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인구가 많아 목 좋은 철도나 지하철에서 구걸하다가는 소득은커녕 덜컹 10만 원을 빚져야 하는 상황이 곧 현실화될 예정이다. 혹 떼려다 혹 붙이는 꼴이다. “가난이 죄”라는 말은 이제 구전이 아닌 명실 공히 법적 지위를 얻게 되었다.
구걸, 그 뒤에 숨은 꿍꿍이?
몇 달 전 해외에서 구걸을 하는 한 여성의 뒤를 밟는 영상이 국내에 방송돼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남루한 복장에 구걸하던 그는 근무(?) 시간이 끝나자 멋쟁이 커리어우먼으로 변신하고 도심으로 사라졌다. 아마 그 영상은 “지금껏 당신은 저 여자에게 속았습니다. 유사 상황에 주의하세요.”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 역시 육교 위에서 구걸하는 할아버지를 보고 “저 할아버지 이층집 있대”라거나 전철에서 다리를 끌며 구걸하는 이를 보고 “저 사람 종착역에서 막 뛰어 나가더라”라는 식의 이야기는 그리 낯설지 않다. 때론 목격담일 수도 있겠지만, 이런 말들에는 구걸에 대한 사회적 비아냥거림과 의도적 곡해가 적잖이 묻어있다. 구걸은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이 꾸미는 기형적 돈벌이란 시각 말이다.
그러나 구걸을 직업으로 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구걸은 남의 일이 아니다. 빠듯한 수입으로 빈곤을 벗어날 길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과외 수입은 우연밖에 없기 때문이다. 탓하고자 하는 말은 아니지만 홈리스 상태에 처한 이들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나에게도 그런 습성은 더러 나타난다. 길을 가다 담뱃갑이 떨어져 있으면 일단 발로 툭 차 본다. 두세 가치라도 있는 것과 빈 갑의 차이는 발의 촉감이 충분히 잡아낸다. 지하철을 타거나 나올 때 교통카드충전기의 거스름돈 출구는 크게 바쁘지 않는 한 살짝 흘긴다. 너무 노골적이어선 안 된다. 그러다 보면 좋은 날이 온다. 버스에서 내릴 땐 빈자리를 한 번 살핀다. 물론 지갑 채라면 양심을 따르겠지만 낱돈이라면 감사히 취한다. 홈리스 분 중에는 유독 땅바닥을 주시하며 걷는 이들도 적잖다.
직업으로 택하지 않더라도 가난한 이들에게 구걸은 다양한 형태로 생계의 한 방편이 된다. 적극적이냐 소극적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구걸은 불량한, 정교하게 기획된 의도를 가진 특수한 사람들의 경제가 아니라 끝 모를 가난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복지는 멀고 민생고는 급하다
오늘 지적장애, 언어장애인 부부의 수급상담을 진행했다. 지난여름 서울역에서 노숙생활을 했던 이들로, 여성은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구걸로 생계를 이어온 이다. 며칠 전 모 방송국에서 합동결혼식을 치러줘 이제는 정식 부부가 됐고, 비록 돈이 없어 당일치기로 먼저 올라왔지만 다른 쌍들과 함께 제주도로 신혼여행까지 다녀왔다고 했다. 이들은 얼마 전 스스로 주민센터에 찾아가 기초생활수급을 문의했으나 부양의무자 때문에 안 된다며 신청조차 반려되었다고 하였다. 결혼하고 나서까지 다시 지하철을 타고 돌아야 하는 마음으로 찾아온 것이다.
오후에는 긴급복지지원 신청을 위해 다섯 분이 찾아오셨다. 3월부터 ‘노숙’이 위기사유에 포함되면서 6개월 미만의 노숙인들도 긴급 생계, 주거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긴급복지제도의 지침이 개정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16명의 신청서를 접수했지만 단 한 명도 지원을 받은 이가 없다. 8시간 이내에 현장조사를 하고 지원하도록 하겠다는 제도임에도 한 달 가까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다. 복지부가 지침은 만들어놨지만 겉핥기식이고, 지자체는 왜 우리가 노숙인을 지원해야 하느냐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예산의 절반을 지자체에서 대야 하는데, 왜 우리 구민도 아닌 사람들에게 돈을 쓰냐는 것이다. 제도는 있으나 그에 따른 수급자는 없는 기가 차는 현실이다. 언제 결정되느냐며 하루가 멀다고 찾아오던 이들의 발걸음이 뜸해졌다. 역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일정한 주거가 없어, 주민등록 말소로 주민등록등본조차 뗄 수 없어서, 몸이 아프고 가방 끈이 짧아서 등의 이유로 임금노동 시장에 진입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복지가 이들의 발판이 되고 기본적인 삶을 책임져야 하겠지만 현실은 이런 식이다. 말은 번지르르하지만 막상 제도에 진입할라치면 갖가지 사유를 들어 퇴짜를 놓는다. 이들은 스스로 생계 방편을 찾아야 한다. 재활용 쓰레기 더미를 뒤져 건진 중고물품으로 주말 벼룩시장에서 장사를 하거나, 장애인증을 펴 보이며 ‘지하철 투어’를 하거나, 신도시 오피스타운을 돌며 손바닥을 펴 보이고, 온종일 발품을 팔아 교회와 사찰을 돌며 몇 천 원의 구제금을 받는다. 복지제도에 어렵사리 골인한 사람들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쥐꼬리만 한 최저생계비로 기초법이 말하는 “건강하고 문화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찌감치 장보기를 포기하고 노숙인 무료급식 대열에 몸을 섞는다. 복지가 이들에게 구걸을 일러주었다.
밀어내는 사회, 움츠리는 사람들
짐을 떠메고 다닐 수밖에 없는 거리 홈리스들은 종종 지하철 물품보관함을 이용한다. 그럴 때마다 맞닥뜨리는 인사가 있다. “(4)보관금지 물품 - 역 구내에서 금지하는 노숙자, 잡상 행위를 위한 물품”이라고 적힌 보관함 업체의 운영 약관이다. 한국철도공사 서울역은 아예 거리 홈리스의 출입을 봉쇄한다. 대합실에 잠시 머물다가도 특수경비용역들이 출현하면 비둘기 떼 놀라듯 흩어져야 한다. 지하철 역시 안전지대는 아니다. 서울시가 밝힌 2011년 9월부터 2012년 1월까지의 지하철 단속 실적을 보면 물건 판매 6,726건, 취객 4,759건, 무가지 수거 3,854건, 구걸 2,211건, 노숙 1,997건, 성범죄 10건 등으로 나타난다. 개정 경범죄처벌법은 이런 조치들에 쐐기를 박는다. 산발적으로 진행되던 빈곤에 대한 혐오를 법률을 통해 공인하고, 확장시키려는 것이다.
“국회의원님들께서 구걸하는 것까지 그렇게 법으로 만든다면, 자기가 진짜 위급할 때 얻어먹는 것까지 법에 걸릴 바에는 아예 그냥 나쁜 짓 하라는 거에요. 내가 판단하기에는. 진짜 밑바닥 인생을 안 겪어봐서 그런지, 만일 국회의원이 그것을 겪었다면 절대 그 법 못 통과시켜요. 없으면 얻어먹을 수밖에 없어요. 왜냐? 없으니까. 남의 것 뺏을 수는 없잖아요. 남의 것 뺏으면 강도고 남의 것 훔치면 절도고,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머리를 굽히는 거에요. 자존심 엄청나게 굽혀가면서 얻어먹는 게 구걸 아니에요? 나도 얻어먹지만, 요 앞 지하도에서 무릎 꿇고 구걸하는 분요, 나 일,이천 원씩 줘요. 나 돈 있을 때 내 돈은 비록 얻은 돈이지만은 비록 교회서 얻었지만 줘요.”
경범죄처벌법을 놓고 나눈 시청역 홈리스와의 대화다. 구걸 금지는 궁지에 몰린 이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소득 원천을 봉쇄한다. 어떻게든 자신의 곤궁을 표현하며 살아가려는 몸부림을 죄로 단정하겠다는 것, 그것은 가난한 이들의 생명마저 부정하는 일이다. 구걸을 생존의 수단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들을 양산한 국가의 책임은 묻지 않고, 빈곤의 책임을 구걸 행위자에게만 묻는 명백한 조작이다. 폐기되어야 할 것은 구걸이 아니라 개정 경범죄처벌법이다. 교도소에 보내야 할 것은 구걸 행위자가 아니라 빈곤이고, 가난한 이들을 사기 치는 복지다.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