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업은 청소년운동의 역사를 정리하려 시도한 몇 안 되는 작업들 중 하나였지만 청소년운동의 주요 의제와 사건 그리고 흐름을 정리하고 소개하는 것도 벅찼기 때문에 깊이 있는 역사 구성과 해석이 이루어지지 못했다(이 작업은 주간인권매체 <인권오름>에 「청소년인권운동, 길을 묻다」는 글로 연재되었다.).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의 청소년인권운동 역사 연구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는 1980년대 중후반에서 1990년대 초중반까지 민주화운동 및 전교조 운동과 함께 진행된 ‘고등학생운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1990년대 중반 이후 등장해 2000년대에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청소년인권운동’이었다. 이 둘 사이에는 운동 조직과 인적 구성에서 분명한 단절이 있고 또 사회 상황의 변화에 따른 차이도 있다. 이 중 현재 청소년 활동가들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이야기는 당연히 ‘청소년인권운동’이다. [‘고등학생운동’의 경우에는 논문 「민주주의 이행기 고등학생운동의 전개과정과 성격에 관한 연구」(양돌규, 2006)를 참고할 수 있다.] 1990년대 중반, 청소년인권운동이라고 부를 만한 움직임이 태동하던 시기부터 간단히 소개하도록 하겠다.
나 역시 당시 역사 정리 작업에 참여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작업이 마무리된 후에도 연재 형태로 정리하던 한계 때문에 부족했던 부분을 보충하여 청소년운동사를 정리해내는 것이 내 소원 중 하나이다. 여기 소개해 드릴 청소년운동에 대한 이야기 역시 그런 작업의 맥락 때문에 아직 덜 익고 많이 불완전한 것이다. 일단 청소년 활동가들이 어떻게 처음 등장했고, 크게 봤을 때 어떤 고민들을 발전시켜나갔는지에 초점을 맞추어서 청소년운동의 진행과정을 대략 네 단계로 나눠보았다. 그리고 좀 더 다양한 청소년운동의 움직임들이 있었으나 이를 미처 다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미리 밝혀 둔다.
온라인에서 모이다
1990년대 중후반 우리 사회에 일어났던 가장 큰 변화를 꼽자면 아마도 PC통신과 인터넷의 보급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청소년운동의 자생적인 흐름도 PC통신과 인터넷 등 온라인 공간에서 시작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최우주 군 헌법소원 사건’이었다. 1995년 당시 춘천에 살던 고등학생이던 최우주 씨는 강제적인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이 학생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내용의 헌법소원을 제기하겠다고 PC통신 하이텔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비록 헌법소원을 제기하지는 못했으나 최우주 씨의 글은 하이텔 게시판에서 파문을 일으켰다. 학생들은 하이텔에 개설된 토론방에서 자신들이 학교에서 느끼는 인권 문제들을 성토했고, 교육 문제를 비롯해 학생인권에 대한 활발한 토론을 주고받았다. 그 결과 하이텔에는 PC통신 동호회 형식으로 ‘중고등학생복지회’라는 모임이 생기게 되었으며 얼마 안 있어서는 다른 PC통신인 나우누리에도 ‘중고등학생복지회’가 만들어졌다.
중고등학생복지회는 토론과 세미나, 언론 인터뷰, 소식지의 발행 같은 활동을 했다. 당시는 교실붕괴, 학교폭력(왕따, 일진회 등), 대안교육 등을 비롯한 이른바 청소년 담론이 적극적으로 제기되는 와중이어서 중고등학생복지회는 학생인권 문제를 이야기하는 자생적인 모임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1998년 중고등학생복지회에서는, 교육부가 세계인권선언 50주년을 맞아 학생인권선언을 만들려는 준비를 하다가 반대하는 목소리를 의식하여 중도 포기하자 이에 항의하는 의미를 담아서 학생들의 목소리를 모아 11월 3일 학생의 날에 「중고등학생인권선언서」를 발표했다. 「중고등학생인권선언서」는 한국의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학생의 인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학생들의 권리 요구를 정리하여 발표한 최초의 문서로 학생들의 요구와 목소리를 사회적으로 공론화시켰다.
온라인을 통해 청소년들이 모이기 시작한 것은 중고등학생복지회뿐만이 아니었다. 1990년대 중후반에는 ‘채널 텐(Ch.10)’, ‘네틴’, ‘아이두’, ‘사이버유스’ 등 많은 청소년 사이트들이 등장했다. 컴퓨터를 이용한 새로운 소통 공간이 열리자 많은 청소년들이 비용이나 거리의 한계를 넘어 소통하고 모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웹사이트들에서는 청소년들의 생활이나 청소년 문화 등에 대해 많은 정보들이 공유되었고 인터넷에 기반을 두고 발전하여서 PC통신에서 활동을 하던 중고등학생복지회보다 더 개방적이었으며 더 큰 규모로 성장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채널 텐은 “청소년을 위한, 청소년에 의한, 청소년의 웹진”이라는 모토를 걸고 청소년들이 직접 운영했던 웹진 사이트였고, 아이두는 10대들의 포털 사이트를 표방하며 블로그, 다이어리, 사전, 토론게시판 등 여러 기능을 제공했으며, 한국청소년개발원의 지원을 받아 만들어지고 운영된 사이버유스와 같은 곳도 있었다.
이 시기는 청소년들이 자신의 삶의 문제를 온라인을 통해 소통하고, 문제로 인식하고, 사회적인 담론으로 만들어가는 때였다. “우리 학교에서 일어났던 부당했고 억울했던 일”은 게시판에서 다른 청소년들의 공감을 받고 비슷한 사례들과 만나면서 대한민국 청소년들이 처한 보편적인 현실로 인식됐다. 사이버유스와 아이두 등에서 주로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졌는데 청소년들의 성 생활, 자퇴, 만 18세 선거권, 청소년들의 아르바이트 등 학생인권 뿐 아니라 다양한 청소년들의 삶의 문제들이 게시판에서 오갔다. 이 시기의 청소년 활동가들은 단지 게시판에 자기 학교의 이야기를 올렸다는 이유만으로 학교로부터 많은 탄압을 받았지만 온라인 활동과 동시에 정기모임 등 온라인 밖에서의 활동도 이어나갔다. 직접 서버와 기술력을 가지고 웹사이트를 운영하던 청소년 활동가들도 있었으며 김대중 정부에서 조금씩 활성화되던 청소년 참여기구에서 활동을 시작한 청소년 활동가들도 있었다.
사회운동으로 등장하다
이처럼 온라인에서 모여서 개개인의 불만을 사회적 목소리로 승화하던 청소년운동은 마침내 사회운동으로 등장하게 된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2000년 ‘노컷운동’을 꼽을 수 있다. 노컷운동은 1999년에서 2000년까지 온라인 서명운동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두발규제 반대 운동의 이름이다. 노컷운동은 평소에 두발규제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이 높았고, 또 어떤 고등학교 교사가 “여러 나라의 청소년들이 참가하는 국제행사에 한국 학생들과 함께 참석했는데 모두 똑같은 머리 모양을 한 학생들은 한국 학생들밖에 없더라”는 경험담을 온라인 게시판에 올린 것을 계기로 시작됐다. 채널 텐, 아이두, 사이버유스 이렇게 세 사이트가 모여서 꾸린 ‘웹 연대 위드(WITH)’가 이 운동을 주도했다.
웹 연대 위드는 ‘자르지마!’ 배너 달기 운동과 온라인 서명운동으로 인터넷을 이용한 운동을 이끌었다. 두발규제에 반대하는 온라인 서명운동은 2000년에 20만 명을 넘어서면서 크게 이슈화됐다. 1년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온라인 서명운동이 20만 명을 넘어선 것은 세계적으로도 성공적으로 꼽힐만한 사례였고, 한국에서는 막 등장하던 인터넷의 파급력을 보여주는 놀라운 사례로 주목받기도 했다. 두발규제에 반대하는 청소년들의 운동은 사회적으로 ‘학생인권’을 중요한 의제로 부각시켰다. 결국 2000년 노컷운동은 교육부에서 각 학교별로 토론회 등을 통해 학생들의 의견을 민주적으로 수렴하여 두발규제를 개정하라는 일종의 두발자율 조치를 내리면서 일단락되었다.
한편 좀 더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청소년운동을 사회운동으로 만들기 위한 움직임도 내부에서 일어났다. 중고등학생복지회의 청소년 활동가들은 중고등학생복지회 활동이 한계에 부딪쳐 침체기를 겪자 ‘업그레이드 학생복지회’를 만들자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2000년 상문고 학생들의 사학 투쟁 사건이 알려지고, PC통신 대신 인터넷이 주류로 떠오르는 등의 상황이 작용하여 온라인에서 뿐 아니라 좀 더 적극적인 운동을 하는 대중적인 청소년단체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그런 주장을 했던 청소년 활동가들은 2000년, ‘학생인권과 교육개혁을 위한 전국중고등학생연합’[아래 전국중고등학생연합(준)]을 만들게 된다.
전국중고등학생연합(준)은 노컷운동이 벌어지던 시기에 명동에서 캠페인과 피케팅을 하고 토론회에 참가하여 완전한 두발자유화를 주장하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고 지명도를 높였다. 노컷운동을 통해 폭발적으로 성장한 전국중고등학생연합(준)은 곧 정식 출범을 하게 되었으며 전국에 여러 지부를 갖춘 단체로 성장했다.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은 두발자유 운동 외에도 체벌반대 운동, 학생 대표의 학교운영위원회 참가 운동, 강제 자율학습과 보충수업 반대 운동, 고교등급제 및 자립형사립고 반대 운동, 인권운동사랑방과 함께한 학교교칙 분석·인권핸드북 발간 등의 활동을 했다.
노컷운동을 했던 웹 연대 위드나 전국중고등학생연합 외에도 ‘청소년인권동아리 타래’ 등 다양한 청소년 모임들이 2000년을 전후하여 자발적으로 생겨났다. 이 시기는 청소년 활동가들이 온라인에서 이야기한 삶의 문제들을 사회운동으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게 된 때였다. 노컷운동에서 청소년 웹사이트들이 연합하여 온라인 서명운동으로 청소년들의 집단적 목소리를 드러냈던 것이나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이 다양한 학생인권을 주제로 캠페인을 벌인 것이 모두 그런 예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시기는 청소년운동에 대한 이론적 기반이나 운동론, 단체의 상 등에 대한 논의가 무르익지 않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때문에 당시 청소년 활동가들은 문제를 이슈화시키고 언론을 이용하는 방식을 주로 취했다. 어떤 이들은 문제가 이슈화되고 사회적으로 알려지기만 하면 개선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기도 했다. 일부 청소년 활동가들이 운동의 방법론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이나 연구를 하기 시작했으나 청소년운동 전반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정치적 의식이 형성되다
2001년 또는 2002년에서 2004년까지의 시기 동안 청소년운동의 역사는 복잡하다. 이 시기에는 청소년운동의 의제가 폭발적으로 확장되었다. 두발자유, 체벌 등의 학생인권 의제는 물론이고, 2003년 NEIS(국가교육정보시스템) 투쟁을 통해 제기된 정보인권 문제, 강의석 씨의 투쟁으로 공론화된 종교의 자유, ‘안티수능’으로 대표되는 입시경쟁교육 반대 운동, 학생회 법제화 또는 학교운영위원회 참여 운동, 인천외고와 용화여고 등에서의 사학 학생인권 투쟁 등을 비롯해서, 청소년 노동인권, 성소수자 청소년, 만 18세 선거권 등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 등 굵직한 사건들과 새롭게 제기된 의제들이 수없이 많았다. 반면 청소년운동을 해나갈 단체들은 생겨나고 사라지며 부침을 거듭했다. 의제들은 계속 제기되는데 여기에 대처하는 것만도 벅찬 상황, 단체들이 재생산에 실패하고 처음 운동을 시작했던 구성원들이 나이가 들어 비청소년이 됨에 따라 2~3년 만에 단체들이 공중분해 되는 상황, 청소년인권 문제가 계속 이슈화되어도 미미한 성과에 그치는 상황은 청소년 활동가들에게 새로운 길을 고민하고 모색할 것을 요구했다.
대응은 다양했다. 만 18세 선거권 운동을 했던 청소년 활동가들은 이슈와 프로젝트가 있을 때마다 느슨하지만 유연하게 결성되는 네트워크형 조직을 실험하기도 했다.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은 학생회장들을 규합하여 대중성 있는 조직을 만들려고 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이후 학교 안에 지회를 만들어 학내 조직화를 통해 운동을 전개해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지회 운동 역시 학교의 강력한 탄압과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의 역량 부족으로 거의 실패했으나 이처럼 이슈 파이팅 외에 청소년운동의 방법을 찾아나가려는 시도는 중요한 움직임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여러 지역에서 ‘행동하는 청소년(경남 진주)’, ‘작은 숲(부산)’과 같은 청소년운동 모임들이 만들어졌으며, ‘청소년의 힘으로’ 등의 조직들이 만들어져 청소년 활동가들의 수도 늘어나고 다양성도 증대되어 청소년운동에 대한 고민과 논의도 한층 심도 있게 이루어졌다.
특히 이 시기 청소년운동은 2002년 ‘미군장갑차 여중생 사망 사건’ 때문에 일어난 촛불집회와 한국 정치의 상황 변동에 따라 영향을 많이 받았다. 촛불집회는 2002년 미군장갑차 사건에 이어 2003년, 2004년 대통령 탄핵 사건과 이라크 파병 반대로 계속 이어졌다. 그러면서 촛불집회를 통해서 처음으로 사회운동을 시작하게 된 청소년 활동가들이 늘어났다. 1980년대의 고등학생운동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전국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아래 전고협)는 청소년의 권리와 권익을 위한 운동에 적극적이진 않았으나 이러한 촛불집회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활동을 기획함으로써 청소년운동에 등장했다. 또한 민주노동당, 사회당 등의 좌파 진보정당들이 활동을 시작하면서, 스스로 좌파나 진보적 청소년의 정체성을 가지고 정당에 가입하거나 사회운동을 시작하는 청소년 활동가들이 나타났다. ‘진보적 청소년 연합’이 대표적이다. 안티조선, 노사모, 열린우리당 등에서 활동을 하는 청소년 활동가들도 있었다.
말하자면 이 시기는 사회운동으로서 청소년운동에 대한 정치적 의식이 청소년 활동가들 사이에서 형성되었던 때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정치적 의식이란 청소년운동의 목표와 목표 달성을 위한 방법론과 조직론 등을 깊이 있게 고민하고 모색했으며, 청소년운동이 한국 사회 속에서 어떤 위치에 있으며 어떤 정치적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를 하나의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고 논의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다. 이 시기를 통해 청소년 활동가들은 다양한 청소년운동의 방법론들과 운동에서의 쟁점들을 정리했으며 또한 사회주의, 아나키즘, 여성주의, 민주주의, 민족주의 등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사회과학적 이론들과 이념들을 참고하여 청소년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만들어갔다.
실천과 행동으로
2005년은 청소년운동에 특별한 해였다. 2005년 5월, 내신등급제 도입을 계기로 입시경쟁에 반대하며 청소년 1000여 명이 자발적으로 거리에서 촛불을 밝혔다. 청소년운동을 해오던 어느 단체도 어느 활동가도 의도적으로 기획하지 않았던, 미조직 대중의 자발적인 행동이었다. 또한 같은 2005년, 두발자유를 요구하는 온라인 서명운동과 거리 집회가 재차 벌어졌다. 여러 학교들에서 두발자유를 요구하는 래커 시위, 종이비행기 시위, 운동장 시위 등 학내시위들로 이어졌다. 학내시위의 대부분도 자발적으로 일어난 사건들이었다.
그러나 2005년, 청소년들의 이런 행동들은 제대로 된 성과로 남지 못했다. 내신등급제 반대 집회는 지속적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교육 정책에 의미 있는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으며, 두발자유운동도 성과를 얻긴 했으나 만족할 만하지는 못했다. 놀랍기까지 했던 청소년들의 자발적 저항들이 별 다른 성과 없이 사그라지자 청소년인권운동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대안을 성찰할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2005년 5월 21일 제9회 서울인권영화제의 부대행사로 진행된 “‘청소년인권운동, 미래를 본다’ 토론회”(인권운동사랑방, 21세기청소년공동체 희망, 청소년인권연구포럼 아수나로 주최)에서는 한해살이 운동, 제자리걸음인 운동, 공유되거나 축적되지 않는 경험, 남지 않는 활동가들 등의 문제가 지적되었다. 이런 고민은 본격적으로 2006년 2월, ‘청소년인권운동 어디까지 왔나’라는 제목의 워크숍에서 구체화된다. 이 워크숍에서는 청소년운동을 아우르는 상설 연대체나 네트워크의 필요성을 제기하는데 이 구상은 3월에 발전하는학생회 가자, 인권운동사랑방, 청소년 다함께, 전북청소년인권모임 나르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그리고 개인 청소년 활동가들이 모인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출범으로 현실이 되었다.
2005년 이후 청소년운동은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21세기 청소년공동체 희망, 전국청소년학생연합(전청련의 경우에는 2008년 촛불집회 때 생겨났으나 2010년을 못 넘기고 해산했다.) 등 여러 청소년단체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 운동은 학교 안에서의 여러 투쟁들과 광장에서의 집회, 언론이나 온라인을 이용한 이슈파이팅 등을 넘나들며 이루어졌고, 과거의 실패와 성공의 경험들 그리고 여러 논의를 바탕으로 좀 더 정리된 운동론과 청소년에 대한 이론과 주장을 운동의 바탕에 두고 있는 것이 하나의 특징이다. 방법적으로는 활동가 조직과 대중 조직의 역할 구분, 지역 조직과 학내 조직에 대한 시도들, 학습과 홍보 등의 준비, 조직화와 직접 행동과 연대를 중심에 둔 운동 등이 현재 청소년운동을 구성하고 있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청소년의 사회적 지위, 가정과 학교로 집약되는 청소년들이 처한 사회 제도들, 정치·사회·경제적 상황 등에 대한 인식이 운동의 이론적 바탕을 이루고 있으며, 교육 및 학교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 가정과 친권이나 청소년보호법 같은 청소년 제도들에 대한 문제의식 등이 청소년운동을 발전시키고 있다.
청소년운동은 어느 정도 성과를 내고 있다. 특히 오랜 세월 공 들여 싸워온 학생인권 분야에서는 학생인권법 운동으로 초중등교육법 일부 개정, 그리고 2010년과 2011년 경기도, 전남 광주, 서울 등지에서 학생인권조례 제정으로 가시적인 성과를 만들고 있다. 교육운동, 인권운동, 시민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 안에서도 청소년운동 그리고 청소년 활동가들의 입지를 넓히고 있다. 청소년들의 인권이나 권리를 주제로 한 책과 논문도 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말해서 청소년운동은 자신의 과제를 충분히 해결하지는 못하고 있다. 여전히 운동은 많은 부분 이슈파이팅에 의존하고 있으며 대중 조직이라고 할 만한 것은 꾸려지지 못하고 있다. 이론과 담론을 실천과 행동으로 실현하려고 하고 있지만 제대로 실현되기까지는 아직 길이 멀어 보인다. 긴 싸움을 통해 학교의 직접적 탄압을 어느 정도 없애는 데 성공한 듯하지만, 가정의 탄압은 여전한 반면, 경쟁적 교육과 불안정 노동이 일반화된 사회에서 청소년운동을 어떻게 안정적으로 해나갈 것인지와 같은 새로운 과제가 부상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청소년운동은 청소년운동에서 익힌 감수성과 의식에 따라 탈학교나 대학입시거부를 선택하고 다른 삶을 살려는 청소년 활동가들에게도 작은 도움도 제대로 못 주고 있는 형편이다.
내가 체감하기로는 최근 청소년운동은 하나의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05년부터 특정한 패러다임에 따라서 5~6년 간 이루어진 청소년운동은 다소 답보 상태에 빠져있다. 비록 지역마다 차이는 크지만 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을 통해 가장 많은 준비를 해오고 경험을 쌓아온 학생인권 문제는 일정 부분 진보하고 있다고 해도 다른 주요한 의제에서는 어떠할 지 모르겠다. 또한 의제 면에서는 무궁무진하게 뻗어나갈 가능성이 있지만 활동하는 활동가들과 회원들의 숫자는 2008년 촛불집회 이후로는 크게 늘지 않고 있다. 전 세대와 지금 세대 사이의 연속성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여기에서는 편의상 마치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청소년 활동가들이 같은 존재들인 것처럼 썼지만 실제로는 서너 번에 걸친 세대교체가 있었으며 따라서 감수성 차이도 크고 고민이 이어지지 못하고 단절되는 현상도 있었다.
2012년, 청소년운동은 지금까지 해오던 일을 더 잘 하는 동시에 청소년 활동가들의 조직화 계획이나 운동에 대한 새로운 기획이 좀 더 구체적으로 필요한 단계이다. 청소년운동을 만들어가고 있는 청소년 활동가 개개인의 삶의 문제 역시 같이 고민해야 한다. 들어가는 돈도 처음에는 수십만 원 정도로 어찌어찌 개인들이 희생해서 꾸려가던 운동들이, 이제는 수백 수천만 원 단위의 재정을 필요로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변화가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통장에 찍히는 동그라미의 개수가 늘어나는 것마저도 두려울 지경이다. 그래도 나는 청소년운동의 역사를 보면서 앞날을 낙관하고 싶다. 어떻게 해서든 여기까지 왔다. "앞으로도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말하며, 두려움에 떨기보다는 좀 더 가보자고 제안하려 한다. 그리고 나중에 뒤를 돌아보면, 다시 우리가 역사를 만들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