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러한 이중적 위험성은 모든 비-주체들(the abject)에게 공통적인 것이기도 하다. ‘잡년’은 위험하다. 그녀들은 가부장 사회에 있는 한 위험하며, 또한 가부장 사회의 오점으로 있는 한 위험한 존재다. 이주노동자들도 위험하다. 그/녀들은 민족국가의 영토에 거주하는 한 위험하며, 동시에 민족성과 자본주의 국가에 얼룩으로 살아가는 한 위험한 존재다. 단적으로 말해 이들은 존재 자체가 억압을 당하고 있으며 역으로 체제의 모순을 입증한다는 점에서 이중적으로 위험한 존재들이다.
그런 까닭에 대한민국에서 청소년은 일종의 증상인 셈이다. 그/녀들이 위험하면 위험할수록 성인들이 지배하는 전체 체계는 모순이 노출되어 자기 동일성을 위협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대한민국은 이들 위험한 청소년을 분류하고 관리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추방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청소년과 정치가 만나는 첫 번째 국면이다. 청소년은 그/녀들의 신체를 포함하여 사고방식과 언어 그리고 상징 등 모든 부분에 걸쳐 관리되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체계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글에서 청소년과 정치가 만나는 두 번째 국면을 열기 위하여, 즉 정치를 당하는 청소년이 아니라 정치를 하는 청소년을 상상하기 위하여 이 첫 번째 정치가 가진 문제에 대해 검토할 생각이다. 특히 현재 작동하고 있는 모순, 역설, 아이러니와 같은 것들을 들춰내고 비판할 것이다. 은폐되어 있는 논점들이 드러나고 이것이 독자들에게 공유된다면, 마침내 체계의 뇌관이 폭로되고 따라서 우리가 원하는 가능성의 지점들도 타진될 수 있을 것이다.
‘청소년+보호’의 모순: 청소년은 정치의 각축장
‘청소년 정치’라는 말은 현실적으로,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형용모순처럼 들린다. 법적으로 그/녀들에게는 정치의 권리가 주어져 있지 않으며 그저 복종의 의무만이 주어져 있을 뿐이다. 그/녀들은 청소년이라는 기간 동안 정치적·사회적 자유를 유예하고 모호한 미래를 기다림으로써 이 예외적 상태를 견뎌낼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청소년은 정치의 예외라는 점에서 너무나도 정치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그/녀들 자신이 정치하는 존재이기에 앞서 언제나-이미 정치의 대상이기에 청소년은 더할 나위 없이 정치적인 사회-공간이다.
우선 청소년이란 표현은 개념 자체부터가 모호하다. 청소년 개념은 생물학적으로나 법적으로, 따라서 사회적으로 단 한 번도 합의된 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청소년에 관한 논의는 언제나 취약한 토대 위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난점은 추상적 수준의 청소년을 경험적으로는 규명할 수 없다는 데에서 기원한다. 신체적 특징에 따라 청소년을 규정할 것인가? 아니면 연령에 따라 규정할 것인가? 만약 이러한 시도가 성공하더라도 이것이 성문화될 수 있을 것인가? 생물학적 규정과 법적 규정은 일치하는가? 또한 청소년 전체에 대한 추상적 규정과 청소년 개개인들에 대한 구체적 적용은 일치할 수 있는가?
어쩌면 우리가 아는 그 ‘청소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까닭에 청소년을 규정하는 문제는 언제나 논란거리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어떤 존재를 청소년이라 규정하는 행위는 애초부터 정치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318’로 청소년의 범위와 전형성을 한정하더라도 실제 청소년들은 흔한 말마따나 그러한 기표들에서 새어나가기 마련이다. 개념적으로 취약하다는 사실은 청소년에 관한 논점들이 근본적으로는 언제나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그렇기에 ‘질풍노도’니 ‘주변인’이니 하는 묘사적 표현들은 바로 그렇게 말하는 당사자들이 처한 서술상의 곤란함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청소년이란 표현을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청소년에 관한 담론들이 존재하는 이상, 청소년에 대한 규정은 불가능하더라도 불가피하다(물론 역으로 불가피하더라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항상 감안해야 한다). 일단 청소년이라는 기표가 사회정치적 의제로 던져지게 되면 그러한 표상이 얼마나 적절한 것인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현실적 효과가 발휘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그러한 의제들은 청소년을 보호해야 한다는 도덕률로부터 시작하곤 한다. 바로 이것이 청소년 정치가 잠재하는 쟁점들의 영점(零點)이다. 그런데 청소년보호법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청소년보호론이 청소년을 억압하는 담론이라는 사실은 쉽게 간파할 수 있다. 미국의 인디언보호구역이 인디언을 억압하는 공간인 것처럼 대개의 보호론은 종 다양성을 보존하는 대신 위계구조를 견고히 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보호론의 궁극적 효과는 기본적으로 보호하는 자와 보호받는 자 사이의 권력관계를 유지함은 물론이거니와 보호받는 자로 하여금 ‘보호 받는다’는 허위의식을 갖게 하여 그/녀 스스로를 거의 항구적으로 정치적 약자로만 머물도록 ‘보호’하는 데 있다.
물론 허울 좋은 명목은 있다. 보통 청소년보호론은 청소년의 ‘인권’을 보호한다고 강변한다. 실제로 온라인 게임 청소년 셧다운제 문제에서도 관련 정부부처는 청소년들의 건강권(특히 수면권)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게임을 오래하면 그만큼 잠을 못 잔다’는 그럴 듯한 근거로 ‘잠을 많이 자기 위해선 게임을 못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을 정당화했다. 나아가 이러한 주장은 ‘권리들의 충돌’(건강권과 문화권)이라는 지극히 자유주의적인 프레임 속에서 우리들로 하여금 ‘어떤 권리가 선행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에만 집중하게 만들었다. 이런 문제설정에선 누가 이기더라도 체계는 언제나 승리하게 되어있다.
어쨌든 보호론의 논리가 기본권을 보장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는 청소년들에게 의무를 부과한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밝혀졌다. 그도 그럴 것이 청소년보호론자들은 청소년의 학습노동에 관한 이야기를 언제나 빼먹기 때문이다. 체계의 입장에선 청소년이 학습기계여야 하는데 게임기계가 되는 것은 위험한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지배적인 사회적 관계들을 재생산하는 학습노동이야말로 청소년들의 건강권을 침해하는 것이지만 저들은 그 사실을 은폐하고 결과적으로는 청소년들의 기본권과 문화권 모두를 박탈한다. 결과적으로 청소년들은 잠을 잘 수 없다.
따라서 청소년 보호와 청소년 억압은 동전의 양면이자 하나의 거울 쌍과 같다. 이것이 바로 청소년 정치의 첫 번째 뇌관이다.
‘청소년+문제’의 역설: 청소년은 이데올로기적 환상
이렇게 빤한 이데올로기적 실천이 전개되는 것은 사회체계 차원에서 보면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 왜냐하면 청소년은 종종 중요한 사회적 문제들을 봉합하는데 효율적인 실마리가 되기 때문이다. 앞서 청소년이 어떻게 정치의 장소가 됐는지 보았다면, 이번에는 어떻게 정치의 매개가 되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상호 관련된 담론양식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사회 전체의 문제를 청소년의 문제로 슬그머니 갈아 끼우는 방식이다. 대개의 ‘청소년 문제’라는 것은 알고 보면 성인들의 문제와 결코 다르지 않거나 오히려 성인들의 문제로부터 유래한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정부 정책이 됐든 미디어 보도가 됐든 청소년 문제는 유독 청소년만의 문제로 초점화하는 경향들이 있다. 이렇게 되면 어떠한 효과가 발생하게 될까?
가령 ‘빵셔틀’ 같은 학교 내에서의 따돌림 현상이 담론화되는 방식은 (그 원인이야 차치하더라도) 최종적으로는 마치 사회 전체에서는 따돌림이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 판타지를 심어준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학생들 사이에서의 집단 따돌림 현상이 기묘하게도 사회 전체에서는 비일비재한 배제의 문제들을 은폐한다는 것이다. 청소년을 표적으로 하는 미디어의 집중포화는 우리의 인지적 신경을 청소년에게 집중하도록 조종하고 그것을 보고 있는 사회구성원 대다수는 어지간해선 그런 유인 효과로부터 자유롭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일종의 성동격서인 셈이다.
욕하는 청소년에 관한 사회적 담론들도 마찬가지다. 욕하는 청소년이 사회적 공포와 비난의 대상이 되자마자 그/녀들은 비도덕적 존재로 전락하게 되는데 그럼으로써 성인들의 욕설 문화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 혹은 말할 수 없는 문제가 된다. 달리 말해 청소년을 도덕적으로 규율하면 그것의 상대적 효과는 성인들의 외설이 면죄부를 얻게 된다는 사실에 있다. 나아가 성인들은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스스로를 오인하기 마련이다. 자신들 내부의 부정적 요소들을 청소년들에게 투사함으로써 마술적으로 깨끗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욕 권하는 사회는 철저하게 비가시화된다.
생각하면 할수록 청소년이란 타자가 없었으면 온갖 외설스러움으로 넘쳐나는 우리 사회가 어떻게 정상적으로 작동했을지는 상상조차 어렵다. 여기에 덧붙여 청소년이 이데올로기적 환상이 되는 두 번째 방식은 앞선 맥락보다 조금은 이중적이다. 이번에는 전체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착각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주지하듯이 청소년 문제는 종종 일탈이란 언어로 포착되곤 한다. 일단 여기서는, 일탈이란 정상적이라 여겨지지 않는 생각이나 행실을 특정 사회구성원이 실천에 옮겼을 때 붙는 말이란 점을 염두에 두자. 그런데 바로 여기에 마술의 비밀이 숨어있다.
가출 문제가 대표적이다. 오늘날 청소년들의 가출이 괄목할 만한 수준으로 증가한다고 했을 때 이것은 하나의 ‘사회적 사실’로서 말 그대로 사회적 문제에 해당한다. 그러나 대개의 담론은 이를 부적응과 같은 청소년 개인의 심리적 문제로 환원하곤 한다. 주지하다시피 그동안 우리가 굳게 믿어 왔던 정상가족의 신화가 붕괴되고 있는 마당에 이를 구조적 차원에서 접근하고자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특히나 청소년 문제의 경우에는 유독 심하다. 치유의 관점에서 청소년 개인에 접근하더라도 대개는 정상가족의 언어로써 그/녀들을 대하는 게 고작이다. 그럴수록 그/녀는 비정상으로 낙인찍힐 뿐인데 말이다.
최근의 ‘가출팸’(가출 패밀리) 현상도 유사한 맥락에 있다. 이 경우 미디어의 선정적 보도로 말미암아 가출 청소년들의 성적 일탈이 문제시되곤 한다. 이를테면 가출을 해서 직접 성을 판매하거나 성매매를 알선하는 행위는 개인의 방종이나 비도덕성의 문제로만 해석되기 일쑤다. 이 경우 청소년 문제 담론은 이중적인 방식으로 사회적 문제를 세탁한다. 1단계는 성매매 문제를 성인의 문제가 아니라 청소년만의 문제인 것으로 치환하는 것이며 2단계는 나아가 이러한 문제들을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권력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방종과 같은 차원으로 축소하는 것이다.
소략해보면, 대한민국에서 청소년은 이데올로기적 환상으로서 기능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최종적 효과는 다분히 이중적이다. 청소년이라는 부정적 타자는 사회의 안녕을 도모하는 데 동원되며, 나아가 그러한 타자성은 실제 청소년 개개인의 존재양식을 억압하는 또 다른 추동체로 작용한다. 이것이 바로 청소년 정치의 두 번째 뇌관이자 앞으로 청소년의 재현체계에 대해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일 것이다.
‘청소년+운동’의 아이러니: 청소년은 표적을 볼 수 없는 비-주체
이런 상황 속에서 청소년은 어떠한 주체적 조건을 살아내고 있을까. 물론 앞선 시기 민주화의 경험을 거치면서 오늘날 청소년들에게는 그/녀들의 선배 세대들에 비해 정치적 기회구조가 상대적으로 열려있다. 민주주의라는 가상적 보편성의 언어가 통용됨으로써 그/녀들은 바로 그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더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있게 되었고 실제로 그것을 관철시킬 사회적 분위기를 이용하는 것 또한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이유로 청소년이라는 존재가 억압을 받고 그 기표의 쓰임새 또한 모순에 처해 있다는 점 역시 분명하다. 보호라는 명분으로 억압하고 그런 취약성을 빌미삼아 그/녀들을 통해 이데올로기적 관행들이 작동하는 게 바로 한국사회 아니던가. 그렇기에 청소년 정치의 주체적 정황을 논의하려면 무엇보다도 불가능성의 조건들을 고려함으로써 거기에 내재된 모순들, 즉 가능성의 조건들을 탐사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최근에 개봉한 영화 ‘완득이’는 특정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이 영화는 (그리고 소설은) 이주배경 청소년이라는 질풍노도의 이념형을 내세워 오늘날 청소년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질문하는 듯하다. 여기서 1970년대 말의 질풍노도 청소년을 다뤘던 ‘말죽거리 잔혹사’와 유의미한 비교지점이 나타난다. 실제로 이 두 영화는 486세대의 청소년기와 오늘날 청소년의 현재를 비교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기까지 하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오늘날 청소년들에게는 죽여야 할 ‘아버지’가 없다. 애초 프로이트가 발견했던 부친 살해 모티프는 자손들이 문명을 시작할 수 있(으며 또한 모든 위대한 이야기가 시작할 수 있)는 근원적 계기로서 작동한다. 마찬가지로 아들들이 힘을 합쳐, 즉 형제애를 발동하여 아비를 살해하고 아비의 사체를 먹어치움으로써 아비 세대에 종지부를 찍고 그의 힘과 권위를 나눠 갖는 과정이야말로 정치의 근원적 계기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죽여야 할 ‘아버지’가 없다니 이는 무슨 말인가.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주인공에게는 상징적 아버지가 압도적일 정도로 편재해 있다. 태권도 사범으로 일하는 생물학적 아버지, 교실에서의 교사라는 아버지, 또래집단에서의 ‘싸움짱’이라는 아버지, 오후 5시가 되면 보행을 멈추고 국기에 경례하게 하는 국가라는 아버지……. 이들은 주인공이 선망하는 모든 자원을 독차지하고 있으며 강건할 뿐더러 각기 다른 방식들을 통해 억압을 행사한다. 그들은 반드시 극복해야 할 억압의 원천이다. 반면 ‘완득이’에서 각각의 상징적 대척점들은 더 이상 아버지이기를 그치고 있다. 장애인이어서 동정하고 돌봐야 하는 아버지, 알고 보니 세상에 둘도 없는 교사라는 아버지, 또래집단에서 일진이어도 ‘찌질’하기만 한 아버지, 이주민조차 돌보지 않아 내가 직접 나서길 기다리는 국가라는 아버지……. 그들은 더 이상 억압의 근원이 아니기에 극복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단지 화해의 대상들로서만 배치되어 있다.
굳이 ‘고개 숙인 아버지’ 운운할 것도 없다. 홀로 객사하는 기러기 아빠를 연상할 것도 없다. 생물학적으로뿐만 아니라 상징적으로도 아버지들은 무능력하다. 아니, 자신들이 무능력하다고 선포함으로써 ‘쉴드’친다고 하는 편이 낫겠다. 이리 불쌍한 아버지는 역사에 없었다. 물론 현실의 생물학적 아버지들이 모두 무능력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른바 정상가족 테두리에서 보자면 부모세대는 억압을 행사하기보다는 자식들을 온정으로 대하며 욕망을 북돋고 미래를 설계해준다. 이리 좋은 아버지는 역사에 없었다. 코카콜라 광고 카피가 이미 말해주지 않았던가.
‘Enjoy It!’ 즉, 그것을 즐겨라. 더 이상 억압은 없다. 실체가 묘연하긴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다. 즐기면 될 뿐이다. 아비를 살해할 도덕적 정당성도, 그로써 취득할 경제적 생산성도 없다.
오늘날 청소년들에게 부친 살해 모티프가 적용되기 힘들다는 사실은, 동시에 그/녀들이 정치적 주체-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물론 이 문제는 20대를 아울러 청년 세대 전체가 직면한 상황이다). 상징적 아버지의 자리가 비어 있다는 것은 오늘날 정치의 어떤 난점을 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인가? 앞서 말한 것처럼 실제 청소년들은 억압을 경험하고 있는데 그 억압의 근원으로 이해할 수 있는 표적이 구조적으로 은폐되어있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이 적대를 동력 삼아 가동된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지금 그/녀들은 활과 화살은 있을지언정 과녁을 볼 수 없기에 정치는 쉽사리 발동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청소년 정치에 존재하지만 보이지는 않는 세 번째의 뇌관이다. 설사 정치적 주체로서의 경험이 봉쇄되는 이러한 장벽을 돌파하더라도 문제는 그리 간단히 해소되진 않는다. 어렵사리 정치의 장에 뛰어들게 되더라도 그 장소는 이미 기성세대가 그물 쳐놓은 문법에 의해 지배되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 촛불정국에서 드러났던 것처럼, 그리고 그 이후의 숱한 운동의 경험들에서 드러났던 것처럼 드물게 존재하는 정치적인 그/녀들은 청소년을 보호하고 매개로 삼아 결국에는 억압하고 이용하는 좌우막론의 퇴행적 정치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판의 성인들이 반말을 날리고 전선에서 배제한다. 그렇기에 저들이 화해의 제스처를 쓰더라도 그/녀들로서는 운동권을 재생산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접근하려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민주화 이래 청소년에게 개방되었다고 믿었던 정치적 기회구조는 사실 정확히 그만큼 불-기회의 구조이기도 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과녁을 찾는데 실패한 화살은 땅에 처박힐 수밖에 없는데, 시위조차도 당기기가 쉽지 않다.
두 가지 답, 혹은 세 번째의 오답
그런데 ‘완득이’의 결말은 뜻밖에도 낙관적이다. 죽여야 할 아버지가 없는 청소년에게 주어진 선택지에는 어떤 답들이 기입되어 있는 것일까? 완득이는 모두를 형제로 삼는다. 뺏어야 할 권위도 부(富)도 없는 채로 그는 생물학적 아버지를 포함하여 그 모든 상징적 아버지들과 손을 잡는다. 그리하여 자신의 질풍노도를 치유하고 비로소 안정에 들어간다. 이주 배경이라는 비교적 가시적인 갈등에도 불구하고 그 답은 비교적 소소한 방식이어서 일상의 이웃들과 손을 잡고 조화를 이루며 사는 길을 택한 것이다. 표적이 없으니 지극히 현실적인 대안인 셈이다. 이것이 오늘날 그나마 개념 있는 청소년들에게는 가장 손에 잡히는 답안지일 것이다.
그 외에는 어떤 답이 있을까? 비록 20대를 다룬 것이지만 표적의 부재를 모티프로 삼는다는 점에서 소설 『표백』을 참고삼을 만도 하다. 말 그대로 표적이 부재하니, 이 소설은 오늘날의 청(소)년이 체계 재생산의 고리이기를 그치고 체계의 오점으로 남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제안한다. 거기서 최선의 선택은 바로 자살이다. 상술했던 것처럼 청소년이 위험한 존재로서 비-주체이자 나아가 이데올로기적 환상이라 한다면 자신의 존재양식을 어떤 방식으로든 중지하는 것은 매력적인 답안지가 될 수 있다. 물론 한 가지 단서조항이 있다. 『표백』에서 말하는 것처럼, 루저(체계 부적응자)인 채로 자살을 하면 오히려 체계의 위력을 가중시킬 수 있기 때문에, 철저하게 체계에 적응하여 성공의 정점에 올라섰을 때 자살은 비로소 효과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체계는 그제야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에게 상상 가능한 답이란 ‘완득이’나 『표백』의 주인공들처럼, 약자들끼리 손을 잡고 연대하거나 아예 질서 바깥으로 이탈하는 정도인 것 같다. 그러나 이 답안지가 어딘지 불만족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전자는 억압·타자화·배제하는 체계를 문제 삼지 못하고, 후자는 별다른 대책 없이 그저 산화하라고 종용할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청소년 정치의 다른 대안을 제시하거나 그것의 타당성을 입증할 의사가 전혀 없다. 그럴 능력도 없다. 다만 체계가 돌아가는 동학을 정확히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서 나는 청소년과 정치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세 가지 쟁점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물론 현실적으로는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쟁점들이 존재할 수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본 바에 의하면, 청소년보호론이 내재한 억압적 효과라는 모순, 청소년에 투사하는 타자성을 통해 성인들의 동일성이 유지되는 역설, 적대의 과녁이 상실되고 내부정치마저도 순조롭지 않게 된 아이러니 등이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논점들이 아닌가 싶다.
한편으로는 청소년 정치의 불가능성을 배태한 이 지점들이 바로 새로운 두 번째 정치의 시작점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이 모순, 역설, 아이러니라 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그 틈새를 벌려 비판하고 비집고 들어가 항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는 보호가 왜 억압과 동일한 것인지 폭로하고 비판할 수 있다. 우리는 청소년에 투사된 타자성을 그대로 성인들(과 체계)에게 반사시킬 수도 있다. 또한 우리는 적대의 과녁을 이전 세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설계하고 배제의 최종 분할선을 파괴하거나 조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는 이들 뇌관을 건드릴 수 있는 새로운 오답이 필요한 시점이지 않나 싶다. 문제가 은폐되어 있는 이상, 답 역시도 보이는 곳에는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청소년은 위험하다. 그러나 체계는 청소년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바로 그렇기에 청소년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체계를 횡단하는 반(反)체계의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