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人터뷰] “여기는 영양제 같은 느낌이야”

희망이 되고 싶은 청소노동자 김순자

지난 4월 초 김순자 후보의 선거운동을 동행했다. 자그마한 몸집에 예쁘장스러운 얼굴이 참 고우셨다. 그런데 억양, 사투리, 빠르고 걸걸한 말투가 영락없는 울산 아지매다. 한나라당 당원이기도 하던 그가 어떻게 청소노동자가 되고 진보신당 비례대표까지 되었는지 그 삶이 궁금하다.
남편과 사별하기 전까지는 먹고 살만했다. 남편 직장도 좋고, 작지만 3층짜리 상가 건물도 소유했다. 때문에 주변 지인들과 여러 관변단체에 소속되어 활동도 했다. 그의 열정적인 성격으로 봐서 왕성하게 활동했으리라. 하지만 남편이 죽고 10년 뒤 그는 모든 활동을 접고 청소노동자가 됐다. 창피하고 민망하여 주변에 얘기도 못했다는 그가 어떻게 노조를 하고 진보신당 비례대표 후보까지 되었는지 울산과학대학으로 만나러 갔다.


“93년도 남편이 돌아가셨어요. 간이 나빠서 10년 정도 투병하다 결국은 돌아가셨지. 우리 아저씨가 원호가족(국가유공자)이거든요. 남편 아버지가 6.25(한국전쟁)때 전사하셨어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직장도 괜찮은 데 다녔죠. 3교대를 했거든요. 그런데 건강이 안 좋으니, 퇴직하고. 퇴직금 받고 슬래브 집 한 채 팔고 3층 건물 사서 왔지. 87년도에 여기 왔는데 7천만 원 정도 가지고 왔지. 은행에 빚도 좀 내고. 와서 장사하면서 많이 갚았지. 그런데 우리 아저씨가 아파서 지출이 많았어. 1층에서 식당을 했어요. 중국집. 아이고, 못하겠더라고. 우리는 중국집 중자도 모르고 했는데. 잘 아는 사람이 중국집 요리사였어요. 중국집 위치가 되겠다고 해보라고 하더라고. 그런데 중국집 조리사가 안 나와. 결석이 더 많고, 몸 아프면 안 나오지, 부부싸움 하면 안 나오지. 배달하는 학생 데려놓으니 오토바이 몰고 도망가지. 도저히 못해먹겠더라고. 그래서 그만 뒀어요. 2층에 당구장이 있었어요. 남편한테 당구장 해보자고 했어요. 그랬더니 우리 아저씨가 당구장 그거 10분에 600원 받아서 돈 되겠나 하더라고. 그래도 세 얻어서 하는 사람도 있는데 하자고 해서 2층 당구장 내보내고 우리가 했지. 당구장 5년 하다가 아저씨를 잃은 거지. 아저씨 아프지만 않았으면 직장도 좋고 괜찮았을 텐데…….


딸 하나 있어요. (사별 당시) 초등학교 5학년. 당시에 내가 젊으니깐 백화점에서 오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안 갔지. (다른 집을 보니) 부모가 노래방 하고 음식점 하는데 일하고 늦게 들어가. 애들이 부모가 집에 없으니 탈선하더라고. 그래서 억수로 고생하는 걸 많이 봤어요. 남편도 없고 딸내미 하나 있는데 내 삶이 애를 바로 성장시켜야지, 아니면 헛것이다 생각했어요. 당시 상가 1, 2층은 세 놔서 월 120~130만 원은 들어왔어요. 이걸로 생활은 되더라고. 그런데 아빠가 빚을 좀 남겼어요. 그래도 애가 대학가면 돈 벌러 가야지, 애한테만 신경 써야지 했죠. 그런데 빚이 늘더라고.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 집을 가지고 있으니 국민연금, 의료보험이 점점 많이 나오더라고. 십년간 빚이 7~8천만 원 되는 거라. 그래서 건물을 팔아서 빚을 해결하고 지금은 빌라에 살고 있어요. (취직을 하려는데) 나이가 있으니 갈 데가 없더라고. 옆집에 아저씨가 여기 학교 경비를 서요. 놀러 가면 아저씨가 청소하는 일 얘기 많이 하시더라고. 그래서 나도 좀 해달라 그랬더니 ‘하겠는교?’ 하더라고. 그래서 다른 사람은 하는데 왜 나는 못하겠는교. 그래서 야간으로 들어갔어요. 처음에는 (딸이) 엄마가 청소한다는 얘기를 친구들한테 안했지. 나도 안하고. 청소하는 게 억수로 부끄럽더라고. 동창들한테도 숨겼죠. 내 혼자 자격지심에 남사스럽고. 그런데 노조활동 하면서 차츰차츰 깨닫게 된 거지. 참 잘못 생각하고 있었구나.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지. 지금도 우리 조합원들도 아직 그래요. 기자들이 사진 찍자 그러면 친구들이 (청소하는 줄) 다 모른데요. 지 인자 쪽팔린다고 안 찍으려고 하는 조합원이 한 둘 있어요. 지는 당시 고등학교까지 졸업했는데 친구들이 청소하고 있구나…….”



청소노동자가 되다


“11명이 낮에 청소하더라고요. 그런데 관리자는 4명이예요. 반장, 경비 반장, 학교 반장, 중간관리자 김부장이 있어요. 점심 먹고 앉혀놓고는 ‘반장 말 안 들으면 해고다. 안 그러면 전환 배치한다.’ 늘 그런 얘기하더라고. 참 더럽다 싶더라고. 인간관계를 참 우습게 보고 노동조합 없었으면 그만 뒀을 거야. 늘 집에 가면 욕했죠. 시발, 시발. 우리 딸이 억수로 들었는 거라. 딸이 우리 엄마가 그리 불평하더만 노동조합 하게 되었구나. 동조해줬죠.


(일하면서 가장 어려운 것이) 밥이 해결 안 되니깐 짜증나 죽겠더라고. 집 가까운 사람은 먹고 오고, (집 먼 사람은) 도시락 싸오고, 겨울에는 차가워서 먹지도 못한다. 학교 건물 주차장 쪽에 가서 냄새 덜 나는 곳에 전기코드 꽂아서 끓여먹고 그랬죠. 노조결성 했을 때 정보과 형사가 찾아왔더라고. 우리 담당이라 하더라고. '왜 노동조합 만들었냐' 묻더라고. 그래서 제일 불편한 게 밥이다. 다 밥 주는데 우리만 안주더라고. 너무 화가 난다. 그랬더니 그 형사가 ‘그건 너무 심한 것 같다. 자기가 학장을 개인적으로 잘 안다. 내가 물어보꾸마’ 그러더라고. 이틀 있다 답이 왔더라고. 올해는 예산 없다, 내년에 생각해 보마 하더라고. 그래서 우리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해서 밥을 뺏드러 먹기 시작했지. 같은 조합원이니깐. 식당에 가서 우리 밥 좀 외상으로 먹자 했지. 그러래요. 한 달, 두 달 만날 숟가락만 갖고 식당 가니, 학교에서 감당이 안 된다고 돈 달래요. 우리는 돈 없어 못준다. 돈 60만 원 받고 밥값 낼 돈이 어딨노. 배짱 내미는 거지. 학교에서는 만날 숟가락 들고 오니 감당 안 되지 막지도 못하겠지. 2006년 10월 말에 팀장이 ‘11월 1일부터 밥 잡수소’ 하는 기라. 11월 1일이 언제고? 했더니 ‘내일 아닌교’ 하는 거라. 그래서 내일부터 먹으라고 하면 되지 뭐 할라고 11월1일이라 그러나. 나는 11월 1일이 까마득하다고. 그리고 밥 먹었지. 식당에서 밀어내면 내 진짜 식판 들고 머리 깨뿔라 했어요.”


2006년 학교에는 경비, 조리종사원, 청소노동자가 노조를 결성하자 해고하겠다는 소문을 돌았고, 다음해 1월 22일 해고예고 통보, 2월 23일 계약해지 통보를 한다. 2월부터 70여 일 간의 투쟁 끝에 5월 10일 복직에 합의했고, 6월 1일 청소노동자 8명이 복직되었다. 같은 해 이 투쟁으로 울산과학대지부는 국가인권위원회 ‘대한민국 인권상’까지 받았다. 플래카드를 만들어 울산과학대학 정문에 한 달 이상 걸었다고 한다.


김순자 씨의 삶에서 노동조합 활동은 삶의 전환점이다. 당적을 한나라당에서 진보신당으로 껑충 뛰어넘은 것도 있겠지만 삶의 가치관, 인간관계가 크게 달라졌다.
“장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나도 그렇고 정몽준이가 잘 돼야 우리 장사도 잘되고 경기가 좋아지고 그래야 장사 잘되고, 노동조합 하는 사람들은 ‘저 농땡이들 일하기 싫어서 그런다.’ 이런 고정관념이 있었죠. 주변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노조에 불신을 가지고 있었죠. 남편 잃고 2003년 이후에 바깥활동을 했지. 동네 반장을 5~6년 하면서 한나라당 여성회장도 하고, 바르게살기위원회도 하고, 옛날에는 반공멸공회, 요새는 신고계도회라고 하대. 거기서 총무도 했지. 봉사활동이라고 하면서 나가서 사진 찍고, 청소하는 거 사진 찍고 그랬지. 정부에서 돈이 나와. 바르게살기위원회에서는 24만 원 정도 나왔어요. 신고계도회 총무는 돈이 안 나왔어요. 학교 청소하면서 정리한 거지. 한나라당 선거운동도 많이 했지. 돈도 받았지. 언제 양심선언을 하긴 해야 되는데. 할 말은 천지인데……. 먼저 먹기는 곶감이 달다고 거기는 사탕 같은 느낌이고 여기는 영양제 같은 느낌. 관변단체 활동하면서도 세상이 참 삭막하다. 인간미가 없다 생각했죠. 나도 그러지 못하면서 불만이 있었죠. 이기적인 틀 속에서 50년을 살았어요. 그런데 투쟁하면서 처음 보는 사람인데. 2월에 그 추운데 침낭 하나로 같이 투쟁하고. 이용두 동지라고 영치금으로 들어온 26만 원인가를 다 주고. 시민단체 어데라고 하는데 지금은 그 사람 얼굴도 몰라요. 그 분이 ‘지부장님 뭐가 제일 필요합니까?’ 묻기에 현금이 젤 필요하다고 웃으면서 그랬죠. 그랬더니 차비 만 원 빼고 지갑 속에 있는 돈을 다 주시더라고요. 37만 원이더라고요. 그런 걸 받으면서 내가 감동 안 받겠어요? 아,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내랑 같은 세상에 살고 있구나 싶었죠. 살아볼 만한 세상이구나 느끼게 된 거죠. 학교는 3~4년 동안 즈그 더러운 거 다 치워주고 그랬는데……. 젊은 사람들의 그 배려심이 참. 우리는 나이 헛먹었다. 그런 모습 보면서 나는 지금도 다른 나라 와서 사는 것 같아요. 지금 현재는 그래요.”



진보신당 비례대표 후보 1번 김순자


“나는 토론회 생전 처음 해보는 사람 아닙니까? 토론회 걱정을 많이 했지. 자유토론이 뭔지 이해가 안가더라고. (수행비서가) 하루 전 날 하고 싶은 말을 하라더라고. 사장들 그것도 잘 못하면 해고 되야한다. 그래야 평등사회 아니가? 노동자만 왜 자꾸 해고시키노. 이런 말 하고 싶다 했지. 준비가 계획적으로 되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내가 이해도 다 못하고 갔거든. (진행 순서가) 첫 번째라 당황을 했지. 불은 막 왔다 갔다 하지. 그런데 다른 사람들 보니깐. 감이 오더라고 그래서 나중에는 여유가 생겼지. 처음에는 실수도 하고 그랬지. 안 할 수가 없지. 배터져 죽는 놈 있고, 배고파 죽는 놈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해서 말을 좀 이쁘게 만들어 했죠.
우리 조끼도 빨간 거. 학교도 빨간 옷만 보면 경기를 합니다. 그런데 새누리도 빨간 옷 입고 비정규직 철폐한다고 하니 어느 게 보수인지, 진보인지 구분이 안되는기라. 서울에 어디 가니깐 빨간 거 안 입고 있더라고 물어보니깐 새누리당으로 오해 받을 것 같아서 안 입었다 하더라고 나도 우리 편인 줄 알고 아이고 고맙다고 했는데 가만 보니 새누리당이라. 토론회 때 그말을 해야하는데 못했네.”


당적을 가지면서 고민이 있었다. 투쟁할 때 진보신당, 민주노동당, 사회당도 오는데 한 쪽으로 가면 눈치를 봐야하니 여간 가시방석이 아니었단다. 다행히 진보신당이랑 사회당이 합쳐서 한 쪽 눈치만 보면 되니 다행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진보신당 비례대표 후보로 2주간의 선거운동을 했다. 이 과정에서 또 다른 세상을 알게 되었다.


“선거 치르면서 참 언론이 진짜 아니라고 생각해요. 선거 진 이유도 언론에 있다고 봐요. 텔레비전이고 신문이고 1면 기사는 전부 다 새누리당, 민주통합당 좀 더 나오면 통합진보당. 진보신당은 있는지도 몰라요. 그 사람들은 돈 내고 선전할 필요도 없어요, 다 해주니깐. <한겨레> 1면 얹으려니 오천만 원 줘야 하더라고. 너무 속상한 거라. 기자들이 암만 취재하면 뭐합니까. MBC는 파업해도 잘도 방송하데요. 언론부터 있는 사람만 살아가는 세상이지. 없는 사람은 배제되고. '박공주'만 자꾸 찍을 것이 아니고. '박공주'는 손이 아파 죽겠다는데 나는 마음이 아파요. 북한을 나무랄 것도 없어요. 즈그는 돈으로 다 세습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국민들도 자기 자식이 비정규직이고 본인도 그렇고, 친정이 촌이라 가보면, 기도 안차요. 우리 오빠 말마따나 농사는 미친놈이 하는 짓이지. 뭐 소 한 마리를 제대로 키울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새누리당 찍고 있다니깐요. 그래도 서울은 좀 다르긴 다르다 했지. 우리 서울 가서 살자 했어요.”


언론노조 파업 현장에 가서 이런 말을 하니 어느 언론노조원이 미안하다고 했다는 일화도 들을 수 있었다. 진보신당 비례대표인데 친척들까지도 통합진보당 김순자라고 문자가 왔다고 하니 속이 많이 상했을 것이다.


총선에서는 패배했지만 예전보다 훨씬 더 바빠졌다고 한다. 또 당신이 도움이 되는 곳이라면 어느 현장이든, 어느 곳이든, 시간이 허락하는 한 하겠다고 하신다. 이 인터뷰 또한 그 연장이다. 60대의 연세에 많은 일정을 소화하기 힘드시지 않냐는 물음에 “어데 마음먹기 달라요. 마음이 항상 청소노동자, 급식 조리 종사원들을 보면서 내가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어제도 12시까지 동국대(신문사)에 보낼 원고 썼어요. 들어볼래요.”


A4용지 두 장에 빼곡하게 적은 원고를 읽어준다.



“… 처음에는 많이 망설였습니다.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 고민 끝에 물론 우리 조합원들도 중요하지만 더 나아가 무권리 상태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함께하자는 의미를 담아 비례 1번을 수락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선거를 치르면서 저는 평생 느끼지 못했던 경험들을 또 한 번 겪게 되었습니다.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청소노동자를 만났고, 급식조리 종사자, 경비 노동자. 가는 곳 마다 청소노동자 아줌마도 국회의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많이 반가워했습니다. 이분들의 희망이 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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