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에서 권력과 권위의 차이를 설명할 때 그 핵심은 지배되고 따르는 자의 자발성 여부라고 한다. 즉 권력이 강제력을 동반하는 힘이라면, 권위는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회 지배계층이 갖는 권력은 그 사회의 법과 제도에 의하여 주어지지만 권위는 그 사회 구성원의 신뢰와 존중에 기반을 둔다. 권력보다는 권위를 얻기가 더 어렵고, 권위는 곧 인격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다.
권위와 권력, 그리고 권위주의
그렇다면 권위주의는? 어느 포털 사이트가 제공하는 정보에 따르면 권위주의는 “어떤 일에 대하여 권위를 내세우거나 권위에 순종하는 사고방식 또는 행동양식”을 뜻한다. 앞서 말한 권위와 권력의 차이를 볼 때 권위주의에서 말하는 ‘권위’는 그 본래 의미와 다른 듯하다. 사회의 지배계층이 피지배계층의 신뢰와 존중에 기반을 둔 영향력(곧 본래 의미의 ‘권위’)을 행사할 수 있다면 그들은 굳이 어떤 일을 해나가는데 자신의 권위를 내세울 이유가 없을 것이다. 결국 권위주의에서 말하는 ‘권위’란 합리적으로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고 상대를 효과적으로 설득하지 못하거나 그러한 노력조차 없이, 마치 당연히 그에 따라야 하는 것으로 강요하는 영향력쯤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권위주의란 어떤 일을 하면서 그처럼 설득되지 않은 영향력을 내세우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법부의 권위’라는 것도 그 의미를 좀 더 섬세하게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사법부는 헌법과 법률이 정한 권력을 갖지만 그만한 권위를 갖추었느냐는 별개다. 이는 어디까지나 국민들이 판단할 몫이다. 국민들이 법원을, 법관을, 판결을 얼마나 신뢰하고 존중하느냐의 문제다. 만약 재판부가 어떠한 법적 분쟁을 다루면서 사건 당사자 및 일반 국민을 이해시키고 설득해보려는 노력 없이 단지 ‘법원의 판단이니 당연히 옳다고 믿고 따르라’고 한다면, 그러한 태도는 ‘사법부의 권위’가 아닌 ‘사법부의 권위주의’다.
한 사회의 원칙과 질서가 유지되려면 법원, 법관, 그리고 판결은 당연히 그 지위에 걸맞는 권위를 갖추어야 한다. 하지만 법원이 권위주의에 빠져서는 결코 그러한 권위를 얻지 못한다. 그런데 근래 법원 내부로부터 터져 나오는 우려와 경고는 다시금 권위와 권위주의의 구별을 혼란스럽게 한다. 가령 영화 ‘부러진 화살’과 그에 대한 대중적 인기가 흔들어 놓은 것,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등장한 일부 판사들의 튀는 의사표현’이 실추시킨 것은 ‘사법부의 권위’인가 ‘사법부의 권위주의’인가.
‘부러진 화살’이 겨냥한 것은?
영화 ‘부러진 화살’에 대하여 법원은 이례적으로 성명까지 내면서 “영화가 특정 국면만을 부각시켜 전체적으로 사실을 호도하고 있다"며 "이는 결과적으로 사법테러를 미화하고 사법 불신을 조장하는 것이어서 심히 유감스럽다"고 했다. 이 영화가 사법테러를 미화까지 하였는가는 모르겠지만, 판사의 집에 석궁을 들고 찾아간 그 행동에 대하여 비판적 메시지가 없는 것은 맞다. 하지만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석궁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을 다루는 ‘형사재판’이었다. 때문에 굳이 ‘피고인도 잘못한 게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하여 이 영화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는 의문이다. 하지만 더 궁금한 것은 그 다음 말이다. 과연 이 영화가 사법 불신을 조장하였을까? 그리하여, 국민의 신뢰가 기반이 되어야 할 사법부의 권위도 이 영화로 인하여 위태로워지고 말았을까?
법원의 판결을 신뢰하느냐 마느냐는 국민의 몫이지, 법원의 판단이니 신뢰해야 한다는 어떤 당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매우 일방적이다. 석궁사건에 대한 형사재판을 오롯이 피고인의 시각에서 묘사하면서, 사법부를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나는 저들을 못 믿겠다는 주인공의, 실제 피고인의, 영화감독의 사법에 대한 불신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러한 영화를 지지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도 역시 국민의 몫이다. 그런데 국민들은 330만을 넘는 관객 수로 답하였고 석궁사건도 다시금 뜨거운 관심을 받게 되었다. 말하자면 사법 불신은 이 영화가 조장한 것이 아니라 이 영화의 등장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이 영화에 대한 인기는 단지 그것을 고스란히 반영하였을 뿐이다. 그렇다면 법원으로서는 이 영화 자체보다는 이 영화에 대한 대중적인 인기를 주목했어야 하지 않을까?
현재의 고조된 사법 불신이 이 영화의 영화적 화법에 대중들이 그저 끌려 다닌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자체로 참 권위적이다. 더욱이 사법부 내부에서 그런 생각을 한다면 그것이 곧 ‘사법부의 권위주의’를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부러진 화살’이 정면으로 겨냥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사법부의 권위주의다. 영화 속에서 피고인과 그 변호사는 자신들이 제기하는 ‘합리적 의심’들에 대해서는 귀를 닫고 일방적으로 검사 측 논리만을 좇아 유죄의 심증을 형성해가는 재판부를 향해 “이것은 재판이 아니라 개판”이라고 했다. 가령 부러진 화살이 발견되지 않은 것, 혈흔감정을 끝내 하지 않은 것, 피해자에 대한 증인신문을 거부한 것에 대한 강력한 문제제기에 재판부는 당사자를 이해시키고 설득하려는 노력이 없었다. 더욱이 피고인이 재판부에 일관되게 요구하는 것은 ‘정의구현’도 ‘실체진실의 발견’도 아닌 ‘법에 의한 재판’이었다. 여기서 법은 실체법이 아닌 절차법, 즉 형사소송법이다. 피고인은 자신에 대한 특별한 배려가 아닌 법이 보장하는 절차의 인정을 요구하였을 뿐인데 그조차도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다. 더욱이 그러한 영화 속 장면들은 실제 사건에 대한 공판기록과 상당부분 일치한다. 일반 대중이 이 영화를 좋아하고, 영화 속 피고인의 분노에 공감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
SNS에 등장한 판사들의 언행이 흔든 것은?
판사들이 어떤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 침묵한다고 그 자체로 재판의 공정성이 보장될 리는 없다. 판사들의 침묵은 단순히 아무런 의사 ‘표명’이 없는 것이지 아무런 ‘의사’가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어떠한 의사를 표명하지 않는 판사도 다들 저마다의 가치관은 있는 것이고 그러한 가치관으로 설령 재판의 공정성이 흔들릴 수 있다면 그러한 위험은 의사표명 여부와는 상관없이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위험을 마치 전혀 없다는 듯 감추는 것이 맞는가 아니면 차라리 드러내는 것이 맞는가의 문제가 남는다.
본래 신뢰라는 것이 무엇을 감추거나 없는 듯 포장함으로써 얻어지기는 힘들다. 도리어 드러내고 보여줌으로써 얻어지는 경우가 많다. 사법부에 대한 신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소통이 전제되어야 한다. 소통이 없는 믿음은 신뢰라기보다는 신앙에 가까운 것인데 일반 국민에게 사법부에 대한 신앙을 요구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일단 재판이라는 것도 결국은 우리와 같이 고민하고 판단하고 표현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매우 당연한 사실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일반 국민과의 소통의 기본이고 신뢰형성의 초석이 아닐까?
“판사는 사적인 영역에서도 비속어가 아닌 품위 있는 언어를 써야 한다." "젊은 법관이라도 존경받는 어른과 같은 성숙한 사고와 품위 있는 처신을 해야 한다." 일부 판사의 SNS 활동이 문제되었을 때 법원 내부 게시판에 올라온 어느 고위직 판사의 글이다. 나는 이번 사건에서 법원 상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본질적인 원인이 바로 이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판사들이 당연히 갖추어야 할 ‘품위’를 잃었다는 것이다. 오랜 기간 법원에 대한 신뢰는 법관의 품위, 품격, 고상한 언행으로 유지되어 왔는지 모른다. 하지만 더 이상 그것만으로는 법원을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것이 영화 ‘부러진 화살’에 대한 대중적인 지지로 드러나 버린 현실이 아닐까?
판사들은 “법관은 판결로 얘기할 뿐이다.”라는 말을 즐겨 한다. 하지만 정작 일반 국민들에게 판결문은 여전히 어렵다. 개념 자체도 어렵거니와 문장 구조가 매우 복잡하다. 무엇보다 일반 생활 언어와 너무 다르다. 그런 식의 판결문 표현을 고집하면서 법관은 판결로 얘기할 뿐이라고 한다면 사실상 법원은 국민과의 소통을 일부 포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SNS에 등장한 일부 판사들은 법원과 일반 국민 간의 그러한 소통방식을 뒤집는다. 무엇보다 일반 생활 언어로 자신의 솔직한 생각을 거침없이 말한다. 그럼으로써 법관도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저마다의 가치관과 철학으로 자유롭게 판단하고 표현하는 자연인임을 드러낸다. 물론 법원과 국민과의 소통은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소통’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 보면, 어쩌면 그 시작은 SNS에서 먼저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사법연수원이 생산, 확대하는 법조계의 권위주의
그렇다면 사법부의 권위주의는 어떻게 생산되고 확대되는 것일까? 지금부터의 내용은 사법연수원생의 신분으로서 직·간접적으로 갖게 된 매우 제한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에 기초한 판단임을 밝힌다. 사법연수원이라는 조직도 법조계의 일부라고 볼 때 이곳에서도 사법부의 권위주의 문화가 생산되고 확대되는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로스쿨 졸업생이 나오기 전인 작년까지 무려 40년간, 우리 사회의 모든 법조인은 사법연수원을 통해 배출되었다. 그런데 사법연수원의 교수진이 최소한 10년 이상의 실무 경험을 가진 현직 판사·검사·변호사들로 구성되다보니, 사법연수원 내 조직문화와 법조계 내 조직문화 간에는 상호 충분한 연관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사법부의 권위주의 문화라는 것도 사법연수원을 통해 생산되기도, 확대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무엇보다 연수생과 교수의 관계를 보면 그렇다. 둘 사이의 관계는 다소 특이하다. 일단 연수생은 신분상 공무원이다. 하지만 연수생이 담당하는 공무(?)라는 것이 수업을 듣고 과제를 제출하며 학기말 시험을 준비하는 것이 대부분이라 사실상 학생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러니 연수원 교수는 연수생의 스승이자 상관이다. 더욱이 연수원 교육이 법원·검찰 실무 교육 중심으로 이루어지다보니 연수생들이 주로 대면하는 교수들은 대부분 현직 부장 판·검사들이다. 때문에 연수원 교수와 연수생 간에는 기본적으로 사제관계가 형성되지만 그 안에 법원·검찰 조직 내의 경직된 상하관계가 스며있다.
그래서일까? 교수는 연수생들로부터 자발적인 신뢰와 존중을 얻기 이전에 자신이 교수로서 당연히 갖고 있다고 인정되는 권위를 앞세우는 경우가 많다. 아니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교수 개인이 그러한 권위를 앞세우기 이전에 이미 그 권위를 인정하고 그에 순종하는 문화가 있다. 가령 입소식 당일부터 연수생이 처음 접하게 되는 법조 문화라는 것이 이른바 ‘주도(酒道)’인데, 술집에 연수생들이 먼저 사열하여 앉아 있다가 교수가 들어오면 일동 기립을 한다든가, 교수가 폭탄주를 돌리면 각자 일어나서 폭탄사를 한다든가(물론 연수생이 폭탄주를 거부할 수는 있지만, 다른 연수생이 대신 마셔주어야 하는 등 그 상황이 그리 자연스럽지 만은 않다), 교수가 주최하는 회식이니 연수생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참석해야 하고, 교수가 자리를 뜨기 전까지 앉아 있어야 한다는 식이다. 그 뿐 아니다. 20명 단위의 각 조마다 의전총무라는 것을 두어 교수에 대한 ‘의전’을 담당하게 한다든가, 스승의 날, 생신, 이취임 등을 기념하여 일정 규모의 행사를 만들고 선물을 준비한다든가 하는 일련의 일들이 수십 년간 그저 관례라는 이름으로 계속되어 왔다. 그렇다보니 교수들 중에는 그러한 문화 속에서 형성되는 자신의 지위에 취하는 분들이 등장하여 연수생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한다. 예컨대 연수원을 떠나면서 특정 내용의 송별식과 선물을 준비하도록 지시에 가까운 언질을 주었다든가, 새벽녘까지 이어지던 매우 사적인 술자리에 갑자기 연수생들을 불러내어 그들의 충성도를 테스트하였다는 등의 사례들 말이다. 그 중에는 간혹, 술자리에서 교수 옆에는 여자 연수생이 앉도록 분위기를 만든다든가, 특정 여자 연수생의 외모에 대한 얘기를 공공연하게 한다든가 등으로 성희롱이 문제될 만한 상황까지 있다.
매우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연수원 외부에서 벌어지는 상황들도 있다. 가령 연수생들이 교수님을 모시고 MT를 가면 그 지방 기관장, 기업인 등이 회식자리에 참석하는 경우가 있다. 그 기관장 등은 교수님께 한껏 예를 표한 뒤 잠시 함께 어울리다가 음식값을 계산하고 간다. 직접 참석은 하지 않더라도 음식을 보낸다든가 숙소를 제공한다든가 하는 경우는 더 많다. 연수생들이 그런 상황을 경험하며 느끼는 것은 법조계의 ‘권위’가 아닌 ‘권위주의’다.
법조계 내부적 개혁으로 가능할까
사법개혁의 방법론으로 내부에서의 개혁과 외부에서의 개혁 중 어느 쪽이 답이냐를 논의하기도 하는데 물론 원칙은 양자를 병행하는 것이 될 것이다. 사법연수원 내의 문제도 그렇다.
내부에서의 개혁 측면을 보면, 사법연수원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 중에도 일단 인적 구성이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부분들이 꽤 있다. 가령 앞서 말한 것들처럼 연수원 교수가 연수생에게 어떤 상황을 강요한다든가 성희롱에 가까운 언행을 일삼는다든가 하는 일들은 분명 과거보다는 많이 줄어든 것 같다. 무엇보다 교수진의 인적 구성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연수생과 교수 간의 엄격한 권력관계에서 빚어질 수 있는 불합리한 상황들에 대하여 연수생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교수들도 있다. 어느 교수는 회식이나 MT에 가서도 절대 무엇을 강요하는 경우가 없다고 하고, 또 어느 교수는 연수생들이 불편해 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도록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조심한다고 하는 등 기성 법조인의 권위주의라는 관념이 도무지 들어맞지 않는 교수들의 사례가 기분 좋게 회자되는 경우도 자주 있다.
하지만 인적 구성의 변화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 여전히 불합리한 상황들은 벌어지는데 그것이 공론화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교수가 권위로서 군림하는 문화와 함께 연수생이 그에 복종하는 문화가 수십 년간 이어져 온 탓이다. 또한 연수원 내에서 발생한 어떤 문제를 공론화시킨다 했을 때, 가령 어느 교수의 성희롱에 가까운 언행을 다른 교수에게 알려 도움을 청한다고 했을 때 해당 교수는 적절한 징계를 받고 피해 연수생은 보호를 받게 되는 등으로 사법연수원 조직 내에서 그 문제를 제대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그 이전에 그러한 의지라도 갖고 있는지조차 의문이다. 아울러 연수생 본인이 불합리한 상황에 민감하지 못한 문제도 있다. 가령 교수와 연수생 간의 회식자리에 지역 유지가 와서 음식값을 계산했다 하더라도 그 상황을 불편해하는 연수생이 있는가 하면 아무런 문제없이 받아들이는 연수생도 있다. 성희롱에 가까운 언행이 있었더라도 정작 당사자는 마땅히 참아 넘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문제를 내부적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화와 구조가 공고히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사법부, 더 넓게는 법조계 전체의 권위주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인적 구성이 달라진다 한들, 새로운 인물이 또다시 그렇고 그런 인물로 퇴화되고 마는 문화와 구조라는 것이 존재한다. 결국 법적으로 또는 제도적으로 문제의 해결을 다소 ‘강제’하는 방법이 필요한 부분이다.
우리 법조계에는 권위주의를 멀리하고 자발적인 신뢰와 존중에 기반을 둔 권위를 갖고자 노력하는 선배들도 많다. 하지만 재판부와 재판 당사자 간의 소통 문제에 비교적 많은 고민을 하는 것으로 보였던 어느 판사는 최근 석연찮은 이유로 재임용에서 탈락되었고, 다른 어느 판사는 역시나 형평성에 문제가 있어 보이는 중징계를 받았다. 오래 전 일이지만 ‘수사 잘 받는 법’이라는 연재물을 일간지에 게재하였던 어느 검사는 결국 검찰을 떠나야 했다. 좁은 식견 때문일지 모르겠으나 우리 사회 법조인 중 권위주의 문화로부터 가장 적극적으로 탈피하고자 하는 분들은 아무래도 변호사 직역에 가장 많은 듯하다. 그러나 역시 안타까운 것은 사법연수원생이 그런 변호사들을 직접 만나 그 고민과 경험으로부터 무언가 배우려면 개개인이 그런 분들을 직접 찾아 나서는 방법 밖에 없다는 것이다. 판·검사 실무 중심의 연수원 교육 자체가 법조계의 권위주의에 기여하는 부분도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연수원에서 내다보는 우울한 전망
법조인 양성 시스템이 이원화 되면서 법조계 문화에도 큰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로스쿨 제도의 도입은 다양한 경험과 가치관, 다양한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을 겸비한 인력이 법조계로 들어오는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하지만 권위주의가 만연한 기성 법조계가 그들의 다양성을 얼마나 제대로 흡수할 수 있을 것인지, 또한 엄청난 등록금 부담을 감수하고 로스쿨에 들어온 이들이 새로운 법조계 구성원이 되었을 때 기존의 권위주의 문화가 되레 강화되지나 않을 런지, 법조 내부에서는 이에 대해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등등 여러 의문을 갖게 된다.
국민들에게 값싸고 질 좋은 법률서비스를 공급하겠다는 것, 이것이 로스쿨 제도 도입의 가장 큰 취지라고 알려져 있다. 변호사 인력의 양적 확대로 서비스의 가격을 낮추는 것만큼은 어느 정도 실현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서비스의 질을 어떻게 높일 것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우려가 남아있다. 분명히 필요하고 절박한 고민이다. 그런데 그 고민 끝에 내려진 결론이 “그러니 로스쿨 교육의 강도를 높이자.”, “그래서 변호사 시험 합격률을 낮춰 경쟁을 강화하자.”라는 것으로 귀결된다면 결국 쳇바퀴만 돌리는 꼴이다. 불행하게도 지금까지의 상황은 그렇다.
법률서비스의 ‘질적’ 향상은 법을 잘 아는 법률가들이 많아졌다고 하여 당연히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약자의 기본권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고, 경제적 이유로 법률서비스에 접근조차 못하였던 이들에게 먼저 다가서려 하고, 민주주의·자유·평등 등의 가치를 누구보다 가슴 깊이 이해하고 있는, 그래서 ‘권위주의’ 따위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지만, 국민들의 자발적인 신뢰와 존중에 기반을 둔 ‘권위’에 대해서는 강한 자존감과 책임감을 갖는, 법을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이 삶의 언어로 표현하는 애환과 절박함에 대해 정성을 다하여 소통하고자 하는, 그러한 자세를 이미 갖추었거나 그러한 자세를 갖추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는 그런 법률가들이 더 많이 배출되어야 비로소 얻어진다. 더욱이 로스쿨 제도 도입의 진정한 취지는 바로 그러한 부분의 ‘질적’ 향상이다. 하지만 변화된 제도 아래서-개인의 성향이나 능력치에 기대는 것 말고-제도적·문화적으로 그 부분을 어떻게 향상시킬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고민이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인권법 분야를 특성화하겠다던 로스쿨들조차 그것이 단지 로스쿨 유치를 위한 레토릭에 불과할 것이라는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 같다.
혹시라도 변호사의 공급 과잉으로 변호사 수입이 낮아지면 자연스레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변호사의 공급 과잉이 이른바 ‘인권 변호사’의 확대로 이어질리 만무하다. 그저 우리 사회에 만연한 빈부격차 문제를 법조계 내부에까지 적극 끌어들이는 결과만 낳을 것이다. 그래도 과거에는 생계가 보장된 변호사 중 상당수가 노동·장애·난민 등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뛰어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변호사들이 자신의 생계부터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으니 본래 배는 부른데 착하기까지 한 사람이 스스로 법을 공부할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 외에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
언제나 변화의 폭이 클수록 기대와 함께 우려도 크다. 수십 년간 이어져 온 법조인 양성 시스템이 그 뿌리부터 변해 버린 상황이니 그에 따른 우려가 큰 것이 되레 자연스러울지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변화를 주도하는 이들의 가치관이고 철학이다. 어쩌면 그래서다. 사법연수원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그래서 더욱 어두운 것일지 모른다.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