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방식이든 재판 결과에는 별 영향이 없을 테니 좋을 대로 하라는 조언을 듣고 저는 한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재판하는 내내 심드렁했던 주심판사와는 달리, 임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앳된 얼굴에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재판 내용에 귀를 기울이던 배석판사였습니다.
자세한 내용이야 다 까먹었지만 마치 대학 새내기를 동아리방에 불러 앉혀놓고 말하듯 조근조근 이야기하며 진술을 마쳤던 기억이 납니다. 왠지 그 덕분에 두어 달의 구속과 지리한 재판 과정이 전혀 무의미한 일은 아니었다고 약간의 위로를 받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눈을 가린 채 한 손에는 칼을 다른 한 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는 정의의 여신상은 사법부가 구현하고자 하는 공정한 재판과 사회정의, 그리고 평등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정의의 여신이 눈을 가리고 있는 까닭은 잘 듣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본다는 것은 앎을 뜻합니다. 무엇을 본다는 행위는 주체가 대상을 파악하고 알아나가는 과정이며 분별하고 구분 짓는 것입니다. 잘 보기 위해서는 높은 자리가 필요하고 그렇게 내려다보면 더 많은 정보를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본다는 것은 그래서 지식을 찾고 쌓아나가는 일이며 이때 시선이 곧 권력이 되는 것이죠.
그럼 듣는다는 것, 들음이란 무엇일까요? 문자가 없던 시절 인간의 역사와 지혜는 구술을 통해서만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위대한 철학과 종교가 모두 성인이 이야기한 바를 듣는 것, 그 들음의 기록입니다. 본다는 것이 타자를 나의 앎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와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이라면 듣는다는 것은 나와 타자의 경계를 허물고 더 큰 지혜 속에 스며드는 일과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눈을 가리는 것은 자신이 아는 것이 없다는 무지함을 선언하는 것이고 귀를 기울이는 것은 지혜를 얻고자 하는 겸손함이 아닐까요?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는 매우 중요한 인권의 항목입니다. 사실 우리 사법부 역사를 조금만 들춰보면 ‘법원은 인권의 최후의 보루’라는 말이 무색하지만 그럼에도 침해된 인권의 회복을 위해 결국에는 법원의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래서 세계인권선언과 국제인권조약은 물론 우리 헌법과 법률에서도 공개재판의 원칙이나 무죄추정의 원칙,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나 불리한 진술을 하지 않을 권리 등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2007년 관련 법률을 제·개정하여 공판중심주의 국민참여재판 제도를 적극 도입하는 등 인권적으로 큰 진전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법에 대한 불신은 여전하고 이 정부 들어 신영철 대법관 사건에서부터 최근 서기호 판사 재임용 탈락까지 사법부의 독립성 또한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습니다. 이 마당에 영화 ‘부러진 화살’로 불거진 사법 불신은 분명 사법부의 권위주의, 사법 엘리트의 권위의식을 겨냥하고 있는 듯합니다.
사법부의 권위는 딱히 한국만의 일은 아닌 모양입니다. 외국 영화나 드라마의 법정 장면에서는 아직도 판사들이 유명한 클래식 작곡가의 머리모양 같은 하얗고 긴 가발을 쓰고 재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대체 왜 그러나 궁금했는데 찾아보니 여러 가지 설이 있더군요. 사실 긴 머리를 손질하는 것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어서 유럽 귀족들에게 가발이 꽤나 유행했다고 합니다. 그런 풍습이 전통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법부에만 고스란히 남아 아직도 판사들은 가발을 쓴다는 것이죠. 또 예전에는 법정이 주로 야외에서 열렸는데 가발이 추위를 막아주는 역할을 했기에 다른 분야에서는 사라진 문화가 법원에는 남아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우리로 치면 재판할 때마다 상투를 틀거나 갓을 쓰고 나오는 격이니 상상해보면 여간 웃긴 일이 아닙니다. 상투나 가발까지는 아니어도 우리나라 판사들도 성직자가 입는 것과 비슷한 가운을 걸치고 나옵니다. 어쩌면 이러한 전통에 기대어 권위를 세우려는 문화와 특권의식이 사법 불신의 핵심에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언젠가 아이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일입니다. 의사가 회진을 돌다 한 환자에게 다가오면 그 환자는 일어나 앉으려 하고 의사는 그냥 누워있어도 된다고 만류하는 장면을 흔히 보셨을 겁니다. 저는 그것이 한국인 특유의 예절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 의사는 아이에게 오더니 의자를 꺼내 앉아서 아이와 대화를 나누는 겁니다. 제가 환자였을 때를 떠올려보니 저 또한 의사 ‘선생님’이 오셔서 일어나 앉으려 했던 것이 아니라 의사와 눈높이를 맞추고 싶어서, 그렇지 않으면 마치 무장해제가 되어 고양이 앞에 놓인 쥐의 기분이어서 그랬던 것 아닌가 싶어졌습니다. 어쩌면 의사들도 부지불식간에 시선에서의 권력관계를 잘 활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고요.
시선의 높고 낮음만이 아니라 가발과 같은 일종의 치장, 재판장이 나온다는 알림과 함께 ‘일동 기립’을 하는 행위, 세심하게 고려된 자리 배치, 그리고 어려운 법률용어는 법정에서 묘한 극적 효과를 가져 옵니다. 이 장엄한 세레모니(ceremony)의 정점은 법의 권위를 가리키고 있죠.
크레온왕: 감히 그 법을 어겼단 말이냐?
안티고네: 네, 그러나 그 법을 저에게 내리신 분은 제우스신이 아니에요. 저승의 신들과 함께 사는 정의의 신도 사람의 세상에 그런 법을 정해 놓지는 않으셨지요. 저는 글로 써진 것은 아니지만 임금님의 법이 확고한 하늘의 법을 넘어설 수 있을 만큼,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하늘의 법은 어제 오늘 생긴 것이 아니고 불멸하는 것도 아니며 그 시작은 아무도 모르니까요.
흔히 자연법사상을 소개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의 한 구절입니다. 왕(권력)의 법 이전에 우선하는 더 큰 법이 있으며 그것이 자연법이라는 이야기인데 천부인권설도 여기서 나온 이야기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권리가 신이 내려준 것인가 아니면 절대적 가치로 존재하는 것인가, 그도 아니면 사회계약에 의한 것인가의 논쟁은 차치하고 저는 이 구절을 법(권력)의 권위와 그에 대응하는 불복종과 저항권의 기원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범죄를 저질렀다고 의심받는, 또는 법률을 위반한 사람이라고 해도 판사에게 사법권을 부여한 주권자로 대우하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는 자세를 가질 때 비로소 법의 권위가 세워진다는 점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번호 특집 제목을 “법원의 권위를 기각합니다”로 붙여봤습니다. 언제쯤 기각된 법원의 권위가 ‘인용’되지 않고 ‘인정’될 수 있을까요?
권위 없기로서는 한국사회에서 정치권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거의 매년 실시되는 직업별 신뢰도 조사에서 정치인은 최하위를 도맡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선거철만 되면 앞 다투어 출사표를 날리며 여의도를 향해 달음질하는 이 행렬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내놓는 공약은 또 어떤지요. 흑묘백묘론. 중국의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전환하는데 앞장섰던 덩샤오핑이 1979년 미국을 방문하고 나서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되는 것처럼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인민을 잘 살게 해주면 된다며 한 말이지요. 극심한 사회 양극화와 불안정한 노동, 세계 금융위기로 인한 불안과 불만, 기후변화와 에너지 문제, 그리고 후쿠시마 사태로 인한 공포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 유권자의 환심을 사려는 기성 정당의 몸부림이 복지국가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고양이 색깔이 어떻든 상관없는 것일까요? 저는 지난해 『정의란 무엇인가』 신드롬에서도 그랬지만 흑묘백묘를 떠올리게 하는 복지 논쟁에서도 한국사회에서의 철학의 빈곤을 느낍니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은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복지국가가 아니라 복지사회를 만드는 것이라며 “복지국가는 국가적 시스템으로 시민들을 보호하겠다는 것이고, 복지사회는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들 자신이 자주적으로 상호 연대하고 협동함으로써 만들 수 있는 사회”(녹색평론, 2011년 7-8월, 119호)라고 했습니다. 고양이의 색깔도 중요하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고양이에게 쥐를 잡도록 해서 살아가야 하는 방식 그 자체를 바꿔야 하는 것이겠죠.
2012년 연중기획 두 번째를 맞아 《사람》에서는 대담을 통해 총선과 대선에서 인권운동이 무엇을 모색하고 실천해야 할 것인지를 다루었습니다. 또한 지난 2008년 총선에서 성소수자의 가시화와 정치세력화를 도모했던 최현숙 선거운동의 의미를 되짚어보았습니다. 인권의제가 중요한 정치적 의제로 채택되는데 그치지 않고 소수자 집단이 제도 정치에서 대표성을 획득하는 것을 넘어서 이미 자리 잡고 있는 대표의 틀을 전복하고 새롭게 만들어나가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합니다. 《사람》도 배제된 이들, 대표되지 않거나 대표될 수 없는 이들, 몫 없는 자들의 목소리에 더욱 귀 기울이겠습니다.
어떤 이는 우스갯소리로 검은 머리카락이든 흰 머리카락이든 머리에 붙어있기만 하면 좋겠다며 흑모백모론이라 합니다. 부쩍 탈모에 시달리는 저로서도 참 가슴에 와 닿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흰 머리냐 검은 머리냐, 대머리냐 가발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생기를 잃지 않고 사람답게 살아가느냐 아닐까요?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