피아노 칠 때마다 화나죠. 초등학교 5학년 때, 그때 거제도 장승포에 살 때인데 아이들한테 몰매를 맞다가 손을 밟혀서 탈골이 됐어요. 그런데 꾀병을 피운다고 병원에 안 데려가시는 바람에 이렇게 불구가 되어버렸어요.”
- 혹시 사랑한 사람이나 좋아했던 사람은 없었나요?
“그런 거는 없었어요. 그럴만한 시기도 없었었고. 어렸을 때 아빠에 대한 기억 때문에도 그렇고, 밖에 나와서 남자라고 하는 거는 다 저를 때리고 착취하고, 그런 사랑의 느낌을 가질만한 사람이 없었어요. 다들 제가 가진 돈 때문에 잘 해줬던 사람은 있었어요.
사랑하고 그런 거는 저한테는 힘들다고,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물론 사랑이야기이도 하지만 예를 들어서 장화홍련 같은 경우는 장화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게 되어서 홍련도 따라죽고, 인어공주는 자기가 물거품이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남자한테 이야기하지 못하고. 아그네스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죠. 그러다보니까 거의 뭐 죽음에 대해서만. 정상인이 아니잖아요. 부족한 게 많다보니까 정상적으로 여성으로 태어났으면 모르겠지만, 내 자신도 찾지 못한 그런 실정에서 사랑은 딴 나라 이야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거죠. 마치 게임에서 리셋하듯이 제 자신의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만 하고 살았으니까. 사랑이니 뭐니 그런 거는 영화 속에서나 있는 거라고.
제가 하고 싶은 거는 어렸을 때 제가 살던 동네에서처럼 어려운 사람들 도와주고 봉사하고 살고 싶다는 거, 그런 생각을 했는데 지금 내 코가 석자다 보니까 그런 일을 못하고 있는 거죠. 마더 테레사처럼 살고 싶고. 근데 제가 지금 가진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제 자신을 아직 찾지 못하다보니까 그런 것을 할 수 없는 거죠. 사랑 문제는 차후 문제고, 또 그런 봉사도 사랑이 될 수 있는 거고.”
- 돌아가신 아버지 산소에는 가보셨나요?
“네. 그런데 아버지 산소 가서도 좀 기분이 별로 안 좋았던 것이 비석에 어머니가 제 이름을 빼버렸더라고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저를 찾았다는데, 아빠 입장에서 보면 장남이잖아요. 근데 (비석에) 이름이 없어요. 아버지 기분은 어떨까. 자꾸 엄마 욕하는 사람이 되는 거 같아서 이런 이야기는 하기 싫어요. 솔직하게 정이 안 가고 그렇지만 어쨌든 저를 낳아준 어머니시잖아요. 싫고 밉지만 그래도 남한테 이야기하는 게 좀 부끄럽고 그래요.
어쨌든 궁합이라는 게 있잖아요. 음식도 궁합이 안 맞으면 체하잖아요. 하물며 음식도 궁합이 맞아야 되는데 엄마아빠 두 분, 가정이 파탄 나고 제가 보기에는 아빠를 만나고 그런 게 가장 큰 실수인 거 같아요. 어쩌면 제대로 만나서 결혼했으면 저도 제대로 태어났을 거 같고 다들 행복하셨을 거 같은데. 모르겠어요. 저는 계모가 되었든 친모가 되었든 자식에게 진정한 사랑을 줄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친부모라고 하더라도 원치 않는 아이가 태어났을 때 모든 문제가 다 아이에게 가고 원망이 아이에게 간다고. 엽기적인 뉴스가 많잖아요. 자기가 낳은 아이인데 운다고 베게로 숨 막히게 해서 죽인다든가 베란다에서 던진다, 그게 여러 가지 감정이 쌓이고 쌓여서 일시적으로 폭발해서 그런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와서는 이해가 가기도 해요. 용서하고 뭐하고 할 게 있나요. 시간이 되돌려지는 건 아니잖아요, 제가 용서를 하든 안 하든. 엄마, 잘못했죠? 사과하세요. 이렇게 따질 생각도 없고 본인 스스로 뭘 잘못했는지 깨닫고 반성하고, 저한테 와서 미안하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걸 원하지도 않아요. 단지 진심이 담긴 말 한 마디라도…….”
“게임을 리셋하듯”이란 말이 한참을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렇게 언젠가는 제대로 된 새로운 삶을 꿈꾸며 그녀 스스로 지은 이름이 다름 아닌 ‘유정’이었다.
“8년 전에 집에 들어갔을 적에 제가 궁금했던 게 하나 있었어요. 엄마가 어렸을 적에, 6학년짜리 자식 앞에서 자기가 성질난다고 한 이야기인데, 너보다 어린 여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네 아빠가 영등포 길바닥에 갖다버렸다, 다 너 때문이다. 엄청 충격적이었죠. 출생신고도 안한 여동생을 갖다버렸다고. 그때는 그걸 어디에 가서 물어볼 수도 없었고 할머니나 고모한테도 이야기할 수 없었어요. 서른세 살이 되어서야 어머니에게 넌지시 물어봤죠. 그러니까 그런 일이 있었는데, 저 낳고 또 임신을 해서 딸을 하나 낳았더래요. 딸을 낳는데 아빠가 잠깐 어디를 데리고 간다고 가서 애를 버리고 왔다고 그러더래요. 그 애 이름이 유정이라고. 그래서 제가 유정이란 이름을 쓰고 있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걔나 나나 버림받은 인생이기 때문에 그 아이 이름을 써주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여자가 되고 싶은 남자 아이가 성전환수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학교 씨름부에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하는 ‘천하장사 마돈나’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 시나리오 자문을 맡기도 했으며 주인공 오동구 역의 배우 류덕환의 연기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트랜스젠더 소설가 김비. 그녀가 류덕환에게 들려준 “나는 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살고 싶은 거다.”라는 말은 영화에서 오동구의 대사가 되었다.
유정 씨 또한 뭔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살고 싶어서 간절히 리셋을 원했을 것이다. 그녀를 그냥 살지 못하게 만들었던 가족이라는 굴레, 한국사회, 그리고 법제도. 진정 리셋되어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사진 | 박김형준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